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별리고 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생로병사의 四苦는 대부분 육체가 느끼는 물리적 고통을 말한다. 그러나 마음의 四苦도 있다. 어쩌면 육체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클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의 고통은 우리의 끊임없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이겨내기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생각은 ‘나’라는 에고가 만들어낸 욕망이며, 욕망은 곧 고통이다. 생각하는 마음 그 자체가 이미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낸다.
오래 전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민 온 친구가 있었다. 그는 한국에 약혼자가 있었는데, ‘열심히 공부해 박사학위를 딴 다음 교수가 돼서 미국으로 너를 불러들여 결혼하겠다’고’ 약혼자한테 약속해놓은 상태였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세월은 흘러 그는 대학, 대학원을 무사히 마치고 결국 교수가 됐고, 고국의 약혼녀와 같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같은 학교 교수이면서 부자인 한 미국 여자를 만나 사귀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그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1년이가고 2년이 갔다. 그 남자는 새 애인과 동거를 하면서도 들키지 않으려고 고국의 약혼녀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 한국의 약혼녀는 이제나저제나 미국에 있는 약혼자로부터 ‘미국에서 살 준비가 끝났으니 들어오라’는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약혼녀 친구가 정부에서 해외취업 비자를 내주기 시작했으니 그것을 받아 일단 미국으로 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약혼녀는 ‘그래’ 그 사람은 돈이없어 못 올 테니 내가 가보자’고 생각했다. 마침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약혼자를 놀라게 하려고 알리지도 않고 떠났다. ‘아마 나를 보는 순간, 너무놀라워 반가워 하겠지.’ 그녀의 마음은 두근거렸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리만리 길을 멀다 않고 달려온 그녀는 마침내 편지 봉투에 적혀있던 주소대로 약혼자의 집을 찾는데 성공했다. 친절한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아 약혼자의 집 문 앞에 당도한 시각이 아침8시였다. 그녀는 힘껏문을 두드렸다. 탕탕탕.
“나예요, 문 열어요.” 그녀는 약혼자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마침내 aans이 열렸다. 아뿔사, 잠결에 뛰어나온 약혼자는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고, 기쁘기는커녕 하얗게 질려버렸다. 어색하고 놀란 남자의 얼굴에는 아랑곳없이 여자는 내 집인양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이곳저곳 둘러보는 여자의 귀를 따라다니던 남편의 태도에는 이상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숨긴 것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침실 앞, 남자는 침실만큼은 한사코 약혼녀를 데리고 가려하지 않았다. 결국 약혼녀가 그를 밀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침대 위에는 벌거벗은 미국여자가 누워있는 것이아닌가.
눈이 뒤집힌 약혼녀는 부엌으로 뛰어가서 식칼을 들고 나와 두 사람을 죽여버릴 기세였다. 방 안에선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약혼자와 미국 여자는 무릎을 끓고 손이 발이되다시피 싹싹 빌었다. 하지만 약혼녀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 소동에 놀란 이웃사람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세 사람은 경찰에 구속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을 우리는 ‘애별리고’라고 한다. 욕심과 집착이 빚어낸 정신적 고통이다. 아마 믾은 사람들이 경험했을텐데, 이런 고통은 사람뿐 아니라 물건에 대한 집착 때문에도 생길 수 있다.
내 제자중에 12캐럿짜리 다이야몬드를 가지고 있었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병에 걸려 수술을 받는 바람에 장기간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는데, 병원에서도 오직 다이야몬드 생각뿐이었다. ‘다이야몬드는 잘 있을까? 누가 훔쳐가지나 않았을까? 몸이 그렇게 아팠음에도 그녀는 오로지 다이야몬드 걱정만 했다. 그후 퇴원해 집에 돌아와 보니 정말 도둑이 들어 다이야몬드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너무 슬퍼서 미칠 지경이 되었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슬픔을 달래려고 술까지 먹기 시작해 건강은 엉망이 되었다.
이것은 옳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안다면 다이야몬드에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는 않으리라. 건강과 맛바꿀 만한 물건이란 없다. 우리는 이 덧없는 물질에 매달려 생각하고 집착하면서 고통스러워 한다. 궁극적으로는 없어질 그것들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수없이 목격한다. 두 남녀가 사랑에 빠져 서로 죽고 못 산다고 한다. 그러다 둘 중 한 사람의 맘이 변해 헤어지자고 한다. 상대방은 고통에 빠져 먹지도, 잠을 이루지도 못해 병이 들고 만다. 그토록 서로가 죽지 못해 사랑했을 때는 언제인가 싶게 상대방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마음까지 생긴다. 따지고보면 애욕만큼 큰 고통을 불러오는 것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애욕에 눈이멀어 고통을 스스로 만든다.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다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동성동본이었다. 부모님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결사반대 했다. 지금은 동성동본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때만 해도 당사자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실의에 빠진 남녀는 마침내 동반 자살을 결심했다. 이승에서 같이 못 할 바에야 차라리 함께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들과 가족들이 겪었던 괴로움은 엄청나게 컸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변하고 또 사라진다. 이것을 깨닫기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영원히 쥘 수 없는 무상한 것들 것 손에 쥐고 싶어 안달하며 괴로워하다 죽고 만다 보통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원증회고 怨憎會苦, 싫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고통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 이 ‘좋다’, ‘싫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있다. 아래는 깊은 낭떠러지에고 하루빨리 서둘러가야 하는 길인데, 막상 다리 한가운데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원수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라.좋고 싫다는 마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이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좋다 혹은 싫다라는 감정을 갖게 되면 고통이 찾아온다. 그 인과관계는 아주 명확하다.
미국에서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이 매우 간단하다. 싫은 사람이 있으면 총으로 쏴 죽이면 된다. (하하하)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싫은 사람이 있어도 겉으로는 좋은 척한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오직 싫은 사람에 대한 나쁜 생각만 하기대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기회닿는대로 그에 대해 헐뜯는다. 이 모든 것은 고통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러한 고통은 어떤 견해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생긴다. 싫다. 좋다. 하는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다.
구부득고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교회나 절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뭔가를 구하는 마음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명예, 돈, 아이들 장례, 도 좋은 연인, 집, 직업…… . 하자만 실제 이런 것들은 기도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주가 그런식으로 운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총선거는 한 선거구에 적게는 2, 3명, 많게는 7, 8명씩나온다. 그중 당선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 후보자들은 몇 년동안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을 한꺼번에 투자하고 가족들까지 선거운동에 동원하지만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된다. 원하는 것을 얻지못하면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돈 한푼 없으면서도 높은 이자의 돈을 빌려 친인척까지 동원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는 그만 1등과 다섯표 차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채무자들과 친인척들이 몰려와 그에게 빚 갚으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는 자살하고 싶었지만 약을 살 돈조차 없었고, 결국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렸다. 돈 들이지 안고 죽고싶다는 소원(?)을 실현한 셈이었다. 시험에 떨어진 사람, 경기에 진 사람, 상업에 실패한 사람의 고통이 어찌 이보다 못할 것인가. 자살할 용기가 없으니 죽지못해 사는 것이다.
고통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것도 아니다. 고통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어떤 고통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강하게 노력하는 마음이 있으면 도움을 주는 고통이있다.
언젠가 한 미국학생이 나에게 상담을 해왔다.
“선사님, 괴로움이 있는데요.”
“무엇입니까?”
“저는 멋있는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직업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참선한다고 앉아 있으면 저는 계속 이런 생각만 들어요. 여자 친구, 돈, 직장, 여자 친구, 돈 직장……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불경을 외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여자 친구, 돈, 직장만을 되뇌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크게 내가 원하는 것들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집니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 참선 수행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 마음속에 집착이 보물처럼 들어 있어서 다른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오히려 이렇게 조언했다.
“지금보다 더한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학생은 당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더 고통을 겪으라니요. 저는 이미 무척 힘듭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더 고통을 겪으면 여자 친구도 생기고 돈도 벌고 좋은 직장도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매일 1천 배를 하고 관세음보살을 5천번씩 외세요.”
“과연 그렇게 하면 제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까요?”
“중국 속담에 이열치열 이한 치한이라는 말이 있지요. 고통은 고통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지금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 고통은 깨끗하지 않은 것입니다. 1천 배를 하고 관세음보살을 외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끗한 고통입니다. 고통을 다른 고통으로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 당신의 고통은 사라지고 지혜가 생길 것입니다.”
ㄱ그 학생은 내 말을 따라 1백 일 동안 열심히 절과 염불 수행을 했다. 결국 그는 나중에 거짓말처럼 훌륭한 여자친구와 새로운 일자리가 나타났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다.
그 학생은 뭔가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수행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행의 본질, 생각의 본질, 고통에 신음하는 마음을 본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일단 수행이라는 약을 먹으면 올바른 수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의 병을 ‘이영한’ 것이다. 이것을 ‘법사탕 Dharma candy’이라고 부르고 싶다. 1 백일 수행이 끝난 귀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수행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읍니다. 하지만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일단 그가 수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한 단계 높은 가르침이 가능해진 것이다. 사실 이 학생에게 준 가르침은 그다지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8만 4천 가지 각각의 고통마다 모두 다른 약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여러분들 중에도 뭔가 얻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열심히 절을 하고 염불을 하고 참선 수행하라. 그렇게 하면 다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면 상심한다. 그러나 실제로 무엇을 얻기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별로없다. 그저 바라기만 할 뿐이고, 언제나 현실을 고통스러워하면서 정처 없이 방황하기만 한다.그러나 참선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참 자아를 발견해 완벽하게 다른 생명들과 일치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참 자아를 얻는다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자!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겠는가?
우리는 스스로 만든 작은 세계에 갇혀 산다. 마치 모기가 작은 병속에 들어가 ‘앵앵’거리며 탈출구를 찾듯, 모든 사람들은 이 고통의 연옥에서 헤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들이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데 방해가 된다. 연옥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감각에 더욱 집착한다. 무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고통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늙는 게 싫어.” “그와 관계는 끝났어. 너무 비참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니 믿어지지 않아.” 이 세상이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알면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지만 모르면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계속 고통을 만들어가면서 살 뿐이다.
Sunday, April 8, 2012
사막의 풀에서 배운다
사막의 풀에서 배운다
삶의 향기 구자분. 수필가
모하비 사막을 시속 75마일로 세 시간여 달리고 있다. 딩클링 댕글린, 그렇게 밤에우는 모래언덕이 있는 사막이리지만 아니다. 그저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의 연속이다. 불모지나 다름없어 보이는 모랫벌.
애리조나 특유의 늠름한 선인장대신 볼품없이 누리끼리한 생명체가 땅바닥에 버짝 엎디어 있다. 풀도 아니다. 나무도 아니다. 식물은 식물이되 소속이 애매해 보인다. 거의가 깡마르다못해 비비 꼬인 채로 부황든듯 비리비리하다. 어쩌다 간간 푸른 기운이 감돌며 움쑥 자란것도 있긴하나 기껏해야 무릎길이다.
일년 내내 강우량이 턱없이 부족한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다. 쨍쨍 내려쬐는 불볕더위 속, 열풍은 사정없이 몰아친다. 밤이면 얼어버릴 듯 급강하하는 기온, 무엇하나 생존여건에 바람직한 구석이란 탖아지질 않는다. 그래도 한 목숨 용케 견디고 버텨왔다. 장하기보다는 그 모진 독기가 오싹한니 겁난다.
저마다 살아내야 할 생의 무게가 다르다지만 그 생명 지켜내기까지 얾마나 힘들고 버겨웠으리랴. 얼마나 숨이 턱턱 막혔으랴, 얼마나 목이 말랐으랴., 억울하고 기막혀 소리소리 지르고 싶은 적인들 얾마나 숱했으랴.
'사막의 약방초'가 그 식물의 이름이란다. 오래 전 이 터에 자리잡고 산 인디언들의 만병통치약에서 지금은 항암제를 추출한다는 식물이다. 봄이면 자잔한 노란 꽃 피어 엶매맺은 다음, 무섭다 무서워 호환이라 불리우던 장티푸스의 특효약에다 폐렴 악재로 뭇사람을 살려낸 사막의 야생초, 제 한 몸 통쨀로 고나의 제단에 희생 제물로 바친 사랑의 다른 모습을 본다.
그렇구나,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되어 낮게 아주낮게 부복하고 썩어주고 죽어야만이 보다 큰 의미로 되살아난다고 하였던 그대로구나. 나라는 자아를, 나에 대한애착을 아낌없이 버리고 비워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한 그 경지, 까마득 아슴하더니 사막의 풀을 통해 조금은 짚히는 듯도 하다.
삶의 향기 구자분. 수필가
모하비 사막을 시속 75마일로 세 시간여 달리고 있다. 딩클링 댕글린, 그렇게 밤에우는 모래언덕이 있는 사막이리지만 아니다. 그저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의 연속이다. 불모지나 다름없어 보이는 모랫벌.
애리조나 특유의 늠름한 선인장대신 볼품없이 누리끼리한 생명체가 땅바닥에 버짝 엎디어 있다. 풀도 아니다. 나무도 아니다. 식물은 식물이되 소속이 애매해 보인다. 거의가 깡마르다못해 비비 꼬인 채로 부황든듯 비리비리하다. 어쩌다 간간 푸른 기운이 감돌며 움쑥 자란것도 있긴하나 기껏해야 무릎길이다.
일년 내내 강우량이 턱없이 부족한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다. 쨍쨍 내려쬐는 불볕더위 속, 열풍은 사정없이 몰아친다. 밤이면 얼어버릴 듯 급강하하는 기온, 무엇하나 생존여건에 바람직한 구석이란 탖아지질 않는다. 그래도 한 목숨 용케 견디고 버텨왔다. 장하기보다는 그 모진 독기가 오싹한니 겁난다.
저마다 살아내야 할 생의 무게가 다르다지만 그 생명 지켜내기까지 얾마나 힘들고 버겨웠으리랴. 얼마나 숨이 턱턱 막혔으랴, 얼마나 목이 말랐으랴., 억울하고 기막혀 소리소리 지르고 싶은 적인들 얾마나 숱했으랴.
'사막의 약방초'가 그 식물의 이름이란다. 오래 전 이 터에 자리잡고 산 인디언들의 만병통치약에서 지금은 항암제를 추출한다는 식물이다. 봄이면 자잔한 노란 꽃 피어 엶매맺은 다음, 무섭다 무서워 호환이라 불리우던 장티푸스의 특효약에다 폐렴 악재로 뭇사람을 살려낸 사막의 야생초, 제 한 몸 통쨀로 고나의 제단에 희생 제물로 바친 사랑의 다른 모습을 본다.
그렇구나,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되어 낮게 아주낮게 부복하고 썩어주고 죽어야만이 보다 큰 의미로 되살아난다고 하였던 그대로구나. 나라는 자아를, 나에 대한애착을 아낌없이 버리고 비워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한 그 경지, 까마득 아슴하더니 사막의 풀을 통해 조금은 짚히는 듯도 하다.
Saturday, April 7, 2012
나의 고질병 '잡동사니 증후군'
나의 고질병 '잡동사니 증후군'
'버리고 또 버려라. 줄이고 확 줄이자.' 올 봄 꼭 지킬 슬로건이다. 이상태로 가면 내가 수집(?)한 물류들에 묻혀 압사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패해졌다.
가구, 그릇, 옷, 신발, 가방, 액서사리, 사무용품은 좌판만 깔면 웬만한 중고품 가게는 거뜬히 차릴수준, 이런저런 미련 때문에 못 버리린 헌책, 신문, 잡지, 스크랩한 기사, 장난감, 철 지난 달력과 크리스마스카드, 오래된 편지 등을 보관하려면 아예 물품보관소를 차려야 할 판국이다.
하지만 못 버리는 데는 몇 가지 나름데로 이유가 있다. 누렇게 빛바랜 편지 속에는그리운 사람들의 사연이있고 고장난 장난감과 손 때묻은 동화책엔 내 목을 껴안던 고사리 같은 애들 손의 따스한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이크 넬슨이 쓴 잡동사니 증후군'에는 쉴 새없이 주변을 어지럽히거나 아무것도 버리지못한채 전전 긍긍 하며 산더미처럼 물건을 쌓아두고 사는 종류의 사람들을 '잡동사니 중독자' 라고 명명한다. 그에 의하면 '잡동시니'란 단순히 쓸모없는 물건만 뜻하지않고 삶에 지장을 주는 모든 정신적 방해물을 말한다. 넬슨도 한때 잡동사니 중독자였는데 그 생활을 청산하며 1.5ton의 잡동사니를 내다버린 뒤 '잡동사니 없는 삶을 위한 모임'을 창립하고 감사로 활동 중이다.
요즘 남편은 내가 혹 이 병을 앓고 있는지 확인차 분주하다. 타주로 이사간 친구는 마누라가 평생 모은 신문을 갖다 버리는데 천 불이나 허비했다며 차고에 쌓인 신문을 보며 은근히 찔러본다.
'천만에!' 라고 잡아 떼려다 움찔해서 집 안팎을 둘러본다. 움찔해서 집안팍을 둘러본다. 신문과 잡지는 읽은 뒤 할머니 친구집에 갖다드리는고로 스케쥴에 밀려 배달못해 눈덩이처럼 쌓인거라 일단 제외, 냉장고에 쌓아둔 음식물들은 포장마차로 하나는 거뜬히 차릴 수준이라 병이 심각한 것 같아 진땀이 난다.
알뜰한 체 하며 먹다남은 음식은 냉동실에 이름표와 날자적어 꼬리표를 달아뒀는데 햇수가 오래된게 수두룩, 이럴 땐 남편몰래 버리는게 상책이다.
차고는 창고가 된지 오래다. 대학졸업한 딸이 가져온 짐은 박스채 그냥있는데 허락없인 함부로 버리지도 못할 판국이니 시집갈 때까지 저대로 쌓여 있으려나!
욕망이란 전차에 탄 모든사람들은 버거운 물욕의 짐을지고 산다.
버리고 또, 버려라! 집안정리, 철 지난 옷 정리, 서랍정리, 서류정리, 문자 메세지와 이메일 정리, 해묵은 사랑 떠나보내기, 상처벋은 어제 추스러기 등 끊을것 끊고 버릴 것이 너무 많다. 무조건 간직하고 껴안는다고 사랑하는게 아니다. 비워둬야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적당한 작별은 추억을 더 아름답게 색칠한다.
버리는 것도 예술이다. 너무 쌓아두면 어느 순간 애물단지가 된다. 잡동사니는 작품을 산만하게 만든다. 위대한 예술품을 창조하기 위해선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하게 없애고 엑기스를 창출하는데 에너질를 모아야한다.
몸도 마음도 가뿐하게 살자. 내 인생의 다이어트! 몸도 마음도 추억도 아픔도 꽃잎 흩어지듯 그렇게 날려보내고 가볍게 이 찬란한 몸을 견디어 내리라.
'버리고 또 버려라. 줄이고 확 줄이자.' 올 봄 꼭 지킬 슬로건이다. 이상태로 가면 내가 수집(?)한 물류들에 묻혀 압사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패해졌다.
가구, 그릇, 옷, 신발, 가방, 액서사리, 사무용품은 좌판만 깔면 웬만한 중고품 가게는 거뜬히 차릴수준, 이런저런 미련 때문에 못 버리린 헌책, 신문, 잡지, 스크랩한 기사, 장난감, 철 지난 달력과 크리스마스카드, 오래된 편지 등을 보관하려면 아예 물품보관소를 차려야 할 판국이다.
하지만 못 버리는 데는 몇 가지 나름데로 이유가 있다. 누렇게 빛바랜 편지 속에는그리운 사람들의 사연이있고 고장난 장난감과 손 때묻은 동화책엔 내 목을 껴안던 고사리 같은 애들 손의 따스한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이크 넬슨이 쓴 잡동사니 증후군'에는 쉴 새없이 주변을 어지럽히거나 아무것도 버리지못한채 전전 긍긍 하며 산더미처럼 물건을 쌓아두고 사는 종류의 사람들을 '잡동사니 중독자' 라고 명명한다. 그에 의하면 '잡동시니'란 단순히 쓸모없는 물건만 뜻하지않고 삶에 지장을 주는 모든 정신적 방해물을 말한다. 넬슨도 한때 잡동사니 중독자였는데 그 생활을 청산하며 1.5ton의 잡동사니를 내다버린 뒤 '잡동사니 없는 삶을 위한 모임'을 창립하고 감사로 활동 중이다.
요즘 남편은 내가 혹 이 병을 앓고 있는지 확인차 분주하다. 타주로 이사간 친구는 마누라가 평생 모은 신문을 갖다 버리는데 천 불이나 허비했다며 차고에 쌓인 신문을 보며 은근히 찔러본다.
'천만에!' 라고 잡아 떼려다 움찔해서 집 안팎을 둘러본다. 움찔해서 집안팍을 둘러본다. 신문과 잡지는 읽은 뒤 할머니 친구집에 갖다드리는고로 스케쥴에 밀려 배달못해 눈덩이처럼 쌓인거라 일단 제외, 냉장고에 쌓아둔 음식물들은 포장마차로 하나는 거뜬히 차릴 수준이라 병이 심각한 것 같아 진땀이 난다.
알뜰한 체 하며 먹다남은 음식은 냉동실에 이름표와 날자적어 꼬리표를 달아뒀는데 햇수가 오래된게 수두룩, 이럴 땐 남편몰래 버리는게 상책이다.
차고는 창고가 된지 오래다. 대학졸업한 딸이 가져온 짐은 박스채 그냥있는데 허락없인 함부로 버리지도 못할 판국이니 시집갈 때까지 저대로 쌓여 있으려나!
욕망이란 전차에 탄 모든사람들은 버거운 물욕의 짐을지고 산다.
버리고 또, 버려라! 집안정리, 철 지난 옷 정리, 서랍정리, 서류정리, 문자 메세지와 이메일 정리, 해묵은 사랑 떠나보내기, 상처벋은 어제 추스러기 등 끊을것 끊고 버릴 것이 너무 많다. 무조건 간직하고 껴안는다고 사랑하는게 아니다. 비워둬야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적당한 작별은 추억을 더 아름답게 색칠한다.
버리는 것도 예술이다. 너무 쌓아두면 어느 순간 애물단지가 된다. 잡동사니는 작품을 산만하게 만든다. 위대한 예술품을 창조하기 위해선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하게 없애고 엑기스를 창출하는데 에너질를 모아야한다.
몸도 마음도 가뿐하게 살자. 내 인생의 다이어트! 몸도 마음도 추억도 아픔도 꽃잎 흩어지듯 그렇게 날려보내고 가볍게 이 찬란한 몸을 견디어 내리라.
Friday, April 6, 2012
서서평 선교사와 다미안 신부
서서평 선교사와 다미안 신부
삶의 향기 허종욱 한동대 교수
한센병은 1980년 다종약물치료법(MDT)이 개발되기 전까지많해도 완치가 쉽지않은 전염병으로 여겨졌다. 문둥병 또는 나병으로 불렀다. 기독교 선교사 중에는 한센환자들을 위해 생애를 헌신한 분들이 많다. 서서평(미국명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도 그중 한 명이다.
지난 17일 광주기독간호대학 오원기념관에서 서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예배 및 평전출전기념회가 열렸다. 1880년에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 서 선교사는 1912년 32세 미혼의 간호사로 미국 남장로교의 파송를 받아 광주등 전남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최초의 간호교육과 여성교육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공중보건과 복지분야교육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했다.
서 선교사는 한센 환자 수용소 여수 애향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여수 애양원은 ‘한센 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린는 최홍중 목사와 손양원 목사를 배출한 곳이다. 자신은 어린 환센 환자를 아들로 삼아 요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다른 선교사들이 한센 환자를 양자로 삼을 것을 권장했다. 서 선교사는 14명의 양자를 두었다.
서 선교사는 1934년 6월 26일 영양실조와 만성 풍토병으로 54세의 삶을 광주에서 마치고 소천했다. 그가남긴 유물은 입던 옷 한벌과 고무신 한 켤레뿐이었다. 사회장으로 광주시가 주최한 서 선교사의 장례식에는 그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기독교인들, 그의 돌봄을 받은 수 백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행렬에서 눈물바다를 이룽었다.
한센 환자를 돌보다 일생ㅇ을 마친 선교사가운데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 (Damien de Veuster 1840~1889) 도 잊을 수 없다.
다미안 신분는 하와이 섬 중 하나인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 환자를 동보다가 자신도 한셉병에 걸려 49세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다미안 신부는 1873년 33세에 당시 하와이 왕조가 건립한 한센 환자 격리 수용소인 몰로카이 섬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았다. 하와이 왕조의 카메하메하 5세는 하와이 여러 섬에 흩어져있던 한센 환자들을 이 섬으로 이주시켜 방치해 두었다. 다미안 신부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집을 짓고 관을 만들고 무덤을 파는 일들을 감당했다.
다미안 신부가 몇 년 동안 이곳 한센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 한센 환자들이 해변에 모여 나느는 이야기를 다미안 신부는 엿듣게 됐다.“자신이 한센 환자가 이니면서 우리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이 말을 들은 다미안 신부는 스스로 환센 환자가 되어 그들과 함계 딩굴면서 희생적으로 그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다 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그가 태어난 벨기에 루뱅에 안장되었다. 하와이 주민들의‘항의’로 그의 유품 등이 몰로카이로 옮겨져 ‘다미안 신부기념관’ 앞뜰에 안장되었다. 하와이주는 4월 15일을 ‘사랑의 순교자 다미안 신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의 동상은 워싱턴 연방의사당 로탄다에 하와이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있으며 하와이 주의회 의사당 앞에도 똑같은 동상이 서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두 선교사의 고귀한 정신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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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허종욱 한동대 교수
한센병은 1980년 다종약물치료법(MDT)이 개발되기 전까지많해도 완치가 쉽지않은 전염병으로 여겨졌다. 문둥병 또는 나병으로 불렀다. 기독교 선교사 중에는 한센환자들을 위해 생애를 헌신한 분들이 많다. 서서평(미국명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도 그중 한 명이다.
지난 17일 광주기독간호대학 오원기념관에서 서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예배 및 평전출전기념회가 열렸다. 1880년에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 서 선교사는 1912년 32세 미혼의 간호사로 미국 남장로교의 파송를 받아 광주등 전남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최초의 간호교육과 여성교육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공중보건과 복지분야교육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했다.
서 선교사는 한센 환자 수용소 여수 애향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여수 애양원은 ‘한센 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린는 최홍중 목사와 손양원 목사를 배출한 곳이다. 자신은 어린 환센 환자를 아들로 삼아 요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다른 선교사들이 한센 환자를 양자로 삼을 것을 권장했다. 서 선교사는 14명의 양자를 두었다.
서 선교사는 1934년 6월 26일 영양실조와 만성 풍토병으로 54세의 삶을 광주에서 마치고 소천했다. 그가남긴 유물은 입던 옷 한벌과 고무신 한 켤레뿐이었다. 사회장으로 광주시가 주최한 서 선교사의 장례식에는 그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기독교인들, 그의 돌봄을 받은 수 백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행렬에서 눈물바다를 이룽었다.
한센 환자를 돌보다 일생ㅇ을 마친 선교사가운데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 (Damien de Veuster 1840~1889) 도 잊을 수 없다.
다미안 신분는 하와이 섬 중 하나인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 환자를 동보다가 자신도 한셉병에 걸려 49세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다미안 신부는 1873년 33세에 당시 하와이 왕조가 건립한 한센 환자 격리 수용소인 몰로카이 섬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았다. 하와이 왕조의 카메하메하 5세는 하와이 여러 섬에 흩어져있던 한센 환자들을 이 섬으로 이주시켜 방치해 두었다. 다미안 신부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집을 짓고 관을 만들고 무덤을 파는 일들을 감당했다.
다미안 신부가 몇 년 동안 이곳 한센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 한센 환자들이 해변에 모여 나느는 이야기를 다미안 신부는 엿듣게 됐다.“자신이 한센 환자가 이니면서 우리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이 말을 들은 다미안 신부는 스스로 환센 환자가 되어 그들과 함계 딩굴면서 희생적으로 그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다 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그가 태어난 벨기에 루뱅에 안장되었다. 하와이 주민들의‘항의’로 그의 유품 등이 몰로카이로 옮겨져 ‘다미안 신부기념관’ 앞뜰에 안장되었다. 하와이주는 4월 15일을 ‘사랑의 순교자 다미안 신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의 동상은 워싱턴 연방의사당 로탄다에 하와이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있으며 하와이 주의회 의사당 앞에도 똑같은 동상이 서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두 선교사의 고귀한 정신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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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pril 4, 2012
숭산 대선사 가르침 무상관
무상관 • 無常觀 Insight into Impermanence
인생8고 • 人生八苦 The Eight Sufferings
生Birth 老Old age 病 Sickness 死Death 四苦The Four Sufferings
애 별 리 고 愛 別 離 苦 Being separated from those you love
원 증 회 고 怨 憎 會 苦 being in the presence of those you dislike
구 불 득 고 求 不 得 苦 Not getting what you desire
오 음 성 고 五 陰 盛 苦 The imbalance of the five skandhas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
생로병사는 모든 인간이 격는 고통이다.
우선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구 아앙……”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으로서 이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얘기다. 아기가 태어나면 ‘구아앙’ 하는 소리로 우는데, “구’란 ‘求’한다’는 뜻이고 ‘아 我’란 ‘나’를 말한다. 즉 구아란 “나를 구해주세요” 하는 말이다. (하하하)
태어나면서 “아, 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 기쁘다” 하면서 웃고 태어나는 아기가 있는가? 아기들은 엄마 배 속에서 나오면서 고통과 추위에 떨면서 양수로 뒤범벅된 몸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의사들은 아기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탯줄을 끊는다. 사방천지가 피로 얼룩져있다. 이처럼 인간은 나면서부터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즐거운 일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시작이다.
그러나 태어남은 시작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부모들은 이 고도의 경쟁사회에서 자식들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 오직 투쟁만을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것을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겪을 고통의 실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 대한 모든 걱정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하면서 아이들의 성공을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자라면 늙은 나를 보호해주겠지, 내 지팡이가 돼주겠지’ 하는 마음, 혹은 이이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가 계속 이세상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부모들은 이이들을 잘 먹이고 일히고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한다고 밀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헌신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가히 세계적이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열정과 기대는 결국 집착을 불러일으켜 고통을 만든다.
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마국에 이민와서 열심히 일하며 산다. 남들보다 덜먹고 덜입고 덜 자면서 쉬지않고 일해 큰돈을 모은다. 그러다 몸이 망가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결국 무엇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거지? 하며 허무해 한다. 내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나와 절친한 한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벌린 사업이 크게 성공해 돈을 많이 벌었다. 아이들도 모두 일류대학을 졸업했고, 다들 결혼해 아이낳고 잘 살고 있다. 그는 여행도 여기저기 많이다녀 안목도 넓었다. 어느 날 그와 차를 마시다가 내가 물었다.
“이선생, 당신은 아주 많은 일을 성취했고 경험했읍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 성공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은 결국 무엇을 얻었읍니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읍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였지만 실제로 그의마음은 텅 비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보통의 삶이다. 가지려고 아무리 버둥거려 봐야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지만 늙는것도 고통이다. 왜 늙는 것이 고통인가 우선 나이들면 힘이 없어져 사람들이 무시한다. 노인들이 가끔 실수라도 하면 젊은이들은 깔깔대고 웃어댄다. 노인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젊은이도 있다. 늙는다는것은 슬픈일이다. 젊었을 때 잘하던 일도 아니들면 서툴어진다. 모습도 추하게 변해서 얼굴엔 주름이 생기고, 시력은 흐려지며 귀도 잘 안들린다. 또 제대로 걷지를 못해 지팡이가 필요해지기도 한다. 머리카락도 빠지고 치아도 빠진다. 젊음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슬픈일이 아닐 수없다. 늙는것을 고통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있다
늙음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30여년 전 동경에 있을 때 친구의 딸이 찾아왔다. 그녀는 이제 자기나이가 마흔을 넘기니 늙는다는 것을 실가마게 돼 너무나 슬프다고 불평했다. 주름진 자기얼굴을 보기싫고 그것이 늘 신경이 쓰여 절에와도 염불이 안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그녀보다 늙은 사람들도 절에와서 열심히 염불을 하는데 그녀는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거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에 절에도 오지 않게 되었다.
그후6개월쯤 지난 뒤 웬 젊은 여자가 나를 찾아와 아는체를 했는데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햇다. 간신히 살펴보니 아! 이 여자가 마로 ‘늙음’을 한탄하며 발길을 끊었던 친구의 딸이 아닌가? 나는 깜짝놀랐다. 그녀는 성형수술로 주름을 완전히 없앤 것이다.
그러나 수술로 얼굴의 주름을 없앴다고 해서 나이까지 없앨 수 있는 것일까? 그여자는 수술로 잠시 행복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결국 주름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그때는 아마 처음보다 더 큰 슬픔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고통이며, 늙고 죽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언제나 죽음의 고통앞에 놓여있다. 나이가 든다는것이 슬프다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바란다. 100살 먹은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기도 한다. 언젠가 120살 먹은 사람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타리 필름을 본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이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며 죽음과 싸워 이기고 있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TV에서 본 그의 얼굴은 슬퍼보였으며 늙은 원숭이 같았다. 눈믈, 콧물을 계속 흘려대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깔깔거리기도 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약간 두려움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퇴화하기만 할 뿐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찾아오는 병마도 또한 고통이다. 젊었을 때라면 “나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병의 고통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들이 아니다. 똥, 오줌도 마음대로 조절하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소화도 잘 안되고, 숨을 쉬기도 힘들다. 두 다리는 힘이 빠져 걸어다니기조차 힘들어져 그저 누워있기만 해야 한다.
나이 든 사람만 큰 병이 드는 것이 아니다. 요즘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나 약물중독을 가지고 있거나 불치병을 않는 어린이들도 많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큰병이나면 수술해야 하고 병상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본인 부주의가 아닌데도 에이즈AIDS에 감염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눈, 귀, 코, 폐의 질환에서 오는 신체의 고통에 시달린다.
가끔 병원에 가보면 모든사람이 다 환자같다. 병문안을 온 사람들도 슬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 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환자들이나 가족들 모두 얼굴이 굳어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친거야.” 그들은 원망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아니, 병원까지 갈것도 없이 그냥 거리를 걸어봐도 도처에서 우리는 육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요즘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각종 불치병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또 한편에선 이를 치유하기위한 각종약과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왜 부처님께서 그렇게 좋은 환경을 버리고 출가를 했는지 좀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왜 인간들이 이런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부처님께서 이 모든고통이 근원을 캐내기 위해 수행을 시작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영원히 살았는가? 아니다. 그 역시 죽었다. 아니, 삶도, 죽음도, 병도, 늙음도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이자 착각일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참 나’란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아무리 부자이고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일시적인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생로병사가 없는 본성을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 몸 역시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드는 것, 그리하여 결국 죽는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몸은 단지 렌터카일 뿐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때가되면 다른 렌터카로 바꿔타야 한다. 나는 한국산 렌터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미국, 프랑스 제를 가지고 있다. 내 렌터카는 별로 좋지않아 언젠가는 독일제로 바꿔야 할 것 같다.(하하하) 그러나 렌터카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것은 렌터카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에만 집착해있지, 운전기사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상처를 입을까. 잃어버릴까. 차에만 정신을 쏟을 뿐 기사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산다. 기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차를 바꿀때도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물, 땅, 공기, 불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우리 렌터카는 생로병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운전기사에게는 생로병사가 따로없다. 운전기사, 즉 우리의 ‘참, 자아’를 알아야 한다. 이것만이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최선의 처방이다.
인생8고 • 人生八苦 The Eight Sufferings
生Birth 老Old age 病 Sickness 死Death 四苦The Four Sufferings
애 별 리 고 愛 別 離 苦 Being separated from those you love
원 증 회 고 怨 憎 會 苦 being in the presence of those you dislike
구 불 득 고 求 不 得 苦 Not getting what you desire
오 음 성 고 五 陰 盛 苦 The imbalance of the five skandhas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
생로병사는 모든 인간이 격는 고통이다.
우선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구 아앙……”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으로서 이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얘기다. 아기가 태어나면 ‘구아앙’ 하는 소리로 우는데, “구’란 ‘求’한다’는 뜻이고 ‘아 我’란 ‘나’를 말한다. 즉 구아란 “나를 구해주세요” 하는 말이다. (하하하)
태어나면서 “아, 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 기쁘다” 하면서 웃고 태어나는 아기가 있는가? 아기들은 엄마 배 속에서 나오면서 고통과 추위에 떨면서 양수로 뒤범벅된 몸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의사들은 아기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탯줄을 끊는다. 사방천지가 피로 얼룩져있다. 이처럼 인간은 나면서부터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즐거운 일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시작이다.
그러나 태어남은 시작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부모들은 이 고도의 경쟁사회에서 자식들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 오직 투쟁만을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것을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겪을 고통의 실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 대한 모든 걱정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하면서 아이들의 성공을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자라면 늙은 나를 보호해주겠지, 내 지팡이가 돼주겠지’ 하는 마음, 혹은 이이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가 계속 이세상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부모들은 이이들을 잘 먹이고 일히고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한다고 밀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헌신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가히 세계적이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열정과 기대는 결국 집착을 불러일으켜 고통을 만든다.
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마국에 이민와서 열심히 일하며 산다. 남들보다 덜먹고 덜입고 덜 자면서 쉬지않고 일해 큰돈을 모은다. 그러다 몸이 망가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결국 무엇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거지? 하며 허무해 한다. 내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나와 절친한 한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벌린 사업이 크게 성공해 돈을 많이 벌었다. 아이들도 모두 일류대학을 졸업했고, 다들 결혼해 아이낳고 잘 살고 있다. 그는 여행도 여기저기 많이다녀 안목도 넓었다. 어느 날 그와 차를 마시다가 내가 물었다.
“이선생, 당신은 아주 많은 일을 성취했고 경험했읍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 성공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은 결국 무엇을 얻었읍니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읍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였지만 실제로 그의마음은 텅 비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보통의 삶이다. 가지려고 아무리 버둥거려 봐야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지만 늙는것도 고통이다. 왜 늙는 것이 고통인가 우선 나이들면 힘이 없어져 사람들이 무시한다. 노인들이 가끔 실수라도 하면 젊은이들은 깔깔대고 웃어댄다. 노인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젊은이도 있다. 늙는다는것은 슬픈일이다. 젊었을 때 잘하던 일도 아니들면 서툴어진다. 모습도 추하게 변해서 얼굴엔 주름이 생기고, 시력은 흐려지며 귀도 잘 안들린다. 또 제대로 걷지를 못해 지팡이가 필요해지기도 한다. 머리카락도 빠지고 치아도 빠진다. 젊음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슬픈일이 아닐 수없다. 늙는것을 고통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있다
늙음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30여년 전 동경에 있을 때 친구의 딸이 찾아왔다. 그녀는 이제 자기나이가 마흔을 넘기니 늙는다는 것을 실가마게 돼 너무나 슬프다고 불평했다. 주름진 자기얼굴을 보기싫고 그것이 늘 신경이 쓰여 절에와도 염불이 안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그녀보다 늙은 사람들도 절에와서 열심히 염불을 하는데 그녀는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거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에 절에도 오지 않게 되었다.
그후6개월쯤 지난 뒤 웬 젊은 여자가 나를 찾아와 아는체를 했는데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햇다. 간신히 살펴보니 아! 이 여자가 마로 ‘늙음’을 한탄하며 발길을 끊었던 친구의 딸이 아닌가? 나는 깜짝놀랐다. 그녀는 성형수술로 주름을 완전히 없앤 것이다.
그러나 수술로 얼굴의 주름을 없앴다고 해서 나이까지 없앨 수 있는 것일까? 그여자는 수술로 잠시 행복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결국 주름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그때는 아마 처음보다 더 큰 슬픔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고통이며, 늙고 죽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언제나 죽음의 고통앞에 놓여있다. 나이가 든다는것이 슬프다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바란다. 100살 먹은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기도 한다. 언젠가 120살 먹은 사람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타리 필름을 본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이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며 죽음과 싸워 이기고 있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TV에서 본 그의 얼굴은 슬퍼보였으며 늙은 원숭이 같았다. 눈믈, 콧물을 계속 흘려대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깔깔거리기도 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약간 두려움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퇴화하기만 할 뿐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찾아오는 병마도 또한 고통이다. 젊었을 때라면 “나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병의 고통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들이 아니다. 똥, 오줌도 마음대로 조절하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소화도 잘 안되고, 숨을 쉬기도 힘들다. 두 다리는 힘이 빠져 걸어다니기조차 힘들어져 그저 누워있기만 해야 한다.
나이 든 사람만 큰 병이 드는 것이 아니다. 요즘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나 약물중독을 가지고 있거나 불치병을 않는 어린이들도 많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큰병이나면 수술해야 하고 병상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본인 부주의가 아닌데도 에이즈AIDS에 감염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눈, 귀, 코, 폐의 질환에서 오는 신체의 고통에 시달린다.
가끔 병원에 가보면 모든사람이 다 환자같다. 병문안을 온 사람들도 슬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 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환자들이나 가족들 모두 얼굴이 굳어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친거야.” 그들은 원망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아니, 병원까지 갈것도 없이 그냥 거리를 걸어봐도 도처에서 우리는 육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요즘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각종 불치병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또 한편에선 이를 치유하기위한 각종약과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왜 부처님께서 그렇게 좋은 환경을 버리고 출가를 했는지 좀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왜 인간들이 이런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부처님께서 이 모든고통이 근원을 캐내기 위해 수행을 시작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영원히 살았는가? 아니다. 그 역시 죽었다. 아니, 삶도, 죽음도, 병도, 늙음도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이자 착각일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참 나’란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아무리 부자이고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일시적인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생로병사가 없는 본성을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 몸 역시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드는 것, 그리하여 결국 죽는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몸은 단지 렌터카일 뿐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때가되면 다른 렌터카로 바꿔타야 한다. 나는 한국산 렌터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미국, 프랑스 제를 가지고 있다. 내 렌터카는 별로 좋지않아 언젠가는 독일제로 바꿔야 할 것 같다.(하하하) 그러나 렌터카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것은 렌터카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에만 집착해있지, 운전기사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상처를 입을까. 잃어버릴까. 차에만 정신을 쏟을 뿐 기사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산다. 기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차를 바꿀때도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물, 땅, 공기, 불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우리 렌터카는 생로병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운전기사에게는 생로병사가 따로없다. 운전기사, 즉 우리의 ‘참, 자아’를 알아야 한다. 이것만이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최선의 처방이다.
Tuesday, April 3, 2012
소승불교
소승불교, 小僧佛敎, HINAYANA BUDDHISM
무상관, 無常觀, Insight into impermanence. 영원한 것은 없다는 통찰
부정관, 不淨觀, Insight into impurity 깨끗한 것이 없다는 통찰
무아관, 無我觀, Insight into nonself '나'는 없다는 통찰
소승불교
보리수나무 아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었고, 처음 펴신 가르침이 바로 소승불교이다. 부처님은 우리네 삶은 고통 그 자체이며,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설파하셨다. 부처님이 설하신 소승불교는 세 가지 통찰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무상관, 부정관, 무아관이 그것이다.
'무상관'은 우리 삶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조차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한다. 이것이 우주의 기본 성질이다.
아침 8시쯤 서울 강북에서 강남으로 한강 다리를 건넌다고 하자.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다시 강남에서 강북으로 건넌다고 하자. 그때 바라보는 강은 한 시간 전의 그 강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다. 8시와 9시에 바라보는 물은 똑같은 물이 아니다. 물은 계속 흘러간다. 물론 한강은 여전히 같은 한강이지만 아침 8시에 보았던 강물은 이미 바다로 흘러갔다. 따라서 아침 8시에 우리가 불렀던 '한강'은 아침 9시에 부르는 '한강'과는 다르다. 순간순간 강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이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떳을 때 우리 몸은 달라져 있다. 아주 미묘한 변화가 잠자고 있는 동안 일어난 것이다. 전날 먹은 음식이 소화되어 있을 테고, 얼굴이나 치아나 피부생태도 전날과 다를 것이다. 음식물은 끊임없이 대변과 소변으로 변하고 있을 것이며, 얼굴은 이미 어제보다 늙었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눈치채지 못할 지라도.
사람의 몸은 매 세포가 매일매일 교체되어 7년마다 완전히 탈바꿈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한다. 순간마다 몸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다. 누군가 "10년 전 나는 파리에 갔었다"고 얘기한다고 하자. 사실 그건 완전히 엉터리같은 소리다. 바로 이 순간 말하는 몸과는 다른 육신인 것이다.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한다.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오래 전 이 지구는 태양에서 나왔고 달은 지구에서 나왔다고 한다. 미래의 어느 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태양에너지는 완전히 소진해서 점점 차가워질 것이다. 태양 에너지가 멈추면 지구 역시 점점 차가워진다. 모든 생물은 살아남지 못한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며, 우리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텅 빈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깡그리 사라질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 영원하다고 믿으면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 마음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세상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지 못하게 덮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현상세계를 제대로 보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욕망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들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은 곧 시라 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쥐고 흔들어대지 못할 것이다. 고통이란 바로 이렇게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내 삶은 아무 문제없어,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아마 이런 사람들은 현재 사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부자이고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무상한 것들을 붙잡고 욕심을 내고 언제나 자기마음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간다. ‘좋고 싫은 것’을 엄밀히 구분해놓고 이것을 진리처럼 껴안고 산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제대로 바라본다면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며, 외부 상황이 변해도 별로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곧 사라지는데 왜 집착하는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두 남녀가 결혼을 한다. 신혼초기에는 “아! 나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을 드디어 찾았어. 너무 행복해”라며 좋아할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경험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얼마나 계속될까? 1년, 2년? 아마 3년 이상 이런 느낌을 가지고 산다면 아주 특별한 커풀일 것이다. 보통 3년 정도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변한다.
“난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그들은 급기야 갈라서고 고통 받는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계속 유지해 나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선 이 세상이 무상함을 먼저 알고 아무것도 붙잡지 말고 다 내려놓아라. 다 놓아버려라.
일부 소승불교와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는 승려들이 몸의 무상함을 경험하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참선수행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몸이 집착하는 욕망을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무상관이다
소승불교의 두 번째 통찰은 ‘부정관不淨觀’ 이다.
일체가 깨끗하지 않다고 보는 생각이다.육체 그 자체를 더럽다고 보는 경우도 있고 마음의 욕망을 더럽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더러움이란 무엇인가.
우리 앞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고 하자. 아주 유명한 모델이나 배우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그녀는 예쁘게 화장을 하고 멋있는 머리모양을 갖추고 있으며, 아름다운 옷을 입고 비싼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 목에는 10캐럿짜리 다이야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다. 하지만 그녀의 몸안에는 여느사람과 마찬가지로 똥이 들어있다. 화려한 겉모습만 보면 안에 들어 있는 똥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을지 모른다. 일시적인 외양이나 몸, 화장, 옷, 다이야몬드에 현혹돼 ‘똥’ 생각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욕망과 집착은 우리 삶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갈망하도록 만든다.
매일 샤워를 하던 사람이 하루, 이틀 샤워를 안 한다고 치자. 이런 상태에서 사무실에 들어오면 다른 사람들이 금방 알아챌 것이다. 좋은 냄새가 안 날 터이고 몸에 더러움이 묻어 있을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은 좋지 않은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더러우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몸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나쁜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이야기는 사람 몸이 본래 더럽다는 말이다. 이것은 좋다. 나쁘다에 문제가 아니라 원래 우리의 상태가 그렇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것이 깨끗하지 않다는 의미의 ‘부정不淨’ 이다.
그러나 본래 ‘더러움’도 더러움이 아니다. 깨끗하고 더럽다는 것도 다 우리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은 똥을 싫어한다. 하지만 동물들은 똥을 먹는다. 인간이 싼 똥을 먹는 구더기, 새, 개미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동물들은 서로의 똥을 먹기도 한다. 말은 자기네 똥이 널려있는 풀 위에 산다. 양은 똥으로 더렵혀진 풀을 먹는다. 그리고 아시아의 몇몇 나라에서는 사람 똥으로 돼지를 키워 아주 비싸게 팔기도 한다.
이런 동물이나 곤충들의 의식에는 인간이 생각하듯 똥이 더럽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박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더럽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똥은 더러워서 싫다.”
“이러이러한 것은 더럽다.”
“나는 저런 사람은 싫어, 이런 사람이 좋아.”
그러한 생각들이 더럽고 깨끗한 것을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고통을 만들기 싫다면 더럽고 깨끗한 것을 만들어내지 말라. 생각이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만드는 더러움이란 결국 우리마음이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용심이 많으면 마음은 더러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돈이나 권력, 성性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럽다’고 하는 것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순수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어떤 집착이나 열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더러워지고 오염된다. 하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면 마음을 더럽히는 것들을 바로 볼 수 있어서 욕심을 떨쳐낼 수 있게 된다.
소승불교의 세 번째 통찰인 ‘無我觀은 내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항상 ‘나’만을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좋아, 나는 저 사람이 싫어.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그러나 본래 이 ‘나’라는 것은 없다.’나’라는 것 역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나’라는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그의 말을 뒤집어보자. 자, 그렇다면 생각을 완전히 끊으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無我觀 수행은 우리 마음을 아주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은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습관, 버릇의 결합일 뿐이다. ‘나’라는 것은 생각, 감정, 인식, 충동, 의식들이 끊임 없이 서로 반응해서 일시적으로 모인 결과이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다섯 개가 뭉친 무더기라는 뜻이다.
당신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왔는가? 당신 스스로 결정한 것인가? 내 얼굴, 내 부모, 내 나라 이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택한 것인가?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진정 이 같은 물음에 답을 찾고 싶다면, 이 고해의 세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참선 수행을 하라.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고통스런 상황을 그저 받아드릴 뿐이다. 아니,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지 모르며,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단지 사회적 상황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나온 ‘생각’들일 뿐이다.
내 주변에는 아주 훌륭한 교육을 받고 바쁘게 사시는 스님 한 분 계셨다. 그는 미국의 유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많은 절을 세우기도 했다.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큰 소망이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절을 짓고 불교대학도 세워 학장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포교에 열심인 그 스님을 존경하고 따랐다. 스님은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느라 참선 수행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스님을 마날 때마다 “큰절과 불교대학을 짓는 일도 좋지만 수행하는 일만이 우리자신을 찾게 해줍니다. 수행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예, 예, 일이 끝나는 대로 참선 수행할 겁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지 한달 뒤 그는 뇌졸중으로 입원해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진정 그가 원하는 것이었는가? 박사학위? 불교 재학? 훌륭한 절? 이 모든 것들이 정녕 우리의 삶을 고해에서 건져준다는 것인가? 이 짧은 인생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죽으면 무엇을 가져갈 수 있는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空手來 空手去)’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독교 속담에는 ‘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도 있다.이 세상에 나서 무엇을 얼마나 성취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몸조차 가져갈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극도의 허무주의자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그렇다면 자살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이 아니다.
내 말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의미나 이유 혹은 선택이란 결국 이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보탬이 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유이다. 이것을 얻으려면 우선 참선수행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無我觀이다.
흔히 ‘나’ 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나’란 어디에 있는가? 얼마나 큰가? 어떻게 생겼나? 무슨 색깔인가? 어디에 놓고 다니는가? 우리 내면을 깊이 바라본다면 실제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께달음이 바로 소승불교의 목적인 ‘열반’을 의미한다. 완벽한 정적과 소멸의 상태이다. 마음과 마음이 만드는 고통이 완벽하게 空 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기쁨을 얻게 된다. 그 경지에서는 오고 가는 것도 없고, 삶도 죽음도 없으며, 행복도 슬픔도 없다.
소승불교의 세가지 통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무상관, 無常觀, Insight into impermanence. 영원한 것은 없다는 통찰
부정관, 不淨觀, Insight into impurity 깨끗한 것이 없다는 통찰
무아관, 無我觀, Insight into nonself '나'는 없다는 통찰
소승불교
보리수나무 아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었고, 처음 펴신 가르침이 바로 소승불교이다. 부처님은 우리네 삶은 고통 그 자체이며,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설파하셨다. 부처님이 설하신 소승불교는 세 가지 통찰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무상관, 부정관, 무아관이 그것이다.
'무상관'은 우리 삶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조차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한다. 이것이 우주의 기본 성질이다.
아침 8시쯤 서울 강북에서 강남으로 한강 다리를 건넌다고 하자.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다시 강남에서 강북으로 건넌다고 하자. 그때 바라보는 강은 한 시간 전의 그 강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다. 8시와 9시에 바라보는 물은 똑같은 물이 아니다. 물은 계속 흘러간다. 물론 한강은 여전히 같은 한강이지만 아침 8시에 보았던 강물은 이미 바다로 흘러갔다. 따라서 아침 8시에 우리가 불렀던 '한강'은 아침 9시에 부르는 '한강'과는 다르다. 순간순간 강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이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떳을 때 우리 몸은 달라져 있다. 아주 미묘한 변화가 잠자고 있는 동안 일어난 것이다. 전날 먹은 음식이 소화되어 있을 테고, 얼굴이나 치아나 피부생태도 전날과 다를 것이다. 음식물은 끊임없이 대변과 소변으로 변하고 있을 것이며, 얼굴은 이미 어제보다 늙었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눈치채지 못할 지라도.
사람의 몸은 매 세포가 매일매일 교체되어 7년마다 완전히 탈바꿈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한다. 순간마다 몸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다. 누군가 "10년 전 나는 파리에 갔었다"고 얘기한다고 하자. 사실 그건 완전히 엉터리같은 소리다. 바로 이 순간 말하는 몸과는 다른 육신인 것이다.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한다.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오래 전 이 지구는 태양에서 나왔고 달은 지구에서 나왔다고 한다. 미래의 어느 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태양에너지는 완전히 소진해서 점점 차가워질 것이다. 태양 에너지가 멈추면 지구 역시 점점 차가워진다. 모든 생물은 살아남지 못한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며, 우리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텅 빈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깡그리 사라질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 영원하다고 믿으면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 마음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세상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지 못하게 덮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현상세계를 제대로 보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욕망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들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은 곧 시라 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쥐고 흔들어대지 못할 것이다. 고통이란 바로 이렇게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내 삶은 아무 문제없어,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아마 이런 사람들은 현재 사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부자이고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무상한 것들을 붙잡고 욕심을 내고 언제나 자기마음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간다. ‘좋고 싫은 것’을 엄밀히 구분해놓고 이것을 진리처럼 껴안고 산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제대로 바라본다면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며, 외부 상황이 변해도 별로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곧 사라지는데 왜 집착하는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두 남녀가 결혼을 한다. 신혼초기에는 “아! 나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을 드디어 찾았어. 너무 행복해”라며 좋아할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경험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얼마나 계속될까? 1년, 2년? 아마 3년 이상 이런 느낌을 가지고 산다면 아주 특별한 커풀일 것이다. 보통 3년 정도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변한다.
“난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그들은 급기야 갈라서고 고통 받는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계속 유지해 나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선 이 세상이 무상함을 먼저 알고 아무것도 붙잡지 말고 다 내려놓아라. 다 놓아버려라.
일부 소승불교와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는 승려들이 몸의 무상함을 경험하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참선수행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몸이 집착하는 욕망을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무상관이다
소승불교의 두 번째 통찰은 ‘부정관不淨觀’ 이다.
일체가 깨끗하지 않다고 보는 생각이다.육체 그 자체를 더럽다고 보는 경우도 있고 마음의 욕망을 더럽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더러움이란 무엇인가.
우리 앞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고 하자. 아주 유명한 모델이나 배우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그녀는 예쁘게 화장을 하고 멋있는 머리모양을 갖추고 있으며, 아름다운 옷을 입고 비싼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 목에는 10캐럿짜리 다이야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다. 하지만 그녀의 몸안에는 여느사람과 마찬가지로 똥이 들어있다. 화려한 겉모습만 보면 안에 들어 있는 똥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을지 모른다. 일시적인 외양이나 몸, 화장, 옷, 다이야몬드에 현혹돼 ‘똥’ 생각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욕망과 집착은 우리 삶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갈망하도록 만든다.
매일 샤워를 하던 사람이 하루, 이틀 샤워를 안 한다고 치자. 이런 상태에서 사무실에 들어오면 다른 사람들이 금방 알아챌 것이다. 좋은 냄새가 안 날 터이고 몸에 더러움이 묻어 있을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은 좋지 않은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더러우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몸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나쁜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이야기는 사람 몸이 본래 더럽다는 말이다. 이것은 좋다. 나쁘다에 문제가 아니라 원래 우리의 상태가 그렇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것이 깨끗하지 않다는 의미의 ‘부정不淨’ 이다.
그러나 본래 ‘더러움’도 더러움이 아니다. 깨끗하고 더럽다는 것도 다 우리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은 똥을 싫어한다. 하지만 동물들은 똥을 먹는다. 인간이 싼 똥을 먹는 구더기, 새, 개미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동물들은 서로의 똥을 먹기도 한다. 말은 자기네 똥이 널려있는 풀 위에 산다. 양은 똥으로 더렵혀진 풀을 먹는다. 그리고 아시아의 몇몇 나라에서는 사람 똥으로 돼지를 키워 아주 비싸게 팔기도 한다.
이런 동물이나 곤충들의 의식에는 인간이 생각하듯 똥이 더럽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박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더럽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똥은 더러워서 싫다.”
“이러이러한 것은 더럽다.”
“나는 저런 사람은 싫어, 이런 사람이 좋아.”
그러한 생각들이 더럽고 깨끗한 것을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고통을 만들기 싫다면 더럽고 깨끗한 것을 만들어내지 말라. 생각이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만드는 더러움이란 결국 우리마음이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용심이 많으면 마음은 더러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돈이나 권력, 성性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럽다’고 하는 것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순수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어떤 집착이나 열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더러워지고 오염된다. 하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면 마음을 더럽히는 것들을 바로 볼 수 있어서 욕심을 떨쳐낼 수 있게 된다.
소승불교의 세 번째 통찰인 ‘無我觀은 내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항상 ‘나’만을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좋아, 나는 저 사람이 싫어.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그러나 본래 이 ‘나’라는 것은 없다.’나’라는 것 역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나’라는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그의 말을 뒤집어보자. 자, 그렇다면 생각을 완전히 끊으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無我觀 수행은 우리 마음을 아주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은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습관, 버릇의 결합일 뿐이다. ‘나’라는 것은 생각, 감정, 인식, 충동, 의식들이 끊임 없이 서로 반응해서 일시적으로 모인 결과이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다섯 개가 뭉친 무더기라는 뜻이다.
당신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왔는가? 당신 스스로 결정한 것인가? 내 얼굴, 내 부모, 내 나라 이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택한 것인가?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진정 이 같은 물음에 답을 찾고 싶다면, 이 고해의 세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참선 수행을 하라.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고통스런 상황을 그저 받아드릴 뿐이다. 아니,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지 모르며,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단지 사회적 상황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나온 ‘생각’들일 뿐이다.
내 주변에는 아주 훌륭한 교육을 받고 바쁘게 사시는 스님 한 분 계셨다. 그는 미국의 유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많은 절을 세우기도 했다.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큰 소망이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절을 짓고 불교대학도 세워 학장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포교에 열심인 그 스님을 존경하고 따랐다. 스님은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느라 참선 수행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스님을 마날 때마다 “큰절과 불교대학을 짓는 일도 좋지만 수행하는 일만이 우리자신을 찾게 해줍니다. 수행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예, 예, 일이 끝나는 대로 참선 수행할 겁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지 한달 뒤 그는 뇌졸중으로 입원해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진정 그가 원하는 것이었는가? 박사학위? 불교 재학? 훌륭한 절? 이 모든 것들이 정녕 우리의 삶을 고해에서 건져준다는 것인가? 이 짧은 인생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죽으면 무엇을 가져갈 수 있는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空手來 空手去)’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독교 속담에는 ‘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도 있다.이 세상에 나서 무엇을 얼마나 성취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몸조차 가져갈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극도의 허무주의자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그렇다면 자살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이 아니다.
내 말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의미나 이유 혹은 선택이란 결국 이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보탬이 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유이다. 이것을 얻으려면 우선 참선수행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無我觀이다.
흔히 ‘나’ 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나’란 어디에 있는가? 얼마나 큰가? 어떻게 생겼나? 무슨 색깔인가? 어디에 놓고 다니는가? 우리 내면을 깊이 바라본다면 실제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께달음이 바로 소승불교의 목적인 ‘열반’을 의미한다. 완벽한 정적과 소멸의 상태이다. 마음과 마음이 만드는 고통이 완벽하게 空 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기쁨을 얻게 된다. 그 경지에서는 오고 가는 것도 없고, 삶도 죽음도 없으며, 행복도 슬픔도 없다.
소승불교의 세가지 통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Sunday, April 1, 2012
불교의 구성
불교의 구성 • 佛敎 構成 The Structure of Buddhism
1.불보佛寶 The Precious One Which is the Buddhism⇒신앙적信仰的 the object of faith ⇒감정적情的 emotional
이고득락 離苦得樂 Departing from pain and attaining pleasure ⇒깊은명상定 Samadhi ⇒아름다움美 beauty ⇒믿음信 faith
2.법보法寶 The Precious One which is the Dharma ⇒哲學的 Philosophical ⇒ 知的 intellectual
전미개오轉迷開悟 Going from ignorance to enlightenment ⇒지혜慧 prajna ⇒진리眞 truth ⇒ 이해解 understanding
3.僧寶 The Precious One which is the sangha ⇒ 倫理的 ethical ⇒의지적 意的 mental
지악수선止惡修善 Putting an end to evil and practicing good ⇒계율 戒 sila ⇒선함善 good ⇒실천行 practice
※.신성함聖 holiness moksha —해탈解脫 liberation
일반적으로 인간의 의식은 지성, 감정, 의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쁨이나 고통은 감정에서 나오고, 사물에 대한 인식은 지성에서 나오고, 행동은 의지에서 나온다. 불교의 목적이란 다름아닌 ‘어떻게 하면 이 세가지를 조화롭게 사용해서 이 세상에 도움을 줄 것인가? 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의식의 균형을 상실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지성, 감정, 의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거나 조화롭게 쓰지 못하면, 오히려 우리의 본성을 발견하는 데 장애가 될 뿐이다. 그리하여 바른 길을 잃어버리고, 내 인생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고통으로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불교는 여기에 세가지 처방을 제시한다. 바로 불 • 법 • 승 (佛,法,僧) 삼보가 그것이다. 이 처방들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종국에는 우리의 본성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불보 佛寶 The Treasure od Buddha
보통 불교에 입문할 때, 우리는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만 믿는다. “아! 나는 부처님을 사랑합니다. 부처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불보는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인 경험을 영적인 수행과 연결시켜 깨달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영적인 수행을 계속하면 생각은 더욱 안정되고 맑아져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과 생각이 점점 균형을 찾아가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균형이 잡히면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온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좀더 분하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으며 맛보고 느낄 수 있게 되며,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푸르고 개가 짖는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어느 날 한 스님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 운문雲門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화장실에서 나오던 운문 스님이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스님이 눈은 똥을 치울 때 쓰는 긴 나무막대기와 마주쳤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마른 똥막대기( 乾屎橛)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진리란 바로 그런 것이다. 바로 순간순간의 삶, 이것이 불보이다. 佛寶에서 얘기하는 아름다움이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생각이 끊어질 때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바깥의 모양이나 형태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파리에 있을 때 제자 한 사람이 아주 수준 높은 박물관 戱畵展에 나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전시회에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유난히 화제가 되는 예술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날 전시회에 구경 왔던 많은 사람들은 그 앞에서 환성을 내지르며 떠날 줄을 몰랐고, 다들 멋있고 아름답다고 이구동성이었다. 박물관 측에서도 그 작품을 걸어놓기 위해 큰돈을 지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멀리서 그것을 보았을 때 도대체 무엇을 표현해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 작품은 액자 안에 낡고 해어진 양말 한 켤레를 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이게 뭐야, 도대체 이 헌 양말 한 켤레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언뜻 보면 하잖게 보일 수도 있으련만, 사람들은 왜 저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가.
잠시 후 나는 왜 사람들이 그 작품에서 그토록 큰 감명을 받는지 깨달았다. 다름 아니라 그 양말 속에는 한 인간의 고단했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양말의 주인은 저렇게 양말이 헤지고 닳도록 걸어 다녔을 것이다. 한 인간의 수많은 고통의 흔적들이 헤진 양말에 그대로 만아 있는 것이고, 이 양말 작품은 바로 그 점을 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작품에는 우리가 소홀히 하는 우리네 일상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액자에 걸린 양말 자체는 낡고 더러웠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아주 아름다웠던 것이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다.”
운문 선사는 바로 이 양말이 담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의미를 가르치신 것이다. 아름다움이 이처럼 겉모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진정한 아름다움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산스크리스트로 그것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라고 부른다. 우리의 본성 혹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뜻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면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나 풍경이 나타난다 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어, 화가 나 있거나 슬프거나 기가 죽어 있으면 창밖에 새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한다 해도 단지 시끄러운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이나 외부의 조건은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언제나 변하게 마련이며, 그때마다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추하게 보이며, 아음속이 분노로 가득하면 칭찬조차도 욕으로 들리게 마련이다.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침이 넘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삼매의 본래 의미이다. 앉아 있든, 서 있든, 누워있든, 운전을 하든, 누군가와 얘기를 하든 단지 ‘그것을 할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런 때에야 말로 일상에서의 모든 것이 진리이다 온 우주가 이미 그 자체로 진리이다. 그리하여 이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움이다. 마음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믿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을 때 이 세상의 마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시며, 이 세상이 이미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참 自我’를 믿는 것이다. 우리자신이 우리의 본성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부처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믿을 수 있으며, 나무, 하늘, 부처, 신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언젠가 누가 나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충격을 받은 듯 “아니, 어떻게 스님이 신을 믿느냐?” 고 되 물었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눈, 귀, 코, 혀, 몸, 마음 이 모든 것을 믿습니다. 파란 하늘, 푸른 나무, 짖는 개, 향냄새 이 모든 것도 믿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나 신을 못 믿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 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과 당신과 모든 것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상을 칠 때, “탕!”하고 들리는 소리와 나는 둘이 아니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나와 우주는 하나이다.
부부가 서로 함께 각자의 본성을 믿는다고 하자. 그러면 몸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하나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헤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각자의 본성을 믿는다면, 모든 것을 믿게 되므로 나와 모든 것은 이미 하나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바깥의 어떤 대상(예를 들면 신)을 믿는 종교는 일단 그 대상과 내가 분리된다. 여기에 내가 있고 신은 저기에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우리로부터 분리된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완벽한 가르침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불교는 주체를 믿는 종교다. 아니, 주체도, 객체도 없다. 종교라고 할 수도 없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다. (心卽佛佛卽心)”
나타난다. 따라서 불보란 순간순간 어 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부처님을 강하게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과 나의 본성을 얼마나 믿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부처니까 부처가 바로 나이다. 순간순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이미 진리이며 아름다움이다. 똥 조차도 아름다우며,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부처이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진정한 나의 길이 내 앞에
법보 法寶, The Treasure of Dharma
부처님은 모든 고통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서 온다고 가르쳤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지식과 고통은 비례하게 마련이어서 아는 것이 적으면 고통도 적게 된다. 우리가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아무 문제가 없다. ‘오직 모를 뿐’은 우리의 근본적인 곳, 즉 생각이 일어나기 전 우리의 마음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지식이란 엄밀히 따져보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일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고 따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하늘이 푸르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나무가 파랗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나 나무 스스로 “내가 푸르다”거나 “내가 파랗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다. 인간들이 아주 오랜 옛날 누군가가 “하늘이 푸르다”고 이야기 했을 터이고 이후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이 말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을 뿐이다.
개, 고양이라는 이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나 고양이 스스로 “나는 개다”. “나는 고양이다”고 말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다음 서로 자기가 만든 것이 옳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색깔, 모양, 시간, 공간, 이름, 원인과 결과, 삶과 죽음, 가고 옴 등등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본래 이것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나오며, 그것도 내 생각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일 뿐이다 미국 사람들은 개를 ‘도그(dog)’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개’라고 한다. 어느 것이 옳은가? 개에게 한번 물어보자.
“너 정말 개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이다. 지혜를 갖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생각이 일어나기 전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름도, 모양도 없는 지점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지점을 마음, 본질, 물질, 하나님, 하느님, 자기자신, 부처, 영혼, 의식 등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본래 그 지점은 생각 이전의 상태로, 이름과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 붙여 입으로 말하는 순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자기 생각에만 집착해 자기만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고통을 만들어내는 근원적 이유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무언가에 집착해 있다. 집착에 사로잡히면 상황을 맑게 볼 수 없다.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원해.” “담배를 피우면 좀 기분이 나아 질 거야” “딱 한 잔만 마시고 끊어야지.”
심지어 참선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이런 습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집착이 일어나면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기능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감정이나 충동이 빚어내는 욕망에 따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면 왜 그때 그러한 감정과 충동이 생겼는지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아, 지금 나는 이것을 하고 싶어하는 구나.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야, 여기에 휘둘리면 단지 고통만 있을 뿐이야. 내 삶에, 내 수행에 전혀 도움이 안 돼.’ 우리가 이렇게 욕망과 감정을 맑게 인식할 수 있다면 이 세계와 나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순간의 욕망이나 감정이 우리를 휘두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얘기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른 견해라는 의미의 ‘정견定見’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이 고통을 부른다고 했다. 무지와 무명이란 무엇인가. 만물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이 무지와 무명을 걷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 앞서 얘기한 것들을 지식이 아닌 지혜로 만들어야 한다.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가 아닌 단전으로 씹고 또 씹어야 한다. 그러면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파랗다’가 다 내 것이 된다.
마음이 열리면 무명이 걷히고, 지식은 지혜로 바뀐다. 그러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지혜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지적인 측면과 불교의 가르침이 연결되는 접점이다. 이것이 법보이다..
승보 僧寶, The Treasure of Sangha
승보는 불도를 실천해나가는 윤리적 측면이다. 부처님과 법을 통해 순간순간 바른 삶을 갈고 닦는 것이다. 삶이 바르다는 것은 나쁜 습관을 없애고 모든 생명에게 도움을 주면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려면 중심이 잡혀서 마음이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이 맑게 보이는 법이다. 그러면 중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저절로 보이게 되며, 삶의 바른 방향을 얻게 된다. 그것이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순간순간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게 된다.
“왜 내가 이것을 하지?”
“왜 내가 저것을 원하지?”
“내가 추구하는 이런 삶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모든 중생을 위한 것이냐?”
이렇게 된다면 순간순간 중생을 돕는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기본적인 지침이 필요하다. 계율戒律d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지침은 언제나 고통에서부터 중생을 제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계율을 지키는 수행을 산스크리트로 ‘실라sila’라고 부른다. 계율은 바른 길 혹은 ‘법Dharma’을 의미한다. 바른 길은 같은 순간순간 중생을 돕는 바른 삶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가 불법 수행에 입문할 때 보통 삼보에 귀의 한다고 한다. 이때 받는 5계五戒는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부처님이 만든 것이다. 살생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음탕한 생활을 하지 말며, 술, 담배나 마약을 하지 말라 등등이다. 이런 계율들은 우리가 깨끗한 마음을 가져서 바른 삶을 살도록 이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제자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제자들은 이제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누가 그들을 이끌 것인지 걱정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 돌아가시면 누가 우리를 가르치십니까?”
부처님이 대답했다.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이다.
자기 자신과 계율을 등불 삼아 살면 된다는 것이다.
계율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열매가 맺힌다. 봄에 꽃이 피지 않으면 가을에 수확을 할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돌고 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봄에 꽃이 피지 않고 가을에 수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여름에 눈이 내리면 큰 문제가 된다. 자연 속에는 스스로 항상 똑 같은 법칙이 있다. 자연은 그 보이지 않는 법칙에 따라 돌고 돈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계율이란 바로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이 법칙에 따라 살지 못한다. 미국 선원에 있을 때 수행을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우선 술이나 담배를 끊으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아니, 나는 자유롭고 싶어 수행을 하는데, 왜 좋아하는 술, 담배를 끊으라고 하십니까?”
나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술이나 담배는 몸에 해롭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마음 공부에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말해도 어떤 사람들은 “상관 없어요. 나는 이미 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내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을 쓰지 않아요” 하고 고집을 피운다. 그러면서 건강이 나빠지고 정신상태가 흐려지면 고통스러워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기 맘대로 하겠다는 자유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세상에 큰 문제가 생기 듯,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고통을 안겨준다.
숲에 서 있는 나무는 고통을 만들지 않는다. 흐르는 물에게는 고통이 없다. 이 세상 아무것도 스스로 고통을 만드는 것은 없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조차 인간처럼 그렇게 많은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다. 동물들은 오직 그들의 상황,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순응하며 살기 때문이다. 아니, 순응해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이면서도 가장 많은 고통에 시달린다. 어떤 이념이나 관념에 집착한 자유만을 부르짖을 뿐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지 않는다. 오로지 ‘나’의 감정 ‘나’의 조건,‘나’의 상황에 대해서만 생가하고, 좋은 감정, 좋은 시간, 좋은 조건만 원한다. 오직 욕망뿐이다.
그러나 이 욕망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럴 때 계율에 따라 수행을 열심히 하면 우리 마음의 에너지는 점점 더 맑고 강해질 것이다. 좋은 상황이 닥치든, 나쁜 상황이 오든 문제될 것이 없다. 순간 순간 바르게 살면 되는 것이다.
좋은 상황에 집착하지 말라. 나쁜 상황에도 집착하지 말라. 순간순간 이 상황을 오로지 다른 사람을 위해 쓴다면 필히 좋은 상황이 나타날 것이다.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진정한 좋은 감정과 조건에 마주서게 될 것이고, 그래서 마침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는 것이 ‘나의 삶’만을 평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해 계율을 자키는 것이다. 그것이 대자대비의 길이고 대보살의 길이다. 단지 나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계율을 지키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다.
대자대비심이 과연 무엇인가?
여기, 대자대비심이 과연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얘기가 있다. 옛날중국에 慧忠 스님이란 분이계셨다. 그는 자비심이 많아 하찮은 미물도 소중히 여기는 분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주 가난했지만 신심이 두터워서 절 생활도 마다하고 토굴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어느 늦가을, 혜충 스님은 겨울 동안 먹을 양식과 옷가지들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에 나섰다. 손에 발우를 쥐고 온 발이 부르트도록 며칠 동안 마을을 헤맨 끝에 다가올 겨울에 대비할 양식과 옷가지들을 얻어 어깨에 메고 산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마침 강한 비바람이 불어댔고, 혜충 스님은 경사진 언덕을 만나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선적들이 나타나 그를 에워싸고는 칼로 위협했다.스님의 키를 넘는 장정들이 무려 다섯 명이 나 됐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스님을 위협했다.
“이 늙은 중아,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스님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겨울에 먹고 입을 양식과 옷가지라오.”
“아하, 이제 보니 거지 중이로구나, 자, 보아라. 우리도 거지다. 네가 도를 닦는 중이라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라. 가진 것을 몽땅 내놓아라.”
산적들은 엄포를 놓았지만 혜충 스님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나쁜 업에 갇혀 살고 있는 산적들에 대한 안쓰러움만이 가득 찰 뿐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스님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남김없이 빼앗았다.
“자, 이 늙은 거지 중아, 생각 같아선 네 목숨도 빼앗고 싶지만 그냥 살려두겠다. 하지만 네가 입은 옷은 벗어줘야 하겠는걸.”
산적들은 스님의 옷을 모조리 벗겼다. 그리고는 스님을 차가운 땅바닥에 눕혀 손목과 발복을 풀로 묶어버린 후 유유히 마을로 사라졌다.
사실 풀로 묶인 몸이야 마음만 먹으면 쉽게 풀 수 있었지만 스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비바람이 치는 차가운 땅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이 지났다. 다음날 아침, 뜬눈으로 밤을 새운 스님의 귀에 언덕위로 올라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마치 군대가 밀려오는 듯 우렁찬 소리였다. 다름아닌 황제와 고관대작들을 수행하는 군대였다. 그들은 사냥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황제가 지나가다가 땅바닥에 누워있는 알몸의 늙은 중을 발견했다. 알몸을 보이는 일이란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다. 더구나 황제 앞에서 알몸을 보안 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웬 중놈이 이 아침에 발가벗은 채 누워 있느냐. 여봐라, 당장 내 앞에 있는 저 발칙한 중놈을 죽여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군은 재빨리 스님에게 달려가 장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스님의 눈은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자, 황제를 목욕한 죄로 이 칼을 받아라.” 장군이 칼을 겨눠 스님의 가슴에 내리치려는 순간 혜충 스님은 연민에 가득 찬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죽이는 것은 상관없소만 먼저 내 몸에서 이 풀을 풀어주오. 내가 당신의 칼을 받아 죽는 순간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텐데, 그러면 이 풀들이 땅에서 뽑혀져 나와 나와 같이 죽게 되오.”
두 손으로 칼을 겨눠 쥐고 있던 장군은 스님의 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장검을 쥐고 있던 손을 거두고 스님을 노려보았다. 장군은 자신의 귀와 눈을 의심했다. 이 노승의 눈은 그야말로 연민의 정으로 가득했다. 갑작스런 죽음을 앞둔 두려움이나 억울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군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수많은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노승은 목슴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한 낱의 풀 한 포기가 다칠까 염려하고 있지 않은가? 혜충 스님의 평온한 얼굴과 연민으로 가득 찬 표정은 장군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마침내 그는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아니, 스님께서는 어찌 죽음을 눈앞에 두시고도 하찮은 비틀린 풀 한 포기 따위에 마음을 쓰십니까?”
스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은 살아 있는 어떤 미물도 죽이지 말라고 하셨읍니다.”
멀리서 장군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황제는 영문을 몰라 더욱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너부터 죽이겠다.”
장군은 천천히 황제에게 걸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황제는 놀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저 스님이 정녕 하찮은 풀 한 포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하룻밤을 꼬박 알몸으로 누워 있었던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더라는 말이더냐.?”
황제 역시 충격을 받았다. 황제는 지난 며칠 동안 부하들을 데리고 산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동물들을 죽이고 왕궁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나는 수많은 생명들을 단지 심심풀이로 죽였건만, 스님은 자기 녹숨으 위협을 받는데도 하찮은 미물을 죽일까 걱정하는구나.”
혜충 스님 앞으로 다기선 황제는 바깥의 동요에 아랑곳하지 않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마침내 무릎을 끓고 직접 스님의 몸에 묶인 풀을 조심스럽게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겉옷까지 벗어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스님, 부디 저와 함께 왕궁으로 가시어 죄 많은 저를 인도해주십시요.”
혜충은 황제를 따라 왕궁으로 가서 마침내 國師가 되었다.
계율이란 우리의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특히 서양 사람들은 계율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율이란 바른 방향을 의미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계율을 잘 지킨다면 안이든, 바깥이든 점검할 필요가 없다. 순간 순간 그냥 지키기만 하면 된다. 계율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것 저것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우리의 본성을 100퍼센트 믿는다면 어떤 장애나 걸림을 갖지 않고 살 수 있으며, 그럴 때 나오는 행동이야말로 진정 바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불 • 법 • 승 삼보는 여러 측면에서 각각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본래 삼보는 2천 5백 년 전 생존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과(佛寶) 그가 행했던 실제 법문(法寶), 그리고 당시 승려와 신도(僧寶), 이것을 합쳐 부처 생존에 존재했던 것들이라고 해 ‘진체삼보(眞體三寶)’라고도 한다. 즉, 초기 형태의 삼보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생존하지 않는 오늘 날 삼보는 이와 다르다..
우선 부처님의 상징인 불상이 제각각이다. 한국과 중국은 금불상이지만 스리랑카와 태국은 석고불상이며, 일본 불상은 한국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노랗든, 하얗든, 소박하든, 어쨌든 다 부처님의 형상(佛寶)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오늘날 8만 4천 가지 경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통해, 도서관에 보관된 부처님 경전을 통해 형상을 통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인다. 이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므로 법보이다. 또 승보란 본래 부처님 생존 당시의 승려들과 신도들만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 세계에 수많은 불교 공동체가 있다. 캄보디아, 베트남, 스리랑카,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 미국, 캐나다, 폴란드, 독일,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그리고 리투아니아에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승보이다. 이것을 현재 존재하는 삼보라는 의미에서 ‘현존삼보(現存三寶)’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본래 형태의 불법승(佛法僧)은 모두 사라졌다. 오늘 날 우리가 만나는 본래 형태의 불법승은 지역마다, 나라마다, 절마다, 모두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불법승인가.
결국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법승은 본래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에서 나왔다.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불(佛)이고, 우리 마음이 순간 순간 맑게 빛난다면 그것이 법(法)이다. 또 우리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걸림이 없다면 그것이 승(僧)이다.다시 말해 佛은 순수한 마음이고, 法은 맑은 마음이며, 僧은 순간순간, 걸림 없이 모든 중생들을 돕겠다는 행동이다. 삼보는 이처럼 하나이다. 이를 ‘일체삼보(一切三寶)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걸림 없는 마음 아닌가? 오래 전에 한 스님이 중국의 조주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차나 마셔라.”
“무엇이 법입니까?”
“차나 마셔라.”
말고 깨끗하고 걱정 없는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불법승이 된다. 한자로 우리는 이것을 ‘실용삼보(實用三寶)’라고 한다. 즉 삼보를 실천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평상심’이다. 조주 선사는 어떤 종류의 질문이 와도 “차나 마셔라”라고 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당장 차를 마셔라. 차가 싫으면 코카콜라나 밀크쉐이크를 먹어도 좋다.(하하하)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조주 선사의 진정한 가르침, 부처님과 모든 위대한 스승들의 높은 가르침을 깨달으면 된다. 그러면 실용삼보를 얻을 수 있다.
불법승은 진 • 선 • 미(眞•善•美)와 바꿔 설명할 수도 있다.
자, 그렇다면 진선미는 과연 어떻게 불법승과 관계가 있는가? 또 진선미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아름다움에 대해 살펴보자. 여러분은 누구나 한번쯤 미스코리아니, 미스 유니버스니 하는 미인대회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각자 저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점수를 준다. 여기여 보는 것은 단지 여자들의 얼굴과 몸이다. 그러나 몸과 얼굴이 아름답다고 해서 행동이나 마음까지 아름다울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몸이나 얼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생각은 어떤 모양일까?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어떤 종류일까?
보통 우리의 마음은 무지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서 좋고 싫음을 만들어 스스로를 추하게 한다. 하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면 무지가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진실한 아름다움, 미美가 나타난다.
다음으로는 선善에 대해 살펴보자. 모든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에 선함을 가지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영화관에 가보면 안다. 착한 주인공이 악당과 싸우는 영화를 본다고 하자. 어떤 장면에서 주인공이 거의 죽을 정도로 얻어맞고 악당이 결국 이길 것 같다. 주인공이 맞는 동안 관객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서 저 악당을 쳐부숴라.’ 극장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똑 같은 마음이다.
아무도 선한 주인공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결론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영화관을 빠져나온다.
왜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인데, 착한 사람에게 복을 비는 한마음이 되는 것일 까.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거둡 말하지만 ‘참 나’와 우주는 결코 다르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고통 받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 역시 고통 받기를 원치 않는다. 어떤 종교는 ‘원죄’를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일으키는 ㄱ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업業’ 일 뿐이다. ‘마음의 습관’일 뿐이다. 업은 통제할 수 있고 없앨 수도 있다. 불교는 어떠한 원죄 의식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공空’이므로, 우리의 업고 공하다. ‘原罪란 공이 아니라 ‘어떤 것’ 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타고난 우리의 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진정한 선의는 옳은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방법은 부처님의 계를 실천함으로서 가능하다.
어느 날 제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스님은 언제나 진실과 선행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마냥 착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이용만 당합니다. 그러면 더 많은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선행이란 ‘나, 나의 것, 나를(I, MY, ME)’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본성은 하나이므로 나와 남이 다를수 없읍니다. 선을 행하면 우리 자신의 고통도 없어지고 다른 사람의 고통도 없어집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항상 슬프다. 이 세상은 늘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느낀다. 항상 다른이의 괴로움을 경계 없이, 분별없이 받아들인다. 이 슬픔은 결국 다른 사람을 돕는 연민의 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불교에서 지장보살은 항상 여섯 개의 고리를 가진 긴 막대기를 들고 있다. 지장보살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들어간다고 서원 誓願을 세운 분이다. 여타 종교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들조차 구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지장보살은 대원본존大願本尊 지장보살이라고도 한다.’대원’은 큰 서원이다. 마지막 중생 한 사람이라도 부처가 될 수 없다면 고통의 바다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 결코 열반에 들지 않겠다. 마지막 중생까지 고통에서 건져낼 때까지 몇 번이고 세세생생 다시 태어나 그들을 구원하겠다는 위대한 서원 誓願이다.
‘本尊’이란 본래 우리의 본성,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대원본존 大願本尊’이란 고통에서부터 모든 생명을 구하겠다는 위대한 서원, 즉 우리의 본래 얼굴, 본성, 본체라는 뜻이다. 이 대 서원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큰 약속은 이미 우리 안에 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승 佛法僧 삼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 마음에 자유를 갖게 한다.
불법승 삼보는 특별한 어떤 ‘거’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르침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줄 안다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순간순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 그 자체이며, 진리를 얻어 바른 길을 간다면 법을 얻는 것이다. 그럴 때 무든 중생들이 이 고통의 세계에서 헤어 나올 수 있도록 걸림 없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승가의 삶이다.
거룩한 삼보에 귀의한다고 할 대 이 거룩함은 사실 거룩한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이 본래 순수하고 맑은 것이 진정 거룩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말한다. 거룩하다는 것은 단지 아름이 없는 어떤 것을 부르기 위한 ‘말’일 뿐이다. 만물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거룩함에 대한 어떤 생각보다 낫다..
1.불보佛寶 The Precious One Which is the Buddhism⇒신앙적信仰的 the object of faith ⇒감정적情的 emotional
이고득락 離苦得樂 Departing from pain and attaining pleasure ⇒깊은명상定 Samadhi ⇒아름다움美 beauty ⇒믿음信 faith
2.법보法寶 The Precious One which is the Dharma ⇒哲學的 Philosophical ⇒ 知的 intellectual
전미개오轉迷開悟 Going from ignorance to enlightenment ⇒지혜慧 prajna ⇒진리眞 truth ⇒ 이해解 understanding
3.僧寶 The Precious One which is the sangha ⇒ 倫理的 ethical ⇒의지적 意的 mental
지악수선止惡修善 Putting an end to evil and practicing good ⇒계율 戒 sila ⇒선함善 good ⇒실천行 practice
※.신성함聖 holiness moksha —해탈解脫 liberation
일반적으로 인간의 의식은 지성, 감정, 의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쁨이나 고통은 감정에서 나오고, 사물에 대한 인식은 지성에서 나오고, 행동은 의지에서 나온다. 불교의 목적이란 다름아닌 ‘어떻게 하면 이 세가지를 조화롭게 사용해서 이 세상에 도움을 줄 것인가? 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의식의 균형을 상실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지성, 감정, 의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거나 조화롭게 쓰지 못하면, 오히려 우리의 본성을 발견하는 데 장애가 될 뿐이다. 그리하여 바른 길을 잃어버리고, 내 인생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고통으로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불교는 여기에 세가지 처방을 제시한다. 바로 불 • 법 • 승 (佛,法,僧) 삼보가 그것이다. 이 처방들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종국에는 우리의 본성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불보 佛寶 The Treasure od Buddha
보통 불교에 입문할 때, 우리는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만 믿는다. “아! 나는 부처님을 사랑합니다. 부처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불보는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인 경험을 영적인 수행과 연결시켜 깨달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영적인 수행을 계속하면 생각은 더욱 안정되고 맑아져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과 생각이 점점 균형을 찾아가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균형이 잡히면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온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좀더 분하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으며 맛보고 느낄 수 있게 되며,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푸르고 개가 짖는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어느 날 한 스님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 운문雲門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화장실에서 나오던 운문 스님이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스님이 눈은 똥을 치울 때 쓰는 긴 나무막대기와 마주쳤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마른 똥막대기( 乾屎橛)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진리란 바로 그런 것이다. 바로 순간순간의 삶, 이것이 불보이다. 佛寶에서 얘기하는 아름다움이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생각이 끊어질 때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바깥의 모양이나 형태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파리에 있을 때 제자 한 사람이 아주 수준 높은 박물관 戱畵展에 나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전시회에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유난히 화제가 되는 예술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날 전시회에 구경 왔던 많은 사람들은 그 앞에서 환성을 내지르며 떠날 줄을 몰랐고, 다들 멋있고 아름답다고 이구동성이었다. 박물관 측에서도 그 작품을 걸어놓기 위해 큰돈을 지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멀리서 그것을 보았을 때 도대체 무엇을 표현해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 작품은 액자 안에 낡고 해어진 양말 한 켤레를 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이게 뭐야, 도대체 이 헌 양말 한 켤레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언뜻 보면 하잖게 보일 수도 있으련만, 사람들은 왜 저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가.
잠시 후 나는 왜 사람들이 그 작품에서 그토록 큰 감명을 받는지 깨달았다. 다름 아니라 그 양말 속에는 한 인간의 고단했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양말의 주인은 저렇게 양말이 헤지고 닳도록 걸어 다녔을 것이다. 한 인간의 수많은 고통의 흔적들이 헤진 양말에 그대로 만아 있는 것이고, 이 양말 작품은 바로 그 점을 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작품에는 우리가 소홀히 하는 우리네 일상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액자에 걸린 양말 자체는 낡고 더러웠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아주 아름다웠던 것이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다.”
운문 선사는 바로 이 양말이 담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의미를 가르치신 것이다. 아름다움이 이처럼 겉모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진정한 아름다움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산스크리스트로 그것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라고 부른다. 우리의 본성 혹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뜻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면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나 풍경이 나타난다 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어, 화가 나 있거나 슬프거나 기가 죽어 있으면 창밖에 새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한다 해도 단지 시끄러운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이나 외부의 조건은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언제나 변하게 마련이며, 그때마다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추하게 보이며, 아음속이 분노로 가득하면 칭찬조차도 욕으로 들리게 마련이다.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침이 넘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삼매의 본래 의미이다. 앉아 있든, 서 있든, 누워있든, 운전을 하든, 누군가와 얘기를 하든 단지 ‘그것을 할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런 때에야 말로 일상에서의 모든 것이 진리이다 온 우주가 이미 그 자체로 진리이다. 그리하여 이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움이다. 마음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믿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을 때 이 세상의 마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시며, 이 세상이 이미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참 自我’를 믿는 것이다. 우리자신이 우리의 본성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부처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믿을 수 있으며, 나무, 하늘, 부처, 신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언젠가 누가 나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충격을 받은 듯 “아니, 어떻게 스님이 신을 믿느냐?” 고 되 물었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눈, 귀, 코, 혀, 몸, 마음 이 모든 것을 믿습니다. 파란 하늘, 푸른 나무, 짖는 개, 향냄새 이 모든 것도 믿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나 신을 못 믿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 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과 당신과 모든 것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상을 칠 때, “탕!”하고 들리는 소리와 나는 둘이 아니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나와 우주는 하나이다.
부부가 서로 함께 각자의 본성을 믿는다고 하자. 그러면 몸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하나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헤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각자의 본성을 믿는다면, 모든 것을 믿게 되므로 나와 모든 것은 이미 하나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바깥의 어떤 대상(예를 들면 신)을 믿는 종교는 일단 그 대상과 내가 분리된다. 여기에 내가 있고 신은 저기에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우리로부터 분리된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완벽한 가르침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불교는 주체를 믿는 종교다. 아니, 주체도, 객체도 없다. 종교라고 할 수도 없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다. (心卽佛佛卽心)”
나타난다. 따라서 불보란 순간순간 어 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부처님을 강하게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과 나의 본성을 얼마나 믿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부처니까 부처가 바로 나이다. 순간순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이미 진리이며 아름다움이다. 똥 조차도 아름다우며,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부처이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진정한 나의 길이 내 앞에
법보 法寶, The Treasure of Dharma
부처님은 모든 고통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서 온다고 가르쳤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지식과 고통은 비례하게 마련이어서 아는 것이 적으면 고통도 적게 된다. 우리가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아무 문제가 없다. ‘오직 모를 뿐’은 우리의 근본적인 곳, 즉 생각이 일어나기 전 우리의 마음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지식이란 엄밀히 따져보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일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고 따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하늘이 푸르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나무가 파랗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나 나무 스스로 “내가 푸르다”거나 “내가 파랗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다. 인간들이 아주 오랜 옛날 누군가가 “하늘이 푸르다”고 이야기 했을 터이고 이후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이 말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을 뿐이다.
개, 고양이라는 이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나 고양이 스스로 “나는 개다”. “나는 고양이다”고 말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다음 서로 자기가 만든 것이 옳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색깔, 모양, 시간, 공간, 이름, 원인과 결과, 삶과 죽음, 가고 옴 등등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본래 이것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나오며, 그것도 내 생각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일 뿐이다 미국 사람들은 개를 ‘도그(dog)’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개’라고 한다. 어느 것이 옳은가? 개에게 한번 물어보자.
“너 정말 개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이다. 지혜를 갖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생각이 일어나기 전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름도, 모양도 없는 지점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지점을 마음, 본질, 물질, 하나님, 하느님, 자기자신, 부처, 영혼, 의식 등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본래 그 지점은 생각 이전의 상태로, 이름과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 붙여 입으로 말하는 순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자기 생각에만 집착해 자기만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고통을 만들어내는 근원적 이유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무언가에 집착해 있다. 집착에 사로잡히면 상황을 맑게 볼 수 없다.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원해.” “담배를 피우면 좀 기분이 나아 질 거야” “딱 한 잔만 마시고 끊어야지.”
심지어 참선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이런 습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집착이 일어나면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기능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감정이나 충동이 빚어내는 욕망에 따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면 왜 그때 그러한 감정과 충동이 생겼는지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아, 지금 나는 이것을 하고 싶어하는 구나.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야, 여기에 휘둘리면 단지 고통만 있을 뿐이야. 내 삶에, 내 수행에 전혀 도움이 안 돼.’ 우리가 이렇게 욕망과 감정을 맑게 인식할 수 있다면 이 세계와 나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순간의 욕망이나 감정이 우리를 휘두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얘기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른 견해라는 의미의 ‘정견定見’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이 고통을 부른다고 했다. 무지와 무명이란 무엇인가. 만물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이 무지와 무명을 걷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 앞서 얘기한 것들을 지식이 아닌 지혜로 만들어야 한다.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가 아닌 단전으로 씹고 또 씹어야 한다. 그러면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파랗다’가 다 내 것이 된다.
마음이 열리면 무명이 걷히고, 지식은 지혜로 바뀐다. 그러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지혜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지적인 측면과 불교의 가르침이 연결되는 접점이다. 이것이 법보이다..
승보 僧寶, The Treasure of Sangha
승보는 불도를 실천해나가는 윤리적 측면이다. 부처님과 법을 통해 순간순간 바른 삶을 갈고 닦는 것이다. 삶이 바르다는 것은 나쁜 습관을 없애고 모든 생명에게 도움을 주면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려면 중심이 잡혀서 마음이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이 맑게 보이는 법이다. 그러면 중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저절로 보이게 되며, 삶의 바른 방향을 얻게 된다. 그것이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순간순간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게 된다.
“왜 내가 이것을 하지?”
“왜 내가 저것을 원하지?”
“내가 추구하는 이런 삶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모든 중생을 위한 것이냐?”
이렇게 된다면 순간순간 중생을 돕는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기본적인 지침이 필요하다. 계율戒律d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지침은 언제나 고통에서부터 중생을 제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계율을 지키는 수행을 산스크리트로 ‘실라sila’라고 부른다. 계율은 바른 길 혹은 ‘법Dharma’을 의미한다. 바른 길은 같은 순간순간 중생을 돕는 바른 삶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가 불법 수행에 입문할 때 보통 삼보에 귀의 한다고 한다. 이때 받는 5계五戒는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부처님이 만든 것이다. 살생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음탕한 생활을 하지 말며, 술, 담배나 마약을 하지 말라 등등이다. 이런 계율들은 우리가 깨끗한 마음을 가져서 바른 삶을 살도록 이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제자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제자들은 이제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누가 그들을 이끌 것인지 걱정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 돌아가시면 누가 우리를 가르치십니까?”
부처님이 대답했다.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이다.
자기 자신과 계율을 등불 삼아 살면 된다는 것이다.
계율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열매가 맺힌다. 봄에 꽃이 피지 않으면 가을에 수확을 할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돌고 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봄에 꽃이 피지 않고 가을에 수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여름에 눈이 내리면 큰 문제가 된다. 자연 속에는 스스로 항상 똑 같은 법칙이 있다. 자연은 그 보이지 않는 법칙에 따라 돌고 돈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계율이란 바로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이 법칙에 따라 살지 못한다. 미국 선원에 있을 때 수행을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우선 술이나 담배를 끊으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아니, 나는 자유롭고 싶어 수행을 하는데, 왜 좋아하는 술, 담배를 끊으라고 하십니까?”
나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술이나 담배는 몸에 해롭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마음 공부에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말해도 어떤 사람들은 “상관 없어요. 나는 이미 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내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을 쓰지 않아요” 하고 고집을 피운다. 그러면서 건강이 나빠지고 정신상태가 흐려지면 고통스러워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기 맘대로 하겠다는 자유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세상에 큰 문제가 생기 듯,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고통을 안겨준다.
숲에 서 있는 나무는 고통을 만들지 않는다. 흐르는 물에게는 고통이 없다. 이 세상 아무것도 스스로 고통을 만드는 것은 없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조차 인간처럼 그렇게 많은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다. 동물들은 오직 그들의 상황,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순응하며 살기 때문이다. 아니, 순응해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이면서도 가장 많은 고통에 시달린다. 어떤 이념이나 관념에 집착한 자유만을 부르짖을 뿐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지 않는다. 오로지 ‘나’의 감정 ‘나’의 조건,‘나’의 상황에 대해서만 생가하고, 좋은 감정, 좋은 시간, 좋은 조건만 원한다. 오직 욕망뿐이다.
그러나 이 욕망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럴 때 계율에 따라 수행을 열심히 하면 우리 마음의 에너지는 점점 더 맑고 강해질 것이다. 좋은 상황이 닥치든, 나쁜 상황이 오든 문제될 것이 없다. 순간 순간 바르게 살면 되는 것이다.
좋은 상황에 집착하지 말라. 나쁜 상황에도 집착하지 말라. 순간순간 이 상황을 오로지 다른 사람을 위해 쓴다면 필히 좋은 상황이 나타날 것이다.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진정한 좋은 감정과 조건에 마주서게 될 것이고, 그래서 마침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는 것이 ‘나의 삶’만을 평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해 계율을 자키는 것이다. 그것이 대자대비의 길이고 대보살의 길이다. 단지 나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계율을 지키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다.
대자대비심이 과연 무엇인가?
여기, 대자대비심이 과연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얘기가 있다. 옛날중국에 慧忠 스님이란 분이계셨다. 그는 자비심이 많아 하찮은 미물도 소중히 여기는 분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주 가난했지만 신심이 두터워서 절 생활도 마다하고 토굴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어느 늦가을, 혜충 스님은 겨울 동안 먹을 양식과 옷가지들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에 나섰다. 손에 발우를 쥐고 온 발이 부르트도록 며칠 동안 마을을 헤맨 끝에 다가올 겨울에 대비할 양식과 옷가지들을 얻어 어깨에 메고 산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마침 강한 비바람이 불어댔고, 혜충 스님은 경사진 언덕을 만나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선적들이 나타나 그를 에워싸고는 칼로 위협했다.스님의 키를 넘는 장정들이 무려 다섯 명이 나 됐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스님을 위협했다.
“이 늙은 중아,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스님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겨울에 먹고 입을 양식과 옷가지라오.”
“아하, 이제 보니 거지 중이로구나, 자, 보아라. 우리도 거지다. 네가 도를 닦는 중이라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라. 가진 것을 몽땅 내놓아라.”
산적들은 엄포를 놓았지만 혜충 스님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나쁜 업에 갇혀 살고 있는 산적들에 대한 안쓰러움만이 가득 찰 뿐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스님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남김없이 빼앗았다.
“자, 이 늙은 거지 중아, 생각 같아선 네 목숨도 빼앗고 싶지만 그냥 살려두겠다. 하지만 네가 입은 옷은 벗어줘야 하겠는걸.”
산적들은 스님의 옷을 모조리 벗겼다. 그리고는 스님을 차가운 땅바닥에 눕혀 손목과 발복을 풀로 묶어버린 후 유유히 마을로 사라졌다.
사실 풀로 묶인 몸이야 마음만 먹으면 쉽게 풀 수 있었지만 스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비바람이 치는 차가운 땅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이 지났다. 다음날 아침, 뜬눈으로 밤을 새운 스님의 귀에 언덕위로 올라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마치 군대가 밀려오는 듯 우렁찬 소리였다. 다름아닌 황제와 고관대작들을 수행하는 군대였다. 그들은 사냥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황제가 지나가다가 땅바닥에 누워있는 알몸의 늙은 중을 발견했다. 알몸을 보이는 일이란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다. 더구나 황제 앞에서 알몸을 보안 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웬 중놈이 이 아침에 발가벗은 채 누워 있느냐. 여봐라, 당장 내 앞에 있는 저 발칙한 중놈을 죽여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군은 재빨리 스님에게 달려가 장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스님의 눈은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자, 황제를 목욕한 죄로 이 칼을 받아라.” 장군이 칼을 겨눠 스님의 가슴에 내리치려는 순간 혜충 스님은 연민에 가득 찬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죽이는 것은 상관없소만 먼저 내 몸에서 이 풀을 풀어주오. 내가 당신의 칼을 받아 죽는 순간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텐데, 그러면 이 풀들이 땅에서 뽑혀져 나와 나와 같이 죽게 되오.”
두 손으로 칼을 겨눠 쥐고 있던 장군은 스님의 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장검을 쥐고 있던 손을 거두고 스님을 노려보았다. 장군은 자신의 귀와 눈을 의심했다. 이 노승의 눈은 그야말로 연민의 정으로 가득했다. 갑작스런 죽음을 앞둔 두려움이나 억울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군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수많은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노승은 목슴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한 낱의 풀 한 포기가 다칠까 염려하고 있지 않은가? 혜충 스님의 평온한 얼굴과 연민으로 가득 찬 표정은 장군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마침내 그는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아니, 스님께서는 어찌 죽음을 눈앞에 두시고도 하찮은 비틀린 풀 한 포기 따위에 마음을 쓰십니까?”
스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은 살아 있는 어떤 미물도 죽이지 말라고 하셨읍니다.”
멀리서 장군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황제는 영문을 몰라 더욱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너부터 죽이겠다.”
장군은 천천히 황제에게 걸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황제는 놀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저 스님이 정녕 하찮은 풀 한 포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하룻밤을 꼬박 알몸으로 누워 있었던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더라는 말이더냐.?”
황제 역시 충격을 받았다. 황제는 지난 며칠 동안 부하들을 데리고 산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동물들을 죽이고 왕궁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나는 수많은 생명들을 단지 심심풀이로 죽였건만, 스님은 자기 녹숨으 위협을 받는데도 하찮은 미물을 죽일까 걱정하는구나.”
혜충 스님 앞으로 다기선 황제는 바깥의 동요에 아랑곳하지 않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마침내 무릎을 끓고 직접 스님의 몸에 묶인 풀을 조심스럽게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겉옷까지 벗어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스님, 부디 저와 함께 왕궁으로 가시어 죄 많은 저를 인도해주십시요.”
혜충은 황제를 따라 왕궁으로 가서 마침내 國師가 되었다.
계율이란 우리의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특히 서양 사람들은 계율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율이란 바른 방향을 의미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계율을 잘 지킨다면 안이든, 바깥이든 점검할 필요가 없다. 순간 순간 그냥 지키기만 하면 된다. 계율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것 저것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우리의 본성을 100퍼센트 믿는다면 어떤 장애나 걸림을 갖지 않고 살 수 있으며, 그럴 때 나오는 행동이야말로 진정 바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불 • 법 • 승 삼보는 여러 측면에서 각각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본래 삼보는 2천 5백 년 전 생존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과(佛寶) 그가 행했던 실제 법문(法寶), 그리고 당시 승려와 신도(僧寶), 이것을 합쳐 부처 생존에 존재했던 것들이라고 해 ‘진체삼보(眞體三寶)’라고도 한다. 즉, 초기 형태의 삼보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생존하지 않는 오늘 날 삼보는 이와 다르다..
우선 부처님의 상징인 불상이 제각각이다. 한국과 중국은 금불상이지만 스리랑카와 태국은 석고불상이며, 일본 불상은 한국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노랗든, 하얗든, 소박하든, 어쨌든 다 부처님의 형상(佛寶)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오늘날 8만 4천 가지 경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통해, 도서관에 보관된 부처님 경전을 통해 형상을 통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인다. 이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므로 법보이다. 또 승보란 본래 부처님 생존 당시의 승려들과 신도들만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 세계에 수많은 불교 공동체가 있다. 캄보디아, 베트남, 스리랑카,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 미국, 캐나다, 폴란드, 독일,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그리고 리투아니아에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승보이다. 이것을 현재 존재하는 삼보라는 의미에서 ‘현존삼보(現存三寶)’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본래 형태의 불법승(佛法僧)은 모두 사라졌다. 오늘 날 우리가 만나는 본래 형태의 불법승은 지역마다, 나라마다, 절마다, 모두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불법승인가.
결국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법승은 본래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에서 나왔다.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불(佛)이고, 우리 마음이 순간 순간 맑게 빛난다면 그것이 법(法)이다. 또 우리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걸림이 없다면 그것이 승(僧)이다.다시 말해 佛은 순수한 마음이고, 法은 맑은 마음이며, 僧은 순간순간, 걸림 없이 모든 중생들을 돕겠다는 행동이다. 삼보는 이처럼 하나이다. 이를 ‘일체삼보(一切三寶)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걸림 없는 마음 아닌가? 오래 전에 한 스님이 중국의 조주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차나 마셔라.”
“무엇이 법입니까?”
“차나 마셔라.”
말고 깨끗하고 걱정 없는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불법승이 된다. 한자로 우리는 이것을 ‘실용삼보(實用三寶)’라고 한다. 즉 삼보를 실천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평상심’이다. 조주 선사는 어떤 종류의 질문이 와도 “차나 마셔라”라고 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당장 차를 마셔라. 차가 싫으면 코카콜라나 밀크쉐이크를 먹어도 좋다.(하하하)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조주 선사의 진정한 가르침, 부처님과 모든 위대한 스승들의 높은 가르침을 깨달으면 된다. 그러면 실용삼보를 얻을 수 있다.
불법승은 진 • 선 • 미(眞•善•美)와 바꿔 설명할 수도 있다.
자, 그렇다면 진선미는 과연 어떻게 불법승과 관계가 있는가? 또 진선미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아름다움에 대해 살펴보자. 여러분은 누구나 한번쯤 미스코리아니, 미스 유니버스니 하는 미인대회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각자 저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점수를 준다. 여기여 보는 것은 단지 여자들의 얼굴과 몸이다. 그러나 몸과 얼굴이 아름답다고 해서 행동이나 마음까지 아름다울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몸이나 얼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생각은 어떤 모양일까?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어떤 종류일까?
보통 우리의 마음은 무지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서 좋고 싫음을 만들어 스스로를 추하게 한다. 하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면 무지가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진실한 아름다움, 미美가 나타난다.
다음으로는 선善에 대해 살펴보자. 모든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에 선함을 가지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영화관에 가보면 안다. 착한 주인공이 악당과 싸우는 영화를 본다고 하자. 어떤 장면에서 주인공이 거의 죽을 정도로 얻어맞고 악당이 결국 이길 것 같다. 주인공이 맞는 동안 관객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서 저 악당을 쳐부숴라.’ 극장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똑 같은 마음이다.
아무도 선한 주인공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결론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영화관을 빠져나온다.
왜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인데, 착한 사람에게 복을 비는 한마음이 되는 것일 까.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거둡 말하지만 ‘참 나’와 우주는 결코 다르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고통 받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 역시 고통 받기를 원치 않는다. 어떤 종교는 ‘원죄’를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일으키는 ㄱ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업業’ 일 뿐이다. ‘마음의 습관’일 뿐이다. 업은 통제할 수 있고 없앨 수도 있다. 불교는 어떠한 원죄 의식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공空’이므로, 우리의 업고 공하다. ‘原罪란 공이 아니라 ‘어떤 것’ 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타고난 우리의 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진정한 선의는 옳은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방법은 부처님의 계를 실천함으로서 가능하다.
어느 날 제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스님은 언제나 진실과 선행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마냥 착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이용만 당합니다. 그러면 더 많은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선행이란 ‘나, 나의 것, 나를(I, MY, ME)’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본성은 하나이므로 나와 남이 다를수 없읍니다. 선을 행하면 우리 자신의 고통도 없어지고 다른 사람의 고통도 없어집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항상 슬프다. 이 세상은 늘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느낀다. 항상 다른이의 괴로움을 경계 없이, 분별없이 받아들인다. 이 슬픔은 결국 다른 사람을 돕는 연민의 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불교에서 지장보살은 항상 여섯 개의 고리를 가진 긴 막대기를 들고 있다. 지장보살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들어간다고 서원 誓願을 세운 분이다. 여타 종교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들조차 구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지장보살은 대원본존大願本尊 지장보살이라고도 한다.’대원’은 큰 서원이다. 마지막 중생 한 사람이라도 부처가 될 수 없다면 고통의 바다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 결코 열반에 들지 않겠다. 마지막 중생까지 고통에서 건져낼 때까지 몇 번이고 세세생생 다시 태어나 그들을 구원하겠다는 위대한 서원 誓願이다.
‘本尊’이란 본래 우리의 본성,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대원본존 大願本尊’이란 고통에서부터 모든 생명을 구하겠다는 위대한 서원, 즉 우리의 본래 얼굴, 본성, 본체라는 뜻이다. 이 대 서원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큰 약속은 이미 우리 안에 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승 佛法僧 삼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 마음에 자유를 갖게 한다.
불법승 삼보는 특별한 어떤 ‘거’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르침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줄 안다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순간순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 그 자체이며, 진리를 얻어 바른 길을 간다면 법을 얻는 것이다. 그럴 때 무든 중생들이 이 고통의 세계에서 헤어 나올 수 있도록 걸림 없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승가의 삶이다.
거룩한 삼보에 귀의한다고 할 대 이 거룩함은 사실 거룩한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이 본래 순수하고 맑은 것이 진정 거룩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말한다. 거룩하다는 것은 단지 아름이 없는 어떤 것을 부르기 위한 ‘말’일 뿐이다. 만물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거룩함에 대한 어떤 생각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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