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30, 2012
이상구 박사 초청 건강 세미나
이상구 박사초청 건강 세미나
초청의 말씀
유전자 의학의 발전으로 모든질병이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 세포들 속에 입력된 유전자의 변질로 발생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읍니다.
그렇다면 변질된 유전자를 희복시키면 암을 비롯한 모든 질병은 치유돨 수 있지 않겠읍니까?
이 놀라운 치유의 길을 아주 이해 하시기 쉽게 제시해드리겠읍니다.
"첨단 유전자의학과 질병의 치유"
21세기 유전자 의학의 진수! 모든 질병은 치유가 가능합니다.
유전자를 알면 건강이 보입니다.
일시 : 5월 7일(일)~~~12일(토) 저녁 7:30 (단, 토요일은 오전 11시) 매일 저녁 6시부터 건강식 제공
장소 : 나성중앙교회 1666 Michigan Ave. LA. CA 90033
전화 : 626--374---9480 , 626--497---8199
후속 프로그램 : 세미나 후 채식요리교실과 부부행복세미나 등 다양한 세미나가 준비됩니다.
OC 카운티 주민을 위한 2차 세미나
일시 : 5월 13일(일) 저녁 5시 30분 시작 암예방 3차 요리전시회 후 건강 강의
14일(월)~~~19일(토0 오전 10:30, 오후 7 :30분 미일 두 차례 강연 (숙식 프로그램)
장소 : 가든 문화 교실 11711 Trask Ave. Garden Grove. CA 92843
전화 : 714--403---6273 , 714--403---6274
후속 프로그램 : 세미나 후 건강요리교실 (월~~~수) 및 매일 환자 건강식 프로그램이 실시됩니다.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대열반경
大 涅槃經
대열반경 大涅槃經 All formations are impemanent 모든것은 무상하다.
시생멸법 是生蔑法 This is the law of appearing and disappearing. 모든것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생멸멸기 生滅滅己 When both appearing and diappearing disappear.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적멸위락 寂滅爲樂 Then this stillness is bliss.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의 여기에 대해 공부했다. 우주 만물이 어떤 조건하에서 서로 작용하여 늘 변한다는 것 말이다. 우주만물은 공에서 나와 짧든 길든 머물다가 결국 공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부처가 창조해낸 생각이 아니다. 전 우주만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우리가 이 법을 만들면 모든것은 이 법을 따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 우주를 만들지 않고 세계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법을 갖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공함을 경험한다면 본래 모든것이 이미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열반경*은 아무것도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우리는 실체에 대한 이름과 모양이 있고, 그것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적으로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체에 대해서, 또 이름과 모양의 나타남과 사라짐에 대해서 둘 다를 깨달아야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작했을 때 제일먼저 모든것이 나타나고 사라진다는 단순한 가르침부터 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가르침의 방편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기위해 그것을 사용했을 뿐이다. 제자들의 생각이 어느정도 성숙해 졌다고 판단한 부처님은 그로부터 방편, 즉 사탕을 빼앗았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런 다음 한 단계 더 나아가 나타남은 단지 나타남이고 사라짐도 단지 사라짐이라고 가르쳤다. 또 여기서 한 발
짝 더 나아가 이러한 깨달음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중생을 구하는 데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모든것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 세상 도처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냄새맡을 수도 있고 맛 볼 수도 있다.그렇다면 우주만물은 '어디서' 나타나서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가? 누가 나타남과 사라짐을 만드는가 참선수행을 열심히 한다면 우리는 모든것은 결국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마음이 모든것을 만든다. 마음이 있으면 나타남과 사라짐이 생긴다. 마음이 없으면 나타남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아무것도 가고 오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이마음을 만드는가? 바로 '나'이다. '나'가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지고 이 온 우주도 사라진다. '나'가 없을 때 마음이 허공처럼, 거울처럼 맑다. 흰공이 오면 흰공을 비추고 붉은 공이오면 붉은 공을 비춘다. 이 맑은 거울은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산, 강, 나무, 개, 고양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비출 뿐이다. 나타남은 나타남일 뿐이고 사라짐은 사라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은 얻는 긍정적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오직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다.
오래전 한국의 위대한 선사 중에 효봉선사란 분이 계셨다. 이분은 우리가 어떻게 이 깨달음을 행할지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법문을 하셨다. 그는 해인사 대웅전 연단에 앉아 주장자를 세번치시더니 법문을 듣기위해 모인 스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만물과 모든법은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본래 모든것은 완벽한 정적이다. 이 정적이 우주의 실체 그 자체이다. 여러분들이 실체를 얻으면 진리응 얻을 수 있다. 그런뒤 이것의 올바른 실천을 얻는것이 가능하다. 나타남과 사라짐 그자체가 진리이고 그것을 깨달은 뒤에라야 바른 실천이 가능하다. 여럽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다. 실체, 실상, 실천이 어디에서 오는가. 답하려고 입을 열면 이미 분별심을 만드는 것이다. 입을 닫고 있으면 공함에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입을 열면 이미 분별심을 만드는 것이다. 입을 닫지고 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이 실체, 진리, 실천을 얻을 것이가?"
수많은 승려 대중들이 모였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스님은 "암시를 하나 주겠다."면서 갑자기 크게 '할'하고 소리를 친 귀 아렇게 말했다. "각자 방으로 들어가서 차를 마셔라."
나타남과 사라짐이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나타남과 사라짐이 없어지는 상태는 극락이다. 모든것이 이미 완전하다. 어디에도 모자람이 없고, 진리 아닌것이 없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이미 완벽하다. 우리는 순간의 마음moment-mind 을 표현할 때 이 '완전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단지 순간순간의 마음 나타남이 나타남이고 순간순간의 마음 사라짐이 사라짐이다. 이 순간의 마음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순간은 매우 짧고, "탕!" 이 짧은 순간에 나타남은 단지 나타남이고 사라짐은 단지 사라짐이다.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이 순간의 마음을 간직하지 못하면 모든것이 다 망상이고 환이다. 그때 모든것은 완벽하지 않고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그런망상속에 살면 우리는 실제로, 이세상 모든것이 나타나고 사라진다.고 믿는다. 만믈이가고 오고 태아나고 죽는다고 믿는다. 여기서부터 苦가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아주 어려운 가르침이어서 뭔가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경험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에서 어떻게 사물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조차 없어진단말인가? 제자 한 사람이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열반경*은 매우 복잡한 것 같읍니다. 모든것은 언제나 변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모든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읍니다. 불교는 너무 어렵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극장에 간다. 선인과. 악인이 나오는 액션 영화를 본다. 수많은 격투장면이나오고 여기저기서 폭팔물이 터진다. 모든것은 아주 빨리 움직이고 있다. 우리일상의 삶도 이와같다 모든것이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가고온다. 우리인생이란 시리즈 영화와도 같은 것이다.
영화장면이 1초에 14컷 정도 된다고 한다. 매컷은 정지된 행동들이다. 각 컷ㅁ만 떼어놓고 보면 움직이는 것이 없다. 모든것ㅇ은 완벽한 정적(멈춤)이다. 오고 가는 것도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는 완벽한 멈춤이다. 영화 필름 한 컷을 집어 손에 놓고 빛을 갖다대면 완벽한 멈춤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 컷의 매 순간이 완벽히 움직이지 않는 행동이다.
우리의 마음과 우주도 이와같다. 실제로 모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움직인다. 쉼이없다. 1초동안에도 아주많은 움직임과 변화로 가득차 있다. 우리의 마음(바로지금)이란 셔터속도가 무한대인 시간에의해 나누어진 렌즈와 같다. 그것을 '순간의 마음moment-mind'이라 부른다. 우리가 그런경지를 얻으면 이 세계의 운동은 멈춘다. 순간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완벽하게 정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 필림처럼 우리는 매 컷을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정지돼 있는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정지된, 정지된, 정지된, 정지된, 필름처럼 바로 지금 이순간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깨달음이다. 매 컷에는 움직이는 것이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영사기, 즉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계속 움직여서 우리는 이 세계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념적인 생각을 현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마음을 지닐 수 없다.
그러나 열심히 참선수행을 해서 우리마음의 렌즈를 멈추고보면 실제 우리삶의 각 순간이 지정으로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순간의마음이라 부른다. 그것은 움직이지도 않고 언제나 완벽하다. 시간과 공간넘어서 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매 순간의 경험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이 점을 아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을 아는것은 매우중요하다. 그때라야만 이 *열반경*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머리로만 이해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옛날 6조 혜능대사 당시 한 스님이 어려서 출가하여 30년동안 매일같이 경전을 공부했다. 그리하여 8만 4천 경전 중 아무 줄이라도 뽑아 읽으면 그 경전이 어느 부분에서 나왔는지 즉각알고 암송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경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열반경*이엇다. 어느 날 그는 6조 혜능 대사를 찾아갔다.
"스승님, 저는 *금강경*도 일고 *반야심경*도 일고 *법화경*도 다 이해했읍니다. 그런데 이 *열반경*만큼은 이해가 안 됩니다. 질문이 있는데 좀 답을 해주시겠읍니까?"
"무엇이 궁금하냐?"
열반경에 이르기를 '모든것은 무상하다'고 했읍니다. 이 대목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다음 대목 입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이 경지가 바로 완벽한 정적, 즉 더없는 가쁨의 경지다' 하는 대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읍니다. 그러면 누가 열반에 이를 수 있읍니까? 완벽한 정적에서는 아무것도 없읍니다.
'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모두는 두 종류의 몸이 있읍니다. 육신의 몸인 色身과 법의 몸인 法身입니다. 육체의 몸은 地水火風 네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언제나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병들어 늙고 죽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시 태아나고 다시 태아나고 다시 태어납니다. 이 때문에 항상 고통의존재이고 정적에 도달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법신은 형태도없고 감정도 없고 인식도 없고 충동도, 의식도, 생기도 없읍니다. 감정이나 의식이 없기 때문에 바위나 마무와도 같습니다.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 이 말 입니다. 그러나 *열반경*에서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이 정적의 상태가 더없는 기쁨의 경지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주십시요."
혜능대서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그래 , 그럼 누가 색신과 법신을 나누었냐?"
"ㅂ부처님께서 설명하셨읍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지금 질문하는 너는 색신이냐 법신이냐?"
"둘 다 입니다."
"둘 다? 누가 둘 다라고 말했느냐?"
"제가 했읍니다."
"오, 내가 했다. 이 '나'라는 것은 색신이냐 법신이냐?"
그순간 제자는 입이 딱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었다. 혜능대사가 이어 말했다.
"놓아라. 너의 개념적인 생각은 버려라. 너의 색신은 결코 한 번도 '나는 이런이런 모양을 갖고 있다'라고 얘기한적이 없다. 법신도 마찬가지이다. 네 스스로 모양과 실체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생각이 나오고 지적인 욕심이 나오고 고통이 나오는 것이다. 너의 생각을 내려놓아라 거기에는 모양도, 실체도 없다. 알아듣겠느냐?"
제자는 깊이 절을 올렸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다.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아주 명확하다, 그것은 말이나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탕!" 그것을 얻으면 '사라지는것도 없고 나타나는것도 없다.' "탕!" 아주 간단하며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결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대열반경 大涅槃經 All formations are impemanent 모든것은 무상하다.
시생멸법 是生蔑法 This is the law of appearing and disappearing. 모든것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생멸멸기 生滅滅己 When both appearing and diappearing disappear.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적멸위락 寂滅爲樂 Then this stillness is bliss.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의 여기에 대해 공부했다. 우주 만물이 어떤 조건하에서 서로 작용하여 늘 변한다는 것 말이다. 우주만물은 공에서 나와 짧든 길든 머물다가 결국 공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부처가 창조해낸 생각이 아니다. 전 우주만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우리가 이 법을 만들면 모든것은 이 법을 따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 우주를 만들지 않고 세계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법을 갖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공함을 경험한다면 본래 모든것이 이미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열반경*은 아무것도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우리는 실체에 대한 이름과 모양이 있고, 그것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적으로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체에 대해서, 또 이름과 모양의 나타남과 사라짐에 대해서 둘 다를 깨달아야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작했을 때 제일먼저 모든것이 나타나고 사라진다는 단순한 가르침부터 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가르침의 방편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기위해 그것을 사용했을 뿐이다. 제자들의 생각이 어느정도 성숙해 졌다고 판단한 부처님은 그로부터 방편, 즉 사탕을 빼앗았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런 다음 한 단계 더 나아가 나타남은 단지 나타남이고 사라짐도 단지 사라짐이라고 가르쳤다. 또 여기서 한 발
짝 더 나아가 이러한 깨달음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중생을 구하는 데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모든것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 세상 도처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냄새맡을 수도 있고 맛 볼 수도 있다.그렇다면 우주만물은 '어디서' 나타나서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가? 누가 나타남과 사라짐을 만드는가 참선수행을 열심히 한다면 우리는 모든것은 결국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마음이 모든것을 만든다. 마음이 있으면 나타남과 사라짐이 생긴다. 마음이 없으면 나타남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아무것도 가고 오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이마음을 만드는가? 바로 '나'이다. '나'가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지고 이 온 우주도 사라진다. '나'가 없을 때 마음이 허공처럼, 거울처럼 맑다. 흰공이 오면 흰공을 비추고 붉은 공이오면 붉은 공을 비춘다. 이 맑은 거울은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산, 강, 나무, 개, 고양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비출 뿐이다. 나타남은 나타남일 뿐이고 사라짐은 사라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은 얻는 긍정적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오직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다.
오래전 한국의 위대한 선사 중에 효봉선사란 분이 계셨다. 이분은 우리가 어떻게 이 깨달음을 행할지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법문을 하셨다. 그는 해인사 대웅전 연단에 앉아 주장자를 세번치시더니 법문을 듣기위해 모인 스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만물과 모든법은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본래 모든것은 완벽한 정적이다. 이 정적이 우주의 실체 그 자체이다. 여러분들이 실체를 얻으면 진리응 얻을 수 있다. 그런뒤 이것의 올바른 실천을 얻는것이 가능하다. 나타남과 사라짐 그자체가 진리이고 그것을 깨달은 뒤에라야 바른 실천이 가능하다. 여럽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다. 실체, 실상, 실천이 어디에서 오는가. 답하려고 입을 열면 이미 분별심을 만드는 것이다. 입을 닫고 있으면 공함에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입을 열면 이미 분별심을 만드는 것이다. 입을 닫지고 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이 실체, 진리, 실천을 얻을 것이가?"
수많은 승려 대중들이 모였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스님은 "암시를 하나 주겠다."면서 갑자기 크게 '할'하고 소리를 친 귀 아렇게 말했다. "각자 방으로 들어가서 차를 마셔라."
나타남과 사라짐이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나타남과 사라짐이 없어지는 상태는 극락이다. 모든것이 이미 완전하다. 어디에도 모자람이 없고, 진리 아닌것이 없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이미 완벽하다. 우리는 순간의 마음moment-mind 을 표현할 때 이 '완전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단지 순간순간의 마음 나타남이 나타남이고 순간순간의 마음 사라짐이 사라짐이다. 이 순간의 마음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순간은 매우 짧고, "탕!" 이 짧은 순간에 나타남은 단지 나타남이고 사라짐은 단지 사라짐이다.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이 순간의 마음을 간직하지 못하면 모든것이 다 망상이고 환이다. 그때 모든것은 완벽하지 않고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그런망상속에 살면 우리는 실제로, 이세상 모든것이 나타나고 사라진다.고 믿는다. 만믈이가고 오고 태아나고 죽는다고 믿는다. 여기서부터 苦가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아주 어려운 가르침이어서 뭔가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경험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에서 어떻게 사물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조차 없어진단말인가? 제자 한 사람이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열반경*은 매우 복잡한 것 같읍니다. 모든것은 언제나 변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모든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읍니다. 불교는 너무 어렵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극장에 간다. 선인과. 악인이 나오는 액션 영화를 본다. 수많은 격투장면이나오고 여기저기서 폭팔물이 터진다. 모든것은 아주 빨리 움직이고 있다. 우리일상의 삶도 이와같다 모든것이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가고온다. 우리인생이란 시리즈 영화와도 같은 것이다.
영화장면이 1초에 14컷 정도 된다고 한다. 매컷은 정지된 행동들이다. 각 컷ㅁ만 떼어놓고 보면 움직이는 것이 없다. 모든것ㅇ은 완벽한 정적(멈춤)이다. 오고 가는 것도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는 완벽한 멈춤이다. 영화 필름 한 컷을 집어 손에 놓고 빛을 갖다대면 완벽한 멈춤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 컷의 매 순간이 완벽히 움직이지 않는 행동이다.
우리의 마음과 우주도 이와같다. 실제로 모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움직인다. 쉼이없다. 1초동안에도 아주많은 움직임과 변화로 가득차 있다. 우리의 마음(바로지금)이란 셔터속도가 무한대인 시간에의해 나누어진 렌즈와 같다. 그것을 '순간의 마음moment-mind'이라 부른다. 우리가 그런경지를 얻으면 이 세계의 운동은 멈춘다. 순간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완벽하게 정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 필림처럼 우리는 매 컷을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정지돼 있는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정지된, 정지된, 정지된, 정지된, 필름처럼 바로 지금 이순간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깨달음이다. 매 컷에는 움직이는 것이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영사기, 즉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계속 움직여서 우리는 이 세계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념적인 생각을 현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마음을 지닐 수 없다.
그러나 열심히 참선수행을 해서 우리마음의 렌즈를 멈추고보면 실제 우리삶의 각 순간이 지정으로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순간의마음이라 부른다. 그것은 움직이지도 않고 언제나 완벽하다. 시간과 공간넘어서 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매 순간의 경험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이 점을 아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을 아는것은 매우중요하다. 그때라야만 이 *열반경*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머리로만 이해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옛날 6조 혜능대사 당시 한 스님이 어려서 출가하여 30년동안 매일같이 경전을 공부했다. 그리하여 8만 4천 경전 중 아무 줄이라도 뽑아 읽으면 그 경전이 어느 부분에서 나왔는지 즉각알고 암송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경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열반경*이엇다. 어느 날 그는 6조 혜능 대사를 찾아갔다.
"스승님, 저는 *금강경*도 일고 *반야심경*도 일고 *법화경*도 다 이해했읍니다. 그런데 이 *열반경*만큼은 이해가 안 됩니다. 질문이 있는데 좀 답을 해주시겠읍니까?"
"무엇이 궁금하냐?"
열반경에 이르기를 '모든것은 무상하다'고 했읍니다. 이 대목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다음 대목 입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이 경지가 바로 완벽한 정적, 즉 더없는 가쁨의 경지다' 하는 대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읍니다. 그러면 누가 열반에 이를 수 있읍니까? 완벽한 정적에서는 아무것도 없읍니다.
'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모두는 두 종류의 몸이 있읍니다. 육신의 몸인 色身과 법의 몸인 法身입니다. 육체의 몸은 地水火風 네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언제나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병들어 늙고 죽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시 태아나고 다시 태아나고 다시 태어납니다. 이 때문에 항상 고통의존재이고 정적에 도달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법신은 형태도없고 감정도 없고 인식도 없고 충동도, 의식도, 생기도 없읍니다. 감정이나 의식이 없기 때문에 바위나 마무와도 같습니다.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 이 말 입니다. 그러나 *열반경*에서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이 정적의 상태가 더없는 기쁨의 경지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주십시요."
혜능대서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그래 , 그럼 누가 색신과 법신을 나누었냐?"
"ㅂ부처님께서 설명하셨읍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지금 질문하는 너는 색신이냐 법신이냐?"
"둘 다 입니다."
"둘 다? 누가 둘 다라고 말했느냐?"
"제가 했읍니다."
"오, 내가 했다. 이 '나'라는 것은 색신이냐 법신이냐?"
그순간 제자는 입이 딱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었다. 혜능대사가 이어 말했다.
"놓아라. 너의 개념적인 생각은 버려라. 너의 색신은 결코 한 번도 '나는 이런이런 모양을 갖고 있다'라고 얘기한적이 없다. 법신도 마찬가지이다. 네 스스로 모양과 실체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생각이 나오고 지적인 욕심이 나오고 고통이 나오는 것이다. 너의 생각을 내려놓아라 거기에는 모양도, 실체도 없다. 알아듣겠느냐?"
제자는 깊이 절을 올렸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다.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아주 명확하다, 그것은 말이나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탕!" 그것을 얻으면 '사라지는것도 없고 나타나는것도 없다.' "탕!" 아주 간단하며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결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Saturday, April 28, 2012
숭산대선사의 가르침 반야심경
반야심경 . 般若心經 The Maha Prajna Paramita Heart Sutra
照見 五溫皆空 度一切 苦厄
Perrceiving that all five skandhas are empty saves all begins from suffering.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중생을 괴로움과 번뇌에서 구한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Form does not differ from emptiness, emptiness does not differ from form.
모양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모양과 다르지 않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No appearing, no disappearing, no taint, no purity, no increase, no decrease.
나타나는것도, 사라지는것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나는것도, 줄어드는것도 없다.
諸法空相 無智無得 涅槃
All Dharmas are marked with emptiness No cognition, no attainment, Nivana
正等正覺
Unexcelled perfect enlightenment---anuttara samyak sambodhi.
정등정각, 아뇩다라삼약삼보리
Gate,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반야심경*, 정확히 말해 (마하바라밀다심경)은 260자 밖에 되지않는 짧은 경전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반야심경*안에는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의 핵심이 다 들어있다.
8만 4천 경전의 모든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전 세계 모든 절에서 읊어진다. 서울 화계사와 계룡산 무상사의 국제선원 에서도 매일 아침 한국말로 한번, 영어로 한 번, 저녁에는 한국 말 한번, 영어로 한번해서 두번씩,
그리고 결제기간 동안에는 더 많이 암송된다. 때때로 마음이 맑지않거나 참선수행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반야심경을 읽어라. 그러면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마하(Maha)라는 말은 위대하다는 뜻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 Prejna Paramita)'이라는 말은 지혜의 완성을 뜻하며, '심셩 Heart Sutra'은 마음에 길 이라는 뜻 이다. 따라서 이것을 '지혜로 가는 위대한 길'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에서 진정으로 무한한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땅이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고. 어떤이에게는 바다가 가장 큰것으로 보일지도 무른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가장 클까? 어쩌면 우주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고 무한대의 세계를 담고 있으니까. 한 위대한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우주는 나의 몸을 덮고 있지만 나의 마음은 온 우주를 덮을 수 있다." ㅇ우주는 내가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사실상 아주 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주라고하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의 마음으로 전 우주를
덮고 있는 것이데, 이로써 우리의 마음은 우주의 무한대적 시공간보다 훨씬 큰 것이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반야심경*은 이 가장 큰 것, 큰 마음을 지적한다. 이 작은 경전의 제목에 '가장 크다'는 의미인 마하를 붙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중생을 과로움과 번뇌에서 구한다. 照見五溫皆空 度一切苦厄
이 세상 도처에 고통이 있다. 그러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어떤 물질적인 것을 얻기위한 욕심을 쫓는다. 자신들이 느끼는 것들이 삶을 완성시켜줄 것이라 믿고 있으며,다른 사람들에의해 인정받고 싶다는 야망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투쟁하는지와 상관없이, 설사 열심히 노력해서 그것들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영원히 지켜낼 수는 없다. 이것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고통 역시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은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진짜와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겪다 죽게되면 고통는 사라진다. 고통은 단지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ㅇ을 깨달으면 어떠한
고통이나 재앙도 존재하지 않게되다. 생각을 하면 어디에서도도 참마음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모든 집착을 끊으면 우리의 참 자아는 어디든 나타난다.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몇가지 중요한 점들을 배웠다. 부처님은 먼저 우리가 '마음' 혹은 '나'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형태, 감각, 인식, 의지, 의식이라는 다섯가지가 뭉쳐만들어진 무더기(五溫, skandhas)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 무더기는 끊임없이 변하는 정신적 에너지의 집전물(五溫)일 뿐이다. 인간은 형태, 감각, 인식, 의지, 의식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변할 때 불가피하게 고통에 빠진다. 이것들이 실제이고 '나'라고 믿기 때문에 결코 고통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것이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이 에너지의 집적물들 역시 공허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통은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오는가? 무엇이 고통을 만드는가?
이 앞에 지금 컵이있다. 여기에 주스를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컵이 깨지먄 주스를 어디에 담을 것인가?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어디서무터 고통이 오는가? 우리가 오온이라는 정신적 에너지 무더기에 집착한다면 고통은 머물 곳(컵)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반야심경*으ㅢ 말대로 이 에너지의 무더기가 공허하다면 고통은 그것이 머물 컵을 잃는다.
따라서 '공'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중여하다. 열심히 수행하여 *반야심경* 오온의 핵심을 통찰하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를 모든 고통과 욕심으로부터 구해준다. 그러나 거둡 말하지만,
단지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모양이 공이고, 공이 모양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은 '모양 色이 공이고 공이 모양 色이다'라고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참선 수행을 오래했던 사람들 조차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이상 생활에서 이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다.
예를 들어 여기에 갈색나무의자가 있다고 치자. 딱딱하고 무겁지만 앉을 수도 있고 물건을 놓을 수도 있다. 의자에 불을 붙여보자. 잠시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와 보면 의자는 이미 불에 타고 없어져버린 뒤다.
딱딱하고 강한 것으로 보였던 그것이 찌꺼기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의자라는 물체는 이처럼 공하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제나 변한다. 다시말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긴 시간이 걸리든 짧은 시간이 걸리든 의자는 결국 변한다.
그러므로 이 갈색의자는 완벽히 공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앉으면 우리 몸무게를 지탱한다.
우리들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이것이 모든 고총의 원인이다. 이 집착이라는 병을 치료하고 싶으면 '이름과 모양이 실체가 아니며 무상하다.'는 약을 먹어야 한다. 그것들은 엊제나 변하고 변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부나 명예,
다른사람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조차 공허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우리들은 몸을 소중히여긴다. 또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곧 죽고 몸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생전에 얼마나 몸을 소중히 다뤘느냐에 관계없이 죽을 때는
이 공한 몸을 가져갈 수 없으며 돈도, 명예도 섹스도 그 어떤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이런것들에 집착해 있다. 그들은 이름과 이공허한 것들을 위해, 단지 그것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그들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입힌다. 그들은 오로지 돈과 명성, 좋은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높은 지위를 얻기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이 공헐하고 무상한 것들을 얻기위해 때로는 온갖 모욕과 고통도 감수한다. 특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섹스에 집착한다. 소용없는 일이다. 모든 형태는 공하기 때문에 뭔가가지거나 지킬 수 잇다.
고 하는 생각 자체가 환상이다.
가장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나는 애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이다.바로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이 아의 삶을 만든다. 그것이 지금과 다음 생을 결정한다. 모든것이 본래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우리은 이 무상한 것들을 놓아버리고 고통없이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젹한 자유이다.
이와 관련해 아주 뉴명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아테네에 디오게네스라는 위대한 철학자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최고의 철학자였음에도 집없이 방황하는 한 마리 개와 같은 생활을 했다. 늘 밖에서 노숙을 했으며 옷은 늘 헐벗었다.
그날그날 먹을 거리도 걱정하지않고 지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옷도 입지않은 채 지내는 등 그의 생활은 그야말로 자연주의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역시 거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깁자기 서늘하다는 생각에 눈을 떴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그의 눈앞에는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알렉산더대왕이 서 있는것이 아닌가.
알렉산더는 돵대한 군사력과 지적인 우수함으로 세계를 정복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있는 영웅이었다. 그날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로부터 몇가지 가르침을 얻고자 그를 방문한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화려한 군복을 입고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과시하며 디오게네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누운채로 먼저 입을 열었다.
"오, 알렉산더 대왕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요, 디오게네스. 당신을 돕고싶어 이렇게 찾아왔소. 나는 이미 세계를 정복했소. 셀 수 없는 왕궁과 부가 내게있소. 당신이 원한다면 다 드리리다. 땅이든, 돈이든, 지위이든 말만하면 모두 당신것이요. 소원을 말하시요."
"고맙습니다. 원하는 것이 하나 있긴 하지요." "말씀만 하십시요. 다 드리겠읍니다." "좀 비켜서 주시겠읍니까?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 좀 춥군요."
"오, 미안 합니다. 알렉산더가 사과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소원 입니다. 하하하하.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모양과 공함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알렉산더 대왕은 단지 햇빛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세상 모든것을 다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디오게네스는 단지
"햇빛을 가리지 마시요"라고 말했을 뿐이다. 오직 그것 뿐이다. 디오게네스는 이미 온 진리를 다 얻었다. 그는 실제가 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과 모양 역시 공해서 부나 명예, 사람, 가족, 높은 지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모든것은 공하다. 왜 이 공한 것들을 갈망하는가. 그것들은 진정으로 우리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지금 나는 단지 햇빛을 원할 뿐이다.' 이것이 다다. 디오게네스는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라는 것을 완벽히 깨달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자유였다. 더 이상 붙잡을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완전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이것을 깨달으면 수행이 필요없다. 법문 또한 필요없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면 수행이 필요하다. '모양이 공하고 공한 것이 모양이다'라는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참선 수행은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나는것도 줄어드는것도 없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가령 여기 3밀리리터의 물이 담긴 병인 있다고 하자 이병에 100도의 열을 가하면 물은 모두 수증기로 변한다.
0도 이하로 얼리면 얼음이 된다. 물은 이처럼 모양과 온도에 따라 변하지만 물 그자체인 H2O는 변하지 않는다. 부증불감 不增不減 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물리학을 통해 이같은 에너지 불멸의 법칙을 고안해 냈고,
후쿠는 화학을 통해 질량불변이라는 진리를 창출해냈다. 이처럼 불교는 현대 물리학이나 화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은 더럽고 깨끗한것도 없다. 깨ㅔ끗한 물을 마셔도 조금있다가 더러운 오줌으로 나온다. 물은 또 개울에 있다해서 적고 바다에들어간다고 해서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지혜롭고 어리석은 것이 따로있지 않다.
*반야심경*은 우리의 본성을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반야심경*에는 '아니다' 不라는 말이 여러번 나온다. 진정한 공함을 깨달으면 말이나 단어가 없다. 입을 여는 순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말이나 단어는 우리본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과 단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말과 단어라는 약이 필요하다.
*반야심경*은 이 두가지를 모두 인식하고 있다. 즉 우리의 본성이 아닌것을 설명함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드러낸다. 딱히 무엇인지 얘기할 수 없지만 그것이 아닌것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우리 본성은 이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고......' 아주 재미있는 방법이다. *반야심경*은 오직 '아니다'라고만 말한다. 아마 이것이 말과 단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나타나거나 사라지지않는다. 더럽거나 깨끗하지도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우리의 본성은 완벽하게 정지해 있으며 그리고 공하다. 그것은 모든것을 구성하는 우주적 실체이다. 그러니 어떻게 나타나거나 사라짐이 있겠는가.
어떻게 더러움과 순수함이 있겠는가 이모든 것은 결국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반야심경*은 생각이전의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법은 공하다. 깨달음도 깨달을 바도 없다. 그것이 열반의 세계다. 諸法空相 無智無得
*반야심경*은 '모든법은 공하다'라고 한다. 따라서 법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조차 큰 실수다. '진정한 공' 의 경지에서는 말도, 단어도, 법도 없다. '보든 법이 공하다'고 입을 여는 순간 이미 '공'을 떠난 것이다. 더 이상 '공'이 아닌 것이다.
말과 단어를 단순히 지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말이 지적하고 있는것을 실제로 얻어야 한다. 모든것이 공한 경지에는 인식도, 깨달음도 없다. 공이야말로 절대이다. 그러나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탕!"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반야심경*에 나온 이말은 그저 그럴듯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도 머리로, 개념적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진리를 찾는데 도움이 안 된다. 뭔가를 얻어야한다. 아니,
사실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한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이미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공'이라는 소승적 경험에서 한 다계 더 나아간다. 진정한 공함을 얻는다면 거기에는 말도, 단어도 없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절대, 즉 열반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에서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해 얘기했다. 모든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 고통을 멈추게하고 삶과 죽음을 멈추게 한다. 이것이 열반이며, 거기에ㅔ는 분별이없다. 가고 오는것도, 높고 낮음도, 좋고 나쁜것도 없으며, 죽고 태아남도 없다.
존재하지조차 않는것을 어떻게 멈추게 할수 있는가 이미 고통이 없는데 어떻게 고통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가. 바로 그 때문에*반야심경* 에서는 '고통도' 고통의 원인도, 고통의소멸도, 길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이처럼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정등정각 正等正覺,
야뇩다라삼약삼보리 '아뇩다라삼약삼보리 anuttara samyak sambodhi' 눈 산수크라수트로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깨달음' 다시말해 '일체만상을 두루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바로 진리를 일컫는 다른이름인 것이다. 열반의 경지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진정한 공함을 얻는다면 그것이 열반일 뿐이다.완벽한 정적과 축복의 경험이다. 주체도 대상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으며, 오고 감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다. 어을 것 또한 없다. 그러나 우리의 수행은 이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열반의 실천에 대해 알아야한다. 이름하여 그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정한 깨달음이다. 집착이 없으면 진리를 얻는다. 우리마음은 공허해서 우주와 같이 맑다. 즉, 거울처럼 맑다는 것이다.
거울 앞에 산을 비추면 오직 산이 있을 뿐이다. 물을 비추면 오직 물이, 붉은것을 비추면 붉은것이 있고, 흰것을 비추면 흰것이 있다.
열반는 공함을 얻는 것이고 긍극적으로는 얻는것도 업ㄱ다는 것이다. 아뇩다라삼약삼보리는 진리를 얻기위해 공의 경험을 실천하는것을 의미한다. 공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라 그것이 대승불교이고 대자대비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smagate, bodhi svha!
한단계 더 나가보자. '공'을 얻으면 그다음 진리를 얻는다. 그러나 단순히 진리를 발견하는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아뇩다라삼약삼보리' 이는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곧 진리를 얻었다는 말이다.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푸르다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정말미에 우리는 아주 뛰어난 진언 眞言, 위대하고 밝은 진언,
최상의 진언인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마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를 읊는다 그것은 '간다 간다 간다. 고해를 넘어 고통이없는 곳으로간다' 고 번역된다.
*방야심경*말미에 나오는 이 진언은 '실천'을 의미한다. 이 진언전까자 모든것은 공함과 진리를 얻는것에 대한것이다. 이 진언은 우리가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어떤 종류의 행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대보살의 행동이다.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깨달음을 실천해야한다ㅏ. 그것은 우리가 바로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순간순간 고통을 바라보면서 오직 중생을 돕는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반야심경*은 정말 흥미롭다. 그것은 이분법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절대의 세계로 나가고, 완벽한 세계 혹은 우리가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세계로 이끈다. 이분법적 세계는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다'라는 세계이다. 절대의 세계는 空, 즉 열반이다.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다'. 이어서 완벽한 세계는 '아뇩다라삼약삼보리'. 즉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나 진리 그자체를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를 경험한 우리는 순간순간 다른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사ㅛㅇ해야 한다. *반야심경*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아제아제 파라아제 파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것은 위대한 사랑과 대자대비심이 잇는 순간의 세계를 계속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대보살의 길이다.
우리가 모든 중생과함께 실천을 할 때 대자대비 大慈大悲의 위대한 사랑은 저절로 나타난다.
실천이라고 해서 어려운것이 아닌다. 순산순간 조화롭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이 이미 세계평화이다. 누군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주고, 배가 고프다고하면 빵을 주면된다.
단지'......할 뿐'이다 우리 앞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이있으면 아무생각없이 단지 도우면 된다. 단지 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야심경* 앞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지시없이 단지 깨달음과 깨닫지 않음에 대한 설명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가면 우리가 뭔가 깨달았다면 뭔가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자.
이것이 아제아제 파라아제 아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의 의미이다.
한단계, 한 단계 순간순간 즉각적으로 우리는 대자대비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깨달은 진리를 사용해서 어떻게 살아애 할지를 얻어야 한다. 순간순간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오직 할 뿐이다.
照見 五溫皆空 度一切 苦厄
Perrceiving that all five skandhas are empty saves all begins from suffering.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중생을 괴로움과 번뇌에서 구한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Form does not differ from emptiness, emptiness does not differ from form.
모양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모양과 다르지 않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No appearing, no disappearing, no taint, no purity, no increase, no decrease.
나타나는것도, 사라지는것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나는것도, 줄어드는것도 없다.
諸法空相 無智無得 涅槃
All Dharmas are marked with emptiness No cognition, no attainment, Nivana
正等正覺
Unexcelled perfect enlightenment---anuttara samyak sambodhi.
정등정각, 아뇩다라삼약삼보리
Gate,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반야심경*, 정확히 말해 (마하바라밀다심경)은 260자 밖에 되지않는 짧은 경전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반야심경*안에는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의 핵심이 다 들어있다.
8만 4천 경전의 모든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전 세계 모든 절에서 읊어진다. 서울 화계사와 계룡산 무상사의 국제선원 에서도 매일 아침 한국말로 한번, 영어로 한 번, 저녁에는 한국 말 한번, 영어로 한번해서 두번씩,
그리고 결제기간 동안에는 더 많이 암송된다. 때때로 마음이 맑지않거나 참선수행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반야심경을 읽어라. 그러면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마하(Maha)라는 말은 위대하다는 뜻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 Prejna Paramita)'이라는 말은 지혜의 완성을 뜻하며, '심셩 Heart Sutra'은 마음에 길 이라는 뜻 이다. 따라서 이것을 '지혜로 가는 위대한 길'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에서 진정으로 무한한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땅이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고. 어떤이에게는 바다가 가장 큰것으로 보일지도 무른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가장 클까? 어쩌면 우주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고 무한대의 세계를 담고 있으니까. 한 위대한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우주는 나의 몸을 덮고 있지만 나의 마음은 온 우주를 덮을 수 있다." ㅇ우주는 내가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사실상 아주 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주라고하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의 마음으로 전 우주를
덮고 있는 것이데, 이로써 우리의 마음은 우주의 무한대적 시공간보다 훨씬 큰 것이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반야심경*은 이 가장 큰 것, 큰 마음을 지적한다. 이 작은 경전의 제목에 '가장 크다'는 의미인 마하를 붙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중생을 과로움과 번뇌에서 구한다. 照見五溫皆空 度一切苦厄
이 세상 도처에 고통이 있다. 그러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어떤 물질적인 것을 얻기위한 욕심을 쫓는다. 자신들이 느끼는 것들이 삶을 완성시켜줄 것이라 믿고 있으며,다른 사람들에의해 인정받고 싶다는 야망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투쟁하는지와 상관없이, 설사 열심히 노력해서 그것들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영원히 지켜낼 수는 없다. 이것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고통 역시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은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진짜와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겪다 죽게되면 고통는 사라진다. 고통은 단지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ㅇ을 깨달으면 어떠한
고통이나 재앙도 존재하지 않게되다. 생각을 하면 어디에서도도 참마음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모든 집착을 끊으면 우리의 참 자아는 어디든 나타난다.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몇가지 중요한 점들을 배웠다. 부처님은 먼저 우리가 '마음' 혹은 '나'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형태, 감각, 인식, 의지, 의식이라는 다섯가지가 뭉쳐만들어진 무더기(五溫, skandhas)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 무더기는 끊임없이 변하는 정신적 에너지의 집전물(五溫)일 뿐이다. 인간은 형태, 감각, 인식, 의지, 의식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변할 때 불가피하게 고통에 빠진다. 이것들이 실제이고 '나'라고 믿기 때문에 결코 고통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것이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이 에너지의 집적물들 역시 공허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통은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오는가? 무엇이 고통을 만드는가?
이 앞에 지금 컵이있다. 여기에 주스를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컵이 깨지먄 주스를 어디에 담을 것인가?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어디서무터 고통이 오는가? 우리가 오온이라는 정신적 에너지 무더기에 집착한다면 고통은 머물 곳(컵)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반야심경*으ㅢ 말대로 이 에너지의 무더기가 공허하다면 고통은 그것이 머물 컵을 잃는다.
따라서 '공'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중여하다. 열심히 수행하여 *반야심경* 오온의 핵심을 통찰하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를 모든 고통과 욕심으로부터 구해준다. 그러나 거둡 말하지만,
단지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모양이 공이고, 공이 모양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은 '모양 色이 공이고 공이 모양 色이다'라고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참선 수행을 오래했던 사람들 조차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이상 생활에서 이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다.
예를 들어 여기에 갈색나무의자가 있다고 치자. 딱딱하고 무겁지만 앉을 수도 있고 물건을 놓을 수도 있다. 의자에 불을 붙여보자. 잠시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와 보면 의자는 이미 불에 타고 없어져버린 뒤다.
딱딱하고 강한 것으로 보였던 그것이 찌꺼기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의자라는 물체는 이처럼 공하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제나 변한다. 다시말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긴 시간이 걸리든 짧은 시간이 걸리든 의자는 결국 변한다.
그러므로 이 갈색의자는 완벽히 공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앉으면 우리 몸무게를 지탱한다.
우리들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이것이 모든 고총의 원인이다. 이 집착이라는 병을 치료하고 싶으면 '이름과 모양이 실체가 아니며 무상하다.'는 약을 먹어야 한다. 그것들은 엊제나 변하고 변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부나 명예,
다른사람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조차 공허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우리들은 몸을 소중히여긴다. 또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곧 죽고 몸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생전에 얼마나 몸을 소중히 다뤘느냐에 관계없이 죽을 때는
이 공한 몸을 가져갈 수 없으며 돈도, 명예도 섹스도 그 어떤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이런것들에 집착해 있다. 그들은 이름과 이공허한 것들을 위해, 단지 그것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그들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입힌다. 그들은 오로지 돈과 명성, 좋은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높은 지위를 얻기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이 공헐하고 무상한 것들을 얻기위해 때로는 온갖 모욕과 고통도 감수한다. 특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섹스에 집착한다. 소용없는 일이다. 모든 형태는 공하기 때문에 뭔가가지거나 지킬 수 잇다.
고 하는 생각 자체가 환상이다.
가장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나는 애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이다.바로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이 아의 삶을 만든다. 그것이 지금과 다음 생을 결정한다. 모든것이 본래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우리은 이 무상한 것들을 놓아버리고 고통없이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젹한 자유이다.
이와 관련해 아주 뉴명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아테네에 디오게네스라는 위대한 철학자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최고의 철학자였음에도 집없이 방황하는 한 마리 개와 같은 생활을 했다. 늘 밖에서 노숙을 했으며 옷은 늘 헐벗었다.
그날그날 먹을 거리도 걱정하지않고 지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옷도 입지않은 채 지내는 등 그의 생활은 그야말로 자연주의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역시 거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깁자기 서늘하다는 생각에 눈을 떴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그의 눈앞에는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알렉산더대왕이 서 있는것이 아닌가.
알렉산더는 돵대한 군사력과 지적인 우수함으로 세계를 정복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있는 영웅이었다. 그날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로부터 몇가지 가르침을 얻고자 그를 방문한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화려한 군복을 입고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과시하며 디오게네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누운채로 먼저 입을 열었다.
"오, 알렉산더 대왕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요, 디오게네스. 당신을 돕고싶어 이렇게 찾아왔소. 나는 이미 세계를 정복했소. 셀 수 없는 왕궁과 부가 내게있소. 당신이 원한다면 다 드리리다. 땅이든, 돈이든, 지위이든 말만하면 모두 당신것이요. 소원을 말하시요."
"고맙습니다. 원하는 것이 하나 있긴 하지요." "말씀만 하십시요. 다 드리겠읍니다." "좀 비켜서 주시겠읍니까?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 좀 춥군요."
"오, 미안 합니다. 알렉산더가 사과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소원 입니다. 하하하하.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모양과 공함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알렉산더 대왕은 단지 햇빛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세상 모든것을 다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디오게네스는 단지
"햇빛을 가리지 마시요"라고 말했을 뿐이다. 오직 그것 뿐이다. 디오게네스는 이미 온 진리를 다 얻었다. 그는 실제가 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과 모양 역시 공해서 부나 명예, 사람, 가족, 높은 지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모든것은 공하다. 왜 이 공한 것들을 갈망하는가. 그것들은 진정으로 우리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지금 나는 단지 햇빛을 원할 뿐이다.' 이것이 다다. 디오게네스는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라는 것을 완벽히 깨달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자유였다. 더 이상 붙잡을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완전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이것을 깨달으면 수행이 필요없다. 법문 또한 필요없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면 수행이 필요하다. '모양이 공하고 공한 것이 모양이다'라는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참선 수행은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나는것도 줄어드는것도 없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가령 여기 3밀리리터의 물이 담긴 병인 있다고 하자 이병에 100도의 열을 가하면 물은 모두 수증기로 변한다.
0도 이하로 얼리면 얼음이 된다. 물은 이처럼 모양과 온도에 따라 변하지만 물 그자체인 H2O는 변하지 않는다. 부증불감 不增不減 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물리학을 통해 이같은 에너지 불멸의 법칙을 고안해 냈고,
후쿠는 화학을 통해 질량불변이라는 진리를 창출해냈다. 이처럼 불교는 현대 물리학이나 화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은 더럽고 깨끗한것도 없다. 깨ㅔ끗한 물을 마셔도 조금있다가 더러운 오줌으로 나온다. 물은 또 개울에 있다해서 적고 바다에들어간다고 해서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지혜롭고 어리석은 것이 따로있지 않다.
*반야심경*은 우리의 본성을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반야심경*에는 '아니다' 不라는 말이 여러번 나온다. 진정한 공함을 깨달으면 말이나 단어가 없다. 입을 여는 순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말이나 단어는 우리본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과 단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말과 단어라는 약이 필요하다.
*반야심경*은 이 두가지를 모두 인식하고 있다. 즉 우리의 본성이 아닌것을 설명함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드러낸다. 딱히 무엇인지 얘기할 수 없지만 그것이 아닌것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우리 본성은 이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고......' 아주 재미있는 방법이다. *반야심경*은 오직 '아니다'라고만 말한다. 아마 이것이 말과 단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나타나거나 사라지지않는다. 더럽거나 깨끗하지도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우리의 본성은 완벽하게 정지해 있으며 그리고 공하다. 그것은 모든것을 구성하는 우주적 실체이다. 그러니 어떻게 나타나거나 사라짐이 있겠는가.
어떻게 더러움과 순수함이 있겠는가 이모든 것은 결국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반야심경*은 생각이전의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법은 공하다. 깨달음도 깨달을 바도 없다. 그것이 열반의 세계다. 諸法空相 無智無得
*반야심경*은 '모든법은 공하다'라고 한다. 따라서 법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조차 큰 실수다. '진정한 공' 의 경지에서는 말도, 단어도, 법도 없다. '보든 법이 공하다'고 입을 여는 순간 이미 '공'을 떠난 것이다. 더 이상 '공'이 아닌 것이다.
말과 단어를 단순히 지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말이 지적하고 있는것을 실제로 얻어야 한다. 모든것이 공한 경지에는 인식도, 깨달음도 없다. 공이야말로 절대이다. 그러나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탕!"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반야심경*에 나온 이말은 그저 그럴듯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도 머리로, 개념적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진리를 찾는데 도움이 안 된다. 뭔가를 얻어야한다. 아니,
사실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한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이미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공'이라는 소승적 경험에서 한 다계 더 나아간다. 진정한 공함을 얻는다면 거기에는 말도, 단어도 없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절대, 즉 열반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에서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해 얘기했다. 모든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 고통을 멈추게하고 삶과 죽음을 멈추게 한다. 이것이 열반이며, 거기에ㅔ는 분별이없다. 가고 오는것도, 높고 낮음도, 좋고 나쁜것도 없으며, 죽고 태아남도 없다.
존재하지조차 않는것을 어떻게 멈추게 할수 있는가 이미 고통이 없는데 어떻게 고통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가. 바로 그 때문에*반야심경* 에서는 '고통도' 고통의 원인도, 고통의소멸도, 길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이처럼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정등정각 正等正覺,
야뇩다라삼약삼보리 '아뇩다라삼약삼보리 anuttara samyak sambodhi' 눈 산수크라수트로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깨달음' 다시말해 '일체만상을 두루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바로 진리를 일컫는 다른이름인 것이다. 열반의 경지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진정한 공함을 얻는다면 그것이 열반일 뿐이다.완벽한 정적과 축복의 경험이다. 주체도 대상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으며, 오고 감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다. 어을 것 또한 없다. 그러나 우리의 수행은 이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열반의 실천에 대해 알아야한다. 이름하여 그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정한 깨달음이다. 집착이 없으면 진리를 얻는다. 우리마음은 공허해서 우주와 같이 맑다. 즉, 거울처럼 맑다는 것이다.
거울 앞에 산을 비추면 오직 산이 있을 뿐이다. 물을 비추면 오직 물이, 붉은것을 비추면 붉은것이 있고, 흰것을 비추면 흰것이 있다.
열반는 공함을 얻는 것이고 긍극적으로는 얻는것도 업ㄱ다는 것이다. 아뇩다라삼약삼보리는 진리를 얻기위해 공의 경험을 실천하는것을 의미한다. 공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라 그것이 대승불교이고 대자대비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smagate, bodhi svha!
한단계 더 나가보자. '공'을 얻으면 그다음 진리를 얻는다. 그러나 단순히 진리를 발견하는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아뇩다라삼약삼보리' 이는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곧 진리를 얻었다는 말이다.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푸르다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정말미에 우리는 아주 뛰어난 진언 眞言, 위대하고 밝은 진언,
최상의 진언인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마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를 읊는다 그것은 '간다 간다 간다. 고해를 넘어 고통이없는 곳으로간다' 고 번역된다.
*방야심경*말미에 나오는 이 진언은 '실천'을 의미한다. 이 진언전까자 모든것은 공함과 진리를 얻는것에 대한것이다. 이 진언은 우리가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어떤 종류의 행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대보살의 행동이다.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깨달음을 실천해야한다ㅏ. 그것은 우리가 바로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순간순간 고통을 바라보면서 오직 중생을 돕는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반야심경*은 정말 흥미롭다. 그것은 이분법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절대의 세계로 나가고, 완벽한 세계 혹은 우리가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세계로 이끈다. 이분법적 세계는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다'라는 세계이다. 절대의 세계는 空, 즉 열반이다.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다'. 이어서 완벽한 세계는 '아뇩다라삼약삼보리'. 즉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나 진리 그자체를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를 경험한 우리는 순간순간 다른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사ㅛㅇ해야 한다. *반야심경*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아제아제 파라아제 파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것은 위대한 사랑과 대자대비심이 잇는 순간의 세계를 계속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대보살의 길이다.
우리가 모든 중생과함께 실천을 할 때 대자대비 大慈大悲의 위대한 사랑은 저절로 나타난다.
실천이라고 해서 어려운것이 아닌다. 순산순간 조화롭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이 이미 세계평화이다. 누군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주고, 배가 고프다고하면 빵을 주면된다.
단지'......할 뿐'이다 우리 앞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이있으면 아무생각없이 단지 도우면 된다. 단지 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야심경* 앞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지시없이 단지 깨달음과 깨닫지 않음에 대한 설명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가면 우리가 뭔가 깨달았다면 뭔가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자.
이것이 아제아제 파라아제 아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의 의미이다.
한단계, 한 단계 순간순간 즉각적으로 우리는 대자대비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깨달은 진리를 사용해서 어떻게 살아애 할지를 얻어야 한다. 순간순간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오직 할 뿐이다.
Wednesday, April 25, 2012
숭산 큰 스님 가르침 금강경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Sunday, April 22, 2012
선의 나침판 대승불교

THE COMPASS of ZEN
대승 불교 大乘佛敎 MAHAYANA BUDDHISM
법체유공관 法體有空觀
INSIGHT INTO the existence and nonexistence of DHARMAS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
무상개공관 無相皆空觀
Insight into the fact that there are no external tangible charateristics and that all is emptiness
(이름과 모양이 공하다는 통찰)
유공중도관 有空中道觀
Insight into existence, emptiness, and the MIddle Way
(존재와 공함, 중도에 대한 통찰)
제법실상관 諸法實相觀
Insight into the true aspect of all phenomena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사사무애관 事事無碍觀
Insight into the mutual interpenetration of all phenomena
(모든현상의 상호침투)
직사이진관 卽事而眞觀
Insight which sees that phenomena themselves are the Absolute (실제 그 자체가 절대라고 보는 통찰)
대승불교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 세상 중생들에게 행한 첫 번째 가르침이 소승불교라고 믿었다. 알다시피 부처님은 6년 고행끝에 보리수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시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과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그래서 심지어 부처님은 처음엔 아예 가르치지 않으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에는 브라만교, 요가 등 많은 가르침들이 있었고, 스승들도 많았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당시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던 신 혹은 구루(영적 지도자)에 의존하지않고 얻은 자신의 깊은 통찰을 누가 과연 믿고 따라줄 수 있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이다. 그때 한 브라마 신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두루 찾아보시면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도 있읍니다. 그들은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들 먼저 가르치는 것이 어떠실지요."
그리하여 부처님은 보리수를 내려와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학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님은 먼저 대승불교인 *화엄경*사상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어려웠다. 그의 통찰은 너무깊고 심오하여 당시 풍미했던 가르침들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위대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부처님은 우선 무지와 욕망,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 뒤 어떻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쳤다.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무상관과 이 세계는 더러움으로 가득차 있다는 부정관, 그리고 종국에는 나와 너가 없다는 무아관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은 이 같은 기본 깨달음을 얻는 길을 가르친 뒤 열반을 얻는 것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착한일을 많이하고 나쁜행동을 하지않으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계율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맑고 순수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고통을 벗어 던져서 완벽한 축복의 세계로 가는 열반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으로서 이름하여 소승불교라 한다. 사람들이 대승불교인 *화엄경*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은 소승불교 사상을 먼저 가르친 것이다. 소승불교는 먼저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고통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완벽한 공 또는 열반으로 가는 것이다. 제자들이 이 같은 가르침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대승불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승불교는 '고통'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 즉 '空'에서 시작한다. 즉, 이 세계가 완벽히 공하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삶이 단지 고해'라는 것은 완벽한 깨달음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바깥 실체가 순수하든 순수하지않든, 좋든 나쁘든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모든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체라고 믿는 바깥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변해서 본래 모든것이 공하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을 얻는다면 고통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왜냐하면 고통 역시 본래 없는 것이니까.
대승불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달음을 향한 모든 수행이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낼 것인가?" 대승불교의 수행은 마지막 한 생명이라도 고통에서 구해내지 않으면 자기 혼자서 무한한 축복의 세계인 극락으로 가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말한다. 이런 마음이 바로 大慈大悲이다. 내 삶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모든 중생을 위해서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자전거에 비유할 수 있다면 대승불교는 버스나 기차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소승불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대승불교는 나쁜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도 함께 가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은 처음에 이런 가르침을 주었지만 수준이 너무 높아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성숙해질 때까지 소승불교 사상을 펴신 것이다. 자, 그렇다면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대승불교는 크게 여섯가지 통찰로 나뉜다.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먼저 모든 실체가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했다. 나의 실체와 우주의 실체는 똑같기 때문에 자성(自性, SELF-NATURE)이 따로 없다. 모든 법의 실체는 空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각자자신의 몸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이 깨달음을 얻기가 쉽지않다. 중국에서는 수행의 일종으로 '자기 몸을 시체로 보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나는 송장이다. 송장이다. 송장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방식으로 수행하면 몸이 우리 마음에 불어넣는 모든 욕심과 집착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이 몸이란 실제로 '나'가 아니다. 몸은 완벽하게 空한 것이다. 변하고 변해서 결국 사라진다.
나는 송장이다. 나는 송장이다. 나는 송장이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몸이 空하고 결국 모든것이 공하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이몸조차 언젠가 시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시체라고 생각하면 그다음 모든 것은 아무문제가 안 된다. 죽은 시체에는 욕심이 없기 때문에 모든것을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실체가 이와같다. 우주의 모든것은 똑같이 하나의 실체이며, 실체는 긍극적으로 空하다. 이것이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로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이름과 모양이 空하다는 통찰
이 깨달음은 실재하는 모든 이름과 모양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갖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空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과 모양을 만들어놓은 뒤 이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름과 모양이 바뀔 때마다 고통을 겪는다. 태양, 별, 산, 강, 나무......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일시적인 이름과 모양일 뿐이다. 앞에서 모든 법의 실체가 '공空'이라고 했다. 따라서 모든 법의 이름과 모양 역시 '공空'하다.
중도 中道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미 중도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중도란 좋고 나쁜 것이 없는 것이다. 높고 낮음도, 가고 옴도,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중도는 단지 '空'을 통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空은 이 우주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절대'로 향하는 길이다. 절대는 완벽하다. 좋고 나쁨, 높고 낮음, 오고 감, 삶과 죽음은 우리의 생각이 만든 것들이다. 머릿속에 있는 개념이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만든다. 이것이 근본적인 망상이다.
생각은 '나'를 만든다. 또한 '나' 아닌 것'을 만든다. 우리가 이처럼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불완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고통이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고통을 다른 중생들에게도 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본래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것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가고 오는 것도 없다. 모든것은 이미 완벽하다.
중도란 空이라는 깨달음으로가는 또 다른길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 空은 완벽한 길이다. 만물이 공하며 공은 절대 그 자체이다.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모든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 공함은 절대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공함은 전 우주의 기본적 진리이다. 여기에는 옳다, 그르다 하는 분별이 없다. 분별심이란 오로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상대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이원성이 사라지면 '절대'가 우리 앞에 명확히 나타난다. 그것은 '완벽한 실체의 세계' 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모든것은 空하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절대이다. 따라서 모든것은 완벽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진리眞理, 실상實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 모든것이 진리 아닌것이 없다. 해, 달, 별, 산, 강, 나무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모든 존재가 가지고있는 이름과 모양 또한 진리이다. 과연 진리 아닌것이 무엇인가? 소승불교는 모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변하기 때문에 진리는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만약 우리가 완벽하게 이 전 우주의 공함을 깨닫는다면 여기서 한 단계더 나아가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현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옆에 벽을 가르키며) 여기 이 벽 색갈은 하얗다. 그것이 진리이다. 저 창밖에 나무는 푸르다. 그것도 진리이다.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 역시 진리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인다. 이것도 진리이다. (시계를 보며) 지금은 저녁 7시 15분이다. 이 모든것들이 진리이다. 이 일상의 모든것들의 진리인데도 이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그들은 좋고 싫음을 스스로 만들고 좋고 나쁨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대승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인 대자대비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실상에 대해 바로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핵심만 다시 짚어보자. 소승불교의 핵심은 모든것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맞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고통이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대승불교로 한단계 넘어오면 사실 모든것이 본질은 공하다. 고통조차도 본래없으며, 모든것은 절대이고 완벽하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누군가 바로 당신 앞에서 괴로움을 겪고있다. 그것 역시 진리이다. 그렇다면 진리 아닌것이 있는가? 이건 박사급 수준이다. 실체와 이름과 모양은 완벽하게 공하다.
그것이 절대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이런 깨달음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생을 돕기 위해서이다.
모든 현상의 상호침투
만물은 이미 진리이여서 경계없이 상호공존한다. 예를들어 내 앞에 우주가 있다고 치자. 구름은 끊임없이 오고가고 가끔 비도 내린다. 빛도 오고간다. 바람도 앞뒤로 불고, 폭풍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 모든 것들이 우주공간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함에도 우주는 그것들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다. 또 그 여러가지것들은 서로방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주는 완벽하게 공하기 때문이다.
마음도 이와같다. 열심히 참선수행을 함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연후엔 감정이 오고가든, 생각이 오고가든, 좋은 상황이 오고 가든, 나쁜상황이 나타났다 사라지든 전혀 방해받지 않는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생기게되고, 내가처한 모든상황을 오직 다른중생을 위해 쓸 수 있다. 행복한 때이든, 고통을 겪을 때이든 오직 다른 중생을 위해 쓸 수 있다. 우리 앞에 닥친 모든상황,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을 오직 다른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데 쓸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본래가지고 있는 심성, 즉 대자대비大慈大悲이다.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무언가 집착해 있다는 얘기이다. 마음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으면 어떤감정, 어떤생각, 어떤문제도 우리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생긱하는 모든것이 진리이다. 우리의 행복도 진리이며 슬픔도 진리이다. 나쁜상황도 진리이며 좋은상황 역시 진리이다. 모든것은 똑같이 공하며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진리 아닌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있다면 나에게 보여달라.
실체 그 자체가 절대라고 보는 통찰
우리는 이미 진리의 세계에 살고 있다. 만물은 공하므로 모든것이 이미 완벽한 길이다. 이것을 지적知的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수행을 통한 어떤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실제로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절대이고 경계가 없으며, 나의 모든행동이 순간순간 중생을 향한 큰사랑과 자비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사실, 본래 '나'라는 것은 없으므로 다른 중생을 위한다는 말조차 틀린 말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 길에는 생각도 없고 고통도 없다. 아무것도 방해하는것도 없다. 이렇게 되면 순간순간의 할일이 명확해 진다. 순간순간의 모든행동은 진리이며 완벽하게 다른중생의 고통과 닿아있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를 도와줄 수 있을까?"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 완벽한 길이며 진리의 길이다.
이런 자비어린 행동은 어떤 관념이나 특별한 행동이 아니다. 본질 그 자체이며, 이것이 보살의 길이다. '나 I' 라는 것은 본래없기 때문에 중생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나의고통이며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나는 단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심'. 위대한 사랑과 자비를 가진마음, 즉 절대의 길이다.
지금까지 얘기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정리해보자.
먼저 우리는 모든것이 똑같이 우주의 실체이며 기본적으로 空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다음 이 우주만물의 수많은 이름과 모양이 공하므로 '나'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중도이며 진리의 길, 바른 길이다.
여기서 부터는 어떤법칙, 어떤이름, 어떤 모양이든지 모두 진리여서 우리를 방해하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무애無碍의 마음을 얻으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며 부처의 행동이다. 순간순간의 행동이 모든 존재와 사물과 함께 나누는 우주적 본질에 닿아있다. 더 이상 '너'와 분리된 '나'는 없디. 이미 우리의 행동은 大慈大悲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대승불교의 주요 가르침 중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과 모든것이 그대로 진리라는것이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모든것이 空한데 그게 眞理란 말입니까?"
아주좋은 질문이다. 답은 쉽다. 집에가서 거울을 한번봐라. 거울속엔 아무것도 없다. 완벽하게 공하다. 거울앞에 붉은 공을 갖다대면 붉은공이 나타나고, 하얀공을 갖다대면 하얀공이 나타난다. 산을 갖다대면 산이나타난다. 있는 그대로 모든것을 비출 뿐이다. 붉은공을 치우면 더 이상 붉은 공이 없다. 오로지 그것을 비출때만 상像이 나타난다. 맑은 거울은 언제마 완벽히 공해서 어떤 것이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것도 아무런 장애없이 비춘다. 모든것은 이 空한 우주라는 거울앞에 서있는 그대로 왔다 갔다 하며 비춘다. 아무것도 덧붙이지도, 빼지고 않는다. 모든것을 비추는 거울이나, 거울에 비친 傷 역시 '空'하므로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인간의 마음은 이렇지 못하다 마음의 거울에 붉은 것을 갖다대면 우리역시 붉은것을 비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붉은 것을 치운뒤 하얀것을 갖다대면 우리마음의 거울은 여전히 '붉은것'을 '생각'하고 있다. '붉은 것보다는 하얀것이 낫지 않을까?' 혹은 '다음에 다시 붉은것이 나타날까?' 혹은 '지금앞에있는 하얀것은 좋지않아, 붉은것이 더 좋아, 아니야, 하얀것이 더 좋아...... 아, 잘모르겠다' 하고 '생각'한다.하얀것이 앞에있지만 우리마음은 언제나 그것을 '제대로' 혹은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다른 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언제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아주강한 욕심이나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다른사람을 위해 자비롭게 행동하는 대신 이 세상의 좋고 나쁨에 집착한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모든것이 空해서 결국 모든것이 같다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 사는 삶은 모두 중생을 위해서 사는 삶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비심은 저절로 나온다.
대보살의 삶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만물이 '空'해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삶은 모두 중생을 위한 삶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자비심은 절로 나온다. '나'가 있으면 욕심이 나오고 모든것과 내가 분리된다. 그러나 '나'가 사라지면 분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참선 수행을 통해 이런 진리을 깨달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자비로운 대보살의 행동은 저절로 나타난다. *반야심경에 나오듯 '얻을바도 없으며, 얻을것도 없다.' 순간순간 중생을 돕는 일만 있을 뿐이다.
Saturday, April 21, 2012
탄허스님 가라사대 시사만평
탄허스님 가라사대
네년은 탄허呑虛스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한 철승哲僧이자학승 學僧으로 이름 높았던 스님을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한국불교학회와 오대산 월정사가 주최하는 학술대회가 다음주 서울에서 열린다. 스님의 어록을 보아 엮은 책도 새로나왔다.
入寂하기 3년 전에 나온 법문집 *부처님이 계신다면* (1980)과 유고집 *피안으로 이끄는 사자후*(1997)를 하나로 묶은 *탄허록*이 최근 출간됐다. 공맹孔孟과ㄴ장 老壯은 물론이고 역학易學까지 경지에 이르렀던 스님의 예지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6.25 전쟁을 1년 전 예견하고 월정사 승려들을 통도사로 미리피신시킨 것이나, 울진 .삼척에 무장공비가 몰려듥기 직전 *화엄경*의 번역원고를 월정사에서 영은사로 옮겨 분서焚書를 막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동양사상과 주역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예측한 그의 말에 귀를 쫑긋세우게 되는 이유다. 스님은 5000년 동안 고난과 역경속에 살아온 우리민족의 불행한 역사가 머지않아 종결될 것으로 내다봤다.
오래지 않아 위대한 지도자가 나와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 양극화, 세대갈등, 가치관의 충돌같은 국내무제를 해결하고 국위를 선양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새로운 문화는 다른나라의 귀감이 되어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라고 말했다.
40여 년 전 스님이 예언한 '머지않은 미래'가 언제인지 나는 모른다. 스님도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음양오행의 심오한 이치를 알 길이 없는 천학비재賤學菲才로서는 암울한 시대를 사는 중생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려는 심모원려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스님의 낙관적 예언에 기대고 싶은 것은 나약한 凡夫의 한계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다. 지난 500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서구 중심주의가 쇠퇴하고,구미 歐美에서 아시아로의 '세력 전이power shift'가 일어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국과 한국이 포함된 동아시아가 새로운 세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화 속에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의 모순은 SNS로 상징되는 정보화의 거센 물경를 타고 지구적 차원의 권력 재편을 추동하고 있다.
북아프리카發 '재스민 혁명'과 뉴욕발 '점령하라Occupy' 시위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물경을 서울대의 전상인(사회학) 교수는 '권력의 재구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회 양극화라고 하는 메가 트랜트를 배경으로 정보기술 IT혁명을 통해 영리해진 개인들이 네트웤크 방식의 단결을 통해 제도권 정치권력을 초체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계간 *철학과 현실*,2012년 봄호).
올해 대선은 이런시대적 벼와속에서 치러진다. 그 중심에 서게 될 지도자가 누가 될지 지금으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대세론의 바람을 타고 박근혜가 될지, 아니면 안철수나 문재인 대망론이 현실이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누가 되더라도 그 또는 그녀가 탄허스님이 예언한 '위대한 지도자'가 되려면 이명박 MB대통령과는 확연히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읽지못한 구시대의 마지막 지도자로 MB를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한다. 전상인 교수의 지적대로 MB는 세계화 . 양극화 . 정보화 . 감성화의 물결 속에서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권력의 재구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로인해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마찰을 빚으며 민심에서 멀어졌다.
내가 감족하는 것은 사실 탄허스님의 예언이 아니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지도자론이다. 무엇보다 스님이 강조한 것은 신뢰다. 지도자가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법과 영이 바로서고, 나라의 기강이 잡힌다는 것이다. 국민의 말을 귀담아듣고, 허물을 지적하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추구하고, 탐심貪心을 경계하며 먹을 것이 적은 것보다 고루 나눠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10%의 선질善質을 기용해 10%의악질 惡質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해야 국민의 80%가 평안한 삶을 누릴수 있다는 말도 한다.
대중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인화를 이룰줄 아는 지도자, 철학과 도의를 아는 지도자, 나이 든사람보다 젊은 사람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ㅓㄴ 지도자라면 누가 된들 무슨 상관인가. 보수면 어떻고 짐보면 어떤가. 기다려도 '고도 Godot'는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온다는 믿음으로 나는 그런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네년은 탄허呑虛스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한 철승哲僧이자학승 學僧으로 이름 높았던 스님을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한국불교학회와 오대산 월정사가 주최하는 학술대회가 다음주 서울에서 열린다. 스님의 어록을 보아 엮은 책도 새로나왔다.
入寂하기 3년 전에 나온 법문집 *부처님이 계신다면* (1980)과 유고집 *피안으로 이끄는 사자후*(1997)를 하나로 묶은 *탄허록*이 최근 출간됐다. 공맹孔孟과ㄴ장 老壯은 물론이고 역학易學까지 경지에 이르렀던 스님의 예지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6.25 전쟁을 1년 전 예견하고 월정사 승려들을 통도사로 미리피신시킨 것이나, 울진 .삼척에 무장공비가 몰려듥기 직전 *화엄경*의 번역원고를 월정사에서 영은사로 옮겨 분서焚書를 막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동양사상과 주역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예측한 그의 말에 귀를 쫑긋세우게 되는 이유다. 스님은 5000년 동안 고난과 역경속에 살아온 우리민족의 불행한 역사가 머지않아 종결될 것으로 내다봤다.
오래지 않아 위대한 지도자가 나와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 양극화, 세대갈등, 가치관의 충돌같은 국내무제를 해결하고 국위를 선양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새로운 문화는 다른나라의 귀감이 되어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라고 말했다.
40여 년 전 스님이 예언한 '머지않은 미래'가 언제인지 나는 모른다. 스님도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음양오행의 심오한 이치를 알 길이 없는 천학비재賤學菲才로서는 암울한 시대를 사는 중생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려는 심모원려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스님의 낙관적 예언에 기대고 싶은 것은 나약한 凡夫의 한계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다. 지난 500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서구 중심주의가 쇠퇴하고,구미 歐美에서 아시아로의 '세력 전이power shift'가 일어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국과 한국이 포함된 동아시아가 새로운 세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화 속에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의 모순은 SNS로 상징되는 정보화의 거센 물경를 타고 지구적 차원의 권력 재편을 추동하고 있다.
북아프리카發 '재스민 혁명'과 뉴욕발 '점령하라Occupy' 시위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물경을 서울대의 전상인(사회학) 교수는 '권력의 재구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회 양극화라고 하는 메가 트랜트를 배경으로 정보기술 IT혁명을 통해 영리해진 개인들이 네트웤크 방식의 단결을 통해 제도권 정치권력을 초체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계간 *철학과 현실*,2012년 봄호).
올해 대선은 이런시대적 벼와속에서 치러진다. 그 중심에 서게 될 지도자가 누가 될지 지금으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대세론의 바람을 타고 박근혜가 될지, 아니면 안철수나 문재인 대망론이 현실이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누가 되더라도 그 또는 그녀가 탄허스님이 예언한 '위대한 지도자'가 되려면 이명박 MB대통령과는 확연히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읽지못한 구시대의 마지막 지도자로 MB를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한다. 전상인 교수의 지적대로 MB는 세계화 . 양극화 . 정보화 . 감성화의 물결 속에서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권력의 재구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로인해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마찰을 빚으며 민심에서 멀어졌다.
내가 감족하는 것은 사실 탄허스님의 예언이 아니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지도자론이다. 무엇보다 스님이 강조한 것은 신뢰다. 지도자가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법과 영이 바로서고, 나라의 기강이 잡힌다는 것이다. 국민의 말을 귀담아듣고, 허물을 지적하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추구하고, 탐심貪心을 경계하며 먹을 것이 적은 것보다 고루 나눠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10%의 선질善質을 기용해 10%의악질 惡質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해야 국민의 80%가 평안한 삶을 누릴수 있다는 말도 한다.
대중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인화를 이룰줄 아는 지도자, 철학과 도의를 아는 지도자, 나이 든사람보다 젊은 사람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ㅓㄴ 지도자라면 누가 된들 무슨 상관인가. 보수면 어떻고 짐보면 어떤가. 기다려도 '고도 Godot'는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온다는 믿음으로 나는 그런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Tuesday, April 17, 2012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삼법인
삼법인 . 三法印 The Three Seals of Extenence
제행무상인 . 諸行無常印 All Compounded things are impermanent.
제법무아인 . 諸法無我印 All Dharmas are without self-nature.
열반적정인 . 涅槃寂靜印 Nirvana is perfect stillness
동양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모든 공문서에 붉은 도장을 찍어왔다. 이름이 새겨진 도장에 인주를 묻혀서 서류에 찍는 것이다. 이렇게해야 문서가 진짜라는 것이 공표된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수행하면 우리의 의식에는 세 개의 기본 도장이 찍히는데, 이것을 三法印이라고 한다. 세 개의 도장이되는 법문의 가르침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첫 번째 도장에 대해서는 이미 배웠다. 바로 '만물은 항상 변한다 諸行無常'는 것이다. 우주 만물의 모든것은 변한다. 모든것은 조건으로 부터 나와서 일정기간 머물다가 꿈으로 사라진다. 이것을 깨달으면 모든 일에 쉽게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하여 고통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변하지 않는것, 오고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본성이다.
그것은 어떤것이 아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사물과 마음의 모든것이 조건에서 나오고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경험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도장처럼 박힐 것이다.
이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본래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법, 원칙, 아이디어, 믿음, 인간, 개, 고양이, 나무, 산 등 우주의 모든것은 '自性' 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이름과 모양은 끊임없이 변하고 변한다. 모든것은 공에서 나오고 결국 공으로 돌아간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므로 자아인 실체가 없다. 諸法無我' 이런 깨달음이 우리의식에 찍는 두 번째 도장이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므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오고 가는 것도, 부처님도, 하느님도, 본질도, 존재도, 마음도 없다.그것들이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당신은 알고 있는가? 불교는 모든 법, 모든 계율이 완전한 정적의 상태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반은 단지 완벽한 정적의 상태를 일컫는 이름이다. 모든것은 완벽한 정적과 소멸에서 나와 결국 공과 소멸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것을 알게되면 마지막 도장을 받는다.
'열반적정 涅槃寂靜' . 생사를 윤희하는 고통을 벗어난 피안이다. 성경에서는 '침잠하라. 그러면 신이라는 것을 알리라' 고가르친다. 불교에서는 '모든 법 Dharma은 완벽한 정적에서 나온다. 고 가르쳤다. 신을 찾고싶으면, 또 부처를 찾고 싶으면, '참 나' 혹은 '절대'를 찾고 싶으면 당신은 이 완벽한 정직과 소멸의 상태를 얻어야 한다. 이 정적이란 진정한 공이다. 우리 마음과 우주의 본질이다.
14세기에 지어진 한 기독교 시는 이것을 아주 맑게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은 깨끗하고 텅 빈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모든 모양이 나타난다.
그것이 본성품이 되어
밝음과 어둠, 고요함과 폭풍이 된다.
The God who is pure emptiness 空
Is created as form 色
Becoming substance, light and darkness,
The stillness and the storm.
본래 이 경지에는 아름도 없고 모양色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리다는 분별심을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공空의 상태에는 반대되는 것이 없다. 오고 가눈 것이 없다. 그것이 '참' 나'.
소슴불교는 이 삶도 죽음도 없는 완벽한 정적과 소멸의 상태인 열반을 얻기위해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승불교 가르침의 목적이다.
삼학 . 三學 Three Kind of Practice
계율 . 戒 Sila-Precepts
삼매 . 定 Samadhi-Meditation
지혜 . 慧 Prajna- Wisdom
소승불교의 세 가지 도장을 받고 싶으면 세가지 종류의 수행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수행을 섞어서 제대로 조화롭게 쓰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계 戒
소승불교 수행은 계율 戒律을 간조한다. 계울이라고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도로 표지판 아라고 생각하면 된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차를 몰고 간다고 치자, 길을 가다 보면 어디서 고속도로가 시작하는지, 어디서 돌아 나가야 하느지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많이 서 있다. 만약 이 표지판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가면 대전가는 길을 놓쳐버리고 만다. 대전가는 것은 고사하고 아니면 부산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우리 마음속엔 '아, 나는 참 나를 찾고 싶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사람을 도우며 살고싶다.'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 일상에 매이다보면 이런생각은 쉽게 사라진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수 자신이 아니라 뒷자석에 앉아 있는 손님이 되는 격이다. 손님이 '이리가라, 저리가라'하고 지시하는 상황처럼 말이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기자신을 다잡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계율은 바른 삶으로 가기위한 명확한 방향을 의미한다. 계율은 법을 의미하고 법은 우주의 바른길을 말한다. 바른 길을 갖는다는 것은 맑은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전도의 정어, 정업, 정명, 수생은 이 계율 수행을 대표한다. 계율을 지키면 자신의 조건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우리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지식도 지배할 수 있다. 반대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으면 지식도 통제할 수 없고 고통이 나타나게 된다.
지식을 지배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우리 욕심이란 것은 결국 지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모든생각은 욕심이며, 욕심은 우리를 고통으로 이끈다. 우리감정은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지식은 항상 분별하게하고 어떤견해에 집착하게 한다. 지식이 많을수록 복잡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며, 지식이 만들어내는 '좋은것' . '나쁜 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 마음은 항상 움직이게되고, 끊임없이 내가 가진 강한 감정들, 다른사람과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좋고 싫은 감정들에 의해 여기저기 사방팔방으로 끌려다니게 된다. 이렇듯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좋고 싫은 감정들에 대해 강한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 중심을 지키는 것이 대단히 힘들어진다.
바로 이 때문에 계율이 팔요하다. 계율이란 나의 욕심과 마음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다. 계울 수행을 하면 단전은 자연스럽게 강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며 다른 사람을 돕는것도 가능해진다.
정 定
바른 참선수행이란 언제 어다서나 항상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느낄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참선 수행에 대한 어떤 관념이나 생각에 집착하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참선아란 그저 앉아 있으면서 하는 어떤 강한 몰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경우, 참선의 목적이 몰입을 가져오는 좋은 감정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참선이 항상 완벽한 정적과 축복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오, 지금 모든것이 평화로워, 너무 좋아.' 이런종류의 생각은 아주 나쁜 병이다. 그것은 좋은 상황에대한 일종의 집착이므로 진정한 참선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수행에 집착하면 지혜는 성장할 수가 없으며, 우리의 지식은 각종 다양한 상황에서 다른사름을 돕는데 제대로 기능할 수가 없다.
팔정도의 정정진, 정정 수행이 참선수행을 대표하는 실천 지침이다. 깊은 수행을 경험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운전할 때나 먹을 때나 얘기할 때나 일할 때나 가족과 같이 있을 때나 언제나 평정한 마음 상태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평상심이라 부른다.
내 외국인 제자 중 한 사람은 항상 깊고 조용한 상태에서의 참선만을 원했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시끄럽게 놀면 "조용히 해라, 내가 명상중이라는 것을 모르느냐"면서 화를 내고 참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집에서도 가족들은 그가 참선중이면 살얼음판을 걷듯 매우 조용히 해야했다. 얼마 뒤 가족들은 참선과 불교를 나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참선은 진정한 참선이 아니다. 참선을 특별하게 만들 뿐이다.매일 매일 일상을 살아가면서 평상심을 갖는것, 그것이 진정한 참선이다. 그것이 수행의 진정한 본질이다.
혜 慧
하늘은 스스로 "하늘이 푸르다"고 한 적이 없다. 우리가 "하늘이 푸르다"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 "하늘이 푸르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사람들은 "하늘이 푸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식이다. 다른사람, 즉 누군가의 생각이다.
한국사람들은 "하늘이 푸르다"고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The sky is blue"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소라이 아오이데스" 라고 한다. 폴란드 사람은 폴란드 말로, 러시아 사람은 러시아 말로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은 누군가의 생각이다. 하늘이 결코 이런식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우주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말이나 생각의 영역이 아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으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만 이 세상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진리이다. 그때서야 나무를 볼 때 오직 푸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설탕을 맛 볼 땐 오직 달콤하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모든 것은 이미 진리이다. 우주는 이미 매 순간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오직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면 이러한 진리가 바로 나의 것이다. 산스크리트로는 '반야 般若'라고 한다.
소승불교의 목표는 열반을 얻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공하다는 것을 얻으면 그 자체가 이 세상 우주, 우리모든 마음의 본질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올바른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진리를 사용하여 이 고통스런 세계를 구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가르침이다.
제행무상인 . 諸行無常印 All Compounded things are impermanent.
제법무아인 . 諸法無我印 All Dharmas are without self-nature.
열반적정인 . 涅槃寂靜印 Nirvana is perfect stillness
동양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모든 공문서에 붉은 도장을 찍어왔다. 이름이 새겨진 도장에 인주를 묻혀서 서류에 찍는 것이다. 이렇게해야 문서가 진짜라는 것이 공표된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수행하면 우리의 의식에는 세 개의 기본 도장이 찍히는데, 이것을 三法印이라고 한다. 세 개의 도장이되는 법문의 가르침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첫 번째 도장에 대해서는 이미 배웠다. 바로 '만물은 항상 변한다 諸行無常'는 것이다. 우주 만물의 모든것은 변한다. 모든것은 조건으로 부터 나와서 일정기간 머물다가 꿈으로 사라진다. 이것을 깨달으면 모든 일에 쉽게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하여 고통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변하지 않는것, 오고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본성이다.
그것은 어떤것이 아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사물과 마음의 모든것이 조건에서 나오고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경험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도장처럼 박힐 것이다.
이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본래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법, 원칙, 아이디어, 믿음, 인간, 개, 고양이, 나무, 산 등 우주의 모든것은 '自性' 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이름과 모양은 끊임없이 변하고 변한다. 모든것은 공에서 나오고 결국 공으로 돌아간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므로 자아인 실체가 없다. 諸法無我' 이런 깨달음이 우리의식에 찍는 두 번째 도장이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므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오고 가는 것도, 부처님도, 하느님도, 본질도, 존재도, 마음도 없다.그것들이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당신은 알고 있는가? 불교는 모든 법, 모든 계율이 완전한 정적의 상태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반은 단지 완벽한 정적의 상태를 일컫는 이름이다. 모든것은 완벽한 정적과 소멸에서 나와 결국 공과 소멸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것을 알게되면 마지막 도장을 받는다.
'열반적정 涅槃寂靜' . 생사를 윤희하는 고통을 벗어난 피안이다. 성경에서는 '침잠하라. 그러면 신이라는 것을 알리라' 고가르친다. 불교에서는 '모든 법 Dharma은 완벽한 정적에서 나온다. 고 가르쳤다. 신을 찾고싶으면, 또 부처를 찾고 싶으면, '참 나' 혹은 '절대'를 찾고 싶으면 당신은 이 완벽한 정직과 소멸의 상태를 얻어야 한다. 이 정적이란 진정한 공이다. 우리 마음과 우주의 본질이다.
14세기에 지어진 한 기독교 시는 이것을 아주 맑게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은 깨끗하고 텅 빈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모든 모양이 나타난다.
그것이 본성품이 되어
밝음과 어둠, 고요함과 폭풍이 된다.
The God who is pure emptiness 空
Is created as form 色
Becoming substance, light and darkness,
The stillness and the storm.
본래 이 경지에는 아름도 없고 모양色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리다는 분별심을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공空의 상태에는 반대되는 것이 없다. 오고 가눈 것이 없다. 그것이 '참' 나'.
소슴불교는 이 삶도 죽음도 없는 완벽한 정적과 소멸의 상태인 열반을 얻기위해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승불교 가르침의 목적이다.
삼학 . 三學 Three Kind of Practice
계율 . 戒 Sila-Precepts
삼매 . 定 Samadhi-Meditation
지혜 . 慧 Prajna- Wisdom
소승불교의 세 가지 도장을 받고 싶으면 세가지 종류의 수행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수행을 섞어서 제대로 조화롭게 쓰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계 戒
소승불교 수행은 계율 戒律을 간조한다. 계울이라고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도로 표지판 아라고 생각하면 된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차를 몰고 간다고 치자, 길을 가다 보면 어디서 고속도로가 시작하는지, 어디서 돌아 나가야 하느지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많이 서 있다. 만약 이 표지판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가면 대전가는 길을 놓쳐버리고 만다. 대전가는 것은 고사하고 아니면 부산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우리 마음속엔 '아, 나는 참 나를 찾고 싶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사람을 도우며 살고싶다.'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 일상에 매이다보면 이런생각은 쉽게 사라진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수 자신이 아니라 뒷자석에 앉아 있는 손님이 되는 격이다. 손님이 '이리가라, 저리가라'하고 지시하는 상황처럼 말이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기자신을 다잡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계율은 바른 삶으로 가기위한 명확한 방향을 의미한다. 계율은 법을 의미하고 법은 우주의 바른길을 말한다. 바른 길을 갖는다는 것은 맑은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전도의 정어, 정업, 정명, 수생은 이 계율 수행을 대표한다. 계율을 지키면 자신의 조건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우리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지식도 지배할 수 있다. 반대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으면 지식도 통제할 수 없고 고통이 나타나게 된다.
지식을 지배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우리 욕심이란 것은 결국 지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모든생각은 욕심이며, 욕심은 우리를 고통으로 이끈다. 우리감정은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지식은 항상 분별하게하고 어떤견해에 집착하게 한다. 지식이 많을수록 복잡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며, 지식이 만들어내는 '좋은것' . '나쁜 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 마음은 항상 움직이게되고, 끊임없이 내가 가진 강한 감정들, 다른사람과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좋고 싫은 감정들에 의해 여기저기 사방팔방으로 끌려다니게 된다. 이렇듯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좋고 싫은 감정들에 대해 강한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 중심을 지키는 것이 대단히 힘들어진다.
바로 이 때문에 계율이 팔요하다. 계율이란 나의 욕심과 마음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다. 계울 수행을 하면 단전은 자연스럽게 강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며 다른 사람을 돕는것도 가능해진다.
정 定
바른 참선수행이란 언제 어다서나 항상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느낄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참선 수행에 대한 어떤 관념이나 생각에 집착하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참선아란 그저 앉아 있으면서 하는 어떤 강한 몰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경우, 참선의 목적이 몰입을 가져오는 좋은 감정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참선이 항상 완벽한 정적과 축복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오, 지금 모든것이 평화로워, 너무 좋아.' 이런종류의 생각은 아주 나쁜 병이다. 그것은 좋은 상황에대한 일종의 집착이므로 진정한 참선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수행에 집착하면 지혜는 성장할 수가 없으며, 우리의 지식은 각종 다양한 상황에서 다른사름을 돕는데 제대로 기능할 수가 없다.
팔정도의 정정진, 정정 수행이 참선수행을 대표하는 실천 지침이다. 깊은 수행을 경험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운전할 때나 먹을 때나 얘기할 때나 일할 때나 가족과 같이 있을 때나 언제나 평정한 마음 상태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평상심이라 부른다.
내 외국인 제자 중 한 사람은 항상 깊고 조용한 상태에서의 참선만을 원했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시끄럽게 놀면 "조용히 해라, 내가 명상중이라는 것을 모르느냐"면서 화를 내고 참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집에서도 가족들은 그가 참선중이면 살얼음판을 걷듯 매우 조용히 해야했다. 얼마 뒤 가족들은 참선과 불교를 나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참선은 진정한 참선이 아니다. 참선을 특별하게 만들 뿐이다.매일 매일 일상을 살아가면서 평상심을 갖는것, 그것이 진정한 참선이다. 그것이 수행의 진정한 본질이다.
혜 慧
하늘은 스스로 "하늘이 푸르다"고 한 적이 없다. 우리가 "하늘이 푸르다"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 "하늘이 푸르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사람들은 "하늘이 푸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식이다. 다른사람, 즉 누군가의 생각이다.
한국사람들은 "하늘이 푸르다"고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The sky is blue"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소라이 아오이데스" 라고 한다. 폴란드 사람은 폴란드 말로, 러시아 사람은 러시아 말로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은 누군가의 생각이다. 하늘이 결코 이런식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우주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말이나 생각의 영역이 아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으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만 이 세상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진리이다. 그때서야 나무를 볼 때 오직 푸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설탕을 맛 볼 땐 오직 달콤하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모든 것은 이미 진리이다. 우주는 이미 매 순간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오직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면 이러한 진리가 바로 나의 것이다. 산스크리트로는 '반야 般若'라고 한다.
소승불교의 목표는 열반을 얻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공하다는 것을 얻으면 그 자체가 이 세상 우주, 우리모든 마음의 본질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올바른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진리를 사용하여 이 고통스런 세계를 구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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