미국에서 잘 살기위한 6가지 조건
전문가의 코너 김창수·공인희계사
한인동포들이 미국사회에서 부리를 잘 내리려면 미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분에 대한 이해력을 길러야 한다. 특히 동포사회의 경제력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매진해야 한다.
미국에서 잘 살기 위한 조건들을 나름대로 정리해본다.
첫째, 영어공부다. 이민자로서 미국에서 자리를 잡는데 필요한 제1장 1과는 영어실력이다.
둘째로 컴퓨터와 친해지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컴퓨터 기술을 습득해서 일상생활과 비즈니스 운영에 이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
셋째, 미국에 대한 공부다. 우리가 시는 미국사회에 대한 이해력을 증진 시키고 미국사회에 잘 적응하기위해 고등학교 수준의 미국역사와 미국지리를 습득해야 한다. 더 나아가 미국의 청치제도와 경제체제를 잘 이해하면 동포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 정치력 신장이다. 특히 연방·주·시전부의 각급 부서에 공무원으로 진출하는 한인 동초들의 숫자가 많아야한다. 미국사회의 요소 요소에, 특히 전부 쪽에 한인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야 한인 파워가 형성된다.
다섯째, 자녀 교육이다. 자식들에게는 재산을 남겨주는 일에 앞서 영어 문장력을 향상시키도록 부모들이 도와주는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에서 출생했거나 어렸을 때 이민 온 자녀라고해서 당연히 영어를 잘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마지막으로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 비지니스맨 들은 명실상부하게 자본과 기술이 집결된 주식회사를 결성해 대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자본을 가진 많은 수익 투자가들이 합심해 큰 자본을 형성하는 비즈니스 풍토가 싹터야 한다.
Saturday, June 30, 2012
Friday, June 29, 2012
분단 현실과 매카시즘의 뿌리
분단 현실과 매카시즘의 뿌리
시론, 이길주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매카시즘(McCarthyism)은 성숙하지 못한 정치문화의 대명사이다. 모든 미성숙함이 그렇듯 매카시즘도 심리적 뿌리가 깊다. 당연히 내것이라고 믿었던 그무엇이 더이상 내곁에 존재하지 않는데서 오는 상실감이 그 뿌리이다. 상실의 충격이 불안장애를 가져왔고, 결국 그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려야 하는 분노의 표출이 매카시즘이었다.
1950년 2월 위스콘신주 출신 연방상원의원 조세프 매카시는 미국의 국무부를 장악하고 있는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그는 250명이란 구체적 숫자까지 제시했다. 이후 미국은 4년동안 붉은 마녀사냥 열기에 휩싸인다. 46년 상원이 된 매카시는 이미 문제의 인물이었다.
정치적 목적이 농후한 매카시의 선언이 미국인들의 상실감을 자극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당연히 미국의 것이라고 믿었던 두개를 잃었다는 생각에 분노해 있었다. 원자폭탄 기술이 내부 스파이에 의해 소련으로 유출됐다는 생각과, 중국을 공산주의에 빼앗겼다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 공산화의 충격이 컸다.
수천 년을 이어온 찬란한 문화, 자원이 풍부한 넓은 땅, 인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인구를 가진 중국은 세 개의 M으로 세계를 유혹해 왔다. 시장(Market)· 선교지(Mission)·군사기지(Military)로서의 가능성을 말한다. 중국 내전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에 미국이 수십억 달러를 쏟아 부은 이유다.
이 중국이 1949년 미국의 적이 되었다. 그상실감은 책임소재 파악의 광기로 분출됐다. 소위 '누가 중국을 잃어버렸나(Who Lost China?)' 논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중국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마오쩌등의 표현대로 중국인들이 잠에서 깨어 일어났을 따름이었다. 중국을 일으켜세운 역사의 힘은 중국공산당이 제시한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또 결벽에 가까운 인민군의 도덕성도 큰 힘이었다. 이 노도와 같은 힘을 타락한 국민당을 통해 막으려 한 미국의 오만과 오산이 '중국상실'의 원인이었다.
매카시는 중국을 공산주의 제단에 바친 국무부 관리들, 명문가·명문대 출신의·엘리트 외교관들을 겨냥했다. 곧 미국의 정부·학계·예술계는 적색분자 색출에나선다.
상처는 컸다. 실직, 사회적 매장, 가정의 파괴가 속출했다. 미국의 월남전 비극의 원인도 매카시즘이 제공했다. 원남전에 개임하지 않을 경우 "누가 인도차이나를 잃어버렸나?" 또는 더 나아가 "누가 아시아를 빼앗겼나?"의 책임추궁이 뒤따를 것을 의식한 케네디와 존슨은 월남의 수령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매카시즘은 역사해석의 문제다. 원하지 않은 현실에대한 불안과 분노앞에 두개의 선택이 있다. 어떤 역사의 힘에 의해 현실이 도출돼었나를 반추해 볼 수 있다. 반면에 역사가 몇몇 악역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는 사관에 기초해 책임자 색출에 매달릴 수 있다. 근거가 약하거나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손가각질이 바로 매카시즘이다. 빗나간 현실에대한 로망이 강할수록 그 힘은 거세진다.
우리 민족의 분단과 대립, 그리고 3대 세습이 상징하는 북한의 가형적 현실 앞에도 이 같은 선택이 있다. 깊은 역사적 반추의 무분별한 사상적 손가락질이다. 성숙한 선택이 요구되는 때다.
시론, 이길주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매카시즘(McCarthyism)은 성숙하지 못한 정치문화의 대명사이다. 모든 미성숙함이 그렇듯 매카시즘도 심리적 뿌리가 깊다. 당연히 내것이라고 믿었던 그무엇이 더이상 내곁에 존재하지 않는데서 오는 상실감이 그 뿌리이다. 상실의 충격이 불안장애를 가져왔고, 결국 그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려야 하는 분노의 표출이 매카시즘이었다.
1950년 2월 위스콘신주 출신 연방상원의원 조세프 매카시는 미국의 국무부를 장악하고 있는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그는 250명이란 구체적 숫자까지 제시했다. 이후 미국은 4년동안 붉은 마녀사냥 열기에 휩싸인다. 46년 상원이 된 매카시는 이미 문제의 인물이었다.
정치적 목적이 농후한 매카시의 선언이 미국인들의 상실감을 자극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당연히 미국의 것이라고 믿었던 두개를 잃었다는 생각에 분노해 있었다. 원자폭탄 기술이 내부 스파이에 의해 소련으로 유출됐다는 생각과, 중국을 공산주의에 빼앗겼다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 공산화의 충격이 컸다.
수천 년을 이어온 찬란한 문화, 자원이 풍부한 넓은 땅, 인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인구를 가진 중국은 세 개의 M으로 세계를 유혹해 왔다. 시장(Market)· 선교지(Mission)·군사기지(Military)로서의 가능성을 말한다. 중국 내전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에 미국이 수십억 달러를 쏟아 부은 이유다.
이 중국이 1949년 미국의 적이 되었다. 그상실감은 책임소재 파악의 광기로 분출됐다. 소위 '누가 중국을 잃어버렸나(Who Lost China?)' 논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중국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마오쩌등의 표현대로 중국인들이 잠에서 깨어 일어났을 따름이었다. 중국을 일으켜세운 역사의 힘은 중국공산당이 제시한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또 결벽에 가까운 인민군의 도덕성도 큰 힘이었다. 이 노도와 같은 힘을 타락한 국민당을 통해 막으려 한 미국의 오만과 오산이 '중국상실'의 원인이었다.
매카시는 중국을 공산주의 제단에 바친 국무부 관리들, 명문가·명문대 출신의·엘리트 외교관들을 겨냥했다. 곧 미국의 정부·학계·예술계는 적색분자 색출에나선다.
상처는 컸다. 실직, 사회적 매장, 가정의 파괴가 속출했다. 미국의 월남전 비극의 원인도 매카시즘이 제공했다. 원남전에 개임하지 않을 경우 "누가 인도차이나를 잃어버렸나?" 또는 더 나아가 "누가 아시아를 빼앗겼나?"의 책임추궁이 뒤따를 것을 의식한 케네디와 존슨은 월남의 수령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매카시즘은 역사해석의 문제다. 원하지 않은 현실에대한 불안과 분노앞에 두개의 선택이 있다. 어떤 역사의 힘에 의해 현실이 도출돼었나를 반추해 볼 수 있다. 반면에 역사가 몇몇 악역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는 사관에 기초해 책임자 색출에 매달릴 수 있다. 근거가 약하거나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손가각질이 바로 매카시즘이다. 빗나간 현실에대한 로망이 강할수록 그 힘은 거세진다.
우리 민족의 분단과 대립, 그리고 3대 세습이 상징하는 북한의 가형적 현실 앞에도 이 같은 선택이 있다. 깊은 역사적 반추의 무분별한 사상적 손가락질이다. 성숙한 선택이 요구되는 때다.
Monday, June 25, 2012
못다한 나의노래
Sunday, June 24, 2012
선의 3요소
참구법· 參究法
조동종 曹洞禪 Perceive silence
지관타좌 只管打坐 조용히 참선하며 앉아있다.
Sitting in silent meditation. (Shikantaza)
타성일편 打成一片 모든 생각을 끊어야 하나가 된다.
Hit all become one.
임제종 臨濟禪 Perceive kong-an
성성적적 惺惺寂寂 말을 들여다 보는것
Illumination, calming, (looking into words)
조계종 曺溪禪 Percieve don't know
'단지불지 시즉견성 但知不知 是卽見性 오직 모를 뿐' 단지 그뿐이다.
If you understand "don't know" just this is enlightenment.
禪의 전통은 달마 대사로 부터 온 것이며, 가사와 발우는 6조 혜능 대사를 통해 내려온 것이다. 6조 이후 禪 전통은 다섯 개의 흐름으로 분류된다. 조동종, 임제종, 법안종, 위앙종, 운문종이 그것이다. 이들은 조금씩다른 스타일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뼈대는 모두 똑같다. 조동종과 임제종만이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禪이 다섯 개의 흐름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6조 혜능 대사는 중국 조계산에서 수 년 동안 가르침을 폈다. 많은 한국스님들은 중국의 위대한 스승들을 찾아 여행했고, 몇 분은 혜능 대사와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6조의 맥은 혜능으로부터 공식 전법계를 받은 한국 스님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리하여 한국에 조계종이 생겨난 것이다.
조동종에서의 주요 가르침은 시칸타짜라는 것으로, 이것은 앉아 있는것을 강조한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완전하게 생각을 끊어야 그때 하나가 된다. 그것의 이름이 타성일편이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마음은 움직이지않는다. 마음은 우주처럼 맑아지고 거울같이 된다. 안팎이 하나가 된다. 산이 당신앞에 나타나면 산과 당신은 하나가 된다. 안팎이 하나가 된다. 이것이 시칸타짜 수행이다.
조동종의 전통은 요즘들어 몇몇 선사들이 공안을 사용하고 있지만 공안공부는 본래 가르치지 않았다. 임제종파의 가장 큰 차이는 공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동종 수행은 한 순간 모든 생각을 끊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하지 않으면 한 시간동안 부처가 된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 시간 동안 우주처럼, 거울처럼 맑게 된다는 것이다. 나무는 푸르다. 벽은 하얗다. 개는 짖는다. 모든것이 하나가 된다. 누군가 배고프면 음식을 주어라. 목이 마르면 물을 주어라. 그것이 전부이다.
임제종도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하는 중요한 도구는 공안 수행이다. 공안수행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든생각을 끊기위해 '말을 들여다 보는것' 혹은 '말을 사용하는것' 이다. 공안수행에서 중요한것은 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안의 진짜의미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라고 하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안 된다. 공안 그 자테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무엇을 지적하는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손가락에 집착해 달을 놓친다. 이것은 아주 나쁜 선병이다.
잘 알려진 사례가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조주의 '무'자 공안에 익숙해 있다. 부처님은 만물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냐?"고 물었을 때 조주 선사는 '무'라고 말했다. 조주선사는 제자의 생각을 없애기 위해 말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방에서 참선을 한다고 하면 머릿속에 '무'를 떠올린다. 아주 강하게 언제, 어디서나 오직 '무'에 괸해서만 생각한다. 그것은 선 수행이 지적하는 바를 완전히 잃어버린 행위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조주선사의 대답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조주는 불성과 불성이 아닌 것을 나누는 제자들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이 '없음'을 단지 사용한 것뿐이다. 그는 달을 가르키기위해 이 '무'를 사용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손가락에 집착해 달을 놓치고 말았다.
'무'는 단지 '무'일 뿐이다. '무'자 공안이 의미하는 핵심은 이미 거울처럼 맑다.는 것이다. 공안을 이해한다는 것은 공안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왜 조주 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했을까----- 모르겠다." 공안을 이렇게 사용하면서 생각을 완전히 끊고 생각이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말에 집착하지 말고 특별한 의미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바른 방향과 본성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공안 수행이다. 조계종의 가르침은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이다. 이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의 본성이다. 사람들은 이런경험을 많은 이름으로 말하지만 본래 그것에는 이름이 없다. 오직 모를 뿐' 그 이상도 , 이하도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테네의 부산한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 중 한 사람이 '스승께서는 스승 자신을 아십니까?' 라고 묻자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내가 모를 뿐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 '오직모를 뿐'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이다. 생각할 때 '나' '너'가 나온다. 그러나 모든 집착을 끊으면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은 하나가 된다.
내가 하나 묻겠다.(손에들고있는 주장자를 가리키며) 주장자와 여러분은 같은가, 다른가? 주의해서 대답하라. 같다고 말해도 나는 여러분을 이 주장자로 30방을 칠 것이고, 다르다고 해도 30방을 칠 것이다. '모르겠다'고 말해도 칠 것이다.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이미 실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하하하) 조계선은 모든 생각을 끊고 '오직 모를 뿐'으로 돌아가면 이미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고봉 선사는 '오직 모를 뿐이 본래 스승'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도 같다.
"스승님께서는 스승님 자신을 아십니까?"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모를뿐을 잘 알고 있다."
조계선은 이런 방법으로 가르친다.
선의 3 요소· 禪의 3 要素 The Three Essential Elements od Zen
큰 믿음 大信心 Great Faith
큰 용기 大奮心 Great Courage
큰 의심 大疑心 Great Question
마음공부를 하는 데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큰 믿음(Great Faith), 큰 용기(Great Courage), 큰 의심(Great Question)이다.
이것은 마음공부라는 삼각형의 세변과 같다. 하나라도 없으면 삼각형은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심 大信心
큰 믿음이란 처한 조건에 관계없이 마음속에 큰 서원을 세워 노력하는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듯이 말이다. 모든 에너지를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심지어 다음 생, 또 다음 생까지 멈ㅊ추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마치 너미 닭ㅇ이 알을 품듯 말이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결코 다른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직 알을 따뜻하게 해서 병아리로 부화시켜야 한다는 어미로서의 본능적인 생각 뿐이다. 물론 가끔 품는 위치를 바꾸기도 하지만 결코 알이 차갑게 되도록 내버러두지 않는다. 만약 어미 닭이 '좀더 재미있는 일은 없을까?' 혹은 '남자 친구닭이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열심히 알을 품지않거나 아예 알을 내버려둔다면 결코 병아리는 태어나지 않는다.
어미 닭은 움직이지 않고 종일 앉아 있어야 한다. 자신의 견해, 조건, 상황을 가지지 않고 오직 한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병아리가 알을 깨도 나올 것이다.
이처럼 오직 한 방향으로 몰두하는 마음을 큰 마음이라 한다.
대분심 大奮心
대분심이란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노력할 때와 비교할 수 있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를 본 적이 있는가. 쥐구멍 밖으로 몸을 기대고 어깨를 잔뜩 긴장시킨 후 용수철을 늘린 것처럼 뒷다라를 빼고 앉아 쥐가 튀어나오면 언제라도 움켜쥘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가 쥐구멍에 집중해 있다. 온 마음이 한 가지 포인트에 맞춰져 바깥의 조건이 어떤하든 똑같은 자세로 몰두하는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난다. 쥐가 '이 정도면 됐어, 저 멍청한 고양이는 지금쯤 갔겠지' 하고 바깥 냄새를 맡기위해 머리를 내미는 순간 고양이는 낚아채는 것이다. 그것이 고양이의 마음이다. 고양이는 언제, 어떤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완벽한 집중을 한다. 외부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맞춰진다.
집에서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때로는 고양이를 하늘로 던졌다가 떨어뜨리면 고양이는 신기하게도 네 발톱을 탁 세워서 안전하게 앉는다. 사람이라면 팔다리가 부러져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고양이는 하늘에 던져져서도 초점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고양이의 큰 용기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고양이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그럴 때 마음은 바깥 조건의 변화에 따라 출렁댖지 않는다.
나는 젊었을 때 충청남도 마곡사라는 절에서 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절 살림을 도맡아 했는데, 음식을 준비하고 모든 생필품에 책임을 져야하는 아주 막중한 일이었다. 한번은 절에서 큰 행사가 열렸다. 전국에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음식준비가 큰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두부를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우리는 며칠씩 걸려 두부를 만들어 물속에 넣어두었다. 마곡사에는 창고에 큰 나무통이 있었는데, 나무통에 물을 가득 채워 두부를 보관해놓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창고에 들어가 나무통을 보니 두부가 두 덩이나 없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또 두 넝이가 없어졌다. 그 이후로 매일 두부가 한두덩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고 문은 항상 잠을쇠로 잠겨져 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그 일이 알려지자 서로 의심하는 바람에 절 분위기까지 흉흉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매일 두부가 많지도 않은 딱 한두 덩이만 없어지는가 하는 점이었다. 두부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꺼번에 다 들고 갔으면 될 터인데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절에 아마 나쁜귀신이 장난을 치는 모양"이라며 두려워했다.
어느 날 내가 꾀를 하나 냈다. 창고에 앉아 밤을 새우며 도둑을 잡기로 한 것이다. 나무통 뒤 기둥에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누구소행인지 꼭 밝혀내고 말리라.' 한 시간이 지나가고 두 시간이 지나가고 세 시간이 지났다. 지루하기도 하고 졸음도 쏟아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윽고 새벽이나 됐을까. 이상한 소리가 창고 구석에서 들렸다. 귀를 쫑긋 세웠다. 뭔가 이상한 그림자가 천천히 나무통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옳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군나. 나는 숨죽이며 그림자의 정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보니 사람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드러났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양이였던 것이다.
고양이는 숨을 죽이고 나무통 가장자리에 앉아 가만히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잔뜩 움추리고 머리는 낮게 숙이고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물 속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물 속에 있던 두부 한 덩이가 점점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순간 고양이가 물밖에서 재빨리 낚아채더니 입으로 가져가서는 아주 맛있게 먹어버렸다. 그리고는 유유히 창고를 빠져나갔다.
고양이는 창고의 나무틀에 난 구멍을 통해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내눈을 의심하지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두부가 움직인다는 말인가. 그러나 에너지를 집중하면 가능한 일이다. 고양이는 물에있는 두부가 떠오를 정도로 온 에너지를 집중시킨 것이다. 고양이의 의식은 오직 한 점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가 이러할진대 사람이 이렇게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무한한 결과가 나오겠는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것이 고양이의 대분심이다.
이런 고양이의 마음상태만 같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우리 수행은 이와 같아야 한다.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한 점 즉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애 집중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면 어느 시점엔가 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엄청나게 폭팔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다.
대의심 大疑心
큰 의심이란 한 가지에 집중해 있는 마음을 오랫동안 계속 간직하는 것이다. 몇 초 혹은 몇 분은 쉬울지 몰라도 오랫동안 한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어머니가 장을 보러갔다 오겠다며 아이에게 말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억어라."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는 오지 않는다. 아이는 배가 고파 밥을 먹는다. 네 시간, 다섯 시간이 흘러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는 온갖 생각과 걱정들로 뒤죽박죽이 된다. "무슨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의 모든 의식의 에너지는 '어머니는 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집중해 있다.
또 다른 예가 있다.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주 배가고파 하늘도, 땅도, 나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어디에 먹을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또 며칠동안 사막을 헤매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햇빛은 따갑게 내려쬐고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물' 뿐이다. 그러나 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거의 죽을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족도, 돈도, 섹스도, 명예도, 잠도 다 필요없다.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한 컵의 물을 찾는 사막의 방랑자처럼 '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수행해야한다. 모든 에너지가 완전히 한 점에 맞춰져 바깥 상황이나 조건에 전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원한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원한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는다. 본성을 찾고 싶으면 오직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가슴깊이 가져야 한다. 이런마음으로 수행을 하면 깨달음은 멀지 않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젊었을 때는 색스, 돈, 명예를 원하고 심지어 참선수행을 하는데도 욕심을 가지고 한다. 이것저것 가지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닌다. 결코 만족을 모른다. 그러다 훌쩍 나이가 들면 한 수간 당혹스러워 진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친한 친구도 한두 명씩 세상을 떠난다. 문득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면서 삶에대한 의문들이 생긴다. 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내 인생은 무엇인가. 허무감을 이기기 위해 '산다는것은 다 그렇고 그런것'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애써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가? 과연 그런가?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하고 말하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죽기전에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는 무엇인가' 하는 큰 의심이며 '오직 모를뿐' 인 마음이다.
다시 말하지만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선 안 된다. 또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강하다면 균형을 잃어 문제가 생긴다. 큰 용기만 가지고 있다면 믿음과 의심은 약해질 것이고 , 오직 에너지만 모아질 뿐이다. 무엇보다 조화가 중요하다. 그것이 '오직 모를 뿐'의 다른 이름이다.
긴장을 풀면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순간순간 함께 기능한다. 참선한다는것은 긴장을 푼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를 운전할 때 어깨가 움츠러져 있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갑자기 변화하는 환경에 순발력있게 대응할 수가 없다. 긴장을 늦추려고 해서 운전할 때 잠을 자라는 것이 아니다. 빨간 뿔이 켜지면 멈추고 초록색 불이켜지면 가면된다. 그것이 전부이다.
대부분의 일본 선방에서는 에너지를 모으는 방법을 주로가르친다. 즉, 용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사사키 로시는 종종 제자들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지 점검하곤 했다. 그가 강조하는 수행은 중심인 단전에서 얼마나 큰 에너지를 한꺼번에 터뜨려내느냐 하는 것이다.
"무[無]라고 말해보아라."
"무우."
"더 크게, 더 힘을 줘서."
"뭉우우."
"너는 아직도 너 자신을 못 믿는구냐, 다시 무."
"무우우우."
"더 크게."
"무우우우우우."
이것은 사무라이들이 받는 훈련과 유사할 뿐 선 수행이 아니다. 강한 단전을 길러내는 것만이 중요시되는 잘못된 훈련이다. 용기만 강조되면 믿음이나 의심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빨리 갈 수는 있어도 명확한 방향은 분명히 아니다. 여러분은 어느 곳에 도착하고 싶은가. 서울? 전라도? 경상도? 금강산? 아니면 센프란시스코? 도쿄? 뉴욕? 파리?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방향을 제공해 주기때문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을 발견해서 중생을 돕는 것이다. 열심히 수행을 하면 큰 용기가 큰 에너지가 된다. 그러면 어느 날 의문이 풀려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 한다. 거듭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오늘 바로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조동종 曹洞禪 Perceive silence
지관타좌 只管打坐 조용히 참선하며 앉아있다.
Sitting in silent meditation. (Shikantaza)
타성일편 打成一片 모든 생각을 끊어야 하나가 된다.
Hit all become one.
임제종 臨濟禪 Perceive kong-an
성성적적 惺惺寂寂 말을 들여다 보는것
Illumination, calming, (looking into words)
조계종 曺溪禪 Percieve don't know
'단지불지 시즉견성 但知不知 是卽見性 오직 모를 뿐' 단지 그뿐이다.
If you understand "don't know" just this is enlightenment.
禪의 전통은 달마 대사로 부터 온 것이며, 가사와 발우는 6조 혜능 대사를 통해 내려온 것이다. 6조 이후 禪 전통은 다섯 개의 흐름으로 분류된다. 조동종, 임제종, 법안종, 위앙종, 운문종이 그것이다. 이들은 조금씩다른 스타일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뼈대는 모두 똑같다. 조동종과 임제종만이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禪이 다섯 개의 흐름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6조 혜능 대사는 중국 조계산에서 수 년 동안 가르침을 폈다. 많은 한국스님들은 중국의 위대한 스승들을 찾아 여행했고, 몇 분은 혜능 대사와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6조의 맥은 혜능으로부터 공식 전법계를 받은 한국 스님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리하여 한국에 조계종이 생겨난 것이다.
조동종에서의 주요 가르침은 시칸타짜라는 것으로, 이것은 앉아 있는것을 강조한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완전하게 생각을 끊어야 그때 하나가 된다. 그것의 이름이 타성일편이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마음은 움직이지않는다. 마음은 우주처럼 맑아지고 거울같이 된다. 안팎이 하나가 된다. 산이 당신앞에 나타나면 산과 당신은 하나가 된다. 안팎이 하나가 된다. 이것이 시칸타짜 수행이다.
조동종의 전통은 요즘들어 몇몇 선사들이 공안을 사용하고 있지만 공안공부는 본래 가르치지 않았다. 임제종파의 가장 큰 차이는 공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동종 수행은 한 순간 모든 생각을 끊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하지 않으면 한 시간동안 부처가 된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 시간 동안 우주처럼, 거울처럼 맑게 된다는 것이다. 나무는 푸르다. 벽은 하얗다. 개는 짖는다. 모든것이 하나가 된다. 누군가 배고프면 음식을 주어라. 목이 마르면 물을 주어라. 그것이 전부이다.
임제종도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하는 중요한 도구는 공안 수행이다. 공안수행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든생각을 끊기위해 '말을 들여다 보는것' 혹은 '말을 사용하는것' 이다. 공안수행에서 중요한것은 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안의 진짜의미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라고 하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안 된다. 공안 그 자테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무엇을 지적하는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손가락에 집착해 달을 놓친다. 이것은 아주 나쁜 선병이다.
잘 알려진 사례가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조주의 '무'자 공안에 익숙해 있다. 부처님은 만물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냐?"고 물었을 때 조주 선사는 '무'라고 말했다. 조주선사는 제자의 생각을 없애기 위해 말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방에서 참선을 한다고 하면 머릿속에 '무'를 떠올린다. 아주 강하게 언제, 어디서나 오직 '무'에 괸해서만 생각한다. 그것은 선 수행이 지적하는 바를 완전히 잃어버린 행위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조주선사의 대답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조주는 불성과 불성이 아닌 것을 나누는 제자들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이 '없음'을 단지 사용한 것뿐이다. 그는 달을 가르키기위해 이 '무'를 사용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손가락에 집착해 달을 놓치고 말았다.
'무'는 단지 '무'일 뿐이다. '무'자 공안이 의미하는 핵심은 이미 거울처럼 맑다.는 것이다. 공안을 이해한다는 것은 공안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왜 조주 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했을까----- 모르겠다." 공안을 이렇게 사용하면서 생각을 완전히 끊고 생각이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말에 집착하지 말고 특별한 의미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바른 방향과 본성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공안 수행이다. 조계종의 가르침은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이다. 이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의 본성이다. 사람들은 이런경험을 많은 이름으로 말하지만 본래 그것에는 이름이 없다. 오직 모를 뿐' 그 이상도 , 이하도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테네의 부산한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 중 한 사람이 '스승께서는 스승 자신을 아십니까?' 라고 묻자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내가 모를 뿐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 '오직모를 뿐'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이다. 생각할 때 '나' '너'가 나온다. 그러나 모든 집착을 끊으면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은 하나가 된다.
내가 하나 묻겠다.(손에들고있는 주장자를 가리키며) 주장자와 여러분은 같은가, 다른가? 주의해서 대답하라. 같다고 말해도 나는 여러분을 이 주장자로 30방을 칠 것이고, 다르다고 해도 30방을 칠 것이다. '모르겠다'고 말해도 칠 것이다.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이미 실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하하하) 조계선은 모든 생각을 끊고 '오직 모를 뿐'으로 돌아가면 이미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고봉 선사는 '오직 모를 뿐이 본래 스승'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도 같다.
"스승님께서는 스승님 자신을 아십니까?"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모를뿐을 잘 알고 있다."
조계선은 이런 방법으로 가르친다.
선의 3 요소· 禪의 3 要素 The Three Essential Elements od Zen
큰 믿음 大信心 Great Faith
큰 용기 大奮心 Great Courage
큰 의심 大疑心 Great Question
마음공부를 하는 데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큰 믿음(Great Faith), 큰 용기(Great Courage), 큰 의심(Great Question)이다.
이것은 마음공부라는 삼각형의 세변과 같다. 하나라도 없으면 삼각형은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심 大信心
큰 믿음이란 처한 조건에 관계없이 마음속에 큰 서원을 세워 노력하는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듯이 말이다. 모든 에너지를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심지어 다음 생, 또 다음 생까지 멈ㅊ추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마치 너미 닭ㅇ이 알을 품듯 말이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결코 다른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직 알을 따뜻하게 해서 병아리로 부화시켜야 한다는 어미로서의 본능적인 생각 뿐이다. 물론 가끔 품는 위치를 바꾸기도 하지만 결코 알이 차갑게 되도록 내버러두지 않는다. 만약 어미 닭이 '좀더 재미있는 일은 없을까?' 혹은 '남자 친구닭이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열심히 알을 품지않거나 아예 알을 내버려둔다면 결코 병아리는 태어나지 않는다.
어미 닭은 움직이지 않고 종일 앉아 있어야 한다. 자신의 견해, 조건, 상황을 가지지 않고 오직 한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병아리가 알을 깨도 나올 것이다.
이처럼 오직 한 방향으로 몰두하는 마음을 큰 마음이라 한다.
대분심 大奮心
대분심이란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노력할 때와 비교할 수 있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를 본 적이 있는가. 쥐구멍 밖으로 몸을 기대고 어깨를 잔뜩 긴장시킨 후 용수철을 늘린 것처럼 뒷다라를 빼고 앉아 쥐가 튀어나오면 언제라도 움켜쥘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가 쥐구멍에 집중해 있다. 온 마음이 한 가지 포인트에 맞춰져 바깥의 조건이 어떤하든 똑같은 자세로 몰두하는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난다. 쥐가 '이 정도면 됐어, 저 멍청한 고양이는 지금쯤 갔겠지' 하고 바깥 냄새를 맡기위해 머리를 내미는 순간 고양이는 낚아채는 것이다. 그것이 고양이의 마음이다. 고양이는 언제, 어떤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완벽한 집중을 한다. 외부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맞춰진다.
집에서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때로는 고양이를 하늘로 던졌다가 떨어뜨리면 고양이는 신기하게도 네 발톱을 탁 세워서 안전하게 앉는다. 사람이라면 팔다리가 부러져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고양이는 하늘에 던져져서도 초점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고양이의 큰 용기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고양이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그럴 때 마음은 바깥 조건의 변화에 따라 출렁댖지 않는다.
나는 젊었을 때 충청남도 마곡사라는 절에서 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절 살림을 도맡아 했는데, 음식을 준비하고 모든 생필품에 책임을 져야하는 아주 막중한 일이었다. 한번은 절에서 큰 행사가 열렸다. 전국에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음식준비가 큰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두부를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우리는 며칠씩 걸려 두부를 만들어 물속에 넣어두었다. 마곡사에는 창고에 큰 나무통이 있었는데, 나무통에 물을 가득 채워 두부를 보관해놓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창고에 들어가 나무통을 보니 두부가 두 덩이나 없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또 두 넝이가 없어졌다. 그 이후로 매일 두부가 한두덩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고 문은 항상 잠을쇠로 잠겨져 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그 일이 알려지자 서로 의심하는 바람에 절 분위기까지 흉흉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매일 두부가 많지도 않은 딱 한두 덩이만 없어지는가 하는 점이었다. 두부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꺼번에 다 들고 갔으면 될 터인데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절에 아마 나쁜귀신이 장난을 치는 모양"이라며 두려워했다.
어느 날 내가 꾀를 하나 냈다. 창고에 앉아 밤을 새우며 도둑을 잡기로 한 것이다. 나무통 뒤 기둥에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누구소행인지 꼭 밝혀내고 말리라.' 한 시간이 지나가고 두 시간이 지나가고 세 시간이 지났다. 지루하기도 하고 졸음도 쏟아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윽고 새벽이나 됐을까. 이상한 소리가 창고 구석에서 들렸다. 귀를 쫑긋 세웠다. 뭔가 이상한 그림자가 천천히 나무통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옳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군나. 나는 숨죽이며 그림자의 정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보니 사람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드러났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양이였던 것이다.
고양이는 숨을 죽이고 나무통 가장자리에 앉아 가만히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잔뜩 움추리고 머리는 낮게 숙이고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물 속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물 속에 있던 두부 한 덩이가 점점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순간 고양이가 물밖에서 재빨리 낚아채더니 입으로 가져가서는 아주 맛있게 먹어버렸다. 그리고는 유유히 창고를 빠져나갔다.
고양이는 창고의 나무틀에 난 구멍을 통해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내눈을 의심하지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두부가 움직인다는 말인가. 그러나 에너지를 집중하면 가능한 일이다. 고양이는 물에있는 두부가 떠오를 정도로 온 에너지를 집중시킨 것이다. 고양이의 의식은 오직 한 점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가 이러할진대 사람이 이렇게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무한한 결과가 나오겠는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것이 고양이의 대분심이다.
이런 고양이의 마음상태만 같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우리 수행은 이와 같아야 한다.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한 점 즉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애 집중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면 어느 시점엔가 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엄청나게 폭팔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다.
대의심 大疑心
큰 의심이란 한 가지에 집중해 있는 마음을 오랫동안 계속 간직하는 것이다. 몇 초 혹은 몇 분은 쉬울지 몰라도 오랫동안 한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어머니가 장을 보러갔다 오겠다며 아이에게 말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억어라."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는 오지 않는다. 아이는 배가 고파 밥을 먹는다. 네 시간, 다섯 시간이 흘러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는 온갖 생각과 걱정들로 뒤죽박죽이 된다. "무슨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의 모든 의식의 에너지는 '어머니는 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집중해 있다.
또 다른 예가 있다.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주 배가고파 하늘도, 땅도, 나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어디에 먹을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또 며칠동안 사막을 헤매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햇빛은 따갑게 내려쬐고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물' 뿐이다. 그러나 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거의 죽을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족도, 돈도, 섹스도, 명예도, 잠도 다 필요없다.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한 컵의 물을 찾는 사막의 방랑자처럼 '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수행해야한다. 모든 에너지가 완전히 한 점에 맞춰져 바깥 상황이나 조건에 전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원한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원한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는다. 본성을 찾고 싶으면 오직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가슴깊이 가져야 한다. 이런마음으로 수행을 하면 깨달음은 멀지 않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젊었을 때는 색스, 돈, 명예를 원하고 심지어 참선수행을 하는데도 욕심을 가지고 한다. 이것저것 가지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닌다. 결코 만족을 모른다. 그러다 훌쩍 나이가 들면 한 수간 당혹스러워 진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친한 친구도 한두 명씩 세상을 떠난다. 문득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면서 삶에대한 의문들이 생긴다. 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내 인생은 무엇인가. 허무감을 이기기 위해 '산다는것은 다 그렇고 그런것'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애써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가? 과연 그런가?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하고 말하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죽기전에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는 무엇인가' 하는 큰 의심이며 '오직 모를뿐' 인 마음이다.
다시 말하지만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선 안 된다. 또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강하다면 균형을 잃어 문제가 생긴다. 큰 용기만 가지고 있다면 믿음과 의심은 약해질 것이고 , 오직 에너지만 모아질 뿐이다. 무엇보다 조화가 중요하다. 그것이 '오직 모를 뿐'의 다른 이름이다.
긴장을 풀면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순간순간 함께 기능한다. 참선한다는것은 긴장을 푼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를 운전할 때 어깨가 움츠러져 있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갑자기 변화하는 환경에 순발력있게 대응할 수가 없다. 긴장을 늦추려고 해서 운전할 때 잠을 자라는 것이 아니다. 빨간 뿔이 켜지면 멈추고 초록색 불이켜지면 가면된다. 그것이 전부이다.
대부분의 일본 선방에서는 에너지를 모으는 방법을 주로가르친다. 즉, 용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사사키 로시는 종종 제자들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지 점검하곤 했다. 그가 강조하는 수행은 중심인 단전에서 얼마나 큰 에너지를 한꺼번에 터뜨려내느냐 하는 것이다.
"무[無]라고 말해보아라."
"무우."
"더 크게, 더 힘을 줘서."
"뭉우우."
"너는 아직도 너 자신을 못 믿는구냐, 다시 무."
"무우우우."
"더 크게."
"무우우우우우."
이것은 사무라이들이 받는 훈련과 유사할 뿐 선 수행이 아니다. 강한 단전을 길러내는 것만이 중요시되는 잘못된 훈련이다. 용기만 강조되면 믿음이나 의심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빨리 갈 수는 있어도 명확한 방향은 분명히 아니다. 여러분은 어느 곳에 도착하고 싶은가. 서울? 전라도? 경상도? 금강산? 아니면 센프란시스코? 도쿄? 뉴욕? 파리?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방향을 제공해 주기때문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을 발견해서 중생을 돕는 것이다. 열심히 수행을 하면 큰 용기가 큰 에너지가 된다. 그러면 어느 날 의문이 풀려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 한다. 거듭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오늘 바로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Saturday, June 23, 2012
좌선
좌선· 坐禪 Sitting in Zen Meditation
조신[調身] To control body
조식[調息] Breathing
조심[調心] Mind
좌선[坐禪] Sitting in meditation
행선[行禪] Walking Zen
와선[臥禪] Lying-down Zen
참선이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참선할 때 우리는 몸, 호흡, 마음을 통제할 어떤 기술들을 사용해서 모든 생각을 끊고 본성을 깨닫는다. 참선하면 흔히 방바닥에 양다리를 반쯤 혹은 완전히 꼬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자세로 똑바로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자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참선은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마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매 상황에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진정한 참선은 앉는 자세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다. 어떤상황, 조건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처음에는 자세를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고 싶으면 먼저 몸을 지배해야만 한다. 앉아있는 동안 일정하게 어떤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가능하면 다리는 꼬고 등과 머리는 일직선에 놓는다. 눈은 반쯤만 열고 45도 시선으로 바닥을 바라본다. 손은 단전앞에놓고 부처님 자세로 오른손을 왼손 밑바닥에 깔고 양 엄지손가락을 맞닿아 둥글게 만든다. 그리고 배꼽아래 단전으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한다. 길게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쉰다.
호흡을 통제할 수 있으면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쉼에 따라 생각도 천천히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다. 에너지가 천천히 배꼽아래 단전에 모이기 시작하면 생각도 덜 복잡해진다. 참선 수행에서 마음을 두는 곳은 항상 우리의 중심, 즉 단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너지가 머리에 있거나 가슴에 모여있다. 머리는 지성의 중심이고 가슴은 감정의 중심이다. 머리에 중심을 두는 것은 생각을 복잡하게 하고 에너지를 올라가게 한다. 생각을 머리와 가슴에서 내려놓아라. 단전의 의지와 행동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생각이 천천히 단전에 모여 안정되면 생각과 감정도 맑아진다.
그러나 참선이 무조건 이렇게 앉아서 하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순간순간 우주처럼 맑으면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참선이다. 운전하는 것도, 테니스를 치는것도 다 참선 수행이다. 모든것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 있는 그대로 맑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오직 모를 뿐'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생각을 끊는다는 것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우리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하는 것이다. 안과 밖이 없다. 안과 밖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운전할때 그냥 운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운전 참선이다. 먹을 때 그냥 먹는 것이다. 그것이 참선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운전하거나 먹을 때 오로지 그것만 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밥을 먹고 있지만 마음은 여기저기를 떠돈다. 여자 친구생각, 남편, 마누라, 시어머니와 싸운 생각, 직장에서 해고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마음은 제주도에서 부터 백두산까지 야생마처럼 떠돌아 다닌다. 입으로는 음식을 씹고 있지만 생각은 천리를 달린다. 단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그것이 바로 생각에대한 집착이며 고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순간순간 생각에 매이지 않고 그냥 할 때 모든 것은 이미 참선 수행이다.
사람들 중에는 몸이 불편해서 참선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 제자 중 한 사람은 허리 디스크 때문에 5분이상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남들처럼 90일 참선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나는 물론 허락했다. 그는 누워서 수행을 했다. 다른사람들이 모두 벽을보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동안 그는 천장을 처다보며 참선수행을 했다. 다만 나와 면담할 때만 몇분간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뒤 다시 선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참선수행이란 이처럼 꼭 반듯하게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앉아 있을 수 없다면 의자를 써도 좋고 서서해도 좋다. 어떤 자세든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선수행의 진정한 자세이다.
대오· 大悟 The Great Enlightenment
천지지천천지전 天地地天天地轉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요, 하늘과 땅이 함께 구른다.
Sky is earth, earth is sky, sky and earth revolve
수산산수수산공 水山山水水山空
물이산이고 산이물이며, 물과산이 다 비었다.
Water is mountain, mountain is water, water and mountain are empty.
천지지지하증전 天天地地何曽轉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언제 일찍이 구른 바가 있었던가?
Sky is sky, earth is earth, when did they ever revolve?
산산수수각완연 山山水水各琓然
산은산, 물은 물, 각기 완연하여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다.
Mountain is mountain, water is water, earth is already complete.
대오란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얻는것이다. 자유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대비를 깨달아 대보살행[大菩薩行]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우리가 매 순간 진리속에서 얹제나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 말은 너무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대붑분 사람들은 그저 흘려듣기 쉽다. 그
러나 실제 우리는 얼마나 실천을 하고 있는가.
인간은 각자 상황에 집착애 욕심, 분노, 무명을 갖는다. 생각이란 언제나 변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이 변하는 생각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 한다. 지니리를 따르지 않고 하루에도 열두번씩 바뀌는 생각을 쫓기 때문에 진리의 삶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선불교는 무명과 방황의 세계에서 걸어나와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자각을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이미 완전하다. 그 점을 깨닫고 싶으면 먼저 각자의 견해, 조건, 상황을 놓아버려야 한다. 맑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라.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다음 단계는 실천이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상황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인식해 찰라마다 올바른 실천을 하느것이다. 이것이 '대오[大悟]' , 말 그대로 큰 깨달음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깨달아 이 세상을 돕느냐 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그러나 머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움직이므로 영원한 것은 없다. 모양이 '공'하고 '공'이 모양이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하는 마음(thinking mind)' 으로 지구가 하늘이고 하늘이 지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이다. 같지만 또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모든것은 언제나 움직이니다. 돌고돈다. 모든것은 언제나 변한다. 모든것이 공허하므로 "산이 물이요, 물이 산이요",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요------"이다.
그러나 이 관점 역시 어떤 점에서는 맞지만 여전히 생각일 뿐이다. 여전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는 상태이므로 개념적인 상태이며,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완벽한 공에서는 가는것도, 오는 것도 없다. "하늘은 단지 하늘이고 땅은 그저 땅일 뿐"이다. 우리늬 마음은 변하지 않고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것도 없다. 이것이 완벽한 정적의 상태이다.
진정한 공을 깨달음에따라 우리의 마음은 완전하게 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있게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늘이 하늘이고 땅은 땅이다." 이것이 또 다른 이름의 순간의 세계이다. 찰라찰라가 다름아닌 세계가 진리이며 실상의 세계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 기능이 없는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옳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진리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올바른 기능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이 진리를 통해 나와 중생, 이 세계를 연결시킬 것인가. 이 진리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실용이다. 답은 아주 쉽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선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것 중의 하나는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승에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에리한 눈을 가진 선사를 찾을 때 까지 이 스승, 저 스승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지만 첫눈에 스승을 알아보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여러 해 선 수행을하면서 많은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곧 어떤것이 옳고 그른지 알게 될 것이다. 섩탕을 맛보지 않으면 단맛을 알수 없고, 소금을 맛보지 않으면 짠맛을 모른다. 아무도 당신의 경험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 당신 스스로 해야한다.
많은 스승들은 자기들이 깨달았다고 주장하지만 깨달음애도 수준이 있다. 첫 번째 깨달음이 있고 본래 깨달음이 있고 마지막 깨달음이 있다. 첫 번째 깨달음은 '공'을, 본래 깨달음은 '여여[如如]' 를, 마지막 깨달음은 '즉여[卽如]를 깨닫는 것이다.
여기 사과가 하나있다. 우리가 그것을 사과라고 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과가 이니라고 하면 공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과인가, 아닌가. 만약 여러분이 바닥을 "탕!" 치거나 '할' 하고 소리치면 이것이 첫 번째 깨달음이다. 혹은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푸르다'거나 '사과는 붉고 벽은 하얗다'라고 하면 '여여[如如]'의 대답을 준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한 입 깨물어 먹으면 바로 '즉여[卽如]'가 된다. 깨달음의 수준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오는 것이다.
'즉여' 야 말로 완전한 대답이다. 형이학상적인 진리가 아니다. 예리한 눈을 가진 선사는 이 세가지 깨달음을 구별해낼 줄 안다. 자유롭게 가르침에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깨달음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깨달음'은 단지 말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나는 깨닫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선 수행을 한다. 부처님은 '모든것은 이미 깨달았다'고 설파했다.
한 유명한 선사의 말대로 '생각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을 가지면 어떤 행동도 바로 '즉여'가 된다. 깨달음을 얻었더고 말하는 것조차 혹은 더욱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조차 생각이고 욕심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만든다.
남전 선사는 "평상심이 도" 라고 말했다. 매일매일의 마음이 이미 대오[大悟]이다. 뭔가 다른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뱀을 그리면서 다리를 그려넣으려 하는 것과 같다.
조신[調身] To control body
조식[調息] Breathing
조심[調心] Mind
좌선[坐禪] Sitting in meditation
행선[行禪] Walking Zen
와선[臥禪] Lying-down Zen
참선이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참선할 때 우리는 몸, 호흡, 마음을 통제할 어떤 기술들을 사용해서 모든 생각을 끊고 본성을 깨닫는다. 참선하면 흔히 방바닥에 양다리를 반쯤 혹은 완전히 꼬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자세로 똑바로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자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참선은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마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매 상황에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진정한 참선은 앉는 자세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다. 어떤상황, 조건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처음에는 자세를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고 싶으면 먼저 몸을 지배해야만 한다. 앉아있는 동안 일정하게 어떤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가능하면 다리는 꼬고 등과 머리는 일직선에 놓는다. 눈은 반쯤만 열고 45도 시선으로 바닥을 바라본다. 손은 단전앞에놓고 부처님 자세로 오른손을 왼손 밑바닥에 깔고 양 엄지손가락을 맞닿아 둥글게 만든다. 그리고 배꼽아래 단전으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한다. 길게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쉰다.
호흡을 통제할 수 있으면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쉼에 따라 생각도 천천히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다. 에너지가 천천히 배꼽아래 단전에 모이기 시작하면 생각도 덜 복잡해진다. 참선 수행에서 마음을 두는 곳은 항상 우리의 중심, 즉 단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너지가 머리에 있거나 가슴에 모여있다. 머리는 지성의 중심이고 가슴은 감정의 중심이다. 머리에 중심을 두는 것은 생각을 복잡하게 하고 에너지를 올라가게 한다. 생각을 머리와 가슴에서 내려놓아라. 단전의 의지와 행동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생각이 천천히 단전에 모여 안정되면 생각과 감정도 맑아진다.
그러나 참선이 무조건 이렇게 앉아서 하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순간순간 우주처럼 맑으면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참선이다. 운전하는 것도, 테니스를 치는것도 다 참선 수행이다. 모든것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 있는 그대로 맑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오직 모를 뿐'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생각을 끊는다는 것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우리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하는 것이다. 안과 밖이 없다. 안과 밖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운전할때 그냥 운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운전 참선이다. 먹을 때 그냥 먹는 것이다. 그것이 참선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운전하거나 먹을 때 오로지 그것만 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밥을 먹고 있지만 마음은 여기저기를 떠돈다. 여자 친구생각, 남편, 마누라, 시어머니와 싸운 생각, 직장에서 해고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마음은 제주도에서 부터 백두산까지 야생마처럼 떠돌아 다닌다. 입으로는 음식을 씹고 있지만 생각은 천리를 달린다. 단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그것이 바로 생각에대한 집착이며 고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순간순간 생각에 매이지 않고 그냥 할 때 모든 것은 이미 참선 수행이다.
사람들 중에는 몸이 불편해서 참선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 제자 중 한 사람은 허리 디스크 때문에 5분이상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남들처럼 90일 참선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나는 물론 허락했다. 그는 누워서 수행을 했다. 다른사람들이 모두 벽을보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동안 그는 천장을 처다보며 참선수행을 했다. 다만 나와 면담할 때만 몇분간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뒤 다시 선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참선수행이란 이처럼 꼭 반듯하게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앉아 있을 수 없다면 의자를 써도 좋고 서서해도 좋다. 어떤 자세든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선수행의 진정한 자세이다.
대오· 大悟 The Great Enlightenment
천지지천천지전 天地地天天地轉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요, 하늘과 땅이 함께 구른다.
Sky is earth, earth is sky, sky and earth revolve
수산산수수산공 水山山水水山空
물이산이고 산이물이며, 물과산이 다 비었다.
Water is mountain, mountain is water, water and mountain are empty.
천지지지하증전 天天地地何曽轉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언제 일찍이 구른 바가 있었던가?
Sky is sky, earth is earth, when did they ever revolve?
산산수수각완연 山山水水各琓然
산은산, 물은 물, 각기 완연하여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다.
Mountain is mountain, water is water, earth is already complete.
대오란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얻는것이다. 자유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대비를 깨달아 대보살행[大菩薩行]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우리가 매 순간 진리속에서 얹제나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 말은 너무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대붑분 사람들은 그저 흘려듣기 쉽다. 그
러나 실제 우리는 얼마나 실천을 하고 있는가.
인간은 각자 상황에 집착애 욕심, 분노, 무명을 갖는다. 생각이란 언제나 변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이 변하는 생각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 한다. 지니리를 따르지 않고 하루에도 열두번씩 바뀌는 생각을 쫓기 때문에 진리의 삶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선불교는 무명과 방황의 세계에서 걸어나와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자각을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이미 완전하다. 그 점을 깨닫고 싶으면 먼저 각자의 견해, 조건, 상황을 놓아버려야 한다. 맑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라.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다음 단계는 실천이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상황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인식해 찰라마다 올바른 실천을 하느것이다. 이것이 '대오[大悟]' , 말 그대로 큰 깨달음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깨달아 이 세상을 돕느냐 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그러나 머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움직이므로 영원한 것은 없다. 모양이 '공'하고 '공'이 모양이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하는 마음(thinking mind)' 으로 지구가 하늘이고 하늘이 지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이다. 같지만 또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모든것은 언제나 움직이니다. 돌고돈다. 모든것은 언제나 변한다. 모든것이 공허하므로 "산이 물이요, 물이 산이요",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요------"이다.
그러나 이 관점 역시 어떤 점에서는 맞지만 여전히 생각일 뿐이다. 여전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는 상태이므로 개념적인 상태이며,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완벽한 공에서는 가는것도, 오는 것도 없다. "하늘은 단지 하늘이고 땅은 그저 땅일 뿐"이다. 우리늬 마음은 변하지 않고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것도 없다. 이것이 완벽한 정적의 상태이다.
진정한 공을 깨달음에따라 우리의 마음은 완전하게 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있게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늘이 하늘이고 땅은 땅이다." 이것이 또 다른 이름의 순간의 세계이다. 찰라찰라가 다름아닌 세계가 진리이며 실상의 세계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 기능이 없는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옳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진리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올바른 기능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이 진리를 통해 나와 중생, 이 세계를 연결시킬 것인가. 이 진리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실용이다. 답은 아주 쉽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선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것 중의 하나는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승에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에리한 눈을 가진 선사를 찾을 때 까지 이 스승, 저 스승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지만 첫눈에 스승을 알아보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여러 해 선 수행을하면서 많은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곧 어떤것이 옳고 그른지 알게 될 것이다. 섩탕을 맛보지 않으면 단맛을 알수 없고, 소금을 맛보지 않으면 짠맛을 모른다. 아무도 당신의 경험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 당신 스스로 해야한다.
많은 스승들은 자기들이 깨달았다고 주장하지만 깨달음애도 수준이 있다. 첫 번째 깨달음이 있고 본래 깨달음이 있고 마지막 깨달음이 있다. 첫 번째 깨달음은 '공'을, 본래 깨달음은 '여여[如如]' 를, 마지막 깨달음은 '즉여[卽如]를 깨닫는 것이다.
여기 사과가 하나있다. 우리가 그것을 사과라고 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과가 이니라고 하면 공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과인가, 아닌가. 만약 여러분이 바닥을 "탕!" 치거나 '할' 하고 소리치면 이것이 첫 번째 깨달음이다. 혹은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푸르다'거나 '사과는 붉고 벽은 하얗다'라고 하면 '여여[如如]'의 대답을 준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한 입 깨물어 먹으면 바로 '즉여[卽如]'가 된다. 깨달음의 수준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오는 것이다.
'즉여' 야 말로 완전한 대답이다. 형이학상적인 진리가 아니다. 예리한 눈을 가진 선사는 이 세가지 깨달음을 구별해낼 줄 안다. 자유롭게 가르침에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깨달음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깨달음'은 단지 말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나는 깨닫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선 수행을 한다. 부처님은 '모든것은 이미 깨달았다'고 설파했다.
한 유명한 선사의 말대로 '생각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을 가지면 어떤 행동도 바로 '즉여'가 된다. 깨달음을 얻었더고 말하는 것조차 혹은 더욱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조차 생각이고 욕심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만든다.
남전 선사는 "평상심이 도" 라고 말했다. 매일매일의 마음이 이미 대오[大悟]이다. 뭔가 다른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뱀을 그리면서 다리를 그려넣으려 하는 것과 같다.
Friday, June 22, 2012
견성성불
견성성불· 見性成佛 See Your True Nature Become Buddha
버들은 푸르고 꽃은 볽다 柳綠花紅 The willow id green, the flowers are red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다 烏黑鷺白 The crows are black, the cranes are white
보이는가? 들리는가? 還見ㅁ 還聞ㅁ Do you see? Do you hear ?
견성성불이란 자기의 본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자기의 본성품이라 무엇인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모든것이 부처님의 본성이다. 모든것이 자기의 본성품이다.
마음과 우주가 일체라면 자기의 본질과 우주의 본질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늘은 푸르고 꽃은 붉으며,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다. 이벽은 흰색이다. 책상보는 황색이다. 그것이 진정한 진리이다. 방 안은 밝게 빛나고 밖은 어둡다.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부처이다..
어떤 생각도 하지말라. 그러면 우주는 이미 너의 것이다. 마음이 우주처럼 맑다는 것은 거울과 같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비춰질 뿐이다. 붉은 공을 비추면 붉은 것이 비춰지고 하얀 공을 바추면 하얀 것이 비춰진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빛이다. 밖에서 개가 짖는다. 설탕은 달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우리의 본성이고 진리이고 불성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하고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다. 아주 명쾌하다.
고칙공안· 古則公案 Kong an and All Cases
1천 7백 공안 千七百公案 (拈頌)
One thousand seven hundred kong-ans 조계종曹溪宗
벽암록 碧岩錄 The Pi-yen Lu 百則 one hundred cases 임제종 臨濟宗
종용록 從容錄 The Tsung-jung Lu 백측 one hundred cases 조동종 曹洞宗
무문관 無門關 The Wu-men-kuan 48 칙 forty-eight cases 諸般
관청에서 띄우는 공문서 같은 중요한 서류에 진위를 판별하는 기준이 있다. 서류의 진본과 복사본이 함께 섞어있어 구별해내기 힘들때 서류에 찍힌 붉은 도장을 보면된다. 서류의 진위여부를 알려면 도장과 맞춰보면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입문한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 어떤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했을 때 이를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 이때 필요한 것이 공안이다. 공안 수행이라고도 하는데, 공부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한 제자들이 스승에게 와서 자신이 이해한 한쪽을 스승이 제시한는 한쪽과 맞추는 것이다. 공안은 일종의 시험문제인 동시에 자기 성찰에 좋은 도구이다. 스승과 학생이 똑같이 이해하고 있으면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전법[傳法]'이라고 한다.
본래 불교에는 공안 수행이 없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제자들에게 만물이 무상하다고 가르쳤다. 욕심, 분노, 무지가 고통을 만들고 이 모든것들이 '생각'에서 나온다고 가르쳤다. 거기에는 어떤글도, 토론도 필요 없었고 오직 禪 수행만이 있을 뿐이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여러차례모임을 통해 부처님 생전의 가르침을 적어 내려갔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은 갑론을박을 벌렸다. "내가 들은 게 옳다." "아니다. 그때 내 기억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이러다 보니 부처님 밀씀의 해석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천5백 년 전에 인도의 달마 대사는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으로 넘어왔다. 불교는 그전부터 이미 3백여 년 동안 중국에서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학문적이고 복을 비는 기복 불교였고, 禪 수행을 강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달마 대사는 사람들이 단지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을 똑바로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면벽하는 달마 대사 앞에 혜가[慧可]라는 이름의 스님이 찾아왔다.
"대사님, 부디 저를 가르쳐주십시요."
"내가 진리를 얘기한다 해도 그대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요."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혜가는 대뜸 그 자링에서 칼로 자기 팔을 잘랐다. 그러나 달마 대사는 한 치의 놀람도, 움직임도 없었다. 혜가는 아픔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ㅂ부디 저의 마음을 편히 해주십시요."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마음을 내게 달라. 그러면 편히 해주겠다.
"마음이 어디있는지 찾을 수 없읍니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순간 혜가는 깨달음을 얻어 달마를 이은 2조가 된다. 바야흐로 禪의 가르침이 달마 대사로 부터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중국 선불교[禪佛敎] 역사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분이 6조 혜능 대사이다. 혜능은 "원인을 만들지 않으면 결과도 없다. 그러니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고 가르쳤다. 어느 날 길을걷던 그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두고 다투는 두 명의 승려와 마주쳤다.
"지금 펄럭이는 것은 깃발이다."
"아니다, 바람이다."
두 승려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 주장이 옳다고 우기고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지나가는 혜능 대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혜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부끼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요. 바로 너회들의 마음이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여기서부터 온갖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또 이런 질문들이 각자 수행을 거치면서 여러가지 또 다른 형태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 제자가 혜능 대사를 찾아왔다.
혜능은 "너는 어디서 왔느냐. 무엇이 여기에 온것이냐?"라고 물었다. 제자는 모르겠읍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내가 무엇인가?'라는 공안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6년 동안 부처님이 수행하면서 물었던 똑같은 질문이다. 부처님, 달마 대사, 6조 혜능 대사 모두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이것이 공안수행의 원조이다. 6조 혜능 대사가 나타날 때까지 따로 불경을 가르치는 교파가 없었다. 오직 참선 수행만이 있었다. 혜능은 많은 위대한 제자들을 배출했다. 큰 비가 내려야 나무들도 크고 버섯들도 잘 자란다. 제자들은 각각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수행을 해서 혜능의 가르침을 꽃피웠다.
이렇게 해서 뻗어나온것이 다섯가지 선의 갈래이다. 임제선사의 선풍을 이은 제자들이 임제종[臨濟宗]을 만들고 법언선사의 제자들은 법안종[法眼宗을 만들고, 운문선사의 제자들은 운문종[雲門宗]을 만들고, 위산, 앙산의 문하에서는 위앙종[僞仰宗]이, 조산·동산의 문하에서는 조동종[曹洞宗]이 나왔다. 이것이 중국 선종의 5가[家]이다
이들은 각기 서로다른 면을 간조하고 있지만 뼈대는 같다. 禪은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 번성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의 깨달음의 경험, 법문들이 쓰여져서 문집으로 만들어졌다. 선사들의 경험이 제자들의 마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어떤 제자가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스승은 그에게 앞선 선사들의 깨달음의 경험들 중 한 사례를 내놓고 묻는다. 진정 깨달음을 얻은 승려라면 즉각적으로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 했을 것이다. 만약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공안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스승은 법을 전해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떤 사람이 운문선사에게 '무엇이 부처님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운문스님은 '마른 똥막대기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승이 이렇게 물었을 때 제자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면 공안의 참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공안수행의 본질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마조[馬祖]선사는 "무엇이 부처입니까?"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다." 몇 년 후에는 이렇게 가르쳤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옛날 공안들은 비교적 단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도 지적인 요소들과 수많은 비유들이 끼어들어 말싸움이나 법문 논쟁으로까지 나타났다. 이러다 보니 선은 일반사람들에게 점점 더 신비한 것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나무 닭이 운다." "돌사자가 하늘을 난다." "토끼 뿔을 보았느냐?" 같은 공안들은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뜬금없는 얘기일 것이다. 상대방이 황당한 대답을 할 때 '선문답 한다'고 말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선문답'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얘기라는 인식이 퍼져버렸다. 이러다 보니 禪 수행은 점점 일부 특정 계층만을 위한 수행이 되어버렸다.
어쨋든 공안에 나온 말들이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감춰진 의미를 찾아 진땀을 흘려야 했다. "불교가 무엇이냐?" 고 물을 때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자란다"라는 식으로 대답하는것이다. 이런 형태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비록 선문답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왔고, 서로다른 禪의 전통이 때로 서로다른 공안들을 사용한다해도 진리는 하나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공안들을 어떻게 써서 사람들의 잠을 깨우고 그들을 도울 것인가, 단지 이것만이 핵심이다. 선사들은 제자들의 생각하고 따지고 분별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말과 단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것은 낚시대에 미끼를 다는 것과 같았다. 물고기가 너무 배가 고프면 미끼와 함께 바늘까지 먹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맑아서 생각에 집착해 있지 않으면 미끼는 잡되 바늘은 잡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여유로운 물고기는 결코 바늘을 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문답에 나오는 말이 논리적으로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안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생각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을 치료하기위한 것일 뿐이다.
공안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조주의 '무'[無]'자 공안이다. 어느 날 한 승려가 조주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개에게도 물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조주선사는 '무[無]', 즉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니, 만물에 불성이 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실까. 조주선사가 깨달음이 앝아 실수를 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조주는 제자의 분별하는 마음을 치료하기위해 일부러 실언을 한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 제자 역시 부처님의 말, 책에 기록된 말에만 집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마음속에 이것 혹은 저것, 예스 혹은 노, 불성 혹은 불성아닌 어떤 '것'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집착해 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것들만이 불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것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모든것을 구분하고 따지는 이원론적인 발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조주는 그 마음을 바로 알아보고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공안은 아주 유명해서 오늘 날 까지 계속 희자되고 있다.
"왜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왜------. 부처님이 옳은가, 조주선사가 맞는가, 잘 모르겠다."
조중의 '무'자 공안은 생각에 대한 집착을 치료해 주는 '말과 단어로 된 약'이다. 이것은 아주 유명한 공안이다. 스승이 이 공안을 줄 때 우리는 조주선사의 '실수'를 사용하여 그것을 비로 잡는다. 그러나 실제 이 공안은 '실수'인것도, 실수가 아닌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을 하면 이 공안은 상식에 맞지않는다. 조주 선사가 실수를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을 끊으면, 집착을 끊으면 이공안은 맑다. 틀린것도 맞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수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공안의 목적은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공안 그 자체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오늘 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무'자 공안에 집착해 있다. 이것저것, 예스 노, 불성 혹은 불성아닌 어떤 '것'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집착해 있다.
조주선사는 이공안을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약을 먹는 환자가 약에 집착해 있으면 본래 가진 병보다 훨씬 더 나쁜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현재 여러불교 종파는 각각의 불교전총에 따라 다양한 공안들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1천 7백 가지를 모아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선문염송[禪文捻頌]이라고 한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이것을 禪의 지침서로 쓰고있다. 벽암록[碧巖錄]에서는 1백칙을 들고 있는데, 현재 임제종에서 쓰고 있다. 종용록[從容錄]에서도 1백칙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조동종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무문관[無門關]에서는 48칙을 쓰고 있는데 이는 여러선종에서 함께 응용하고 있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볽다 柳綠花紅 The willow id green, the flowers are red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다 烏黑鷺白 The crows are black, the cranes are white
보이는가? 들리는가? 還見ㅁ 還聞ㅁ Do you see? Do you hear ?
견성성불이란 자기의 본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자기의 본성품이라 무엇인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모든것이 부처님의 본성이다. 모든것이 자기의 본성품이다.
마음과 우주가 일체라면 자기의 본질과 우주의 본질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늘은 푸르고 꽃은 붉으며,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다. 이벽은 흰색이다. 책상보는 황색이다. 그것이 진정한 진리이다. 방 안은 밝게 빛나고 밖은 어둡다.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부처이다..
어떤 생각도 하지말라. 그러면 우주는 이미 너의 것이다. 마음이 우주처럼 맑다는 것은 거울과 같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비춰질 뿐이다. 붉은 공을 비추면 붉은 것이 비춰지고 하얀 공을 바추면 하얀 것이 비춰진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빛이다. 밖에서 개가 짖는다. 설탕은 달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우리의 본성이고 진리이고 불성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하고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다. 아주 명쾌하다.
고칙공안· 古則公案 Kong an and All Cases
1천 7백 공안 千七百公案 (拈頌)
One thousand seven hundred kong-ans 조계종曹溪宗
벽암록 碧岩錄 The Pi-yen Lu 百則 one hundred cases 임제종 臨濟宗
종용록 從容錄 The Tsung-jung Lu 백측 one hundred cases 조동종 曹洞宗
무문관 無門關 The Wu-men-kuan 48 칙 forty-eight cases 諸般
관청에서 띄우는 공문서 같은 중요한 서류에 진위를 판별하는 기준이 있다. 서류의 진본과 복사본이 함께 섞어있어 구별해내기 힘들때 서류에 찍힌 붉은 도장을 보면된다. 서류의 진위여부를 알려면 도장과 맞춰보면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입문한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 어떤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했을 때 이를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 이때 필요한 것이 공안이다. 공안 수행이라고도 하는데, 공부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한 제자들이 스승에게 와서 자신이 이해한 한쪽을 스승이 제시한는 한쪽과 맞추는 것이다. 공안은 일종의 시험문제인 동시에 자기 성찰에 좋은 도구이다. 스승과 학생이 똑같이 이해하고 있으면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전법[傳法]'이라고 한다.
본래 불교에는 공안 수행이 없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제자들에게 만물이 무상하다고 가르쳤다. 욕심, 분노, 무지가 고통을 만들고 이 모든것들이 '생각'에서 나온다고 가르쳤다. 거기에는 어떤글도, 토론도 필요 없었고 오직 禪 수행만이 있을 뿐이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여러차례모임을 통해 부처님 생전의 가르침을 적어 내려갔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은 갑론을박을 벌렸다. "내가 들은 게 옳다." "아니다. 그때 내 기억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이러다 보니 부처님 밀씀의 해석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천5백 년 전에 인도의 달마 대사는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으로 넘어왔다. 불교는 그전부터 이미 3백여 년 동안 중국에서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학문적이고 복을 비는 기복 불교였고, 禪 수행을 강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달마 대사는 사람들이 단지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을 똑바로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면벽하는 달마 대사 앞에 혜가[慧可]라는 이름의 스님이 찾아왔다.
"대사님, 부디 저를 가르쳐주십시요."
"내가 진리를 얘기한다 해도 그대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요."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혜가는 대뜸 그 자링에서 칼로 자기 팔을 잘랐다. 그러나 달마 대사는 한 치의 놀람도, 움직임도 없었다. 혜가는 아픔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ㅂ부디 저의 마음을 편히 해주십시요."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마음을 내게 달라. 그러면 편히 해주겠다.
"마음이 어디있는지 찾을 수 없읍니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순간 혜가는 깨달음을 얻어 달마를 이은 2조가 된다. 바야흐로 禪의 가르침이 달마 대사로 부터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중국 선불교[禪佛敎] 역사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분이 6조 혜능 대사이다. 혜능은 "원인을 만들지 않으면 결과도 없다. 그러니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고 가르쳤다. 어느 날 길을걷던 그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두고 다투는 두 명의 승려와 마주쳤다.
"지금 펄럭이는 것은 깃발이다."
"아니다, 바람이다."
두 승려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 주장이 옳다고 우기고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지나가는 혜능 대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혜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부끼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요. 바로 너회들의 마음이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여기서부터 온갖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또 이런 질문들이 각자 수행을 거치면서 여러가지 또 다른 형태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 제자가 혜능 대사를 찾아왔다.
혜능은 "너는 어디서 왔느냐. 무엇이 여기에 온것이냐?"라고 물었다. 제자는 모르겠읍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내가 무엇인가?'라는 공안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6년 동안 부처님이 수행하면서 물었던 똑같은 질문이다. 부처님, 달마 대사, 6조 혜능 대사 모두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이것이 공안수행의 원조이다. 6조 혜능 대사가 나타날 때까지 따로 불경을 가르치는 교파가 없었다. 오직 참선 수행만이 있었다. 혜능은 많은 위대한 제자들을 배출했다. 큰 비가 내려야 나무들도 크고 버섯들도 잘 자란다. 제자들은 각각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수행을 해서 혜능의 가르침을 꽃피웠다.
이렇게 해서 뻗어나온것이 다섯가지 선의 갈래이다. 임제선사의 선풍을 이은 제자들이 임제종[臨濟宗]을 만들고 법언선사의 제자들은 법안종[法眼宗을 만들고, 운문선사의 제자들은 운문종[雲門宗]을 만들고, 위산, 앙산의 문하에서는 위앙종[僞仰宗]이, 조산·동산의 문하에서는 조동종[曹洞宗]이 나왔다. 이것이 중국 선종의 5가[家]이다
이들은 각기 서로다른 면을 간조하고 있지만 뼈대는 같다. 禪은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 번성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의 깨달음의 경험, 법문들이 쓰여져서 문집으로 만들어졌다. 선사들의 경험이 제자들의 마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어떤 제자가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스승은 그에게 앞선 선사들의 깨달음의 경험들 중 한 사례를 내놓고 묻는다. 진정 깨달음을 얻은 승려라면 즉각적으로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 했을 것이다. 만약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공안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스승은 법을 전해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떤 사람이 운문선사에게 '무엇이 부처님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운문스님은 '마른 똥막대기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승이 이렇게 물었을 때 제자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면 공안의 참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공안수행의 본질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마조[馬祖]선사는 "무엇이 부처입니까?"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다." 몇 년 후에는 이렇게 가르쳤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옛날 공안들은 비교적 단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도 지적인 요소들과 수많은 비유들이 끼어들어 말싸움이나 법문 논쟁으로까지 나타났다. 이러다 보니 선은 일반사람들에게 점점 더 신비한 것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나무 닭이 운다." "돌사자가 하늘을 난다." "토끼 뿔을 보았느냐?" 같은 공안들은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뜬금없는 얘기일 것이다. 상대방이 황당한 대답을 할 때 '선문답 한다'고 말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선문답'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얘기라는 인식이 퍼져버렸다. 이러다 보니 禪 수행은 점점 일부 특정 계층만을 위한 수행이 되어버렸다.
어쨋든 공안에 나온 말들이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감춰진 의미를 찾아 진땀을 흘려야 했다. "불교가 무엇이냐?" 고 물을 때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자란다"라는 식으로 대답하는것이다. 이런 형태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비록 선문답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왔고, 서로다른 禪의 전통이 때로 서로다른 공안들을 사용한다해도 진리는 하나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공안들을 어떻게 써서 사람들의 잠을 깨우고 그들을 도울 것인가, 단지 이것만이 핵심이다. 선사들은 제자들의 생각하고 따지고 분별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말과 단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것은 낚시대에 미끼를 다는 것과 같았다. 물고기가 너무 배가 고프면 미끼와 함께 바늘까지 먹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맑아서 생각에 집착해 있지 않으면 미끼는 잡되 바늘은 잡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여유로운 물고기는 결코 바늘을 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문답에 나오는 말이 논리적으로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안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생각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을 치료하기위한 것일 뿐이다.
공안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조주의 '무'[無]'자 공안이다. 어느 날 한 승려가 조주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개에게도 물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조주선사는 '무[無]', 즉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니, 만물에 불성이 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실까. 조주선사가 깨달음이 앝아 실수를 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조주는 제자의 분별하는 마음을 치료하기위해 일부러 실언을 한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 제자 역시 부처님의 말, 책에 기록된 말에만 집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마음속에 이것 혹은 저것, 예스 혹은 노, 불성 혹은 불성아닌 어떤 '것'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집착해 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것들만이 불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것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모든것을 구분하고 따지는 이원론적인 발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조주는 그 마음을 바로 알아보고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공안은 아주 유명해서 오늘 날 까지 계속 희자되고 있다.
"왜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왜------. 부처님이 옳은가, 조주선사가 맞는가, 잘 모르겠다."
조중의 '무'자 공안은 생각에 대한 집착을 치료해 주는 '말과 단어로 된 약'이다. 이것은 아주 유명한 공안이다. 스승이 이 공안을 줄 때 우리는 조주선사의 '실수'를 사용하여 그것을 비로 잡는다. 그러나 실제 이 공안은 '실수'인것도, 실수가 아닌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을 하면 이 공안은 상식에 맞지않는다. 조주 선사가 실수를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을 끊으면, 집착을 끊으면 이공안은 맑다. 틀린것도 맞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수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공안의 목적은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공안 그 자체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오늘 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무'자 공안에 집착해 있다. 이것저것, 예스 노, 불성 혹은 불성아닌 어떤 '것'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집착해 있다.
조주선사는 이공안을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약을 먹는 환자가 약에 집착해 있으면 본래 가진 병보다 훨씬 더 나쁜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현재 여러불교 종파는 각각의 불교전총에 따라 다양한 공안들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1천 7백 가지를 모아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선문염송[禪文捻頌]이라고 한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이것을 禪의 지침서로 쓰고있다. 벽암록[碧巖錄]에서는 1백칙을 들고 있는데, 현재 임제종에서 쓰고 있다. 종용록[從容錄]에서도 1백칙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조동종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무문관[無門關]에서는 48칙을 쓰고 있는데 이는 여러선종에서 함께 응용하고 있다.
Tuesday, June 19, 2012
직지인심
직지인심· 直指人心 Pointing Directly to Mind
동산선상의 삼서근 洞山先師 麻三斤
Master Dong Sahn "Three pounds of flax"
운문 선사의 마른 똥 막대기 雲門禪師 乾屎橛
Master Un Mun "Dry stick on the shit place
조주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 趙州禪師 庭前栢樹子
Master Joju "The cypress tree in the garden"
禪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더 이상 분석도 필요없다. 그저 우리마음으로 길게 들어가 잠을 깨고 부처가 되는 것이다. 옛날에 누군가가 한 위대한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의 본성을 찾는다는 게 아주 어렵지요?"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아주 어렵지."
누군가 또 질문을 했다.
"본성을 찾는다는 게 아주 쉽지요?"
"그럼, 아주 쉽지."
누군가 또 물었다.
"본성을 찾는다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지."
누군가 또 물었다.
"참선은 어떻습니까,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선사가 이렇게 말했다.
"물을 마실 때 찬지, 더운지는 네 스스로 안다."
이 이야기는 우리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다.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고 생각하면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 물 마실 때 찬지 뜨거운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 어렵거나 쉬운것을 만들지 말라.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뭔가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그것이 禪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든 삶에대한 의문들을 가지고 있다. '부처가 무엇일까?' '삶과 죽음이 무엇일까?' 부처님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으면 먼저 우주와같이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우주처럼 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볽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하얀것이 오면 하얀것을 비춘다. 단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 그것이 진리이며,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고해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한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가리키는가? 다음 세 가지 이야기는 禪의 가르침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지 보여준다.
동산 스님의 '삼베 서근 麻三斤'
옛날 중국에서의 얘기다. 어느 날 아침, 동산 스님이 삼베 무게를 달고 있었다. 저울이 딱 서 근을 가르키고 있었다. 순간 그는 어떤 생각도 없었다.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우주처럼, 거울처럼 맑았다는 것이다. 단지 삼베 서 근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그가 '삼베 서 근'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마침 한 스님이 그에게 와서 물었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삼베 서근이다."
그 말에 스님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이 전부이다. 단순히 비추는 것이다.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횐것이 오면 힌것을 비춘다. 삼베 서 근이면 그냥 마음의 거울에 삼베 서 근만 비추는 것이다. 진리는 아주 쉽다. 생각을 하면 이런가르침은 어려울 것이다. 생각이 없으면 모든것이 이미 부처인 것이다.
운문 스님의 '마른 똥막대기 乾屎橛
옛날 우리농촌도 그랬지만 중국 절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분뇨를 퇴비로 만들어 밭에 뿌렸다. 스님들은 화장실에 큰 통을 갖다놓고 거기서 볼일을 보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긴 똥막대기로 저은 뒤 오물을 재에다 굴려 말리고, 똥막대기는 볕에 내놓았다.
어느 날 운문 스님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바지춤을 올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때 성급한 스님 한 사람이 화장실 문 앞에 다가와서 운문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운문 스님은 지체없이 이렇게 말했다.
"마른 똥 막대기니라."
운문 스님은 질문을 받았던 그 순간 단지 볕아래 긴 똥막대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운문 스님은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한 뒤 가던길을 계속 걸어갔던 것이다. 순간 스님의 마음은 단지 마른 똥막대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볕 아래 똥막대기가 그의 생각의 전부였던 것이다.
조주 스님의 '뜰앞의 잣나무 庭前柏樹子'
달마 대사는 禪의 초조[初祖]이다. 그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기 전 불교는 이미 중국에 융성해 있었다. 많은 절들이 세워졌고, 스님들도 많았으며,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불교는 몇몇 왕조에서 국교로까지 인정되었다. 달마 대사는 중국에 도착한 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도 참선 수행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부처님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드믈다는 것을 파악했다. 사람들은 그저 소원 성취를 위해 불교를 이용하고 있었다. 달마 대사는 중국 불교에 충격을 주어서 그들의 잠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마 대사가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중국 사람들에게 위대한 선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양무제도 개인적으로 달마대사를 초청해 법문을 듣고 싶어했다. 양무제가 그에게 은근한 자랑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한사람의 승려에게라도 옷을 주고 음식을 주면 극락왕생한다고 했읍니다. 그동안 저는 수없이 많은 승렫들에게 음식과 옷을 주었읍니다. 경전간행도 많이 했고 절도 많이 세웠지요. 자, 제가 얼마나 공덕을 받을 수 있겠읍니까?"
그러자 달마 대사는 일어지하에 "공덕이 하나도 없읍니다."라고 잘라말했다. 양무제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잘못 들었는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내쳐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주신 가장 신성한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스러운 것은 없읍니다. 오직 '공[空]'이 있을 따름입니다. (廓然無聖)"
양무제는 완전히 기가 꺾였다.
"어떻게 감히 당신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읍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달마 대사는 "모르겠읍니다"라고 말했다.
그 길로 달맏대사는 소림사 위 어둡고 축축한 토굴로 가서 면벽 수행을 시작했다. 무려 9년 동안 '오직 모를 뿐' 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단지 벽만보고 앉아있는 참선 수행을 한 것이다.
달마 대사는 진리를 가르치러 중국에 왔다. 어떻게 하면 바른 수행으로 우리의 본성을 찾을 수 있는지 가르치려 했다. 이것이 중국불교라는 선의 출발점이다. 아무리 훌륭한 설명이라도 깨달음의 경험은 나누어줄 수 없다. 배고플 때 음식 사진 1천여 장을 보여준다해서 배고픈 사람을 도와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에게는 무언가 먹을 것이 필요하다. 禪 수행이 나온 이유가 이 때문이다.
"입을 벌려라. 이것이 음식이다. 이것이 물이다."
禪은 비록 훌륭한 말로 가르치지 않지만 바로 우리의 마음에 직접 닿아있다. 그래서 본성을 직접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달마 대사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조주 선사가 살아 계실 때 禪 수행은 질문과 대답안에 감춰진 의미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승려들은 비밀스런 가르침과 이상한 설명만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조주가 절의 뜰을 거닐고 있었다. 한 스님이 다가와 물었다.
"달마대사가 왜 중국으로 왔읍니까?"
이것은 '불교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이나 같은 말이다. 이때 조주는 '뜰 앞에 있는 잣나무'라고 대답했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순간 조주 선사는 뜰 앞에 잣나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란 어떤 비밀스럽고 신비한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앞에 이미 '있는 그대론의 진리'라는 것을 조주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에 뜰 앞의 잣나무가 바로 진리였다.
달마의 가르침과 모든 위대한 선사들의 가르침도 바로 이와 같다. 제자가 "불교가 무엇입니까?"라며 진리에대한 배고품을 호소했을 때, 조주는 그에게 음식이 그려져있는 사진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직접 말한 것이다.
"입을 열어라,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다. 배고프면 먹어라."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동산선상의 삼서근 洞山先師 麻三斤
Master Dong Sahn "Three pounds of flax"
운문 선사의 마른 똥 막대기 雲門禪師 乾屎橛
Master Un Mun "Dry stick on the shit place
조주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 趙州禪師 庭前栢樹子
Master Joju "The cypress tree in the garden"
禪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더 이상 분석도 필요없다. 그저 우리마음으로 길게 들어가 잠을 깨고 부처가 되는 것이다. 옛날에 누군가가 한 위대한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의 본성을 찾는다는 게 아주 어렵지요?"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아주 어렵지."
누군가 또 질문을 했다.
"본성을 찾는다는 게 아주 쉽지요?"
"그럼, 아주 쉽지."
누군가 또 물었다.
"본성을 찾는다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지."
누군가 또 물었다.
"참선은 어떻습니까,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선사가 이렇게 말했다.
"물을 마실 때 찬지, 더운지는 네 스스로 안다."
이 이야기는 우리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다.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고 생각하면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 물 마실 때 찬지 뜨거운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 어렵거나 쉬운것을 만들지 말라.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뭔가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그것이 禪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든 삶에대한 의문들을 가지고 있다. '부처가 무엇일까?' '삶과 죽음이 무엇일까?' 부처님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으면 먼저 우주와같이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우주처럼 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볽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하얀것이 오면 하얀것을 비춘다. 단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 그것이 진리이며,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고해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한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가리키는가? 다음 세 가지 이야기는 禪의 가르침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지 보여준다.
동산 스님의 '삼베 서근 麻三斤'
옛날 중국에서의 얘기다. 어느 날 아침, 동산 스님이 삼베 무게를 달고 있었다. 저울이 딱 서 근을 가르키고 있었다. 순간 그는 어떤 생각도 없었다.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우주처럼, 거울처럼 맑았다는 것이다. 단지 삼베 서 근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그가 '삼베 서 근'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마침 한 스님이 그에게 와서 물었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삼베 서근이다."
그 말에 스님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이 전부이다. 단순히 비추는 것이다.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횐것이 오면 힌것을 비춘다. 삼베 서 근이면 그냥 마음의 거울에 삼베 서 근만 비추는 것이다. 진리는 아주 쉽다. 생각을 하면 이런가르침은 어려울 것이다. 생각이 없으면 모든것이 이미 부처인 것이다.
운문 스님의 '마른 똥막대기 乾屎橛
옛날 우리농촌도 그랬지만 중국 절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분뇨를 퇴비로 만들어 밭에 뿌렸다. 스님들은 화장실에 큰 통을 갖다놓고 거기서 볼일을 보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긴 똥막대기로 저은 뒤 오물을 재에다 굴려 말리고, 똥막대기는 볕에 내놓았다.
어느 날 운문 스님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바지춤을 올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때 성급한 스님 한 사람이 화장실 문 앞에 다가와서 운문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운문 스님은 지체없이 이렇게 말했다.
"마른 똥 막대기니라."
운문 스님은 질문을 받았던 그 순간 단지 볕아래 긴 똥막대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운문 스님은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한 뒤 가던길을 계속 걸어갔던 것이다. 순간 스님의 마음은 단지 마른 똥막대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볕 아래 똥막대기가 그의 생각의 전부였던 것이다.
조주 스님의 '뜰앞의 잣나무 庭前柏樹子'
달마 대사는 禪의 초조[初祖]이다. 그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기 전 불교는 이미 중국에 융성해 있었다. 많은 절들이 세워졌고, 스님들도 많았으며,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불교는 몇몇 왕조에서 국교로까지 인정되었다. 달마 대사는 중국에 도착한 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도 참선 수행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부처님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드믈다는 것을 파악했다. 사람들은 그저 소원 성취를 위해 불교를 이용하고 있었다. 달마 대사는 중국 불교에 충격을 주어서 그들의 잠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마 대사가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중국 사람들에게 위대한 선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양무제도 개인적으로 달마대사를 초청해 법문을 듣고 싶어했다. 양무제가 그에게 은근한 자랑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한사람의 승려에게라도 옷을 주고 음식을 주면 극락왕생한다고 했읍니다. 그동안 저는 수없이 많은 승렫들에게 음식과 옷을 주었읍니다. 경전간행도 많이 했고 절도 많이 세웠지요. 자, 제가 얼마나 공덕을 받을 수 있겠읍니까?"
그러자 달마 대사는 일어지하에 "공덕이 하나도 없읍니다."라고 잘라말했다. 양무제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잘못 들었는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내쳐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주신 가장 신성한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스러운 것은 없읍니다. 오직 '공[空]'이 있을 따름입니다. (廓然無聖)"
양무제는 완전히 기가 꺾였다.
"어떻게 감히 당신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읍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달마 대사는 "모르겠읍니다"라고 말했다.
그 길로 달맏대사는 소림사 위 어둡고 축축한 토굴로 가서 면벽 수행을 시작했다. 무려 9년 동안 '오직 모를 뿐' 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단지 벽만보고 앉아있는 참선 수행을 한 것이다.
달마 대사는 진리를 가르치러 중국에 왔다. 어떻게 하면 바른 수행으로 우리의 본성을 찾을 수 있는지 가르치려 했다. 이것이 중국불교라는 선의 출발점이다. 아무리 훌륭한 설명이라도 깨달음의 경험은 나누어줄 수 없다. 배고플 때 음식 사진 1천여 장을 보여준다해서 배고픈 사람을 도와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에게는 무언가 먹을 것이 필요하다. 禪 수행이 나온 이유가 이 때문이다.
"입을 벌려라. 이것이 음식이다. 이것이 물이다."
禪은 비록 훌륭한 말로 가르치지 않지만 바로 우리의 마음에 직접 닿아있다. 그래서 본성을 직접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달마 대사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조주 선사가 살아 계실 때 禪 수행은 질문과 대답안에 감춰진 의미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승려들은 비밀스런 가르침과 이상한 설명만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조주가 절의 뜰을 거닐고 있었다. 한 스님이 다가와 물었다.
"달마대사가 왜 중국으로 왔읍니까?"
이것은 '불교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이나 같은 말이다. 이때 조주는 '뜰 앞에 있는 잣나무'라고 대답했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순간 조주 선사는 뜰 앞에 잣나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란 어떤 비밀스럽고 신비한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앞에 이미 '있는 그대론의 진리'라는 것을 조주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에 뜰 앞의 잣나무가 바로 진리였다.
달마의 가르침과 모든 위대한 선사들의 가르침도 바로 이와 같다. 제자가 "불교가 무엇입니까?"라며 진리에대한 배고품을 호소했을 때, 조주는 그에게 음식이 그려져있는 사진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직접 말한 것이다.
"입을 열어라,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다. 배고프면 먹어라."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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