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연기 . 十二緣起 The Twelve link's the chain of Dependent Origination
무명 無名 Ignorance 감정 受 Sensation
정신구조 行 Mental formations(karma) 욕망 愛 Desire
의식 識 Consciousness 집착 取 Clinging
이름과 모양 名色 Name and form 존재 有 Existence
여섯가지 감각기관 六入 The six senses 태어남 生 Life
접촉 觸 Contact 늙고 병들어 죽음 老死 憂悲苦惱 Old age, Suffering,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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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아주 포착하기 어려운 정신 활동에서 고통을 만드는 고리를 단순화해 보여주었다. 각 고리는 이전 고리의 결과이며 그것은 조건으로 변하여 다시 다음고리를 만든다. 열심히 수행하면 순간 순간 내 마음에 사라졌다 나타나는 이 고리를 잘 볼 수 있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연기의 고리는 나타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연기의 고리는 무지무명 無知無明에서 시작한다. 무지 無知란 이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아주 간단 하다. 이 세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모를 때, 즉 이새상은 항상 변한다는 것을 모를 때 우리는 모든것이 영원하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무명 無明은 우리 앞에 펼쳐진 현상을 실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 욕망, 감각에 집착하는 것이다. 무명은 우리를 어떤 사고 혹은 정신구조로 이끈다. 이 정신구조란 이생에서 혹은 전생에서 길러진 강한 습관의 힘, 즉 업 (行, karma, mental formation) 이다. 습관의 힘을 통해 의식(識, consciousness 이 나타나는데, 이 의식이란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나오게 하는 씨와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생각과 의식은 이름과 모양 (名色, name and form)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일단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나오면 '나' 아닌 것들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낸다. 여섯가지 감각(六入, six senses;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촉감(觸, contact)의 세계 혹은 이름과 모양의 세계와 접촉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受, sensation) 습관적 경험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다. 거기서 욕망(愛. desire)이 나와 감각에 달라붙게(取, clinging)되는 것이다.
'나는 저것을 좋아해, 나는 이것 아니면 안 돼, 나는 더 많이 원해, 더 많이 필요해.' 이런 마음이 나오는 것이다. 이제 '나'라는 것이 이름과 모양을 만들어서 여섯가지 감각을 통해 이 새상에 집착하게 한다. 그러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有, exisitence)한다'. '나는 듣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생각이 삶(生, life)를 만들고 새로병사(生老病死, old age, suffering, death)를 민든다. 그것이 고통의 세계이다. 그것이 12연기이다. 부처님은 고통을 버린다는 것은 이들 각각의 고리를 만드는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단순 명쾌하다. 12연기는 내가 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모두 극도의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 마음속에 무지가 나타나면 삶과 죽음이 나타난다. 내가 나의 고통을 만든다. 무지가 어디서 오는가? 무지를 민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래전 스리랑카의 한 유명한 스님이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 선원에 와서 소승불교에 대해 강의했다. 그는 2주일 동안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얘기했고, 12연기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강의 했다. 강의 후에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무지가 생로병사를 비롯해 모든것의 원인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과연 무지는 언제 그리고 왜 나타납니까?"
그러자 스님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무지는 저절로 나타난다고 하셨읍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학생은 만족스럽지 않은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저절로 나타납니까? 왜 저절로 나타납니까? 모든것이 모든것의 원인이 된다고 했는데, 무엇이 무지의 원인인가요?"
그러자 스님의 말문이 막혔다. 스님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듯 했지만 그동안 그가 읽었던 경정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내지 못하는 듯 했다.(하하하)
언제 왜 무지가 나타나느냐? 마음을 굳게먹고 참선수행을 열심히하면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답을 낼 수 있는가.? 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 무지가 나타난다. "왜 무지가 나타나느냐?" 하고 묻는 순간 나타난다. 의심을 내고 생각을 가지면 무지가 나타난다. 질문이 없으면 그것은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않는다. 아직은 이해가 잘 안갈 것이다. 오직 참선 수행만이 여기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성제 . 四聖諦 The Four Noble Truths
고 苦 Suffering ㅡㅡ 일체가 모두 고통이다. 一切皆苦 All things are suffering.
집 集 Origination ㅡㅡ 십이연기순환 十二緣起順觀 The twelve links of dependent origination, in order
멸 滅 Stopping ㅡㅡ 십이연기의 순환을 끊음 十二緣起 逆觀 The twelve links of dependent origination, in reverse order.
도 道 The Pathㅡㅡ 팔정도(여덟가지 바른수행 방법) 八正道 The Eightfold Path
부처님은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가르쳤다.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므로 인간도 결국 변하고 사라져서 空으로 돌아갈 것인데 이것을 모르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들은 왜 우리 삶이 많은 고통으로 채워지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고 苦, 집 集, 멸 滅, 도 道라는 사성제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물론 많은 종교에서도 삶이 고통스럽다고 가르친다.그러나 우리가 겪는 고통이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본성을 찾는 순간 그 고통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오직부처님 한 분 뿐이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가지고 있으면 여기 내놓아보아라. 이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이 나오는 것이다.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외부조건들 때문에 끊임없ㅇ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부처님은 고통이 어떻게 '무지'에서 비롯되는지를 가르쳤다. 무지가 나타나면 우리마음에 '나'라는 것이 나타나고 그다음 생로병사, 행과 뷸행, 태양, 달, 별 등 모든 것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순전히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 부처님의 큰 의문이었다. 아름다운 왕궁에서 온갖 화려함으로 둘러싸여 있던 이 젊은 왕자는 인간의 고통을 보았고, 스스로 이 큰 질문에 대답하기로 맹세했다. 그는 부와 권력, 가족을 버리고 6년간 고행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는 결국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그의 본성에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난 뒤 모든 존재가 아주 많은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이 우리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고통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무지가 사라지면 삶과 죽음, 늙음, 병......이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진다.
부처님은 이런것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깨닫고 나서야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향해 가는 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삶의 모든면에 적용가능한 아주쉬운 수행을 가지고 어떻게 고통을 벗어버릴수 있는지를 보았다. 이것이 팔정도이다.
팔정도 . 八正道 The Eightfold Path
정견(바른견해) 正見 Right View 정명(바른 삶) 正命 Right Livelihood
정사(바른생각) 正思 Right Thought 정정진(바른노력) 正精進 Right Effort
정어(바른말) 正語 Right Speech 정념(깨어있는 상태) 正念 Right Mindfulness
정업(바른 행위) 正業 Right Action 정정(바른 수행) 正定 Right Meditation
부처님은 욕망, 분노, 무지를 버리고 '참 나'로 돌아오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가르쳤다. 팔정도는 우리 마음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병을 고치기 위한 여덟가지 각각 다른 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견 正見, 바른견해
첫 번째 약은 '정견', 즉 바른 견해이다. '바르다'고 해서 무슨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견이란 '어떤 관점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보는 것이다. 이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보면 수십억 중생들이 고통의 수레바퀴를 타고 돌고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모든 중생은 오직 그들의 분노, 무지, 욕망만 을 따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정견이란 욕심, 분노, 무지에 기반한 행동들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결국 고통으로 이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 마음을 휙휙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감정과 욕심을 쫓아야만 하는가?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욕망, 분노, 무지에 기반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을 때 즉각적으로 이 행동이 결국 어디로 귀착될지 깨닫게 된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아니면 모든 중생을 위해서?' 이런 질문이 우리 행동에 방향을 만들어준다. 방향이 명확하면 우리 삶 전체가 명확해지고 어떤 종류의 행동도 다른 중생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나 자신의 욕망, 분노, 무지를 쫓아 나 자신만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면 나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무언가 하고 싶으면 이런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 내가 이것을 하지?' 이것이 바로 정견이다.
정사 正思, 바른 생각
바르게 생각한다는 '정사'도 이와 매우 비슷하다. 우리 모두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종종 그것들에 집착한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고, 조건과 상황에 매달린다. '나는 여자다.' '나는 남자다.' '나는 승려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일본인이다.' 이런 조건들에 집착하면 이 세상과 또 중생과 온전히 연결될 수 없다. 우리가 오직 이 '나, 나의, 나를' 이라는 자기가 만들어놓은 작은 틀로만 사물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들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정사란 어떤 관점, 어떤 견해,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도 집착하지 않고 오직 생각 이전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다. 禪院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의견에 집착하지말아라. 개인적으로 옳다고 생각한 것을 가지고 다른사람과 언쟁하지 말아라. 의견에 집착하고 방어하는 것은 옳은 수행이 아니다. 모든 의견을 놓아버려라. 이것이 진정한 불교다."
우리가 생각을 시작하면 분리가 일어난다. 분별심이 생긴다.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생각 이전의 마음이 실체이고 나의 실체이다. 그렇게 되면 너의 실체, 나의 실체, 전 우주의 실체가 모두 하나이다. 생각이전의 마음을 얻는다면 마음은 우주와같이 맑게된다. 거울처럼 맑아 진다.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이 비추고 힌것이 오면 횐것을 비춘다. 그렇게 되면 모든 실체와 하나가 되고 진정한 생각이 저절로 나타난다. 더 이상 이기심, 악의, 적의에 머물지 않게 된다. 이것이 지혜이자 바른 생각이다.
'정어 正語, 바른 말
많은 사람들이 혀에 집착해 있다. 혀는 아주 재미있다. 우리는 두 개의 눈, 귀 , 콧 구멍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왜 입과 혀는 아나일까? 이 입이란 것은 아주 큰 일을 한다. 먹는 일과 얘기하는 일을 끊입없이 한다. 입은 언제나 음식에서부터 술, 그리고 얘기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우리의 강렬한 집착들의 대부분이 이 혀의 욕망에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나 콧구멍이나 눈에서 오는 집착은 별로없다. 한 개의 입과 혀는 이미 하나로도 충분히 이 세상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한 개에 그친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는 눈, 귀, 코, 혀, 촉감이라는 다섯가지 감각 중에서 혀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선불교에서는 종종 "혀에는 뼈가 없다"고 얘기한다. 한번 밷어놓은 말도 마음 순간에 완전히 다른말로 바꿀수 있기 때문이다. 혀는 어떤 것이든 만들 수 있다. 모든 거짓말의 원천이다. 한 위대한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죄악의 혀가 파멸로 이끌 것이다. 병마개를 가지고 필요할 때만 열어라."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고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이세상에 고통을 가져다 준다고 했다. '정어' 란 이처럼 순간순간 혀가 하는 일에대해 주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고 따뜻한 말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혀를 사용하라는 얘기이다. 견해와 조건을 내려놓고 마음에 어떤 것도 만들지 않으면 정어는 저절로 나타난다.
정업 正業, 바른 행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은 우리 생각의 반영이다. 무처님께서는 우리가 바른 행동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돠와줄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다. 도둑질이나 살생이나 음탕한 관계나 술, 담배를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그런 행동을 통해 어떤 정신적인 습관을 만들어낸다. 악행은 나쁜 업을 만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착한 일만 하면 우리는 대보살의 업을 쌓는 것이다. 착한 일이란 오직 다른 중생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정업'은 언제나 우리의 행위가 다른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업을 '바른 업' 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명 正命, 바른 삶
이는 우리의 생계, 직업, 일과 관계되는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안과 밖 두가지 일을 가지고 있다. 안으로는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고, 밖으로는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도와주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어떤 일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에나가 돈을 벌고, 또 어떤 사람은 절에 살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 그러나 겉모양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지금 하고있는 이 일들이 오직 나만을 혹은 나의 가족만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모든 중생을 위한 일인가? 이런 의문들이 중요하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일정 정도의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그중 어떤 사람들은 동물을 죽이고 공기와 물을 더럽히는 일로 돈을 번다. 또 어떤 이들은 술과 마약, 폭탄, 총 등을 팔아 돈을 벌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오직 나쁜 업만을 쌓을 뿐 이세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다. 비록 가족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이 세상에 고통만을 배가할 뿐이다. 단지 돈을 벌기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조심해라. 이 세상의 원인과 결과는 언제나 명확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고통을 부는 직업은 갖지 말아야 하다고 가르친 것이다. 누차 얘기하지만 가장 중여한 것은 '이 일을 내가 왜 하는가?' 라고 묻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면 바른 삶, 즉 '정명'은 저절로 명확해진다
정정진 正精進, 바른 노력
팔정도 중 '정정진'이라는 것이 있다. 정정ㅈ3진이란 참선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얘기이다.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시간이 있거나 없거나, 또 피곤하건 안 하건 수천, 수만 년 동안 쉬지 말고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정념 正念, 깨어있는 상태
한 줄기 빛이 한 지점에서 나와 다른 지점으로 갈 때 똑바로 직선을 만들듯, 바로 이 순간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우리 인생을 만든다. 많은 사람들은 오직 그들의 생각, 분노, 욕심, 무지만을 좇는다. 그리하여 매 상황마다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바로 지금 깨어 있다면 행복을 얻는다.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이 깨어있는 상태를 불교에서는 '정념'이라고 한다.
정정 正定, 바른 수행
부처님은 또 바른 수행, 즉 '정정'이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 가르쳤다. 바른수행이란 순간순간 움직이지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 조건에서도 우주처럼 맑은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주처럼 맑은 마음을 유지하지만 항상 바늘 끝처럼 깨어있는 것이다.
어떤사람들은 수행을 단지 '마음의 평화'만을 경험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러비던스 선원을 세운지 얼마 안 돼,, 한 로큰롤 밴드가 우리 선방 바로 아래층에 이사를 왔다. 너무 시끄러워 많은 핵생들이 수행을 할 수 없다며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선사님, 밖이 너무 시끄러워 수행을 할 수 없어요. 그들에게 멈추라고 하면 어떨까요."
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햇다.
"조용한 상태에서 찾아오는 정적은 정적이 아니다. 시끄러운 소음속에서 찾는 침묵이 진짜 정적이다. 이 로큰롤 밴드 음악가들이야말로 여러분들을 깨우쳐주는 위대한 부처님들이다."
물론 조용한 곳에서 참선수행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수행을 할때 목적이 단지 정적이라는 경험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 삶은 항상 조용한 것이 나니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남대문 시장도, 심지어 감옥조차 훌륭한 선원이 된다.
사람들은 참선 수행이란 아주 힘들게 앉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것은 완정한 수행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집착하는 것이다. 진정한 참선은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는 '마음'의 수행이다. 어떤 마음 자세로 앉아 있는가. 그것이 핵심이다. 바로 지금 이순간 나의 마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것이 나의 삶을 만든다. 마음이 맑으면 우주가 맑아진다. 열심히 참선하는 것도 좋은 자세로 앉아 있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생각의 집착을 끊고 생각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 '
선방에 앉아있지 않고도 모든 조건, 상황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운정할 때도, 먹을 때도, 청소할 때도 참선할 수 있는가.그것이 살아있는 참선이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어떤 일정한 수행 방법이 필요하다. 앉아서 다리를 꼬고 등을 꼿꼿이 세워라. 이런 앉은 자세를 유지할 수 없으면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수년 전 프러비던스 선원에 등과 다리가 아파 누운채로 90일 동안 수행한 학생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천장을 바라보고 수행했다. 식사할 때나 염불할 때, 나와 얘기할 때정도 앉아 있는 것이 가능했다. 나머지는 오로지 누워 있어야 했다.
한 선사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걸을 때나 서 있을 때, 앉아잇거나 누워있을 때, 말하거나 침묵할 때, 항상 언제 어디서건 방해받지 않는 것, 이것이 무엇인가?"
진정한 참선은 얼마나 오랜시간 앉아있었는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 안에 큰 물음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호흡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다. 천천히 내쉬고 천천히 들이마셔라. 내 쉬는게 적어도 들이마시는 속도의 2배는 되어야 한다. 천천히 호흡하면 좀더 쉽게 생각을 끊을 수 있고 마음에서 오고 가는것에 집착하지 않게된다. 에너지는 차츰차츰 단전으로 모여서 감정과 느낌들을 더 잘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강조하고 싶은것은 참된수행, 다시말해 정정이란 어떤 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순간순간 매일 일상의 한가운데서 나의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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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pril 17, 2012
Saturday, April 14, 2012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연기
연기 . 緣起 . Dependent Origination
종연생 . 從緣生 . To arise from conditions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종연멸 . 從緣滅 To be extinct from conditions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아유종유 . 我有從有 If I exist, that exists.
내가 존재하면 저것이 존재한다.
아멸종멸 . 我滅從滅 If I cease to exist, that ceases to exist.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나뉜다. 마음은 언제 나타나서 어떻게 변해 언제 사라지는가? 이런 생각은 시간에대한 생각이다. 이에 비해 공간에 대한 생각은 여기 책상에 컵이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지팡이거 있는 것이가, 없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어떤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인가? 대승불교는 바로 이 공간과 관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인간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여기 이 앞에 놓은 이 책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이에 비해 소승불교는 이 책이 언제 나타났는지에 대한 통찰이다. 고통이 언제 나타났는가? 마음이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리고 무슨일이 있어났는가? 한번 물어보자.
이 세상은 언제 시작 했나? 우리의 이 '마음'이란 것은 언제 비롯되었나.? 모든것은 이미 여러조건이 맞아떨어져 나온결과라고 했다. 어떤조건이 나타나면 어떤결과가 나타난다. 조건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 내가 여기 있으면 뭔가가 저기있다. 내가 여기 없으면 뭔가도 저기없다. 다시말하면 이 세게는 내가 만드는 세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개는 개의 세계를, 고양이는 고양이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서로가 보는 세계는 다르다.
여자들은 쥐를 보면 소리를 지르지만 고양이는 쥐를 보면 좋아한다. "우와! 내 밥이 나타났다." 내가 좋은 세상을 만들면 나는 좋은 세상을 가지는 것이고, 나쁜세상을 만들면 나쁜세상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여기 존재하면 이 세상은 내 것이다. 내가 없어지면 세상도 사랒진다. 내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저기에 뭔가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내가 죽어도 하늘에 있는 태양은 없어지지않는데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태양이 아니다. 누군가의 태양이다. 누군가가 현재 보고있는 태양이다. 본래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태양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라지면 태양도 사라진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것이 사라진다. 그것이 부처님의 1단계 가르침이다.
LA의 달마 선원 Dharma Zen Center에 어느 날 누가 찾아왔다.
옷도 아주 잘 차려입은 긴 수염을 기른 한국신사였다. 그는 유교, 도교, 불교는 물론 서양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현대물리학, 과학, 심리학, 문학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 했고,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책에서 읽은 단어와 개념들로 가득차 있었다. 죽은 언어였던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그가 내 컵을 가르키면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어디서 왔읍니까?"
내가 아무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가게에서 사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을까요?"
나는 별 생각없이 이렇게 말했다.
"공장에서요."
"그러면 그전에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공장장이 공장에서 모든것을 지휘해서 컵을 만들었겠지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태양, 달, 별, 산, 강, 심지어 인간도 '누군가가 ' 만들었겠네요."
"...... 네."
순간 나는 그가 진리를 찾기위한것이 이니라 어떤 특정한 생각으로 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스님, 그럼 이 세상 만물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당신이오."
내가 불쑥 이렇게 말하자 그는 얼굴이 창백해져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 이젠 내가 하나 여쭙겠소. 여기 무지개가 있다고 칩시다. 그건 누가 만든 거지요? 하느님이요? 부처님이요?"
그는 잠간 멈뭇거리더니 "태양빛이 만든것이 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태양은 누가 만들었지요?"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둣 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무지개는 태양, 물, 그리고 우리의 눈 이 세가지가 어루러져 만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있으면 무지개는 저기 있읍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읍니다. 여기 다섯사람이 있다면 다섯 개의 무지개가 있는거지요. 모든 사람들이 무지개를 봅니다. 나는 여기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내 무지개는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들의 무지개는 거기에 있는 겁니다. 우리의 무지개는 이처럼 서로 다릅니다. 내 앞에 놓여진 이 컵은 나한테는 여기에 있는 것이지만 당신에게는 저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열 사람에게는 열 개의 무지개가 있고, 스무 사람에게는 스무 개의 무지개가 있는 것이다. 내 무지개는 내가 만든 것이다. 하늘을 보지 않으면 무지개는 없는 것이고, 이 쪽 방향에서는 보이지만 다른 방향에서는 안 보일 수도 있다. 서울에 앉아서 제주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하늘에 떠있는 무지개를 보라고 해봐야 그가 볼 수 있는 그의 무지개는 없다.
무지개는 어떤 시간과 장소라는 조건과 함께온다. 물, 수중기, 빛, 사람의 눈과 의식이 합쳐져서 생긴다. 이런 조건들이 있을 때라야만 무지개는 존재하는 것이다. 조건과 분리된 존재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보고 말한다.
"야, 여기에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까 내가 존재한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모든것이 이와같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무언가가 저기에 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라지면 내 세계도 사라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세계를 갖게되지만 나의 세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다름아닌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만든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원인과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만드는 것들에 휘둘린다.
개미를 통해 한번 설명해보자. 그 수많은 개미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빵부스러기, 나무토막, 잎 부스러기를 옮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아이고 작기도 해라. 이처럼 작은 세계도 있구나" 한다. 하지만 개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그들 세계의 전부이다. 물 한 방울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물 한 방울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수만의 미생물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자라고 죽는다. 아주 작은 세계이지만 미생물에게는 그세상이 전부이다.
여러분이 우주비행사가 됐다고 상상해보자. 우주선 창밖으로 지구를 내려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이고 참 작구나." 우주선까지 갈 것도 없이 비행기 창문에서 내려다봐도 같은 생각이 들것이다. 산, 나무, 강, 빌딩...... 땅에 있을 때는 그렇게 커 보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것처럼 보인다.
내가 나의 세계를 만들고 나의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아울러 나의 삶을 지배하는 원인과 결과도 만든다. 이 모든것들은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어디에 있으며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현재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중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는 말을 설사 받아들인다 해도 현재가 없다는 말까지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현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사실은 큰 착각이다. 현재가 어디있는가? 현재가 존재한다고 하면 이미 그건 과거이다. 현재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과거가 되는 것이다. 오로지 나의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 뿐이다.
내가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시간은 다른 사람의 것이아닌 바로 나의 시간이다. 맞벌이하는 아내를 가다리는 남편의 예를 들어보자. 두 사람은 오후 5시에 민나가로 했다. 그런데 6시 반이 됐는데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남편은 점점 화가난다. 이때 화나는 마음이 '그의' 마음이고 6시 반은 '그의' 시간이다. 아내는 같은 시간, 그녀의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간다. 하지만 차 안에서 아내를 기다라는 남편의 시간은 너무 천천히 지니가서 고통의 시간으로 바뀐다. 똑같은 시간인데도 아내와 남편의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왜 다른가? '마음'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좋게 혹은 나쁘게, 행복하게 혹은 슬프게 만든다. 오직 우리의 이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예는 우리의 삶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저녁 8시에 디스코 장에 간다고 하자. 친한 친구들과 춤을 추는 아주재미있는 파티이다. 모두 줄겁게 놀다보니 훌쩍시간이 흘러벌써 11시 반이 되었다. 집에 갈 시간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났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에 간다고 생각해 보자. 한 달이나 못 보았기 때문에 가슴이 마구 뛴다. 그런데 비행기가 연착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했다. 그때 한 시간은 한 달이나 1년처럼 느껴질 것이다. 디스코 장에서 춤을출 때 느끼는 시간과 공항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느끼는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다 생각에서 오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순간 나의 마음ㅇ의 상태가 어떠한가?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생각은 또한 공간을 만든다. 미국과 한국 모두 동서남북이 있지만 미국에서 보는 동서남북과 한국에서 보는 동서남북은 다르다. 나는 여기 서 있다. 나는 나의 동서남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라지면 나의 동서남북은 어디로갈까? 죽은 사람에게 동서남북이 있을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한 사람이 오른손을 들어올려 오른쪽이라고 하면 반대편 사람에겐는 왼쪽이다. 큰방에 1백 명이 들어서 있다면 각자의 오른쪽과 왼쪽이 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전쟁과 갈등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들만의 '왼쪽'과 '오른쪽'을 만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원인과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간이 조건과 결과를 지배한다면 시간은 원인을 지배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인은 변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수평선과 수직선에 비유해보면 시간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며 공간은 수직선이다. 원인은 항상 어떤 조건을 가로질러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져 있다고 할 때 그 상황은 공간이다. 나의 상황은 나의 위치, 방, 관계, 집, 경험, 삶이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원인은 어떤 조건, 상황을 가로질러 '고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때문에 상황이나 조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황에 집착하면 조건에 집착하고 원인은 사라질 수가 없다. 원인은 언제나 내가 집착하는 조건에 의해 불이붙어 매 순간 고통을 준다. 이 고통은 원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 시간과 공간, 원인과 조건은 항상 같이 작용한다. 생각을 놓지 않으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남자한테 버림받은 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이 경험에 집착하면 일종의 원인이 된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여자이기 때ㅜ네 상처받았다. 남자가 싫다.' 그리고 그것은 조건이 되고, 이런 원인과 조건에 집착하면 그녀의 삶은 언제나 남자로 인해 고통으로 얼룩진다. 그녀의 원인은 항상 조건을 가로지른다. 그녀가 어딜 가든, 이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그녀는 고통스러워한다. 수백권의 책도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정신과 병원 치료도 소용없다.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시간과 공간을 만들지 말라. 원인과 결과도 만들지말고 집착하지 말아라. 생각, 조건, 상황, 시간 이 모든것을 천천히 내려놓아라. 순간순간 오직 모를 뿐......이다. 그러면 원인도 점점 사라진다.
언제 어디서나 '오직 모를 뿐'으로 산다면 시간과 공간을 이미 뛰어 넘은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나의 삶에 다가오는 어떤 조건이나 상황도 오직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만 쓰여진다. 그것이 자유이다. 불교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각자의 세계 혹은 사고방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지구와 달은 태양주위를 돈다. 이것은 작은 세계로, 소천小天이라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태양계에 닿아 있다. 한 개의 태양계도 매우크다. 그런데 3천 개의 태양계가 중간 크기의 은하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3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인 우주는 광대하다. 그레 비하면 인간 세계란 아주 작다. 불교는 우리가 이런 큰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아마 우리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좁은 세게에 머물지 않게 될 것이다. 개미의 세계, 미생물의 세계 동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도 그런식으로 보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좁은 소견으로 만들어놓은 아주 작은 세상에 안주하며 산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가 우주처럼 넓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언제나 남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내가 어떻게 나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아는 것은 쉽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신을 만들었는가? 또 신은 모든것을 알고있고, 천국과 에덴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선악과도 안들어 "이 열매를 먹으면 죄를 받아 죽는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신 역시 어떤것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정말 인간을 사랑한다면 나무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부모라고 생각해봐라. 독을 만든뒤 아이들에게 먹지 말라고 해놓고 아이가 그것을 먹었다고 탓할 수 있는가? 인과와 연기가 주는 가르침은 재미있다. 선악과를 만든 신은 어디서 왔으며 고통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신을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면 힌트 하나를 주겠다.
'신'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실수이다. 입을 열면 원인이 나타나고 입을 닫으면 사라진다. 신을 만들지 말라. 부처님도 만들디 말라. 순간순간 그 어느것도 만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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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연생 . 從緣生 . To arise from conditions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종연멸 . 從緣滅 To be extinct from conditions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아유종유 . 我有從有 If I exist, that exists.
내가 존재하면 저것이 존재한다.
아멸종멸 . 我滅從滅 If I cease to exist, that ceases to exist.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나뉜다. 마음은 언제 나타나서 어떻게 변해 언제 사라지는가? 이런 생각은 시간에대한 생각이다. 이에 비해 공간에 대한 생각은 여기 책상에 컵이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지팡이거 있는 것이가, 없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어떤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인가? 대승불교는 바로 이 공간과 관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인간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여기 이 앞에 놓은 이 책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이에 비해 소승불교는 이 책이 언제 나타났는지에 대한 통찰이다. 고통이 언제 나타났는가? 마음이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리고 무슨일이 있어났는가? 한번 물어보자.
이 세상은 언제 시작 했나? 우리의 이 '마음'이란 것은 언제 비롯되었나.? 모든것은 이미 여러조건이 맞아떨어져 나온결과라고 했다. 어떤조건이 나타나면 어떤결과가 나타난다. 조건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 내가 여기 있으면 뭔가가 저기있다. 내가 여기 없으면 뭔가도 저기없다. 다시말하면 이 세게는 내가 만드는 세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개는 개의 세계를, 고양이는 고양이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서로가 보는 세계는 다르다.
여자들은 쥐를 보면 소리를 지르지만 고양이는 쥐를 보면 좋아한다. "우와! 내 밥이 나타났다." 내가 좋은 세상을 만들면 나는 좋은 세상을 가지는 것이고, 나쁜세상을 만들면 나쁜세상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여기 존재하면 이 세상은 내 것이다. 내가 없어지면 세상도 사랒진다. 내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저기에 뭔가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내가 죽어도 하늘에 있는 태양은 없어지지않는데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태양이 아니다. 누군가의 태양이다. 누군가가 현재 보고있는 태양이다. 본래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태양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라지면 태양도 사라진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것이 사라진다. 그것이 부처님의 1단계 가르침이다.
LA의 달마 선원 Dharma Zen Center에 어느 날 누가 찾아왔다.
옷도 아주 잘 차려입은 긴 수염을 기른 한국신사였다. 그는 유교, 도교, 불교는 물론 서양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현대물리학, 과학, 심리학, 문학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 했고,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책에서 읽은 단어와 개념들로 가득차 있었다. 죽은 언어였던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그가 내 컵을 가르키면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어디서 왔읍니까?"
내가 아무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가게에서 사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을까요?"
나는 별 생각없이 이렇게 말했다.
"공장에서요."
"그러면 그전에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공장장이 공장에서 모든것을 지휘해서 컵을 만들었겠지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태양, 달, 별, 산, 강, 심지어 인간도 '누군가가 ' 만들었겠네요."
"...... 네."
순간 나는 그가 진리를 찾기위한것이 이니라 어떤 특정한 생각으로 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스님, 그럼 이 세상 만물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당신이오."
내가 불쑥 이렇게 말하자 그는 얼굴이 창백해져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 이젠 내가 하나 여쭙겠소. 여기 무지개가 있다고 칩시다. 그건 누가 만든 거지요? 하느님이요? 부처님이요?"
그는 잠간 멈뭇거리더니 "태양빛이 만든것이 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태양은 누가 만들었지요?"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둣 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무지개는 태양, 물, 그리고 우리의 눈 이 세가지가 어루러져 만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있으면 무지개는 저기 있읍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읍니다. 여기 다섯사람이 있다면 다섯 개의 무지개가 있는거지요. 모든 사람들이 무지개를 봅니다. 나는 여기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내 무지개는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들의 무지개는 거기에 있는 겁니다. 우리의 무지개는 이처럼 서로 다릅니다. 내 앞에 놓여진 이 컵은 나한테는 여기에 있는 것이지만 당신에게는 저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열 사람에게는 열 개의 무지개가 있고, 스무 사람에게는 스무 개의 무지개가 있는 것이다. 내 무지개는 내가 만든 것이다. 하늘을 보지 않으면 무지개는 없는 것이고, 이 쪽 방향에서는 보이지만 다른 방향에서는 안 보일 수도 있다. 서울에 앉아서 제주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하늘에 떠있는 무지개를 보라고 해봐야 그가 볼 수 있는 그의 무지개는 없다.
무지개는 어떤 시간과 장소라는 조건과 함께온다. 물, 수중기, 빛, 사람의 눈과 의식이 합쳐져서 생긴다. 이런 조건들이 있을 때라야만 무지개는 존재하는 것이다. 조건과 분리된 존재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보고 말한다.
"야, 여기에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까 내가 존재한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모든것이 이와같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무언가가 저기에 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라지면 내 세계도 사라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세계를 갖게되지만 나의 세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다름아닌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만든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원인과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만드는 것들에 휘둘린다.
개미를 통해 한번 설명해보자. 그 수많은 개미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빵부스러기, 나무토막, 잎 부스러기를 옮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아이고 작기도 해라. 이처럼 작은 세계도 있구나" 한다. 하지만 개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그들 세계의 전부이다. 물 한 방울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물 한 방울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수만의 미생물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자라고 죽는다. 아주 작은 세계이지만 미생물에게는 그세상이 전부이다.
여러분이 우주비행사가 됐다고 상상해보자. 우주선 창밖으로 지구를 내려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이고 참 작구나." 우주선까지 갈 것도 없이 비행기 창문에서 내려다봐도 같은 생각이 들것이다. 산, 나무, 강, 빌딩...... 땅에 있을 때는 그렇게 커 보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것처럼 보인다.
내가 나의 세계를 만들고 나의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아울러 나의 삶을 지배하는 원인과 결과도 만든다. 이 모든것들은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어디에 있으며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현재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중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는 말을 설사 받아들인다 해도 현재가 없다는 말까지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현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사실은 큰 착각이다. 현재가 어디있는가? 현재가 존재한다고 하면 이미 그건 과거이다. 현재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과거가 되는 것이다. 오로지 나의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 뿐이다.
내가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시간은 다른 사람의 것이아닌 바로 나의 시간이다. 맞벌이하는 아내를 가다리는 남편의 예를 들어보자. 두 사람은 오후 5시에 민나가로 했다. 그런데 6시 반이 됐는데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남편은 점점 화가난다. 이때 화나는 마음이 '그의' 마음이고 6시 반은 '그의' 시간이다. 아내는 같은 시간, 그녀의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간다. 하지만 차 안에서 아내를 기다라는 남편의 시간은 너무 천천히 지니가서 고통의 시간으로 바뀐다. 똑같은 시간인데도 아내와 남편의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왜 다른가? '마음'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좋게 혹은 나쁘게, 행복하게 혹은 슬프게 만든다. 오직 우리의 이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예는 우리의 삶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저녁 8시에 디스코 장에 간다고 하자. 친한 친구들과 춤을 추는 아주재미있는 파티이다. 모두 줄겁게 놀다보니 훌쩍시간이 흘러벌써 11시 반이 되었다. 집에 갈 시간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났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에 간다고 생각해 보자. 한 달이나 못 보았기 때문에 가슴이 마구 뛴다. 그런데 비행기가 연착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했다. 그때 한 시간은 한 달이나 1년처럼 느껴질 것이다. 디스코 장에서 춤을출 때 느끼는 시간과 공항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느끼는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다 생각에서 오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순간 나의 마음ㅇ의 상태가 어떠한가?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생각은 또한 공간을 만든다. 미국과 한국 모두 동서남북이 있지만 미국에서 보는 동서남북과 한국에서 보는 동서남북은 다르다. 나는 여기 서 있다. 나는 나의 동서남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라지면 나의 동서남북은 어디로갈까? 죽은 사람에게 동서남북이 있을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한 사람이 오른손을 들어올려 오른쪽이라고 하면 반대편 사람에겐는 왼쪽이다. 큰방에 1백 명이 들어서 있다면 각자의 오른쪽과 왼쪽이 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전쟁과 갈등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들만의 '왼쪽'과 '오른쪽'을 만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원인과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간이 조건과 결과를 지배한다면 시간은 원인을 지배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인은 변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수평선과 수직선에 비유해보면 시간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며 공간은 수직선이다. 원인은 항상 어떤 조건을 가로질러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져 있다고 할 때 그 상황은 공간이다. 나의 상황은 나의 위치, 방, 관계, 집, 경험, 삶이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원인은 어떤 조건, 상황을 가로질러 '고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때문에 상황이나 조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황에 집착하면 조건에 집착하고 원인은 사라질 수가 없다. 원인은 언제나 내가 집착하는 조건에 의해 불이붙어 매 순간 고통을 준다. 이 고통은 원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 시간과 공간, 원인과 조건은 항상 같이 작용한다. 생각을 놓지 않으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남자한테 버림받은 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이 경험에 집착하면 일종의 원인이 된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여자이기 때ㅜ네 상처받았다. 남자가 싫다.' 그리고 그것은 조건이 되고, 이런 원인과 조건에 집착하면 그녀의 삶은 언제나 남자로 인해 고통으로 얼룩진다. 그녀의 원인은 항상 조건을 가로지른다. 그녀가 어딜 가든, 이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그녀는 고통스러워한다. 수백권의 책도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정신과 병원 치료도 소용없다.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시간과 공간을 만들지 말라. 원인과 결과도 만들지말고 집착하지 말아라. 생각, 조건, 상황, 시간 이 모든것을 천천히 내려놓아라. 순간순간 오직 모를 뿐......이다. 그러면 원인도 점점 사라진다.
언제 어디서나 '오직 모를 뿐'으로 산다면 시간과 공간을 이미 뛰어 넘은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나의 삶에 다가오는 어떤 조건이나 상황도 오직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만 쓰여진다. 그것이 자유이다. 불교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각자의 세계 혹은 사고방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지구와 달은 태양주위를 돈다. 이것은 작은 세계로, 소천小天이라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태양계에 닿아 있다. 한 개의 태양계도 매우크다. 그런데 3천 개의 태양계가 중간 크기의 은하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3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인 우주는 광대하다. 그레 비하면 인간 세계란 아주 작다. 불교는 우리가 이런 큰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아마 우리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좁은 세게에 머물지 않게 될 것이다. 개미의 세계, 미생물의 세계 동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도 그런식으로 보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좁은 소견으로 만들어놓은 아주 작은 세상에 안주하며 산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가 우주처럼 넓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언제나 남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내가 어떻게 나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아는 것은 쉽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신을 만들었는가? 또 신은 모든것을 알고있고, 천국과 에덴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선악과도 안들어 "이 열매를 먹으면 죄를 받아 죽는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신 역시 어떤것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정말 인간을 사랑한다면 나무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부모라고 생각해봐라. 독을 만든뒤 아이들에게 먹지 말라고 해놓고 아이가 그것을 먹었다고 탓할 수 있는가? 인과와 연기가 주는 가르침은 재미있다. 선악과를 만든 신은 어디서 왔으며 고통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신을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면 힌트 하나를 주겠다.
'신'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실수이다. 입을 열면 원인이 나타나고 입을 닫으면 사라진다. 신을 만들지 말라. 부처님도 만들디 말라. 순간순간 그 어느것도 만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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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rch 24, 2012
불교의 목적 숭산 큰스님 가르침
불교의 목적 • 佛敎 目的 The Purposes of Buddhism
보리의 지혜를 구하고 닦는다 上求 菩提 First attain enlightenment.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한다. 下化 衆生 then instruct all beings.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그러시는 선생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 아십니까?”
소크라테스가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바로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걸핏하면 나, 나, 하지만 실상 이‘나’라는 것이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우리는 왜 사는가? 돈? 아니면 사랑? 혹은 명예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면 내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그저 행복하게,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 소망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부분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먹고 자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모든 것들은 진정한 삶의 목표가 아니며, 다시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인도에서 태어난 부처님은 2천5백여 년 전, 싯다르타 고타마라고 불리던 왕자였다. 왕궁에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곧 이어받을 왕위까지,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진정한 자기자신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끝 모를 의문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란 결국 병들어 늙고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허무감을 느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모르겠다.”
그 당시 인도의 지배계층들은 브라만교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만교의 가르침은 이 젊은 왕자의 의문에 답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의문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왜 인간은 이 세상에 나왔는가? 왜 우리는 매일 먹어야 하는가? 왜 병마에 시달리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가?”
그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고, 아름다운 음악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왕궁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홀연히 왕궁을 떠났다. 긴 머리를 다 깎고 수행자가 되어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오로지 ‘나는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이라는 화두를 안고 열심히 수행했다.
그렇게 6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그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동쪽 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의 존재가 무한대의 시공간에 놓여있다는 것을, 우주와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도, 죽음도, 결국 따로 없다는 것을, 오고 가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른바 석가모니 부처님이 무명의 눈을 떠 本性을 발견 한 것이다.
그는 무지가 나타날 때 ‘마음’이 나타남을 깨달았다. 또 마음이 나타나면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욕망에서 삶과 죽음, 오고 감, 행복과 불행 등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오로지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을 온전히 지켜감으로써 부처님은 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世世生生 거듭하는 삶과 죽음이라는 덫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것이며, 바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이름하여 열반(涅槃, nirvana)이라 부른다.
당시 부처님이 얻었던 이 깨달음은 아주 높은 경지였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눈에는 무지 속에서 욕망과 분노를 쫓으면서 나고 병들고 늙고 죽으며 끊임없이 방황하는 중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순간순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
‘내가 깨달은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유치원 아이들에게 어떻게 쉽게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듯 생각에 잠겼다.
‘누가 내 말을 믿어줄 것인가? 아니,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내 말에 귀 기울여줄까?’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비웃을지도 모르고, 이교도라 하여 죽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아주 맑게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가르침을 포기하고 영원한 안식과 기쁨의 상태인 열반의 상태에 그냥 머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고해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에 대한 깊은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한한 열락의 자리인 부리수나무를 박차고 나와 인간들의 고통의 현장인 속세로 나온 것이다. 무한한 평화와 기쁨의 상태인 열반의 세계를 떠나 시끄럽고 더럽고 경쟁과 투쟁이 가득한 인간의 세상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부처님은 속세의 왕위를 버렸듯 다시 한번 조용하고 안락한 열반의 상태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깨달음의 경험을 혼자만 간직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 大慈大悲’이다. 위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 거룩한 깨달음의 사랑이 바로 불교의 시작이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역사적 聖人의 가르침만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인가? ‘깨운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에서 나온 부처, 즉 ‘붓다(Buddha)’라는 말은 우리가 본성품을 깨달아 고통의 잠에서 깨어난다는 뜻이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
자, 그럼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다. “당신은 누구인가? 태어났을 때 어디서 왔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들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간절한 삶의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다면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책이나 지식은 답을 찾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돈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님이나 하느님(하나님)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오직 모를 뿐’만이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답을 찾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종교적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들은 결국 ‘주체 종교’와 ‘객체 종교’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주체 종교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을 믿는 것이고, 객체 종교란 바깥의 초월적인 힘, 즉 이 세상과 우리 삶을 통제하는 어떤 강력한 힘, 즉 신을 믿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외부의 힘 혹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믿으면 뭔가를, 이를테면 행복이나 특별한 에너지, 신비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명상 수행도 이를 방편으로 이용한다. 어쨌든 하나되고 싶은 어떤 대상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것은 모두 ‘객체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는 주체 종교이다. 자기 자신, 내가 이미 갖고 있는 本性品 바로 ‘나’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나我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태어났을 때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언제 죽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질문을 절실하게 파고들면 모든 생각은 완벽히 끊어진다. 안과 밖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며,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된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는 분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란 것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하여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책을 통한 배움이 아니며, 어던 절대자 혹은 외부적인 힘에 의존하지도 안는다. 불교가르침의 진수는 바로 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깊이 함으로서 ‘오직 모를 뿐……’ 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우리의 본성, 참 나(眞我)를 얻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불교는 단지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길(道)이다. 그 길의 이름이 ‘ 오직 모를 뿐’이다.
‘오직 모를 뿐…… .’
그 순간 우리 자신과 우주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참선수행’이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 올바른 길과 진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불교 역시 진리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참 나를 깨닫고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진정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참 나를 얻을 때 우리는 우주적 존재가 된다. 우주와 나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실용, 實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上求菩提 下化衆生)’ 그러나 이 두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가르치는 것은 수레의 양쪽 바퀴와도 같은 것이다. 한쪽이 고장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면서 사람들과의 삶을 소홀히 안다면 진리로 향하는 길은 더욱 요원해지게 된다. 한편 깨달음을 얻기 위한 피나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또한 부처가 될 수 없다.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두 가지 수레바퀴로 나아갈 때, 우리는 佛國土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8만 4천 경전이나 성경을 줄줄이 왼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으며 그 모든 이해와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작 눈감고 죽는 순간에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이 낫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사람과 위대한 보살도(菩薩道), 그리고 위대한 자비는, 다름 아닌 우리마음에 대한 탐구를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중생을 구하는 것이다.
보리의 지혜를 구하고 닦는다 上求 菩提 First attain enlightenment.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한다. 下化 衆生 then instruct all beings.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그러시는 선생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 아십니까?”
소크라테스가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바로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걸핏하면 나, 나, 하지만 실상 이‘나’라는 것이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우리는 왜 사는가? 돈? 아니면 사랑? 혹은 명예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면 내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그저 행복하게,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 소망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부분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먹고 자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모든 것들은 진정한 삶의 목표가 아니며, 다시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인도에서 태어난 부처님은 2천5백여 년 전, 싯다르타 고타마라고 불리던 왕자였다. 왕궁에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곧 이어받을 왕위까지,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진정한 자기자신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끝 모를 의문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란 결국 병들어 늙고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허무감을 느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모르겠다.”
그 당시 인도의 지배계층들은 브라만교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만교의 가르침은 이 젊은 왕자의 의문에 답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의문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왜 인간은 이 세상에 나왔는가? 왜 우리는 매일 먹어야 하는가? 왜 병마에 시달리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가?”
그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고, 아름다운 음악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왕궁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홀연히 왕궁을 떠났다. 긴 머리를 다 깎고 수행자가 되어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오로지 ‘나는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이라는 화두를 안고 열심히 수행했다.
그렇게 6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그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동쪽 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의 존재가 무한대의 시공간에 놓여있다는 것을, 우주와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도, 죽음도, 결국 따로 없다는 것을, 오고 가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른바 석가모니 부처님이 무명의 눈을 떠 本性을 발견 한 것이다.
그는 무지가 나타날 때 ‘마음’이 나타남을 깨달았다. 또 마음이 나타나면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욕망에서 삶과 죽음, 오고 감, 행복과 불행 등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오로지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을 온전히 지켜감으로써 부처님은 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世世生生 거듭하는 삶과 죽음이라는 덫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것이며, 바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이름하여 열반(涅槃, nirvana)이라 부른다.
당시 부처님이 얻었던 이 깨달음은 아주 높은 경지였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눈에는 무지 속에서 욕망과 분노를 쫓으면서 나고 병들고 늙고 죽으며 끊임없이 방황하는 중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순간순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
‘내가 깨달은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유치원 아이들에게 어떻게 쉽게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듯 생각에 잠겼다.
‘누가 내 말을 믿어줄 것인가? 아니,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내 말에 귀 기울여줄까?’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비웃을지도 모르고, 이교도라 하여 죽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아주 맑게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가르침을 포기하고 영원한 안식과 기쁨의 상태인 열반의 상태에 그냥 머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고해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에 대한 깊은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한한 열락의 자리인 부리수나무를 박차고 나와 인간들의 고통의 현장인 속세로 나온 것이다. 무한한 평화와 기쁨의 상태인 열반의 세계를 떠나 시끄럽고 더럽고 경쟁과 투쟁이 가득한 인간의 세상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부처님은 속세의 왕위를 버렸듯 다시 한번 조용하고 안락한 열반의 상태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깨달음의 경험을 혼자만 간직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 大慈大悲’이다. 위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 거룩한 깨달음의 사랑이 바로 불교의 시작이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역사적 聖人의 가르침만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인가? ‘깨운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에서 나온 부처, 즉 ‘붓다(Buddha)’라는 말은 우리가 본성품을 깨달아 고통의 잠에서 깨어난다는 뜻이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
자, 그럼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다. “당신은 누구인가? 태어났을 때 어디서 왔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들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간절한 삶의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다면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책이나 지식은 답을 찾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돈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님이나 하느님(하나님)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오직 모를 뿐’만이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답을 찾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종교적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들은 결국 ‘주체 종교’와 ‘객체 종교’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주체 종교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을 믿는 것이고, 객체 종교란 바깥의 초월적인 힘, 즉 이 세상과 우리 삶을 통제하는 어떤 강력한 힘, 즉 신을 믿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외부의 힘 혹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믿으면 뭔가를, 이를테면 행복이나 특별한 에너지, 신비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명상 수행도 이를 방편으로 이용한다. 어쨌든 하나되고 싶은 어떤 대상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것은 모두 ‘객체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는 주체 종교이다. 자기 자신, 내가 이미 갖고 있는 本性品 바로 ‘나’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나我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태어났을 때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언제 죽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질문을 절실하게 파고들면 모든 생각은 완벽히 끊어진다. 안과 밖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며,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된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는 분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란 것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하여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책을 통한 배움이 아니며, 어던 절대자 혹은 외부적인 힘에 의존하지도 안는다. 불교가르침의 진수는 바로 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깊이 함으로서 ‘오직 모를 뿐……’ 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우리의 본성, 참 나(眞我)를 얻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불교는 단지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길(道)이다. 그 길의 이름이 ‘ 오직 모를 뿐’이다.
‘오직 모를 뿐…… .’
그 순간 우리 자신과 우주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참선수행’이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 올바른 길과 진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불교 역시 진리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참 나를 깨닫고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진정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참 나를 얻을 때 우리는 우주적 존재가 된다. 우주와 나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실용, 實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上求菩提 下化衆生)’ 그러나 이 두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가르치는 것은 수레의 양쪽 바퀴와도 같은 것이다. 한쪽이 고장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면서 사람들과의 삶을 소홀히 안다면 진리로 향하는 길은 더욱 요원해지게 된다. 한편 깨달음을 얻기 위한 피나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또한 부처가 될 수 없다.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두 가지 수레바퀴로 나아갈 때, 우리는 佛國土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8만 4천 경전이나 성경을 줄줄이 왼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으며 그 모든 이해와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작 눈감고 죽는 순간에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이 낫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사람과 위대한 보살도(菩薩道), 그리고 위대한 자비는, 다름 아닌 우리마음에 대한 탐구를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중생을 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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