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10, 2012

어떤 것이 불성인가

어떤 것이 불성인가• 如何是佛性 What is Buddha-nature?


佛設一切皆有佛性 Buddha said that all things have Buddha-nature .부처는 모든 것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趙州狗子無佛性 Joju said that the dog does not have Buddha-nature. 조주선사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다.

如何是是耶 Which one is wrong? 어느것이 그른가?

萬法歸一 The ten thousand Dharmas return to the One.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一歸何處? When does the One return?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禪이란 말이나 단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말과 단어에 집착하면 본성을 이해할 수 없고, 불성도 얻을 수 없다. 어떤것도 얻을 수 없다.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없다' '있다' 는 생각에서 나온 언어이다. 절대가 아닌 모두 상대적이고 분별적이고 개념적인 생각들이다. 부처는 모든것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조주 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그 세대에 살았던 승려들은 경전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과 단어에 집착해 있어서 부처가 가르키는 즉각적이고 살아있는 경험을 놓쳤다. 깨달음과 불성에 대해 단지 토론만 했고, 중생이 과연 깨달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논쟁만 했다.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했으니 개에게도 불성이 있겠구나. 그러면 개도 부처가 될 수 있나?'

스님들은 언제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오로지 경전만 읽고 수행은 하지 않아서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개도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개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아주 어려운 문제로구나.'

그리하여 결국 조주 선사에게 묻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 날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들이 말과 단어에 집착하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禪病을 가지고 있다. 조주의 말에서 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는 것도 그것이다. '無란 무엇인가?'

'이 無라는 것이 나와 같은가, 다른가?' 또 생각하고 생각한다.

일본 선방에서 많은 학생들은 하루종일 '無'를 찾는다. '무우우우------' 하고 생각하며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나는 無가 돼야 해.'

'나는 사라져야 해.' 그런 종류의 수행은 뭔가를 만드는 수행이다.

'無'를 만드는 것이다. 조주 선사가 처방한 좋은 약을 써서 나쁜 병을 만드는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 만공 스님에게 조주의 '無' 자 공안에 대해 여쭈었다.

"스승님, 조주 선사가 말씀하신 '無'의 의미를 알고 싶은데요."

"아주 쉽다. 선원 뒤 정원에 서 있어 봐라. 거기에 아주 많은 무가 있다."

만공이 얘기한 무란 먹는 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아주 높은 수준의 가르침이다. 만공은 이 사람에게 無라는 것이 뭐 특별한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無'안에서 어떤 깊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실수라는 것이다. 따지지 말라. 생각하지 말라. 조주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를 놓치지 말라.

"왜 無인가? 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결코 무를 이해하지 못하며, 본성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여전히 무를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시장에가서 무를 보아라. 많은 무들이 너를 가르칠 것이다. 그것들이 선사들의 가르침보다 나을 것이다.(하하하)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조주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하나는 어디로 갑니까?"

그렂자 조주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가사를 하나 지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나 나갔다."

아니,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왜 조주 선사는 그런 대답을 했는가.

만약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할' 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마룻바닥을 "탕!" 하고 쳤다면 이해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이다'. 혹은 책상 위 연필을 들고 '이것은 연필이다.'라고 말해도 그 역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조주 선사는 전혀 엉뚱하고 긴 대답을 했다. 왜 그랬을까. 조주 선사는 제자가 어떤 특별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여기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야. 그런데 이 하나는 어디로 가나. 여기에 감춰진 의미가 뭐지?' 제자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조주 선사는 제자의 이 생각하는 마음을 뚝 자르는 큰 의심을 주었던 것이다. 사실 일곱근이나 나가는 옷이란 있을 수가 없다.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주 선사의 말은 무자 공안과 마찬가지로 질문한 이에게 큰 의심을 던져주고 있다.

'도대체 스승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 하고 의심해보는 이것이야말로 조주선사가 지니고 있는 가르침의 기술이다. 그는 제자들의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말과 단어라는 칼을 사용한다. 생각을 끊기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한편 조주 선사는 말에만 집착하여 답이 틀렸다고,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면 선사가 이미 당신을 몽둥이로 30방 때렸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불성이란 무엇인가?' 대답은 여러가지로 할 수 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할 수 도 있다.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일곱근의 가사라고 말할 수 도 있다. 이 모든 형태의 대답들은 불성을 지적하는데 좋고 나쁘고가 없다. 이 밖에 얼마든지 다른 대답들이 나올 수 있다.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 중 한사람인 유마 거사의 관련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유마 거시는 부처님 생전에 깊은 깨달음을 얻었던 사람이다. 한번은 그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부처님 귀에 들렸다. 많은 승려와 보살들이 유마거사의 집에 모였다. 서로 문안인사가 오간 뒤 자연스럽게 법거량이 벌어졌다. 누군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냈다.

"둘이 아닌 것[不二中道]이 무엇입니까?"

서로들 자신의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느라 애쎴다.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선과 악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고고 가는것이 다른게 아닙니다."

위대한 문수 보살도 입을 열었다.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둘이 아닙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아주 훌륭한 생각"이라며 감탄했다. 마침내 사람들이 유마 거사에게 물었다.

"신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유마 거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정답이다. 가장 완벽하고 가장 깊은 대답이었다. 입을 열면 이미 두 개를 만드는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다.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면 입을 열지 말아라.

말과 단어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입을 닫으면 나와 우주는 하나가 된다. 둘이 니다. 성경에서는 "침묵하라, 그러면 내가 神임을 알게 된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라고 말한다. 불성도 이와 같다.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불성을 알고 싶으면 먼저 하나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야 한다.

기억하라.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첫번째 코스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임제 선사는 누가 질문만 하면 '할'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덕산 선사는 방망이로 때렸다. 구지 선사는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입을 열면 이미 이분법을 만드는 것이다. 말과 단어는 거기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어떤 행동만이 가능하다.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의 나침판'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Monday, July 9, 2012

선원 2

선원 2

묘향산에 가면 보현사[普賢寺]라는 절이있다. 보현사에서 인호대[引虎臺]를 거쳐 싱원사까지 가는 길에 이름난 폭포수가 있다. 규모와 아름다움이 손꼽히는 폭포이다.
서산 대사가 어느 날 제자인 사명 대사와 함께 묘향산의 이 폭포를 지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폭포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폭포수를 바라본 뒤 발길을 돌렸다.

서산대사는 키가작고 여자처럼 곱게 생겼다. 누가 보아도 타입이 단정한 선승이었다. 그러나 사명 대사는 군인 출신으로 몸이 장대하고 힘이 넘쳐흘렀다. 키도크고 어깨도 넓었다. 사명 대사는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들을 보면 삶에 의문을 가져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한 것이다. 이후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다 서산 대사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두사람은 상원사로 향했다. 그런데 사명대사의 마음속에 이상한 생각이 피어올랐다. 앞서 걷는 스승의 모습이 너무도 왜소해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스승의 얼굴과 몸이 작긴 정말 작구나, 여자처럼 걷고 있잖아, 저런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니, 나도 참 한심하다. 한심해, 아까 본 목포는 장대하기 이를 데 없는데, 내 스승의 모습은 저토록 초라하기 짝이 없다니------. 저런 사람이 과연 나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사명 대사의 귀에 갑자기 뒤에서 굉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수직으로 내리꽂히던 폭포가 거꾸로 치솟고 있는 게 아닌가. 물이 땅에서 부터 솟아올라 하늘 끝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명대사는 너무 놀랐다.
"스승님, 스승님, 저것 좀 보십시요."
사명 대사는 앞서걷는 스승을 불렀다. 그러나 서산 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걷기만 했다.
"스승님, 어떻게 물이 거꾸로 올라갑니까?"
서산 대사가 툭 한마디 던졌다.
"네 마음을 닮았나 보구나."

순간 사명 대사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스승님이 나의 생각을 읽으신 게로구나.'
폭포수를 솟구치게 한 이는 다름아닌 스승인 서산 대사였던 것이다. 사명 대사는 스승에게 참희의 절을 했다.
"스승님, 이 나쁜 제자를 용서해주십시요."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친다면 그것은 더이상 실수가 아니다. 마음을 비워라. 그러면 너의 업도 비워진다.
"예, 만물이 처음으로 제 마음에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했읍니다. 이제 저의 진정한 길을 찾기시작했읍니다."

사명대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폭포수는 다시 예전대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다. 서산 대사는 제자의 마음을 꿰 뚫ㅇ어본 것이다. 제자가 '나'라는 이상[我相]에 가려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말과 단어로는 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도력을 사용 함으로서 제자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 맑은 가르침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는 스승을 밎게되고 자신의 견해와 생각이 바보 같았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제자들의 닫힌 생각을 열게 하기 위해선는 때로 이처럼 초능력이라는 사탕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면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스승을 존경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능력만을 보여준다면 그 스승은 단지 도를 부리는 사람일 뿐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제자들의 업이 벗겨지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신비와 기적으로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능력에 집착하게 되면 '자유'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에 집착하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신도없고, 부처도 없고, 인간을 통제하는 어떤것도 없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에 대한 집착에 불과한 것이다.

미국 뉴욕에서 어느 날 버스를 탄 적이 있었는데, 내 옆좌석 남자가 '금연'표지를 보고도 태연스레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그러자 뒷자석의 남자가 넌지시 한마디했다.
"차안에서는 금연입니다. 저기 금연 표지가 안 보입니까?"
그러나 담배를 피워 문 남자는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담배피는 자유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며 계속 피워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갑자기 뒷자석의 남자가 그의 빰을 갈겼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반격을 가할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니, 왜 때리는 거야."
그러자 뒷자석의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때릴 자유가 있으니까요."
180도의 영역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공함에 집착하게 된다. 270도의 영역에 멈추면 '자유'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다음영역으로 넘어가야 한다.

마지막 360도의 영역은 만물이 단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만물은 진리이다. 진리는 바로 이와 같다. 여여[如如, truth like this] 이다. 이 점은 0도의 ㅇ우치와 같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출발 지점이 종착지가 된 것이다. 0도와 360도의 차이점은 0도는 집착하는 생각인 반면 360도는 집착하지 않는 생각, 즉 무애[無碍]인 것이다.

360도의 영역에서는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다. 안과 밖이 하니가 된다. 하늘을 볼 때 하늘과 하나가 된다. 나무를 볼때 나무와 하나가 된다. 볼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과 우주가 완벽히 하나가 된다. 이것을 순간의 세계(moment world)라고 부른다. 한 순간에 무한의 시간이 있고 무한의 공간이 있다. 한 순간에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이 있다. 이때 행하는 실천이 대보살행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생각에 집착하면서 차를 운전하면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어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맑다. 운전할 때는 그냥 운전할 '뿐' 이다. 진리도 이와 같다.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추고 파란불이 켜지면 가는 것이다. 이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다. 본능적인 행동이란 욕심이나 집착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서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빨간것이 나오면 빨간 것을 비추고 흰 것이 나오면 흰 것을 비추는 것이다. 보살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나를 위한 욕심이 없다. 내 행동은 오로지 중생을 위한 것이다. 나를 위한 욕심이 없다. 내 행동은 오로지 중생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완벽한 삶이다.

0도는 '작은 나(Small I)'이다. 90도는 '업을 가진 나( Karma I)' 이다. 180도는 '나가 없는 나(Nothing I)'이고 , 270도는 '자유로운 나(Freedom I)'이다. 그리고 360도는 '큰 나(Big I)'이다. '큰 나' 란 시공을 초월 한 것이다. 삶도, 죽음도 없다. 단지 모든 중생을 구하고 돕고 싶을 뿐이다. 나와 너는 하니이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다른사람들이 슬프면 나도 슬프다.

禪 修行은 바로 이 360도에 도달하는 것이다. 360도에 도달하면 실제로 원도 사라진다. 원이란 단지 선을 가르치는 도구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여기 책과 연필이 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가, 같은가.
0도 에서는 책은 책이고 연필은 연필이다. 90도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이기 때문에 책은 연필이고 연필은 책이다.

180도에서는 모든 생각이 끊어져 말도 단어도 없다. 따라서 가장좋은 대답은 (책상을 "탕!"치며) "탕!" 바로 이것이다. 270도 에서는 완벽한 자우의 상태이므로, 책이 화나고 연필이 웃는다 라고 얘기할 수 있다. 360도에서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진리의 영역이므로, 안은 밝고 밖은 어둡다. 3 곱하기 3은 9이다. 모든것은 있는 그대로 이다. 책은 책이고 연필은 연필이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처럼 각 영역에서 대답은 다 다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정답인가? 여러분은 대담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 답을 주겠다. 앞서 말한 다섯개의 답은 다 틀렸다. 왜? (잠시 침묵한 뒤) '할!'
책은 푸르다. 연필은 노란색이다. 만약 이말을 알아듣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안다고 말하면 나는 여러분을 이 주장자로 30방 때릴 것이다. 모른다고 말해도 30방을 때릴 것이다. 왜? (잠시 침묵한 뒤) 오늘 바깥 날씨가 아주 춥다.

일단 진리를 깨달으면 진리를 쓰는 법을 알아야 한다. 실용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360도에서 우리 마음은 우주처럼 맑다. 거울처럼 맑다. 빨간것이 오면 빨간것을 비추고 하얀것이 오면 하얀것을 비춘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이 나타나면 무엇이 우리의 할 일인가. 나 또한 배가 고프다고 해야 하는가. 목마른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목이 마르다고 해야 하는가. 과연 그것이 진정한 대자대비심이러고 할 수 있는가.

禪과 명상 수행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은 단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깨달음, 즉 실체와 실상만을 강조한다. 순간순간 진리의 올바른 실천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같이 배고파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주는 게 돕는 것이다. 목마른 삶에게는 같이 갈증이 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실 것을 주는 것이 돕는 것이다. 그것이 실용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선불교의 가르침도 그와 똑같다.

우리는 올바른 길[實體]을 찾아 진리[實相]를 얻으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며 순간순간 올바른 삶[實用]을 살아야 한다.
'나'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 만물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다. 360도에 오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꽃은 붉고 벽은 하얗다. 나와 이 세계가 언제나 하나가 된다. 그러면 순간순간 오직 다른사람을 위해 살게 된다. 큰 사랑과 큰 자비로 오로지 중생을 돕는 것, 그것이 바른 삶이다. 자, 그럼 옛 스님들의 공안을 몇가지 인용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한번 점검해보도록 하자.

이명박 정부의 외교 참사

이명박 정부의 외교참사

중앙시평 박명림 연세대 교수 정치학

일본과 군사정보협정은 일본 역할 키워주고 한국이익 침해한다. MB정부 외교 실패 반복 공동체에 치명적이다.

한•일 점보보호협정을 울러싼 논란이 뜨겁다 무엇보다 먼저 모든 단계에서의 철저한 비공개 추진은 정부 스스로 내논의 휘발성과 민감성을 알고 았었다는 점을 반증한다. 게댜가 협정의 명칭마저 본질을 담고 있는 '군사' 용어를 생갹하여 은폐를 기도 하였다.

의회 동의 여부 역시 해답은 분명하다. 이 협정은 한국의 주권을 침탈한 적이 없는 여느 국가와의 군사협정이 이니다. 한국의 국가 주권을 부인•침탈•병탄했던 국가와의 '군사' 협정 체결 문제가, 헌법 제60조가 규정하고있는 국회의 체결•비준 동의권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무엇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말인가?

실질적 차원에서 금번 협정 체결로 한국이 얻을 실익은 무엇일까? 한 • 일이 미국•중국•유럽에 관한 군사정보를 교류하여 공통이익을 증진시키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북한 문제'에 대한 정보 공유와 교류 정도일 것이다. 실익이 거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문제에 관한한 한국 스스로 갖고 있거나 미국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정보를 넘어, 일본으로부터 얻을수 있는 양질의 정보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명박 정부 들어 악화된 남북관계가 한•일 군사 밀착을 초래하였다면 더욱 문제다. '양자관계' 차원에선 건국 이래 모든 한국 정부가 분리하여 접근했던 '남북관계'와 '한•일 관계를 연동시킨 최초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통일•평화•안보•주권 문제에 일본을 '직접' 연루시킨다는 것은 어떤 한국정부도 시도하지 않은 금기였다.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한•일 '관계정상화'를 거부하였고 박정희는 한•일 '경제' 협력에 한정하였다. 또 노태우의 동북아 6개국 평화협의회 제안 이래 김대중과 노무현은 동북아 협력기구나 6자회담을 통해 한국의 안보•평화•통일 문제에 대한 일본의 참여를 허용하였으나 '다자 기구와 다자틀' 의 범위에서였다. 건국 전후의 '반공' 과 '친일', '빨갱이 타도'와 '친일세력 부활' 사이의 연쇄고리를 연상시키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증오와 대일 밀착 연동은, 한ㅂ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하지하책인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국의 역할증대와 대북 압박을 위해서라도 한•일 군사협력은 득책이 될 수 없다. 중국-소련-북한의 사회주의 진영이 현재의 중국-북한 양자 협력체제보다 훨씬강했던 냉전시대에도 없었던 한•미•일 군사협력•동맹체제를 추구한다는 것은 미•중 G2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국가책략이 아닐 수 없다. 한•일 협력과 한•중 협력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균형외교 요소이기 때문이다. 독도, 위안부, 교과서 왜곡,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식민 통치 배상과 같은 인권•역사•영토 문제에서 일본의 태도는 안보협력의 중대한 고려 요인이 된다. 이 문제들에서 극우세력및 군국주의 향수파들이 바로 일본의 군대보유, 해외 팽창을 추구하는 세력이라는 점은 금번 협정 체결시도가 일본의 평화세력과 극우세력 누구를 이롭게 하는지, 한•일 연대와 동북아 평화에 정녕 도움이 되는지를 숙고하게 한다. 이 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가 바른 한•일 연대를 향한 교정 능력을 보여주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미국의 구상 역시 냉정히 촌탁해야 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으로 일본을 기축국가로 삼는 동북아 안보질서를 추구해왔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한•미•일 군사협력•군사동맹체제를 거부한 이유는 일본의 대두만큼 악화될 한•미동맹 체제 때문이었다. 냉전시대 한국에 한•미 '동맹'은 단순한 '북한저지'를 넘어 '중국봉쇄' '소련봉쇄'와 '일본 견제'를 위한 다층적 안보협력 구도엿다. 비밀문서들이 보여주듯 한•미 동맹을 촉진•강화시킨 한 요인 역시 미•일 접근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압력으로 인한 일본 '군사' 역할의 증대는 한국인으로서는 과거 악몽의 재현에 가깝다.

한국민들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조약, 일반명령 1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독도 문제, 동해표기 문제 등에서 미국이 일본 이익을 위해 한국 이익을 일방적으로 희생시켜온 역사를 잘 기억하고 있다. 한국민들에게 미국이 주도하는 오늘의 '일본대두' '한•일 접근'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역사적 근거다.

이명박 정부는 다른 정부에서는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외교 참사에 가까운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쇠고기 협상, ARF 의장성명 파동, 남북 정상회담 준비 비밀 접촉공방, 계속 드러나는 자원외교 실패 사례, 그리고 한•일 정보보호협정 서명 보류에 이르기 까지 한국 규모 국가로서는 '외교'라고 하기조차 부끄러운 국제관계를 반복하고 있다. 국가경영에서 외교 실패는 공동체에 치명적인 유산을 남긴다. 대통령을 포함한 담당자들은 잦은 참사 앞에 깊이 숙고하고 거듭 성찰하길 당부드린다. 참사를 막는 최고의 현책은 바로 국민에게 묻는 것이다.

Sunday, July 8, 2012

절차 무시한 한일정보협정추진

절차무시한 한일정보 협정 추진
노재원 시카고지사 편집국장

국민정서 고려하지않은 정부의 밀실처리는 부끄럽고 이해봇할 행동

7세기 중반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한 채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중국 대륙의 패권을 차지한 당나라까지 얽혀 이들의 외교 ·군사 경쟁은 더욱 치열했다.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는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렸다. 서기 642년 백제군에 의해 대야성이 함락될 때 성주인 사위와 딸을 잃은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백제를 치기위한 군사지원을 요청, 당태종으로부터 이를 약속 받았다.

신라는 백제의 계속된 공격이 두려웠고 당나라는 수나라 멸망의 원인이 된 북쪽 강국 고구려의 존재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라와 당나라는 연합군을 구성해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각각 멸망시켰다. 그후 신라는 한반도 지배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왕의 7년간에걸친 힘겨운 싸움에서 승리해 676년 삼국 통일을 마무리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만주벌판까지 지배했던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대부분 잃어버리고 평양이남으로 우리영토를 제한 했다는 것이다. 또 외세를 끌어들인 것도 시비의 대상이다. 일부에서는 이 때문에 고구려 유민들이 재배층을 형성했던 발해와 통일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 신라의 통일은 이후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단일국가의 시원이 됐다.

21세기 한반도는 신라-발해 이후 1천 여년 만에 다시 남과 북으로 나눠져 있다. 해방 직후 외세와 이념·사상의 차이에 의해 분단된 남과 북은 1948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후 경쟁 아닌 경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남과 북의 우열은 이미 명맥하게 가려졌다. 한국은 세계속에 작지만 강한 나라로 우뚝 선 반면 불한은 지구촌 유일의 세습왕조라는 전근대성과 폐쇄성을 면치못하고 있다. 여기에다 주민들의 궁핍한 삶도 아랑곳 않는 빗나간 군사력 강화와 인권 유린은 지탄의 대상이다.

한국정부가 지난 26일 국무회의서 비공개 안건으로 상정된 한일 군사전보보호협정(GSOMIA)이 논란이 되고 있다. 핵과 미시일 등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증가하면서 북한 전보를 공유할 핑요성에 따라 추진했다는 것이다. 대북 억지력을 위한 일본의 전보력과 유사시 주한미군, 주일미군이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일본과의 군사정보 교류는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한일 두 나라는 앞으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물론 사회 동향등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게 된다.

이 같이 중요한 결정을 여론수렴절차도 없이 비밀리에 진행한 것은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 요청을 한 것보다 더 못 한 일이다. 위안부, 돋도 문제등 일본과의 갈등이 여전한 상태에서 국민 정서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결정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어렵다. 그예날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은 것은 어쩌면 통일보다는 생존이 더 급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백제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서 존립이 우태로웠던 신라로서는 늑대가 아니라 호랑이라고 해도 당나라의 힘을 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이 북한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재개식 군사력은 몰라도 경제력이나 인구, 외교력 어느 하나도 밀리지 않는 한국이 달갑지않은 외세 일본과 손을잡아야 할 만큼 절박한 처지인가. 대통령의 외국 순방중 한일군사정보협정을 밀실 처리한 것은 불가피성이나 타당성보다 떳떳하지못하고 부끄러운 행위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산 너머 산'의 나라

'산 너머 산'의 나라
특별기고 피터 M 벡 아시아재단 한국대표

내가 한국에서 가장 사랑하는것 중 하나가 산이다. 마치 한국 여성처럼, 세상에서 높진 않지만 그 아름다움 비교대상이 없다. 그래서 한국어 표현 중 가장 좋아하는 말이 '산 너머 산' 이다.

우선 서울에서 시작해보자. 난 등산 친구들과 종종 어떤 산이 가장 좋은지 논쟁을 벌린다. 하지만 전세계어디에도 서울만큼 갈만한 산이 많은, 축복받은 대도시는 없다는 데 이견이 없다. 북쪽 도봉산에서 남쪽 관악산까지, 어느 동네나 15분 거리 안에 오를 만한 좋은 산이 있다.

난 인왕산 밑에 산다. 나처럼 다리가 '롱다리' 는 우리 집 문에서 성곽을 따라 정상까지 1.5km를 30분 이면 갈 수 있다. 다른 한국 산처럼 거리는 짧지만 가파르기 때문에 아침 운동으로 최고이고, 전망도 좋다. 주말엔 이 코스에 청와대 뒤 북악산을 추가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고 이영희 한양대 교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북한산을 소개해준 분이다. 도시에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데, 봉우리가 10여개인 데다가 볼 사찰도 많다. 정상에서 서울을 등지고 서보면 끝없이 이어진 산봉우리들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등산욕심이 별로없는 사람을 위해선 산책길과 건강공원이 마련돼 있다.

등산은 우정을 다지기 좋은 활동이다. 또 아직은 고물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기에도 좋다. 지난 주말, 제일 친하고 오래 사귄 친구 두명과 오대산 월정사에서 템풀스테이를 했다. 스님들은 친절했고 음식과 시설은 환상적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른 사찰과 암자를 둘러보고 비로봉에 올랐다.

지난달 출장 중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의 산 두 곳을 오를 시간을 겨우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서 사방이 물인 광경을 보는것은 그 어떤 경험과도 비교할 수 없다. 만약 정상까지 7~8km 등반하는 게 싫으면 20여곳의 갈림길이 있는 제주도 둘레길을 걸어봐도 좋을 것 같다.

한국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높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산들!
전 세계 어디에도 한국만큼 산의 축복을 받은 나라는 없어"

울릉도 성인봉은 높이 984m로 한라산 높이의 반을 약간 넘는다. 그럼에도 아주 인상적이다. 독도까지 5시간 여행을 하면서 느낀 운동부족을 푸는데 제격이었다. 울릉도항에서 독도박물관쪽 길을 따라 오른 후 골짜기의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된다. 이쪽에선 유명한 울릉도 쇠고기(약소)와 약초, 집에서 담근 고구만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북한 지도자들이 호전적인 행동을 그만하고 개혁을 받아들여 남북화해가 시작된다면 한반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산 두곳을 다시 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묘향산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금강산과 백두산은 내가 오른 그 어떤 산과도 달랐다. 밥을 먹고 보라는 속담(금강산도 식후경)을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금강산의 만물상은 정말 독특했다. 셀 수 없이 많은 형상을 바위틈에서 찾아낼 수 있었고, 이는 인근노상 온천에서 쉬면서 하기에 딱 좋은 일이었다.

외국인 입장에서 백두산은 별로 기대가 크지 안은 산이었다. 하지만 활동을 멈춘 화산의 거대한 호수는 한라산 백록담과 미국 오리건주 크레이터 호수를 합친 것보다 커 보였다. 중국 쪽에서도 백두산에 오를 수 있다. 만약 오른다면, 천지 테두리까지 걸어가라고 충고하고 싶다. 내 경우 중국 총알 택시를 타고 가다가 내 인생이 눈앞에서 지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기사에게 걸어서 사겠다고 말하고 내려 버렸다.

앞으로는 칠보산에 정말로 일곱가지 보물이 있는지도 꼭 보고 싶다. 요즘은 지리산에 오를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20여 년 전 임권택감독의 영화 '태백산맥'을 보고 이 산과 사랑에 빠졌다. 한국에 8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올라야할 산이무수히 많다. 이직 명산 순례를 시도해 보지 않은 당신이 산에 오르지 않을 핑게는 무엇인가?

선원

선원· 禪圓 The Zen Circle

원칙 義理 Principles

진공 眞空 진정한 공함 True emptiness Nothing I attachment to emptiness

180 無我 No form, no emptiness 1000X0=0 1X0=0 (나가 없는 나)

90 존재와 비존재 有無[業我] 업을가진 나 Existence and nonexistence Karma I
attachment to thinking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orm 0=1, 1=0

0 속진(작은 나) 俗塵[小我] The common dust(clinging) Smal I
attachment to name and form 1+2=3

360 있는 그대로(큰 나) 如如[大我] The Absolute Big I
nonattachment thingking just like this 3X3=9 Formis form, emptiness is emptiness
절대적 존재 [妙有] 妙我 (자유로운 나)

270 Absolute existence Freedom I attachment to freedom thinking
Freedom form, freedom emptiness 3X3=9 1000X100=1000X9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선생님은 칠판에 큰 원을 하나 그리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회들이 오늘부터 이 원과같은 마음을 지녔으면 좋겠다. 둥근 마음은 아무런 장애없이 어디든 갈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너회들은 자유로유로워질 수있다.

좋은 상황이 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알게 될 것이다. 나쁜 상황이 와도 역시 어떻게 사용하게될지 알게될 것이다. 나쁜상황이 와도 엮시 어떻게 사용할 지 알게될 것이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건 주어진 상황을 따르면 된다. 원이라는것은 완벽하게 비어있다. 즉, '나, 나의, 나를, 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와 네가 하나가 된다. 그러면 나를 위한 삶이 곧 다른사람을 위한 삶이 된다."

불교에서 원[圓]은 중요한 가르침의 도구다. 원을 신앙의 상징으로 모시는 곳도있다.
나도 때로 원을 사용해 선 수행을 설명한다. 원은 0도에서 시작해 90도, 180도, 270도, 360도를 돈다 360도 지점ㅇ은 처음의 0도와 똑같다. 먼저 0도에서 90도까지 지점은 집착과 생각의 영역이다. 생각은 욕심이고 모든 욕심은 고통을 부른다. 다시말해 모양과 이름에 대한 집착의 영역(smal I)이다. 그러다 보니 분별심을 만든다. 옳고 그름, 이것과 저것, 아름다움과 추함, 좋고 싫음, 나의 것과 너의 것 등등 말이다.

이 몸은 탐 . 진. . 치, 즉 욕심과 분노와 무지를 가지고 있다. '나' 라는 이몸은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고통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그리하여 0도에서 90도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며 고통자체가 삶인 영역이다.

90도를 지나면 '나'라는 업의 영역(Karma I)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생각이 '나'를 만든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나'라는 의식이다. 이해하는 것으로 '나'를 알고싶은 상태이다. 각자는 각자의 '나'를 만든다. "나는 교수야." "나는 아버지야." "나는 어머니야." "나는 여자야." "나는 중국인이야, 미국인 이야, 한국인이야." 0도에서 90도까지는 각각 모양과 이름에 대해 집착한다. 그래서 모든것이 다른다. 90도를 지나도 생각에 집착한다. 모든것이 같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당신은 0 이었다. 이제 당신은 하나이다. 언젠가 당신은 죽을 것이고 그때는 다시 0 이 된다. 그러므로 0 은 하나와 똑같고 하나는 0 과 똑같다. 원 위에는 모든것이 같다.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모든사물은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이름과 모양이 空해서 결국 空으로 돌아간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그러나 이 영역에서는 이것 역시 지적인 생각이다.

180도의 영역은 생각이 전혀없는 영역(Nothing I)이다. '空' 을 경험하는 상태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것은 '나' 가 완전히 사라지는 진정한 공의 영역이다. 모든실체는 완벽히 하나가 된다. '색도없고 공도 없다.' 어떤 이들은 이 영역을 절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절대'라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 절대는 없다. 이 점은 생각이전의 지점이기 때문에 말이나 단어가 없다. 입을 여는 것 자체가 큰 실수이다.

당신이라면 이 영역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임제 선사는 '할'이라는 소리로 대신했고 덕산선사는 방망이로 내리쳤다. 구지 선사는 다만 손가락 한 개를 들어 모였을 뿐이었다. 이처럼 오직 행동만이 이 영역을 표현할 수 있다. 말이나 단어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영역에서는 산도없고, 강도없고, 신도 없고, 부처님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오직 "탕!" 이 소리만 있을 뿐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내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스승님, 제가 깨달았읍니다. 만물이 空함을 깨달았읍니다."
"오 그래? 누가 깨달았다구?"
"제가 깨달았읍니다."
"누가?"
"저요."

나는 지팡이로 그를 내리쳤다. "탕!" 그러자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空함의 영역에는 이 '나'라는 것이 없는데, 지금 누가 비명을 지른 것이냐?"
그러자 그는 금세 얼굴이 붉어져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정한 空함의 영역은 말도없고 단어도 없다. 그는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미국에 있을 때 심신운동훈련(EST) 운동의 기초자인 베르너 에르하르트를 소개받은적이 있다. 그는 수백명의 사람들을 앉혀놓고 긴 강의를 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강의를 경청했다. 그는 종종 '공' 에 대해 이야기 했다.
"공이란 이러이러한 것이고, 저러저러한 것이다."

강의가 끝난 후 나는 우연히 그가 탄 차에 동승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강의를 아주 좋아하는군요. 그런데 '공'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내가 우주 쉬운 질문을 했다는 표정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지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 자체가 이미 어떤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진정한 공이 아닙니다."
그는 잠시 말을 잃더니 이윽고 나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진정한 공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空의 영역에는 말이 필요없다. 그래서 이 세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탕!" '너는 어디서 왔느냐?' "탕!" 우주적 실체와 너의 실체는 같으냐, 다르냐? "탕!" '신은 무엇이냐?' "탕!" '부처가 무엇이냐?' "탕!" 이 행위는 말이나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완벽한 空의 영역, 즉 완벽한 '無自我'의 영역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것이 180도 이다.

이 영역에 도달하면 우리는 '나'가 없는 완벽한 정적의 마음을 가지게 되며, 또 그 경험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우주적 에너지를 갖게 된다. 신비하고 기적적인 영역에 도달한다. 이것이 270도의 영역이다. 자유로운 '나'를 얻는 단계이다. 공간과 시간에 장애를 받지 않는 완벽한 자유의 영역이다.

어린이들은 텔레비젼 만화를 참 좋아한다. 개, 고양이, 뱀, 사자가 나와 사람처럼 옷을 차려입고 차를 몰거나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고양이와 새가 서로 얘기르도 한다 이이들은 텔레비젼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손 뼉을 친다. 만화에서는 어떤 행동도 가능하다. 이것은 만화에서 뿐만이 아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주적 에너지 혹은 어떤 특별한 힘과 강하게 연결되어 초능력을 발휘하는 사름들이 있다. 특히 도가나 요가 수행자들 중에 많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에너지의 원리로 생각하면 된다. 만물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소위 '초능력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에너지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삶들에 불과하다.
지구는 양의 에너지를 대펴하고 하늘은 음의 에너지을 대표한다. 일상의 도처에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를 수없이 찾아볼 수 있음에도 다만 우리가 너무 익숙해 느끼지 못할 뿐이다. 자석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음극과 양극이 만나면 붙는다.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친다.

탁자위에 자석들을 올려놓아 도넛모양을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자. 그중 한 개를 연필로 툭 치면 다시 자기들끼리 다른 극들을 찾아 똑같은 모양의 도넛 모양배열을 만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례는 우리인간이 이우주 에너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열심히 수행하면 완벽하게 공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우주적 에너지가 들어오게 된다. 절대 에너지를 얻는 것으로, 에너지를 지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가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으므로 만약 우리 몸을 양의 에너지로 충만하게 하면 대지와 몸은 서로 분리되므로 몸은 공중에 뜰 수 있다. 땅에 다시 내려오고 싶으면 음의 에너지를 만들면 된다. 어떤 도사들은 하늘을 떠다니거나 바위 덩어리를 들어올리기도 한다. 이 모두 '마음'을 사용하여 만믈을 구성하고 있는 에너지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얻으면 지기 몸을 뱀으로 바꿀수도 있고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될 수도 있다. 또 물위를 걸어다닐 수도 있다. 살고 싶으면 살고 죽고 싶으면 죽는다. 이것이 270도의 영역이다.

그러나 선 수행은 이처럼 신비하거나 특별한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옛 선사들이 종종 초능력으로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을 깨닫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계속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엮음 허문명 옮김

Sunday, July 1, 2012

선 정진

선 정진·禪 精進 Effort in Zen

행주좌와 行住坐臥 어묵동정 語默動靜
걸을 때,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얘기할 때, 움직일 때, 침묵할 때
When walking, standing, sitting, lying down, speaking, being silent, moving, being still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At all times, in all places
무문단 無問斷 시심마是甚麽 걸림없는 이것은 무엇인가?
Without interrruption, what is this?

어디든지 어느 순간에서도 진정한 방향을 잊어서는 안 된다. 태어날 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게 인생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이 세상에 나왔다. 또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지않고 떠난다. 그러면서도 대부분 사람들은 뭔가를 좇으며 산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것에 집착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하는 것을 모두 가져갈 수는 없는데 말이다.

태어날 때 모든 것은 이미 만들어 졌다. 이생의 당신의 업은 전생에 이미 만들어놓은 업에의해 결정된 상태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우리의 삶이 어떤 운명적인 것에 의해 이미 만들어졌다고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는 한 가지 길이 있다. 순간순간 마음을 지배할 수 있으면 업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전생의 업이 만들어놓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에너지를 바로 지금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움직일 때, 서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얘기할 때, 침묵할 때, 언느 곳, 어느 때나 어떤 마음가짐을 간직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바깥 조건과 상황들은 끊임없이 우리마음을 야생마처럼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닌다. 이 세계는 매일매일 점점 더 복잡해지고 항상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새로운 과학적, 기술적인 변화가 정신없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매일 신문과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정보에 허덕이고, 혼잡한 도시에 살면서 영화를 보고, 춤을 추러가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계획들을 세운다. 물론 이것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이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가면 우리는 중심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서 덜컥 죽음이 닥쳐오면 어떻게 하나.

옛날에 종사짓고 살았던 시절에는 자연사가 많았으므로 죽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각종 질병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조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 의문에대한 해답을 찾는 일이야말로 다른 어떤것 보다 시급한 문제이다.

어떤 종류의 경험이든 나쁘거나 좋은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각자 경험한 모든것을 잘 소화해 단전을 강하게 하고, 그것을 지혜로 만들어 다른사람을 돕는 일이다. 어떠한 조건과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도록 수행해야 한다. 결코 우리의 가는 방향을 잊지말고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6䞕 전쟁 때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한 여인이 있었다.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 보냈는데 몇 달 후 남편이 전사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충격과 실의 속에서도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남편없는 상태에서 그 아들은 그녀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매일 그녀는 아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지하나로 열심히 일했다.

아들은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들이 군에 가 있는동안 월남전이 터졌다.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군과함께 파견되였다. 그녀의 아들도 예외는 아니였다. 남편이어 아들까지 전장으로 보내야 하다니, 어머니는 너무 슬펐다. 아들은 그녀의 삶의 전부였다. 아니, 그녀 자신의 삶보다 더 큰 존재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아들에게 쏟아부었다.

이 어머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아들을 전장에 보내놓고 한탄만 하고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더욱울 열심히 일했다. 아들이 돌아오면 곧 짝을 맺어줘야 할 테니, 돈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낮에는 막노동, 밤에는 삯바느질까지 했다. 집 밖에 작은 밭도 꾸며서 채소도 길러 시장에 내다 팔아가며 돈을 모았다. 그녀는 한 순간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내 아들을 도울 수 있을까.' 밥을 먹을 때도, 알울 헐 때도, 장을 보러 갈 때도 오직 아들 생각뿐이었다.

어머니의 삶의 방향은 아주 맑았다. 어떤 상황서도 그녀의 에너지는 아들에 맞춰져 있었다. 외부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고 왔다갔다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수행하고 싶으면 이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산다. 언제나 음식, 섹스, 돈, 오락, 명예, 잠 같은 것들에 자신을 빼앗겨버린다. 물론 이런 것들은 열심히 추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으며, 얻는다 해도 영원히 가직할 수 없다. "아!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나는 이것도, 저것도 얻었으니까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았어." 그러나 우리가 정작 찾아야 할 본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오직 찾아야할 욕심과 분노를 좇아 사는 삶은 바른 삶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고통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바로 이순간 마음을 어떻게 가지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밥을 먹을 때나 영화를 보러 갈 때나 일을 할 땐나 벤치에 앉아 놀거나 한 순간도 우리의 본성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나는 무엇인가. 나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오직 모를 뿐------.'

앞서 소개한 어머니와같은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내 아들, 내 아들, 어떻게 내아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생에서 뿐 아니라 다음 생, 또 다음 생에서도 말이다.

'오직 모를 뿐' 을 맑게 가져라. 모든 사람들은 일하고 돈을 벌어야만 한다. 매일매일 누군가와 약속도 해야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한다. 그리고 많은 것에 개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나는 무엇인가?' 하는 큰 의심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언제, 어디를 가든 꼭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이것이 바로 禪 수행의 중요한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