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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March 19, 2012

만행 진라의 길 구도의 길 끝편

진리의 길, 구도의 길 지은이의 말
나는 어린시절부터 줄곧 진리가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왜 사는 지, 왜 태어났는지, 이 생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더욱 풀리지 않는 의문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왜 사람은 죽어야 하는가? 왜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영원히 사라져야 하는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과 함께 내가처한 사회ㆍ문화적 환경속에서 ‘나’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철이 들무렵 텔레비전과 신문의 뉴스를 접하며 왜 다른나라 사람들은 우리처럼 안락하고 안전하게 살지못하는 것일까? 풍요와 기회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데 왜 다른 나라 아이들은 나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쟁과 폭력과 싸움의 한가운데서 허우적대야 할까? 내게는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 왜 어떤 아이들은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것일까? 나는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런 걸 누리고 있는 것일까?
만약 내가 그런 혜택을 누릴만한 그 어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고, 다른나라 아이들 역시 그런 불행에 상응하는 어떤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논리나 합리성이 결여된 것이다. 따라서 이 생이란 아무의미가 없는 것알지도 모른다.
그 의미 없는 태어남과 의미없는 죽음사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일들 역시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이 새상이란 무엇인가?
많은 종교들이 이러한 질문들에 쉬운 답을 제공했다. 오랫동안 나는 그러한 쉬운 답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종교에서 주는 답이란 결국 ‘무한히 善한 존재가 이 우주를 창조했으나 어떤 무한히 惡한 존재가 이 우주를 파괴해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선과 악의 관념을 믿었다. 신이 이 세상의 선하고 성스러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믿었으며, 악과 괴로움과 고통과 전쟁등은 ‘다른 어떤 외부의 존재’로부터 왔다고 믿었다. 오랫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권의 책만이 절대적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었다. 비록 우리의 생이 상상하기 힘든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가득한 신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신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가르침을 주시기위해 한편에서는 전쟁과 병과 싸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아기들이 태어나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아니, 믿기를 바랐으며, 믿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은 믿을 수가 있었다.
서양 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내가 갖고 있었던 의문들에 대해 보다 명확한 답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일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한 것도 그를위한 것이었다. 하버드 대학원의 모토는 ‘VERITAS’ 이다. ‘진리’라는 뜻이다. 예일대학의 모토는 ‘LUX et VERITAS’이다. ‘빛과 진리’라는 뜻이다. 이것들은 예일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의 도처에 있다. 건물에도 벽에도, 길에도 씌여있으며 게시판과 학교 버스에도 씌여있다. 교과서에는 물론이고 펜, 샤츠, 바지, 커피잔, 메모장, 모자, 양말, 넥타이, 장갑에도 나타나고, 심지어 속옷에도 씌여있다.
‘진리’ ‘빛과 진리’ ‘진리’ ‘빛과 진리’ ‘진리’ 빛과 진리’ ‘진리’ ‘빛과 진리’.........
나는 공부를 계속하면서 마음속에 갖고있던 질문들이 어떤 답을 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종교를 나의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기독교인으로 남고자 애쓰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한다 할지라도, 나는 오직 진리, 즉 베리타스를 찾기만 한다면, 그건 좋은 일이었다. 또 다른 어떤 것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면, 그것 여기시 좋은 일이었다. 나는 내가 찾는 것의 바깥모양에는 개의치 않았다. 진리를 찾는 일만이 중요했다. 베리타스 를 찾기만을 원했다. 그것을 기독교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좋은 일이었다. 나는 내가 찾는 것의 바깥모양에는 개의치 않았다. 진리를 찾는 일만 중요했다.
그런던 1987년 어느 날.
예일대 신학대학교에 다니는 개신교 목사인 한 친구가 나에게 책을 한 권 주었다. 《선의 마음, 초발심》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불교서적이었다. 나는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989년 겨울.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서 머리를 빡빡 깎고 희색옷을 입은 한 키 작은 한국사람을 만났다. 그는 말했다. 자기는 아주 멀고 조그만 나라 한국의 수도 서울에 있는 ‘화계사’라는 절에서 살고 있다고,
그의 가르침은 나를 완전히 충격에 빠뜨렸다. 그의 가르침은 내가 평생들어온 말 가운데 유일하게 참되고 정직한 말이었다.
그분은 현재 서울 화계사 큰스님이신 숭산 행원 대선사님이시다.
느는 큰스님의 가르침이 진실로 귀하고, 진실로 참된 가르침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므로 나의 전 생을 그 가르침에 따라 살기로 했다.
이 책은 내가 어떻게 이 같은 진리의 도정을 걸어왔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뉴저지 주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파리, 보스턴,을 경유하여 결국 한국의 절들 ㅡ 서울 화계사, 충남 계룡산 신원사, 그리고 지리산에 자리잡은 조그만 암자 ㅡ 에서 수행하는 삶을 택하기까지 나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책을 내는 일이 주저된다. 수도승이 더군다나 아직 풋내기인 내가 살아온 여정을 쓴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건방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우연하게 일이 이루어졌다.
지난 봄, 나는 한국의 한 친구와 함께 숭산 큰스님의 영어 법문집인 《선의 나침판》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었다. 내가 출판하고 싶어한 책은 바로 이 책이다. 나 자신의 말이 아니라. 나의 스승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책은 너무 방대했다. 그리고 애초에 미국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출판사가 출판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들었다. 책이 매우 유익하다 할지라도 분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 책을내면 출판사로서는 적자를 보게 될 뿐일 것이라고 여러 사람들이 말했다. 그런 가운데 한 출판사에서 고맙게도 《선의 나침판》을 출판하겠노라고 제안해왔다. 이와 함께 현재 숭산 큰스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그리고 현재 수많은 서양사람들이 얼마나 큰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리고 있는지 나 자신의 삶을 통해 얘기하면 한국불교를 세계화하고 경제위기로 실의에 빠져있는 한국사람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는 도반들의 조언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먼저 이 책이 나오게 되었다.
나는 나의 스승의 위대한 책인 《선의 나침판》이 내년 하반기중 한국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위해 이일을 했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램이다.
나는 마국인 스님인 내가 한국사람들에게 한국의 불교전통에 대해 얘기한다는 게 영 이상하고 쑥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이 요즘처럼 미국사회를 교과서나 되듯이 쫓아가려고 하는 마당에 한국인들에게 바깥이 아닌 바로 자신들 안에 위대한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현재 대단히 많은 서양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단히 많은 외국인들 ㅡ 대부분 교육 수준도 높고 경제적 어려움도 없이자란 중산층 인텔리들이 많다. ㅡ 이 한국에 와서 이 전통을 배운다음, 자기네 나라로 가지고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우선 숭산 행원 대선사님께 한없는 깊은존경과 감사를 표시한다. 또한 계룡산 신원사 주지인 성광스님, 선덕스님과 도관스님을 비롯한 화계사의 모든 위대한 스님들과 신도들, 전남곡성 관음사 지인스님께도 머리숙여 감사한다.
이 책은 허문명씨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도반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수없이 많았던 우리의 영어대화를 구술, 변역정리하고 편집하여 이 책에 실었다. 우리는 한국사회, 미국사회는 물론 종교, 사회, 문화, 삶과 죽음 등 모든 것을 같이 이야기했다. 그의 열정적인 작업과 마르지않는 실험정신은 나의 아둔하고 재미없는 삶과 생각들을 훌륭한 솜씨로 다듬어 주었다. 그는 앞으로 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믾은 일을 펜으로 이루어낼 위대한 지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책에서 잘된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진정한 친구인 그에의한 것이며, 모든 실수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몫이다.
수덕사 주지이자 서울포교당인 강남구 논현동 무불선원 이사장인 법장스님과 마포구 법화전사 도림 큰스님, 그리고 지난 여름과 가을 이 두 곳 사찰에서 내 강연을 들어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이 책의 집필은 서울 인사동 〈지대방〉이라는 찻집에서 전부 이루어 졌다. 주인 오영순 보살님의 친절한 도움과 후원에 감사한다. 그리고 수년동안 끊임없이 나를 도와주고계신 김영현씨에게도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중모 사장님과 정은숙 주간님을 비롯한 〈열람원〉 편집부와 사진작가 김홍회님께도 감사한다.
이 책의 판매를통해 얻은 수익금은 모두 숭산선사의 많은 서양학생들을 통해 한국불교 ㅡ 한국불교의 가르침과 예술적 전통과 문화 ㅡ 를 전세계에 전파하는 일을 지원하는데 쓰일 것이다. 한국의 고대 불교의 전통을 전파하는 일이 다른나라들로 하여금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의 무궁무진한 풍요로움을 보다 깊이 깨닫게 하는 데 기여하기를,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평화 통일을 앞당기는 데도 기여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1999년 10월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 현각 합장

Tuesday, March 6, 2012

만행 나의 도반 세번째 이야기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명공스님

명공스님 역시 재미있고 특별한 스님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에 소련에서 태어났다. 소련에서 아주 유명한 생물학박사였다. 러시아에서 가장 명문인 모스크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두 개나 받았다. 그 나라에서 일반 사람은 만질 수 없는 많은 월급을 받았던 과학 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다. 소련에서는 일단 모스크 바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만 하면 편안한 삶이 보장되었다.
그의 연구 결과는 매번 훌륭한 것이어서 그는 아주 잘 나가는 생물학자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점점 공산주의 사회의 본질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일거수일투족을 옥죄는 시스템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는 나은, 아니 정치적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완전히 부패와 강압만이 가득한 곳이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사회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동료학자들은 그를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를 아끼는 친구들은 제발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사회에 순응해 살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연구원에서 쫓겨나 국내 추방을 당하게 된다. 시베리아의 황량한 버려져 텐트를 치고 사냥을 하는 원시인과도 같은 삶이 그를 기다렸다.
당시 소련 정부는 능력 있는 과학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 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했다. 공 들여 연구한 생산물들이 국외로 유출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에 비판적이다 싶은 과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격리를 했다.
춥고 외로운 곳에서 몇 년을 보낸 후 명공스님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옮겨 살게 되었다. 그는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그즈음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는 개방정책을 펴 소련의 빗장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때마춰 마침 큰스님의 강연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다. 개방 분위기와 전통적으로 불교에 대해서 만큼은 상대적인 관대함을 가지고 있던 공산주의 사회의 특성 때문에 큰스님은 1980년대 후반 러시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법문을 하셨고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 젠센터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명공스님은 큰스님을 만나자마자 큰 감명을 받고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큰스님을 만났을 때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큰스님은 간단한 대답으로 그의 복잡한 생각을 끊어놓았다. 그는 그날로 페테르부르크 젠센터로 가서 수행을 시작했다. 경전도 열심히보고 공부도 많아하고 숭산스님의 책도 많이 읽었다.
그는 소련 체재가 무너진 뒤 1996년에 서울 화계사로 와서 동안거를 시작하면서 출가를 했다. 당시 50대 후반이었는데 행자생활을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화계사에서 아주 유명했다. 특히 작년 화계사에 수해가 났을 때 나는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큰 바위를 옮기고 더러워진 가재도구를 쉬지 않고 정리하는 그를 보면서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 했다.
화계사 신도들은 그를 아주 존경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소련에서 하도 고생을 해서 이빨이 거의 남지 않았는데 신도들이 그가 일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동해서 이빨까지 다 해줄 정도였다.
러시아 민요와 비슷하다며 틈날 때마다 한국 뽕짝을 듣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이다.
만행 치린스님
이분은 싱가포르 출신인 중국계 스님이다. 그는 최근 3년동안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치린스님은 나의사제舍弟 이지만 나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없다. 내가 그에게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는 스님이 되기 전에 싱가포르에서 스쿠터를 몰고 다니며 안다닌 데가 없을 만큼 자유분망한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마음속 한켠은 허무감과 삶에대한 의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처음에 점한 불교는 중국 불교로 경전도 많이 읽었고 예불도 직접 주도하면서 열심히 절에 다녔다. 그러다 1996년 싱가포르 젠센터에서 큰스님을 만나 큰스님 밑에서 출가를 했다. 그리고는 아예 한국으로 와 살고 있다. 그는 아주 순수하며 온화한 마음을 가졌다.
또 차茶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다. 어떤 차든지 한 모금만 마시면 이 차가 어느 나라 것인지는 물론 차의 성분이 무엇이고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금2방 알아차린다. 심지어 찻잎을 언제 어느 철에 땃는지 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니, 스님 언제 그렇게 차에 대해 연구를 하셨어요?” 하고 물으면 그는 하하하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중국인입니다.태어나면서부터 차를 마셨으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차린스님은 앞으로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 전역에서 큰스님의 가르침을 알릴 스님이 될 것이다.
만행 도관스님
마지막으로 내가 소개하고 싶은 스님은 화계사의 도관스님이다. 그는 한국인 스님이다. 내가 감히 한국인 스님들을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해도 되는 것인지 몰라 여러 번 고민했지만 개인적으로 도관스님께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마지막으로 적기로 했다.
그는 진정한 수행자다. 화계사 총무 스님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면서도 매일 참선과 수행을 빼놓지 않는 수님이다. 나는 도관스님의 삶을 보면서 저런 수행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의 많은 스님들이 되도록 신도들과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신도들과 수행을 같이하고 싶어하지 않는 스님들도 보았다. 그러나 도관스님은 매일 하는 모든 수행을 신도들과 그리고 다른 스님들과 항상 나누려 하신다.
그는 지난 3년동안 화계사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해온 3천배 행사를 빠지지 않고 지도하신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매달 3천배 행사 때마다 화계사에는 3백여 명이 몰려드는데 도관스님은 몸이 아프건 말건 일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매달 거르지 않고 3천 배.수행을 하곤 하는데 병이 났을 때도 신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3천 배를 계속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곤 했다.
저녁 일곱 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 50분 절하고 10분 귀는 식으로 진행되는 3천 배, 도관스님은 그 10분 쉬는 시간에도 온전히 당신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지 않고 신도들 곁으로 간다. 그러면서 힘들지는 않는지 염려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그들을 격려한다
모든 일상을 수행과 접목시키려는 그의 삶이야말로 참다운 수행자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Monday, March 5, 2012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현문스님
현문스님의 삶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는 생과 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분이다. 그는 폴란드 스님이다.
화학, 생물학, 문학, 역사학, 음악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그를 우리는 또 ‘황금의 손을 가진 스님이라고 부른다. 고장 난 것은 뭐든지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장차 폴란드를 대표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현문스님은 지금도 피아노만 있으면 바흐, 헨델, 모차르트 곡을 악보 없이도 연주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폴란드에서 유명하다는 음악 선생님들을 찾아 다니며 작곡법과 지휘 법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그를 새장 속 새처럼 가둬놓았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자기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자라면서 조국 폴란드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으나 점점 그런 일들을 접하면서
폴란드 정부가 외부 강대국인 소련의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조국 폴란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과학자가 되기로 한다. 당 간부나 엘리트 당원을 위한 음악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보다는 화학이나 생물학을 공부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조국에 더 유용하게 쓰여지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창시절 종교적 신념과 관련된 큰 경험을 했다.
폴란드 국민들의 98퍼센트는 가톨릭 이다. 폴란드에 가면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성당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중학생이 되자 현문스님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견진성사 (영아세례 다음에 받는 칠품성사 중 하나로 주교가 성신의 은총을 주기 위하여 그 신자의 이마에 성유를 마르는 성사)를 받기 위한 교육에 참여한다. 추기경이나 주교로부터 은총을 받는 이 행사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그때 현문스님이 다니던 성당의 주교님은 폴란드에서도 가장 존경 받는 카를 보티라 추기경이었다.
이분이 후에 교황 요한 바울 2세가 되신 바로 그분이다. 현문스님은 카를 보티라 추기경이 교황이 되기 1, 2년 전에 견진성사 의식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니 그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얼마나 영광된 일이었겠는가.
수련 마지막 날, 추기경님은 학생들에게 그 동안 가르침에 대해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현문스님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는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도 일찍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문에 휩싸였다. 세상의 많은 불공평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견진성사를 받기 전에 반드시 이 의문을 풀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문스님이 입을 열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면 왜 장애인들을 만드셨을까요?”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건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우리가 나뿐 일을 하면 그렇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함이지.”,
현문스님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만약 그러한 신이라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간 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신부님 말씀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성당을 나와버렸다. 그리고 난 뒤 성당에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현문스님은 청년 시절 폴란드의 유명한 운동권이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 반정부 지하단체에 가입한 뒤 가열찬 투쟁정신(?)으로 운동권의 대표가 된다. 명석한 머리와 대담한 용기를 가진 그는 운동권의 스타였다.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물론 운동권의 이론을 제공하는 이론가였으며 화학물질 제조 기술도 갖고 있어 각종 시위용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당시 폴란드 반정부 운동의 신화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급기야 정부에 체포돼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는 석방돼서 다시 저항하다 또 붙잡혀 들어갔다. 석방과 구금을 반복했다. 그 당시 그는 완전히 쫓기는 신세가 되어 부모 형제들과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의 반독재 반정부 투쟁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아주 커다란 조직을 만들려다 체포된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이제 살아서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하리라는 절망에 빠졌다. 당시 그가 도모한 일이 워낙 큰일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그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할 것이고 고문의 고통과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반정부 투쟁을 하다 잡힌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렇게 죽어갔다. 혹은 중노동을 하는 수용소로 옮겨져 과로로 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약간 달랐다. 워낙 반정부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가 잘못되면 성난 민중들이 어떻게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정부 역시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죽인다면 그의 명성과 활약상을 들어온 폴란드 국민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태세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문은 면하게 되고 대신 악명 높은 교도소에 장기형을 받고 수감된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심리학을 전공하는 여 교수가 어느 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폴란드 안에서 현문스님을 비롯한 반정부 인사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프로잭트를 맡아 연구중이었다. 정신적인 신념과 정치적 행위에 관한 연구였다고 한다.
인터뷰는 3일간 지속되었다. 인터뷰 마지막 날 그 교수는 현문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아니오,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문스님은 일말의 주저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 교수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습니까?”
“∙∙∙∙∙∙만약 신이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처럼 고통에서 허우적댈 수 있습니까? 도대체 신이란 어떤 분이시길래 우리가 이처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만들어 내신다는 말입니까?”
그 교수는 충격을 받았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당시 폴란드 대다수 국민들은 카톨릭을 믿고 있었고 투쟁은 대부분 성당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유물론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공산주의 간부들은 당연히 무신론자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단 ‘무신론자’들은 그들과 적어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운동권 인사는 신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2주일 뒤 현문스님은 뜻밖에 석방을 통보를 받는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산당이 현문스님을 사면한 것이다. 자신의 사면이 그 여교수의 인터뷰 보고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석방 훨씬 뒤의 일이었다.
오랜 저항운동과 감옥생활, 그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서는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문과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이 가져다 준 변절이 아니었다. 그는 감옥을 나온 뒤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아! 나는 누구인가.’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며 그토록 열심히 반정부 투쟁을 해왔건만 마음속은 허전했다. 당시 그와 투쟁했던 동지 몇몇은 티벳 불교에 심취하고 있었다. 당시 폴란드 정부는 카톨릭을 탄압하는 대신 불교에 대해서는 무신론이라 하여 간섭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티벳불교의 대선사인 카투 린포체에게 그를 소개했고 현문스님은 그의 지도아래 명상수행을 했다. 현문스님은 아주 열심히 수행에 참여했다. 이틀에 한 번씩 불교경전도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문스님은 불교신자인 한 친구로부터 녹음 테이프 한 개를 선물 받는다. 그것은 숭산 큰스님의 영어법문 녹음이었다. 그는 테이프를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분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는 자신의 오랜 방황이 그제야 끝나는 듯한 환희에 휩싸였다. 며칠 뒤 현문스님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큰스님이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운영하고 있던 젠센터를 방문하게 된다.
바르샤바 젠센터는 1978년에 문을 연 것으로 당시 큰스님의 가르침은 삶에 환멸을 느낀 폴란드 젊은이들 사이에 점점 파고들고 있었다. 현문스님은 이곳에서 용맹전진을 마치고 다시 고향 크라콥으로 돌아갔다.
불교는 그들에게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티벳 • 중국 • 일본의 불교 서적들이 서구를 거쳐 폴란드로 몰래 수입되고 있었고 학생들과 지성인들은 너도나도 그것을 복사해다 읽었다. 현문스님 말에 따르면 어떤 책을 너무 여러 번 복사를 해 읽기가 어려운 것도 많았다고 한다.
현문스님은 1년 후 드디어 숭산 큰스님의 폴란드 방문소식을 듣는다.
그런데 당장 바르샤바 대학까지 갈 차비가 없었다. 그는 가장 아끼고 있던 로큰롤 음반을 모두 내다팔았다. 책과 옷가지까지 다 팔았다.
그렇게 마련한 여비로 바르샤바 대학으로 간 스님은 깜짝 놀랐다. 이미 선방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복도에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큰스님의 목소리만 들어야 했다.
그날은 폴란드 내의 유명한 지성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거대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큰스님은 바르샤바 대학에서 돋장 강의를 마치고 바르샤바 젠센터로 가셨다.
젠센터 선방은 이미 완전히 만원이었다. 현관과 복도에까지 빼곡히 주저앉아 너도나도 참선을 배우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부엌에까지 주저앉아 참선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큰스님과 인연을 맺은 현문스님은 본격적으로 큰스님의 일을 돕는다. 우선 고향 크라콥에 젠센터를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고 숭산 큰스님이 좀더 자주 폴란드를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재미있는 것은 큰스님의 폴란드 방문 때마다 쌍수를 들고 반대를 한 것은 폴란드 주재 북한대사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폴란드 사람들이 혹시 남한 사상에 물들까 하고 매우 경계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때는 큰스님의 뒤를 미행하고 몰래 비밀요원을 파견하여 큰스님의 설법을 적어가기도 했다. 한번은 큰스님이 폴란드에 ‘한국 불교 문화전시회’를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거리에 붙인 포스터를 모두 찟고 전시장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방해는 오히려 폴란드 정부를 불편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큰스님을 더욱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현문스님은 바르샤바 젠센터에서 생활했지만 오랜 기간 출가를 주저했다. 결혼도 않고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였가 때문에 출가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했자만 출가보다는 돈을 볼어 큰스님을 자원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보석사업을 시작해 돈을 꽤 많이 번다.
나는 언젠가 현문스님께 “왜 하필 보석가공 일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여자들이 보석에 돈 쓰기를 좋아하니까 돈을 쉽게 벌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그의 무대도 넓어졌다. 프랑스, 이탈리아, 싱가포르를 제집 드나들 듯 왔다갔다하며 사업을 발전시켰다.
수익금의 대부분은 각 나라에 세워진 큰스님의 젠센터에 송금했다.폴란드 사람들이 한국의 동안거와 하안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비행기표와 생활비를 대주기도 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으면서도 한번도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쓰지 않았다. 출가를 안 했어도 출가한 스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느 날 큰스님이 그에게 “이제 출가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때가 안 됐읍니다. 한 몇 년 더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큰스님은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태어날 때 자기 자신에게 “내가 태어날 준비가 되었느냐” 하고 묻고 태어났습니까? 또 죽을 때 “내가 죽을 때가 되었는가” 하고 죽습니까?”
현문스님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자 이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십시오. 당신은 이미 오래 전 출가한 수도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문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달 후 그는 출가를 했다. 그 역시 지금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생활하신다. 한국 문화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그는 한국의 전통예술, 그중에서도 목공예와 도금공예에 관심이 많다. 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웃음을 잃지 않고 부지런히 수행하시는 현문스님. 그에게 존경을 보낸다.

Sunday, March 4, 2012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이야기

만행 무심스님

다음으로 소개할 분은 현재 화계사 국제선원에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미국인 스님인 무심스님이다. 그는 현재 숭산 큰스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있는 스님이다. 그는 현재 숭산 큰스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스님이다. 큰스님과 함께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큰스님의 모든 이정을 짠다.
앞서 소개했던 대봉스님처럼 무심스님도 필라델피아의 유태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 교수이고 동생은 미국에서 유명한 해양 생물학자다. 그 역시 1981년 미국의 명문 보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4년에 출가했다.
국제선원 스님들 중에는 비록 큰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출가를 하긴 했지만 한국과 별로 인연이 없어서 음식이나 생활방식이 잘 안 맞아 생활하는 데 고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무심스님은 나 만큼이나 전생에 한국과 인연이 깊어서인지 정말로 한국 사람 이상으로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 음식도 무엇이나 잘 드신다. 속담도 모르는 게 없다.
무심스님은 숭산 큰스님 제자들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조계종에서 비구계를 받으셨다. 이것은 외국인 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조계종이라는 큰 우산 아래 들어간 일이어서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그전까지는 대부분 미국 관음선종에서 비구계를 받았는데, 무신스님 이후로 대성스님, 청안스님 그리고 나까지 모두 한국 조계종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무심스님은 출가한 직후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화계사 국제선원이 만들어지면서 총무일도 맡고 수덕사, 신원사, 화계사 등에서 안거수행도 많이 했다.
그는 영어와 한국어를 다 잘하기 때문에 숭산스님의 모든 사무적 일정을 헌신적으로 맡아보고 있다. 무심스님은 아주 세심하고 꼼꼼하기 때문에 무려 15년 동안이나 큰스님을 옆에서 모시고 있다. 그의 성실성과 치밀함은 정말 대단하고 컴푸터에도 굉장히 능하다.
화계사 국제선원에서도 지도법사이기 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정말 한시도 제대로 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큰스님이 몇 차례 병원 신세를 지셔야 했는데 그때마다 무심스님은 24시간 큰스님곁에서 간호를 했다. 한번은 큰스님이 미국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무심스님의 정성에 탄복하여 큰스님께 ‘누구냐’고 여쭌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큰스님은 선뜻 ‘내 아들이다’라고 대답하셔서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다고 한다.

만행 명행스님

명행스님은 미국의 명문 코넬 대학교에서 그리스와 라틴 등 고전문학을 공부한 수재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아직도 자유롭게 쓰고 말할 줄 안다.
그는 천재에 가까운 암기력을 갖고 있으며 꼼꼼한 성격에다 두터운 신심을 갖고 있다. 만약 그가 출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잘생겼으므로 결혼도 해서 마름다운 아내와 아이들을 가졌을 것이다.
그가 고전문학에 심취한 이유는 진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 진리냐’ ‘삶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의문을 갖고 있었던 그는 수많은 그리스, 라틴 고전들에 빠져들었다. 그것도 옛날 고어로 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동양 철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동양을 여행하기로 하고 우연히 신문을 읽다가 한국에서 영어선생님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그 즉시 자원을 했다. 그는 4년동안 한국에서 전라북도 전주와 충청남도 대전, 공주 일원의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고 보면 명행스님 역시 한국과 아주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그는 도시생활을 좋아하지 않아 주로 지방에서 살았는데 겨울에 우연히 공주로 여행을 갔다가 당시 계룡산 신원사에서 동안거 수행을 하는 외국 스님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신원사에서 그와 처음 대화를 나눈 스님이 바로 무심스님이다. 무심스님은 그에게 화계사 국제선원을 소개하며 꼭 한번 오라고 초청했다. 그는 신원사에서 며칠 묵으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듣는 사찰의 종소리가 그렇게 친근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신원사 몇몇 외국인 스님들로부터 숭산 큰스님과 벽암 큰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서울을 오가며 국제선원에서 수행을 하고 큰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한 것이다. 그는 출가하면서 그때까지 읽고 있었던 그리스, 라틴 책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그는 매일 1천배 수행을 하는 스님이다. 매사에 진지하고 부드러워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경을 받고 있다.

만행 청안스님

나는 지금 유럽에 한국 불교를 포교할 스님 한 문을 소개하려 하는데 그는 다름아닌 청안스님이다.
청안스님의 고국은 헝가리, 청안스님은 특히 자신의 고국 헝가리에 대한 애국심이 투철하며 고색창연한 헝가리 문화와 역사에 대해 큰 자긍심을 갖고 계신 분이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헝가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한국을 아주 좋아한다. 두 나라 모두 오래되고 자랑스런 문화를 갖고 있으며 이웃 강대국으로부터 수 차례 침략을 받았으나 조상들의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해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헝가리 국민이나 한국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그에게는 반가운 일이다. 유럽에서도 특이하게 헝가리 국민들만 매운 음식을 즐긴다고 한다. 어떤 음식은 유럽사람들이 도저히 입에도 못 댈 정도로 맵다고 한다. 또한 두 나라는 언어의 구조와 형태까지 비슷하다고 한다.
청안스님은 이렇게 얘기한다.
“많은 언어학자들은 한국어와 헝가리어가 몇 천 년 전에 동일한 언어의 뿌리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헝가리인 들이 본래 아시아 땅에서 살다 지금의 헝가리 땅으로 이주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헝가리는 유럽 안에서도 가장 동양적인 사고방식과 문화를 가진 나라다.”
그래서인지 청안스님은 한국말도 유창하고 한국 음식도 잘 드신다. 그의 아버지는 국제적으로 존경 받는 심장병 전문의다. 어머니 역시 의사다.
그는 자랄 때부터 영어, 연극, 스포츠에 만능 재주꾼이어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대학 다닐 때는 ‘실험연극’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도 중여한 예술 장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실험연극은 대본을 사용하지 않고 배우들이 즉석에서 즉흥적인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전에 계획된 말보다는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당시 그 경험을 통해 청안스님은 순간에서 순간, 상황에서 상황, 말이 필요없이 현실을 인식하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1990년 헝가리에 법문을 하러 온 숭산 큰스님을 만나게 된다. 부다페스트에 있는 대형 강의실은 큰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당시 청안스님은 이미 헝가리의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이 창업한 번역회사를 열심히 운영하고 있었다. 헝가리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해 헝가리도 바야흐로 개방의 물결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많은 회사들이 헝가리 시장을 놓고 경쟁적으로 자본참여를 할 때였다. 그때 청안스님은 그 회사들의 일을 도와주면서 큰돈을 벌었다. 어떤 때는 그의 한달 벌이가 아버지의 4개월 월급을 합친 것보다 많은 때도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출가를 하지 않고 사업을 계속했더라면 지금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인 부다페스트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순전히 큰스님을 뵙기 위해 미국을 서너 차례 방문 한다. 또 1993년 10월에는 3년마다 한 번씩 미국에서 전세계 큰스님의 제자들이 모이는 ‘세계일화’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미국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서 3개월간 안거수행을 했다. 그리고 그 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세상이 온통 고통으로 가득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헝가리에서 돈을 벌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견딜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출가를 했다.
부모님은 거의 혼절을 했다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많았던 아들에게 부모님이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그래도 나는 형제가 여덟이나 되었기 때문에 출가하면서 부모님의 노후 걱정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청안스님의 출가는 곧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질 자식이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속 깊은 고통 속 에서도 출가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부모님 곁을 떠나 5년간이나 한국에 살고 있다. 그는 정말 부지런하고 성실한 수행자다. 자신이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해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청안스님은 화계사 국제선원의 총무 및 재무스님으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신다.
청안스님은 지난 여름 큰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고, 곧 고국인 헝가리로 돌아가 젠 센터 주지를 맡을 예정이다. 그는 한국 불교를 유럽에 알리는 선구자가 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

Friday, March 2, 2012

만행 무량스님

만행 무량스님

무량스님은 내가 평생 동안 만났던 사람 중에서 몇 안 되는 아주 인상적인 분이시다. 나는 그가 큰스님 다음으로 ‘할 수 있다는 의지가 강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잘 생기고 머리도 좋아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단 한 가지 그를 덮친 불행이 있었다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그 일은 생각이 깊었던 그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그의 얼굴은 흡사 조각처럼 말고 아름답다. 특히 그의 크고 푸른 눈은 정말 ‘예술’이다 그 푸르고 맑고 깊은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깊은 바닷속을 유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젠센터에 오는 사람들은 무량스님의 맑은 눈만 보고도 ‘수행을 하면 저런 눈을 가질 수 있는 것이냐’며 감탄한다. 스님의 맑은 눈은 그 어떤 백 마디의 가르침보다 확실한 것이다.
무량스님은 미국에서 가장 좋은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예일 대학에 입학해 지리학을 공부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었던 그는 이 우주에 대해서 탐구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리학은 이과적인 상상력과 문과적인 상상력을 둘 다 필요로 하는 학문이다.
그는 학과 공부 이외에도 요가수행에 심취했다. 그는 나에게 “만약 스님이 안 되었더라면 히말라야에서 요가수행을 하는 요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무량스님은 1978년 예일 대학에 강연 왔던 숭산 큰스님을 만난 뒤 큰스님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인근 뉴헤에븐 젠센터에서 참선수행을 시작했다. 1980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변호사로 성공한 아버지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을 바랐지만 큰스님을 따라 한국으로 와 버렸다. 그리고 1983년 출가를 했다.
무량스님은 서울 화계사에 국제선원을 만든 창립 멤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84년 화계사에 최초로 국제성원을 만든 뒤 5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다. 그 동안 연세어학당에서 한국말 공부도 열심히 하셔서 한국말도 아주 유창하다.
무량스님은 한국에서 첫 번째로 유명해진 외국인 스님이기도 하다. 88 올림픽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방송국 기자들이 당시 미국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큰스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무량스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도왔다. 최초로 한국 불교를 미국에 알리는 선봉장 역할을 하신 것이다.
무량스님은 또 수행을 아주 열심히 하시는 분이다. 한국에서 큰스님의 비서로 있을 때 큰스님이 해외 강연으로 국내를 비우시면 지체 없이 암자로 들어가 홀로 수행하셨다. 수덕사 인근의 한 암자에서 1년 동안 혼자서 수행하시기도 했고 미국으로 가기 전 1년 동안은 남한 땅 전체를 도보로 여행하기도 했다.
무량스님이 미국으로 건너가 LA에 있는 큰스님의 절인 달마 젠센터(Dharma Zen Center)의 주지로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미국 몇몇 주에서는 운전자 마음대로 자동차 번호판에 문자를 새길 수 있는데 스님은 자동차 번호판에 ‘Y ALIVE’(“Why do you live? For what?)를 쓰고 다니셨다. 즉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화두를 자동차 번호판에 새기고 다닌 것이다.
그가 주지로 있었던 달마 젠센터는 아주 낡은 건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 고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전기가 나가기 일쑤고 겨울이면 파이프가 터지고 바람이 불면 창문이 부서져 나가고 화장실 변기도 자주 막혔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그는 심하게 말해서 망치 다루는 법도 제대로 몰랐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무량스님은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느끼셨다. ‘사찰’은 돈을 쓰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신도들의 보시 (사실, 미국 절은 한국처럼 보시가 아니라 젠센터에 같이 사는 신도들의 생활비로 운영되지만, 어쨌든……)를 이렇게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무량수님은 그 길로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집안수리를 혼자 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들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일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창문도 고치고 타일도 붙이고 시계도 고치고 끊어진 파이프도 잇고 화장실 변기도 뚫고 벽지도 바르고…….
달마 젠 센터는 그의 힘과 노력으로 완전히 새집이 되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는 덕분에 건축분야에 전문가가 되어, 이제 캘리포니아에 절을 혼자서 짓고 계시다.
무량스님의 또 하나 위대한 점은 쉼 없이 노동하신다는 것이다. 달마 젠센터 주지 때는 승복도 벗어 던지고 더러운 작업복 차림으로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주지 정도면 얼마든지 편하게 생활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한번도 ‘나는 주지이다’라고 내세운 적이 없이 말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하셨다. 그 모든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LA 주정부에서는 한동안 극심한 가뭄으로 물의 사용량을 제한한적이 있었는데 스님은 아예 정원을 다시 꾸며 선인장 정원으로 만들어버렸다.
무량스님은 또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분이시다.
그는 한번도 새 승복을 입어본 적이 없다. 항상 낡고 여기저기 기운 승복을 입었다.
나는 때로 승복을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얼마나 한복을 좋아하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이다. 아름다운 승복을 받을 때마다 나는 너무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이건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무량스님을 생각하면 새 승복을 입는다는 일이 얼마나 죄스럽고 부끄러운지.
처음에 한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새 승복을 받을 때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런데 자꾸 거절하다 보니 선물하시는 분들이 언짢아하셨다. 또 낡은 옷만 입고 다니니까 거의 강제로 옷 가게에 가서 옷을 사 입히시곤 하셨다. 나는 그분들 마음을 너무도 잘 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다. 하지만 무량스님을 생각하면 그 새 옷들을 도저히 입을 수 없어 그저 사과 상자에 넣어놓고 있었다.
“아니, 스님, 제가 사드린 옷, 왜 안 입으시는 거예요?”
섭섭한 듯한 그이 표정에 나는 너무 미안했다. 생각 끝에 나는 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승복을 꺼내 몇 번이고 빨았다. 헌 승복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량스님을 본받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뒤부터 나는 새 옷을 선물 받으면 항상 몇 번이고 빨아 좀 헌것으로 만든 다음 입었다. 옷을 선물하시는 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나는 무량스님의 훌륭한 삶을 따라 배우고 싶다.
그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꿈은 이제 서서히 무르익고 있다. 그 꿈은 다름아닌 미국의 아름다운 산에 완전히 한국적인 전통 사찰을 세우는 것이다. 이미 몇 년 전 큰스님의 풍수 조언에 따라 캘리포니아 땅을 사서 한국 사찰을 세우는 일에 착수하셨다.
스님이 캘리포니아 땅을 산 얘기도 거의 신화에 가깝다. 스님은 미군들이 쓰는 지도를 사서 샅샅이 훑은 뒤 좋은 곳이다 싶으면 어김없이 현장 답사를 갔다. 그리고 큰스님께 풍수를 여쭌 뒤 마침내 마음에 드는 땅을 고른 것이다.
그는 큰스님과 중국 • 인도 • 대만 • 홍콩의 절을 다니면서 큰스님으로부터 풍수를 배웠다. 한국에 있으면서는 전국의 사찰을 다 도보로 다니며 익혔기 때문에 그 분야에 관한 한 전문가다. 풍수란 땅과 하늘과 물과 바람 에너지의 조화다. 어떤 땅은 양(+)의 에너지가 강한데 비해 어떤 땅은 음(ㅡ)의 에너지가 강하다. 무량스님은 특히 사찰은 풍수가 중요하다며 명당 자리에서 수행을 해야 우주의 맑은 기운과 하나가될 수 있다고 하신다.
일례로 애리조나주 세도나 같은 곳도 미국에서 알아주는 명당 자리인데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명상 단체들이 자리잡고 있어 관광지 역할도 톡톡히 한다.
무려 4년 동안이나 찾아 다녔건만 마음에 드는 명당 자리가 안 나타나 무량스님이 수심에 잠겨 있을 때 큰스님이‘하루 네 번씩 기도를 하라’고 하셨다. 무량스님은 그로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런데 그렇게 1년여가 다될 무렵 바로 그 캘리포니아에 땅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그가 찾던 땅이었다. 그곳은 L A에서 북쪽으로 차를 두 시간쯤 달리면 닿는 거리인데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산맥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이어져 있는 해발 1천 미터의 산이다. 산 아래는 오래된 카우보이 마을인데 지금도 그곳 사람들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부츠를 신고 산다.
나는 1994년에 그곳을 처음 방문했는데 너무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놀라 티벳에 온 것이 아닌가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곳은 아직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천연의 땅이었다. 머리에 큰 뿔을 가진 야생 양떼와 매와 독수리, 퓨마, 살쾡이, 곰, 토끼, 노루 등등 동물들도 없는 게 없다. 방울 뱀도 산다.
그 이듬해인가 나는 다시 그곳을 찾아 무량스님이 기거하는 곳에서 며칠 묵었다. 이튿날 새벽 어스름에 화장실을 갔다 나오는데 한 50미터쯤 뒤에서 퓨마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완전히 발이 땅에 붙어 옴짝달싹 못했다. 다행이 퓨마는 그대로 뒤돌아 달아났다. 그럴 정도로 그곳은 아직 태초의 신비가 가득한 천연의 땅이다.
큰스님은 그 땅을 보시더니 99퍼센트 다 좋은데, 절을 세울 땅 앞에 흐르는 강의 흐름이 산의 에너지를 분산시킨다는 것을 한 갖지 지적하셨다. 무량스님은 그 말을 듣고는 강물이 마르는 여름까지 기다린 뒤 혼자 포크레인을 작동시켜 아예 물줄기를 바꿔버리셨다. 무려 2년 동안 그는 순전히 혼자서 강가에 자라고 있던 그 수많은 나무며 바위들을 그대로 옮기고 강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틀어놓은 것이다. 그는 진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슈퍼맨이다.
내가 다시 그 산을 찾았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산이 되어 있었다.
지금 그곳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사찰이 착착 세워지고 있다. 이미 기와지붕을 얹고 온돌도 깐 요사채(스님들이 거주하는 곳)가 완성되었다. 이모든 일을 혼자 하셨다니 거의 기적에 가깝다.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건축가들도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만으로 지어야 하며 지붕에 무거운 기와까지 얹어야 한다’ 무량스님의 주문에 도저히 못하겠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무량스님은 일단 캘리포니아가 지진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겉모양은 한국식으로 하고 내부 철근이나 구조는 미국식을 따르기로 했다. 한국식 대중 목욕탕도 만들기로 했다.
남은 문제는 대웅전.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인 대웅전만큼은 안팎 모두 완전히 한국식으로 짓겠다고 하신다. 미국에는 기술자들이 없어서 한국 가술자와 같이 일하고 싶은데 한국사람들을 데려오려면 먹이고 재우고 하는 비용까지 만만치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그나마 돈도 부자 아버지한테 사정사정해서 유산울 미리 달라고 거의 강탈하다시피(?)받은 것이데 사찰을 짓기에는 역부족이다.
스님은 아예 한국에서 대웅전을 지어 다 분해한 후 공수를 하는 것이 싸다면 그 방법도 진지하게 고려중이시다.
그는 외아들이다. 그이 출가에 충격을 받으신 그의 아버지는 아예 그와 의절을 선언하셨다. 그러나 몇 년 뒤 아버지 역시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화해했다. 그는 아버지한테 “미국에 전통적인 한국 절을 세우는 게 나의 꿈인데 내가 한 살이라도 더 젊어 힘이 남아 있을 때 일해야 한다”며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조른 것이다. 그는 유산의 단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현재 한국 절을 세우는데 쓰고 있다. .
지금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캘리포니아 산에 작은 간이 텐트를 세워 혼자 먹고 자고 하신다.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 저녁예불과 참선을 잊지 않고 낮에는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일을 하신다.
그는 또 완전히 환경친화적 건축방법을 쓴다. 산에서 쓸 모든 동력은 태양열과 풍력 등 자연력을 이용할 예정이다. 전기는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스님은 이미 이를 위해 전시에나 사용가능한 베터리들을 사 모아 지하에 묻어 태양열로 충전을 하면서 쓰고 계신다. 현재 공사중이기 때문에 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도 오로지 태양열만 이용하고 있다.
나는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로 있을 때 나흘 동안 거기 가서 공사를 도운 적이 있었는데 한번도 전기 문제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았다.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스님은 이처럼 캘리포니아 사찰 내 모든 자원을 재활용해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수행처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그는 절 앞에 흐르는 강 위에 다리 하나를 지었다. 그 다리는 한국의 전통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오래된 돌로 만든 아주 아름다운 다리이다.
요즘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국 이민자들이 알음알음으로 무량스님이 한국 절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주말마다 가서 스님을 돕는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그곳에 가면 마치 고향에 와 있는 것 같다며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까지 흘린단다. 무량스님은 그들을 상대로 한국 문화를 가르치기까지 한다는데 상상해보라. 한국사람들이 푸른 눈의 미국인 스님으로부터 한국 문화를 배우는 모습을.
스님은 이처럼 단지 불교만을 포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전통을 미국에 널리 알리는 위대한 분이다.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우스갯소리를 잘해 웃음이 끊이지 않는 무량스님. 만약 내가 지금 한국에 살지 않는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캘리포니아로 달려가 그의 일을 도우며 살 것이다.

Thursday, March 1, 2012

만행 나의 도반 대봉스님

만행 나의 도반 대봉스님

대봉스님
대봉스님은 현재 계룡산 국제선원장이시다.
대봉스님을 처음 만나면 모르는 사람도 이내 그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미소에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 곁에 서면 누구라도 천사가 안 되고는 못 배길 정도다. 스님은 원래 ‘도문’이라는 법명을 받으셨는데 지난 여름 숭산 큰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아 새로운 법명을 받으셨다. 우리는 그를 이제 대봉스님이라 부른다.
대봉스님은 유태인으로, 미국 펜실바니아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미국의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세대다.
국방성 앞에서 반전 데모를 하기 위해 세 번이나 친구들과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날아가 시위를 했다. 그 세 번의 시위는 모두 미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규모였는데 매번 약 50여만 명이 참가하는 대 집회였다. 두 번째 집회까지는 시위대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쳐져 아주 평화적으로 진행 됐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 번째 시위 때는 시위를 주도한 지도부끼리 의견이 갈라져 시위 전략과 방법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서로 싸우고 헐뜯고 도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와 싸우기 위해 모였는지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지도부 중 한 명이었던 대봉스님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평화를 위한다고 했지만 혹 우리들 마음엔 또 다른 욕심이 자리했던 것은 아닐까. 平和와 終戰을 외치는 우리가 이처럼 분쟁과 전쟁을 계속하다니...... . 극도의 좌절과 환멸이 그를 짓눌렀다.
당시 그는 반전운동을 하는 평화단체에 속해 있었는데 그런 일을 겪고 난 뒤 그 단체에서 나왔다.그리고 좀더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은 일이 정신병원 상담사.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었던 그는 일단 자신의 전공을 통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정신병원으로 출근했다. 그런데 바로 이 경험이 그의 인생을 뒤흔들 큰 의문을 가져다 주었다. 정신병원에서 그는 수많은 정신 질환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바기 몸을 물어뜯는 자해를 하고 밤이고 낮이고 소리를 질러댔다.
의사들은 그런 환자들을 동물 다루듯 했다. 그는 소위 배웠다는 똑똑한 의사들이 아무리 미친 사람이라도 그렇지 하찮은 벌레 다루듯 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오히려 의사보다는 덜 배우고 지위도 낮은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성심 성의껏 대했다.
대학 다닐 때의 반전 데모와 정신병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삶에 큰 의문을 갖게 된다. 돈을 받고 명예를 얻는 일이 어쩌면 나만의 이기적인 삶을 위한 선택은 아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 부딪쳤다.
그는 소위 자신의 먹물 근성을 빼고 싶어 공장에 취업했다. 그런데 어떻게 일자리를 알아보다 보니 하필 핵 잠수함 만드는 공장에 취업하게 된다. 그곳의 노동자들은 지금껏 자기가 만났던 소위 먹물들보다 덜 배운 사람들인데도 훨씬 착하고 인간적이었다. 남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무기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책감은 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뉴헤이븐에 있는 큰스님 젠센터에서 수행하는 공장 동료와 친하게 지내던 그는 동료로부터 큰스님의 가르침에 대해 듣게 된다. 그리고 ‘내가 여태껏 찾아왔던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으로 큰스님의 제자가 된다.
유태교는 종교적 뿌리가 깊다.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와 의사인 아버지는 불교 수행을 하는 장남인 그를 탐탁지 않아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대학을 나와 공장에 취직한 아들 때문에 늘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일까지 그만두고 아예 잰센터에 눌러앉아 사는 그가 못마땅하게 여겨지신 것이다. 그와 부모님 사이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스님이 필라델피아로 법문을 하러 가는 길에 동행을 하게 되었다. 그때 큰스님은 필라델피아가 대봉스님의 고향인 것을 알아차리고 법문이 끝난 뒤 “집에 가서 부모님께 함께 인사를 드리자”고 제안하셨다. 내키지 않았지만 스님은 집에 연락을 했다. 스님의 연락을 받은 부모님은 조부모님을 비롯하여 친척이란 친척을 다 불러모았다. 큰스님을 상대로 종교 논쟁을 벌이겠다는 심산이셨다고 한다.
이윽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조부모님들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유태교와 불교 사이에 한바탕 격전이 치러진 것이었다. 장시간의 토론을 마치고 조부모님들과 부모님들은 대봉스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숭산스님이 가시는 길과 우리가 가는 길이 다르지 않은 것 같으니 너의 수행을 허락한다.”
대봉스님은 뛸 듯이 기뻤고 그 후 더욱더 수행에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4년 출기를 하게 된 대봉스님은 요즘 큰스님과 함께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신다.
대봉스님은 숭산 큰스님이 계룡산에 짓는 국제선원의 총 감독관이라 현재 계룡산 공사장 조립주택에 살고 계신다. 대봉스님은 자신의 온 열정과 에너지를 계룡산 국제선원 공사에 쏟아 붓고 계신다
계룡산 국제선원은 아주 역사적인 곳이 될 것이다. 이제 비로소 한국불교를 배우고 한국 전통에따라 참선수행을 하고 싶어하는 서양인들의 공간이 한국땅에 생기는 것이다. 물론 서양인들의 것만은 아니다. 한국 사람들도 무구든지 참여할 수 있다.
큰스님은 계룡산 국제선원이 완공되면 참선수행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문호를 개방해 가르침을 전하실 예정이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수행하고 싶어도 장소가 여의치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요즘엔 한국 동안거에 참여하려면 1,2년씩 기다리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계룡산 국제선원이 완공되면 수행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와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전세계에 위치한 숭산 큰스님의 젠센터에서 수행하는 세계인들은 계룡산 국제선원의 완공을 손꼽아 기다리고있다.(1999년10월)

Wednesday, February 29, 2012

만행 나의 도반들

만행 나의 도반들
우리 국제선원 승가 안에는 재미있는 스님들이 많다. 전세계에서 오신 분들이고 대부분 자유로운 서양에서 나고 자라 속세 경험도 다양하다. 그 지난한 삶의 역경 속에서 진리의 길, 도의 길을 찾아 떠만 그들의 삶은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어떤 때는 솔직히 피를 섞은 나의 가족들보다 더 깊은 정을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또 한 분의 부모님.
숭산 큰스님은 나의 또 다른 부모님이시다. 부모님은 내 몸을 주셨지만 큰스님은 내 정신을 주신 분이다. 아니, 이미 내 안에 있는 보물을 찾게 해주신 분이다. 아니, 이미 내 안에 있는 보물을 찾게 해주신 분이다. 그의 가르침, 그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그의 대자대비심은 내가 여태껏 받았던 어느 사랑보다 값진 것이다.
내가 큰스님께 드리는 존경과 사랑은 신격화나 미화가 아니디. 그의 고단했던 삶과 그 고통 속에서 행했던 무서운 수행정진, 그리고 그 속에서 피워 올린 위대한 깨달음, 그리하여 살아 있는 언어로 쏟아져 나오는 지혜……
나는 숭산 큰스님 때문에 수행을 시작했고 비로소 내 삶의 나침반을 가진 것이다. 만약 큰스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고통의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큰스님은 나를 비롯한 모든 수행자들을 하루하루 깨여 있도록 만드는 위대한 수행자이시다.
1993년 어느 날, 뉴욕에서 내 동생 그랙에게 숭산 큰스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첫 장면에서 모든 승려들이 큰스님께 삼배를 올리는 모습이 나왔다. 그랙은 다짜고짜 나에게 “아니 어떻게 똑 같은 사람에게 저렇게 몸을 숙여 절을 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나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런데 그랙은 다큐멘터리 내내 숭산스님 법문을 다 듣더니 “이제서야 삼배를 올리는 심정을 알겠다”고 말해 나를 흐믓하게 한 적이 있다.
나는 한쪽 어깨에 숭산스님을 또 다른 어깨에 내 부모님을 짊어진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나의 아름다운 형제들은 소개하겠다.
무상스님
그는 나의 도반들 중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스님이다. 그는 진정 살아있는 보살이다. 우리는 자라온 환경도 비슷하고 걸어온 길이 비슷해서 서로 만나자마자 친한 친구가 되었다.
무상스님은 1964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전공은 고대 문학으로 그리스철학은 물론 러시아 문학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는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러시아어는 물론 불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독일어에다가 한국어까지 안다. 그는 걸핏하면 고대 시나 소설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인용,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한다. 쇼펜하우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물론 고대 희랍 비극, 세익스피어의 시와 소설 등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무상스님은 미국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하버드를 졸업한 후에는 흑인 인권운동을 했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의 남부인 앨러바마와 미시시피로 내려가 흑인 인권운동을 했다. 그 당시 이슈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이 일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그 운동에 뛰어들었던 젊은이들 몇몇은 백인 자상주의자들에게 살해를 당하기도 했다. 무상스님은 그때 그곳에 계셨다. 독자들 중에도 〈미시시피 번닝〉이라는 미국 영화를 보신 분이 있을 텐데, 이 영화가 바로 당시 이야기를 재연한 것이다.
무상스님은 1년 동안 흑인 인권운동에 헌신한 뒤 예일 대학 법대대학원(law school)에 입학했다. 약자를 보호하고 돕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우선 법을 공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님이 예일 대학원이었을 때 지금 미국 대통령 부부인 클린턴과 힐러리가 1년 후배로 학교를 같이 다녔다고 한다. 최근에 나는 무상스님에게 요즘 클린천 대통령이 왜 그렇게 많은 문제로 속을 끓이고 있는지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예일 대학원에 있을 때 클린턴은 한번도 나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없었거든”(하하하)
무상스님은 정말 재치가 있으면서도 지혜가 많은 분이다. 그의 머리는 고성능 컴퓨터 그 자체다. 한번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적이 없는 탁월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데다 숫자에 관해서도 거의 無不通知다. 우리는 그를 ‘걸어 다니는 계산기라고 부른다.
나는 그와 함께 한국, 홍콩, 중국, 폴란드 등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여행할 때 제일 골치 아픈 게 돈 계산이다. 환율이 나라마다 다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무상스님은 환율 계산하는데 거의 천재적 이었다. 우리는 무상스님에게 우리가 바꾸고 싶은 달러 액수만 얘기하면 그는 1, 2분 안에 그나라 돈으로 계산을 해낸다. 그것도 그날 그날 바뀌는 시세를 고려해서 말이다. 놀라 자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 계산기처럼 완벽한 실력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깨나 듣고 자란 나도 ‘워든지 못하는 게 없다’고 자부하지만 계산만큼은 자신이 없다.
나는 무상스님의 암산실력이 하도 신기해서 장난기를 발동해 몇번이나 그를 테스트한 적이있다. 그는 그때마다 순식간에 계산을 해냈고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는 정말 걸어다니는 컴퓨터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리라. 그의 삶은 오직 진리를 향한 끝없는 구도의 길이었다.
예일 대학 법대를 졸업한 후 그는 철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법을 공부하면서 오히려 더욱 큰 의문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법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법이야말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유력한 무기라 확신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해보니 법이란 것이 약자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통제하는 강력한 방편에 불과했고 명예나 돈벌이 같은 개인적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법을 공부하는 것이 정의나 진리의 삶과는 거리가 먼, 힘과 엘리트주의를 구현하는 삶의 다름 아닌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삶과 진리와 정의에 대해 수많은 교수님들, 지식인들을 쫓아다니며 물었지만 어느 누구로부터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마침내 1975년 예일 대학으로 법문을 하러 오신 숭산 큰스님을 만난 것이었다. 그때 강의실에는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과 교수님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해는 큰스님이 미국포교를 시작한지 3년째 되던 해였는데 이미 미국에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 자리에 모인 교수님과 학생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졌다. 숭산스님은 아주 쉽고 생생한 언어로 대답을 했고, 게다가 앚주 유머러스하기까지 하셨다. 무상스님은 그때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는 그때 일을 떠올릴 때면 항상 이렇게 얘기하곤 한다.
“큰스님 법문을 들은 그날 밤, 나는 마치 소크라테스가 환생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큰스님의 가르침 방식은 완전히 소크라테스식이었다. 큰스님의 언어는 책에 있는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지혜의 언어였다. 나는 너무 감동을 받았다. 그때까지 살아 오면서 결코 그 누구에게도 그런 가르침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답은 주지 않았다.
그 다음 날로 그는 숭산스님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무산스님의 부모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백만장자다. 그러나 그는 하버드,예일이라는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보증서들을 모두 팽개치고 스님이 되였던 것이다.

Monday, February 27, 2012

만행 불교의 세가지 보물

- 만행 불교의 세 가지 보물
출가하기 전 나는 다양한 경험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예일 대학, 하버드 대학원, 뉴욕 생활, 그리고 홍콩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겪은 내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나는 그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만 다를 뿐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인간관계의 기본 코드는 경쟁이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오직 생존을 위한 룰(RULE)만 있을 뿐이다. 마치 수영장에서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수면위로 머리를 내놓고 팔다리로 물살을 사정없이 기르면서 물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지위를 얻기 위해, 그리고 아름다운 차, 아름다운 연인, 아름다운 집을 얻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결코 만족이 없다. 오직 투쟁과 쟁취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나의 출가 전 생활의 결론이다.
그러나 출가한 이후 나는 완벽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불교에는 佛 • 法∙∙•∙僧이라는 세 가지 寶物이 있다. 이 세가지 보물은 삶이라는 거대한 폭풍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배와 같은 것이다. ‘佛’ 이란 곧 부처이다. 부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다. ‘法’은 지혜와 자비의 마음을 갖고 부처님 말씀을 나누고 가르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과 ‘법’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세 번째 보물인 ‘僧’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스님 사회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승’이란 사실 이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다. ‘승’은 출가를 했든 안 했든 지혜와 진리를 찾고 싶어하는 큰 개념의 사람들을 가르친다. 아니 더 깊은 의미로 이 세상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세상 우주에 살고 있는 생물 중에서 ‘僧’에 속하지 않는 것들은 없다.
매일매일 스님들과 함께 살면서 수행하는 승려의 삶이야말로 불 • 법 • 승 삼보의 요체를 사는 삶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출가 이후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물론 스님들도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속가와 같이 질투와 시기가 있고 다툼이 있다. 사람들는 그런 승려들의 다툼을 볼 때마다 ‘머리 깎은 중들이 속세 사람들보다 더 욕심이 많다’고 손가락질한다. 진정 부끄러운 일이다. 겸허히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승가는 기본적으로 속가와는 룰과 방향이 다르다 승려사회의 룰과 방향은 깨달음이다. 부처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간순간 모든 중생을 잠에서 깨워 대자대비심으로 중생을 도우며 살겠다고 서원한다.
나는 출가를 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더 큰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가족은 근본적으로 내가 태어난 가족과는 다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본래 나는 형제 자매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제 내 형제 자매들은 결혼해 아이들을 낳아, 내게도 조카들이 많이 생겼다. 우리 가족은 점점 대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마음속엔 ‘우리만의 사람들’이라는 의식이 있다. 가족은 점점 더 커졌지만 여전히 다른 가족, 다른 사람들과는 분리된 것이다.
물론 승가 안에서도 모든 일원이 한마음인 것은 아니다. 같은 혈통의 한 가족 안에서도 나와 친한 가족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가족도 있고 폭넓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가족이 있는가 하면 아주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가족도 있고 하듯 말이다.
그러나 승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다. 스님이 된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본성을 찾아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더 마음을 열고 도와주고 격려 한다.
내 미국 가족들은 각자 구성원이 우선 자기 삶, 자기 가족의 삶을 위해 산다. 나는 때때로 부모님, 형제 자매들로부터 전화나 편지를 받는데 그들과의 대화란 늘 똑 같은 걱정, 똑 같은 관심사에서 맴돌 뿐이다.
그러나 승려 가족들은 ‘자기’를 넘어서 자기와 남이 하나되는 삶을 살려고 한다. 180도 방향이 다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에게 갚아야 할 빚이 얼마나 많으냐, 평생 동안 한쪽 어깨에는 어머니를, 한쪽 어깨에는 아버지를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좁은 의미의 보은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가슴에 닿는 말이다.
비록 크리스마스 같은 큰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에 참석을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수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삶으로써 부모님의 은혜를 갚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가족을 버리고 출가를 했습니까?”
그러나 나는 가족을 버린 게 아니다. 나는 더 큰 가족의 일원이 된 것뿐이다.
http://blog.daum.net/hirimaloka/6046692

Sunday, February 26, 2012

나의 전생 이야기

나의 전생 이야기

사람들은 또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티벳 불교도 있고 중국 불교도 있고 일본 불교도 있는데 왜 한국 불교를 선택했느냐. 그리고 나를 아는 분들은 어쩌면 그렇게 한국 생활에 적응을 잘하느냐고 감탄을 한다.
사실 그분들은 외국인인 내가 한국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에서 그런 말들을 하시지만 실제로 나는 이곳 한국에 살면서 한번도 ‘외국’에 나와 있다거나 ‘고향’을 떠나 있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미국에서 김치와 된장찌개를 처음 맛보았을 때,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법수스님 방에서 한국 사찰 사진이 실린 달력을 처음 보았을 때, 그때마다 나는 내 안에서 한국의 모든 것을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금 형제들∙친구들∙ 부모님들이 편지를 보내 “언제 ‘집’에 오느냐”고 재촉하신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미국 집이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안는다. 물론 나는 내가 태어난 미국땅과 가족들을 사랑한다.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미국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 살고 자라면서도 한번도 조국에 대한 애톳함이나 가슴 뿌듯함 같은 것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10년 전 한국에 왔을 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고향에 왔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산이 아름답고 절이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그런 것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그러나 고향 같다고 느낀 아라는 한국이 처음이다. 한국 다음으로 독일이 좀 친근했다고나 할까.
나는 한국인들이 남의 나라 사람 같지가 않다. 참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가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황병기씨의 가야금 연주 소리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면 조선시대의 최고의 화가들 중 한 사람이었던 정선의 그림을 보시라. 아니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을 들어 보시라.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호떡을 먹어보시라. 인사동 낡은 찻집에서 쌍화차를 마셔보시라. 아니면 〈서편제〉 CD를 사서 들어보시든지. 특히 비 오는 가을 날 듣는 〈서편제〉 소리는 얼마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 바로 이런 감정, 이런 느낌, 이런 경험, 이런 의식이 내가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것이다.
나와 한국 불교에 대한 인연도 참 묘하다. 미국에서 불교공부를 하고 싶어했을 때 뉴욕의 내 집 옆에는 뉴욕 젠 센터(Zen Community of New York)라는 아주 유명한 젠 센터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정말 수행을 하고 싶어졌을 때 그곳을 찾았지만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일본 젠 센터였다.
그리고 몇 달 뒤 숭산스님이 운영하시는 케임브리지 젠 센터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들어갔던 것이다.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가 어떻게 다른지 몰랐다. 동양이라면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참선수행에 그렇게 걸신들린 듯했으면서도 일본 젠 센터는 왜 들어가지 못했을까. 또 한국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면서도 케임브리지 젠 센터에 들어갔을 때는 어쩌면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졌을까.
나는 내가 전생에 한국인이었음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그것말고는 나와 한국에 대한 인연을 설명할 수가 없다.
‘나의 전생’에 관해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1990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큰스님 밑에서 계룡산 신원사 동안거에 들어갔다. 안거가 끝나고 나는 수유리 삼각산 화계사로 돌아왔다. 어느 날 점심 공양을 마치고 절 뒤뜰을 거니는데 대웅전 앞을 오르려다 갑자기 어느 스님 방에서 울려 퍼지는 웬 음악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그 음악의 멜로디가 내 발길과 귀를 사로잡은 것이다. 나는 완전히 충격에 사로잡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스님 방 앞으로 발길을 옮겨 방문 앞에 섰다 멜로디를 계속 듣는 동안 내 안에서는 아주 벅찬 느낌이 솟아 올랐다. 슬픈, 아니 슬프다기보다 애잔하다고나 할까. 목구멍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심지어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노래 한 곡에 그렇게 내 감정이 울렁거린 경험은 처음이었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스님 방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노래가 아마 한국의 오랜 전통 민요이거나 농부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오는 판소리 가락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내가 그 동안 참선수행을 너무 열심히 해서, 첫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한국에 대해 무슨 콩깍지 같은 게 씌워져서 좀 이상해졌나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방으로 돌아왔다.
동 안거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그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없었고 내 기억속에 노랫가락도 희미해져 갔다.
그러다 다시 그 노래를 만난 게 1995년 여름이었다. 이미 출가를 해 화계사에서 살고 있는데 동국대에서 여름방학 기간 동안 불교경정을 영어로 강의해 달라는 부탁이 왔다.
내 강의 스타일은 좀 독특하다. 가능하면 교실 밖을 벗어나 식당이나 잔디밭에 둘러앉아 노는 것인지 공부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편하게 한다. 어떤 날은 식당에서 떡국이나 라면을 함께 먹으면서 수다를 떨 듯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8월 15일이었다. 그날이 광복절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원래 그날은 공휴일이라 휴강일 이었으나 학생들 중 몇몇이 강의를 원해 우리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큰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미침 8 ∙ 15광복절 50주년 기념식이 생방송되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내로라 하는 정치인들, 퇴역군인들, 광복인사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어떤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장중하지만 너무 친근하게 다가오는 저 가락,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속에 아주 깊고 무거운 것이 가라앉는 느낌이 생겼다.
한 학생이 내 얼굴을 보더니 “아이고, 현각스님이 우시네, 현각스님 왜 우시는 거예요?” 하며 놀려댔다. 나는 너무 창피해 뛰다시피 화장실로 갔다. 휴지를 집어 들고 눈물을 닦으면서 바로 그 노래가 5년 전 화계사 스님 방 앞에서 들었던 ‘그 노래’ 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노래지? 무슨 노래인데 들을 때마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그해 겨울이 돌아왔다.
나는 경주 남산의 작은 암자인 천룡사에서 혼자 백일 기도를 했다. 작은 토굴에서 매일 2천배를 하고 참선수행을 했다. 하루 네다섯 시간만 잤다. 밤 아홉 시에 다시 일어나 열한 시까지, 그리고 새벽 한 시 반에 일어나 세 시 반까지 새벽수행을 했다. 끼니는 아침과 점심만 먹었다.
천룡사 2백 미터 아래에는 작은 집이 하난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노 보살님 한 분이 내 아침과 점심공양을 챙겨주셨다. 그 보살님은 천룡사를 관리하는 분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묵언수행을 할 때라 보살님과는 그저 눈인사만 나누었다. 내가 매일 앛침, 점심공양을 먹으러 그곳에 갈 때마다 그 노 보살님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옆방에서 다리미질을 하거나 바느질을 하셨는데 항상 TV를 켜놓고 계셨었다.
어느 날 그곳에서 점심공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밥을 먹다가 이내 숟가락을 놓고 다시 암자로 향했다. 토굴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 노래에 대한 생각 때문에 참선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노래냐. 유행가냐. 영화 음악이냐. 한국의 전통 노래 같긴 한데 도대체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점심공양을 하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TV소리가 커지더니 보살님이 바깥에서 일하는 할아버지를 큰소리로 불렀다. 빨리 와 텔레비전을 보라고 난리를 치셨다. 나도 무슨 일인가 궁금해 보살님 방으로 건너가 TV를 보았다. 북한에서 일가족이 귀순해와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 노래가 또 울려 퍼졌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지만 묵언수행이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백일 기도를 마친 후 나는 남산을 여기저기 오르다 남산의 한 암자에서 소행하는 나이든 스님 한 분을 만났다. 그 스님은 암자에서 수행만 하면서 사셨다. 마침 젊은 스님 한 분이 옆에 계셨는데, 그 스님께 이것저것 전해주기 위해 들렸다고 했다. 그분들과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갑자기 젊은 스님이 나이 든. 스님을 가리키며 ‘이 분은 전생을 아주 잘 보시는 스님’아라고 소개했다. 나는 마침 지난 기도 기간 내내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며 그 스님에게 여쭈었다. 걸망에서 영한사전을 들고 한국말을 이어갔다.
“스님, 제가 한국에 와서 어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막 나왔어요. 목과 가슴에서 막 슬퍼요. 이런 일 나에게 한번도 없었어요.”
“무슨 노래야?”
“몰라요.”
“제목이 뭐예요?”
“잘 몰라요..”
“가사가 뭐예요?”
“잘 몰라요……
“멜로디 알아요?”
나는 잠시 멈추었다 노랫가락을 애써 기억해냈다.
“……딴 따아아아따따 따 안…… 따 따딴
내 허밍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스님들이 웃어댔다.
“그거 애국가 아냐, 애국가.”
“애국가? 애국가가 뭐예요?”
“우리나라 국가, 나라 노래 말이에요.”
나는 사전을 뒤졌다.
‘국가 =National anthem.’
“아, 나라 노래! 그런데 저는 왜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 막 흘러요? 그리고 목. 가슴 막 아파요?”
“전생에 스님은 한국 사람이었어요. 나는 아주 잘 보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평소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그 스님에게서 확인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이 이야기를 몇 년 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하도 신비한 경험이라 나 혼자만 가슴속에 묻어두고 싶었다. 언젠가 큰스님께 여쭤볼 기회가 있으면 여쭙기로 하고 말이다.
그런데 작년 여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하안거를 할 때 드디어 큰스님께 나의 전생에 대해 여쭐 기회가 생겼다. 매일 아침 큰스님은 국제선원에서 아주 짧은 법문을 하셨는데 법문 후 질의 응답이 있었다. 나는 모든 스님들 앞에서 큰스님께 궁금증을 털어 놓았다.
그동안 화계사, 동국대, 남산에서 겪었던 일을 다 얘기했다.
“큰스님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지요? 한국 사람들조차 애국가를 들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데 왜 저만 그렇게 유난스러울까요?”
큰스님은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스님의 업을 알고 있어요. 전생에 스님은 한국 독립군이었읍니다.”
“예?”
“전생에 스님은 일본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은 한국인이었다. 이 말입니다. 스님은 한국이 일본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을 때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전쟁에 나가 열심히 싸워 일본군을 많이 무찔렀지요. 그런데 어느 날 일본 군인의 총탄에 맞아 죽게 된 것입니다. 죽을 때 스님은 너무 한이 맺혀 ‘아 나는 다음 생에는 아주 강한 나라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큰스님은 이 부분에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조국을 위해 살겠다고’’고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미국에서 태어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겁니다. 스님은 한국과 아주 강한 업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다 전생에 나라를 찾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독립군이었습니다. 그러니 보통 한국 사람들보다 애국가를 들을 때 더 강한 느낌을 갖는 게 당연하지요, 하하하.”
큰스님의 웃음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나는 큰스님 말씀을 듣고 놀랐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로서 가슴속 체증이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미 내가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던 내 전생을 큰스님으로부터 확인 받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독립군이라…… 아아! 바로 그것 때문이었구나…….”
전생 경험에 대한 재미있는 경험이 한 가지 더 있다.
작년 11월초 나는 지리산이 있는 전남 구례 천은사 위 상선암 옆 토굴에서 백일 기도를 했다.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를 하느라고 바쁘다는 핑계로 수행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다시 한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른 스님들 동안거 때에 맞춰 나는 혼자 토굴수행을 한 것이다. 천은사 주지스님과 당시 상선암 주지스님이었던 지인스님(현재 전남 곡성 관음사 주지)의 가르침과 도움이 없었다면 그 수행은 불가능 했다. 그곳에는 전기도 수도도 없고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해야 했다. 1백 일 동안 나는 솔잎가루와 약간의 과일만 먹으면서 묵언수행을 했다. 매일 1천3백 배를 했고 ‘신묘장구 대 다라니’ 염불수행을 했다.
기도르 시작하고 이틀 가량 지났을까. 내 맘은 점점 밝아졌다. 그런데 목탁을 두드리면서 염불에 몰두해 기도를 할 때 어느 순간 갑자기 구에서 어떤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서 들리는 환청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환청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환청은 환청이었다. 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어보면 지나가는 바람밖에 없었으니까.
날이 갈수록 귀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크게 들렸다. 이상한 것은 내가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할 때만, 특히 한밤중 염불 때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흘, 나흘이 지나자 그 소리들은 점점 명확해졌다. 울음소리, 비명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들이 들릴 때마다 몇 번이나 목탁치는 것을 멈추고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그저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휘잉 자나갔다. 그리고 다시 염불을 하면 여지없이 그 비명소리, 외침, 울음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무서웠다. 일단 어둠이 내리면 방안에 촛불 하나 켜놓고 일체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구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쭈삣쭈삣 곤두섰다.
그렇게 정확하게 3주일이 지나 기도 22일째 되는 날이었다. 한 순간에 그 소리들이 사라졌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내 마음도 평화로워졌다. 아무런 두려움도 일지 않았다. 마치 어릴 적 성당에 다닐 때 천사들이 부르는 성가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참으로 신비한 경험이었다.
수행이 끝나고 지인스님께 여쭈었다. 지인스님은 곰곰히 생각을 하시다 뜻밖에 지리산의 빨찌산 역사를 이야기 하셨다. 나는 그때 지리산도 처음이였거니와 지리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지리산에 얽힌 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를 들으면서 너무 놀랐다. 그리고 이념으로 부모와 형제가 나뉘어 이 지리산 자락에서 총구를 겨눴던 슬픈 역사를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다.
그때 지인스님 옆에는 화엄사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내 기도 경험을 들으시면서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 누군가 아주 열심히 염불을 해주면 그들의 영혼이 자유로워진다면서 아마 나의 염불기도가 빨찌산 영혼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스님의 말씀을 내가 입증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일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와 나와의 강한 인연의 끈을 다시 한번 경험했다.
때때로 나는 ‘인연’이나 ‘전생’이 실제로 있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전생이니 인연이니 업이니 하는 것을 불교만의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기억수행’이라는 독특한 수행을 통해서 각자 ‘이전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른바 ‘회상’(anamnesis)이라는 깊은 기억과정을 사용한다면 그들의 과거 삶의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라면서 환생이 사실이며 우리 존재의 실체라는 것을 인정했다.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 에머슨과 휘트먼 같은 전설적인 시인들도 전생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그들은 전생이라는 것을 그저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지어낸 관념이 아니라 자기들 자신의 경험에 의거한 직관이라고 말했으며 그에 대한 증거로서 불교 경전을 자주 인용했다.
현대 과학에서는 신경정신학계를 중심으로 전생 경험에 대한 많은 연구결과들이 있다.
일례로 몇 년 전에 미국에서는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Many Lives Many Masters)라는 책이 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이 책은 1997년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다.
책의 저자인 브리이언 와이스 박사는 미국 정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지독한 악몽과 공포증에 시달리던 젊은 여성 캐설린을 치료하면서 의외의 상황에 직면해 혼란에 빠진다.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최면상태에서 유아기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요법을 시행하는 도중 뜻밖에 그녀의 전생과 만난 것이다.
황당하게만 들릴 게 분명한 비정통적인 이야기를 공개한다는 것이 과학자로서의 명성과 경력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잇음을 잘 알고 있었던 브라인언 박사는 그러나 신념과 용기를 갖고 이 책을 펴냈다. 그리고 그 책은 전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전생에 관해서 더 깊은 이해를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Thursday, February 23, 2012

만행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

만행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스님생활이 어렵고 힘들지 않느냐. 속세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이것저것 지켜야 할 게 많은 스님 생활을 계속 할 것이냐”고 묻기도 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약간 당혹스러워진다. 스님생활이야말로 지금까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경험인데 말이다.
나는 승려의 길을 선택한 것이 내 일생 최고의 선택이었으며 그런 이년을 가진 것에 대해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스님이 되기 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가질 수 있었다.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었고 아름다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큰집에 살면서 주말이면 차를 몰고 피크닉을 가고 저녁이면 맛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달콤한 속세의 것들을 어떻게 버릴 수 있었느냐고 말하지만 사실 나에게 그것들은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꿀’이 아니라 ‘독’이라고나 할까.
스님이 되기 전 내 삶은 항상 무언가 좇는 삶이었다. 명예를 좇고, 지위를 좇고, 욕망을 좇고, 사랑을 좇고, 돈을 좇고, 직장 상사를 좇고, 부모님과 선생님의 생각을 좇고, 친구들의 뜻을 좇고, 기회를 좇고…… 끝없이 좇고 좇고, 또 좇는 삶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니 잠을 자면서 꿈을 꿀 때조차 말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다. 머리가 좋고 재능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이런 상황에 내몰리기 쉽다. 그게 세상이다. 한국이든 마국이든 다를 게 없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잠자리에서조차 무언가를 얻으려고 아둥바둥하지만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설사 원하는 것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순간이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버드와 예일에서 공부할 때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님들로부터 배웠다. 나를 비롯한 내 친구들의 꿈이란 바로 그런 교수님들처럼 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회를 움직이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삶이란 피곤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스물네 시간 온통 일, 일, 일, 일에 휩싸였고 항상 무언가를 좇고 있었다.
다른 삶들이 자신의 견해와 다른 의견을 내놓을까봐 두려워했고 그들의 질투 때문에 괴로워 했다. 혹 실수라도 할까봐 두려워했으며 자기 잘못이 드러나면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견딜 수 없어 했다.
내 친구들 중에는 꿈을 이뤄 교수가 된 친구가 많다 교수가 되는 순간 그들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일에 둘러싸였고 선재 교수님들로부터 받는 압력, 학생들의 요구에 시달렸으며 참가하기 싫은 학회 무임에 억지로라도 참석 해야 했다. 많은 친구들이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술과 여자에 의지했다. 말로는 진리를 얘기했지만 정작 그들의 삶은 달랐다.
현대사회는 소비사회다.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쓸모 없는 인간이다. 이 사회는 계속 우리에게 뭔가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사야 한다고 말하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의 운영코드는 우리 머릿속에 입력되어 우리 역시 계속 뭔가를 해야 하고 뭔가를 얻어야 한다고 믿는다.
많은 중국 선사들은 ‘무위’無爲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싸우지 않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라. 나뭇가지는 움직인다. 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무가 고통스러워하는가. 나무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다. 흘러가는 물도 마찬가지다. 한 방울 물이 바위를 뚫기도 한다. 물의 힘은 무한대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바로 무위다. 무위란 바로 빈 행위 (empty action)를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마음과 행동은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처한 현실과 내가 원하는 마음은 분리되어 있다. 그것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종종 우리는 이 순간을 살지 않고 과거나 미래에 산다. 지금 이 순간을 잊어버리고 지난 일에 대한 우회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흥분과 기대로 산다. 밥을 먹으면서도 운전을 하면서도 생각은 길들지 않은 야생마처럼 이쪽 저쪽을 돌아다니다. 단 한 순간도 만족하는 법이 없다.
스님의 삶이란 매 순간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삶이다.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완벽한 삶이다.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다.
나는 집도 없고 옷도 없고 의료보험도 없고 차도 없다. 하지만 행복하다. 매일매일 자유롭고 하루하루 새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내 뺨을 스치는 바람, 귓가에 들려오는 새소리, 코에 닿는 향냄새,혀로 느끼는 차의 맛, 바로 이 순간의 삶이 진리의 삶이다.
그러나 스님의 삶이 나만의 자유를 위한 삶인가. 그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먹는 밥, 내가 자는 곳. 내가 입는 옷, 이 모든 것은 어디서 왔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해 나에게 준 것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순간순간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는 삶을 통해 일체 중생들을 제도해나가는 삶만이 그들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다. 또한 내 능력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Thursday, February 9, 2012

만행 아! 스님이 되고싶다




만행 아! 스님이 되고 싶다

미침내 90일간 겨울 안거가 끝났다.
깊은 산 깊은 절에서 90일 동안 참선수행 경험에서 얻은 것을 내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교육받고 주로 도시만 여행했던 내게 계룡산 신원사에서의 그 체험은 너무 큰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경험이 나에게 아주 친숙했다는 점이다.
신원사 법당 앞에는 아주 오래된 감나무가 있는데 그렇게 오래된 듯한 나무는 처음보았다. 그런데 그런 나무하나조차도 내게는 낯설지 않았다. 미국에는 나무들이 다 싱싱하고 쭉쭉 뻗어있다. 그런데 한국 나무들은 다 비틀리고 꺾었는데도 보면 볼수록 애정이 갔다.
90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경험이 내 인생에 새로운 획을 그어줄 사건이 될 것임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안거가 끝나고 화계사로 올라왔다., 한 달 동안 화계사에 있으면서 안거수행에 참여했던 미국인 친구와 함께 숭산스님의 법문집을 영어로 편집하는 작업을 했다. 그 미국인 친구는 오랫동안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접한 친구였는데 나에게 좀 도와 달라고 해서 혼쾌히 참여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10여일 전, 나는 그 친구와 함께 한국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 친구도 한국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여서 둘 다 어디를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화계사 스님 한 분이 경주를 가보라고 했다. 무작정 서울역으로가서 경주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금히 따나온 길이라 여행 안내 책자하나없이 내려갔다. 그저 화계사 스님한테 경주에가면 남산에 들렀다가 불국사에가서 자고 오라는 얘기만 듣고 내려온 상태였다.
우리는 물어물어 남산이라는 곳에 닿았다. 남산으로 들어서서 다섯시간, 여섯시간을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나는 남산을 올라가면서 주변마다 곳곳에 새겨진 석불들을 발견하고 너무너무 깜짝 놀라고 흥분했다. 남산은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 같았다.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지만 로마는 하나의 도시이기 때문에 남산같은 안온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아니, 차원이 다른 것 이었다. 너무나 인상적 이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마침내 우리는 큰 석상앞에 도착했다. 그 웅장함과 장엄함에 놀라 서 있었더니 찬구가 앉아 참선을 하자고 제안했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우리는 산속 참선수행을 하고 108배를 했다. 수행을 마치고 산을 더 올라갔더니 작은 암자가 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큰 논이 펼쳐졌다. 저멀리 산능선들이 겹쳐 보이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꼭 한국에 다시 올 거야.”
우리는 그 작은 암자를 한참 둘러보다 산을 내려왔다.
남산을 내려온 우리는 불국사 석굴암으로 향했다. 불국사 석굴암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이 왜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까.
나는 로마에서 한 달간을 산 적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정말 아름다운 수도원을 차례로 방문한 적이 있다. 매일 루브르 박물과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독일에서는 아름다운 고성들도 많이 가봤다.
그런데 불국사 석굴암의 아름다움은 그 세계적인 문화재들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불국사 석굴암을 보면서 나는 아주 진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로마, 파리의 문화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아 들었건만 어떻게 한국의 이토록 아름다운 문화에 대해서는 한번도 보거나 들은 적이 없었을까. 도대체 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저 불상과 굴을 만든 사람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드 다빈치에 버금가는 천재적 장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에대해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을까. (나는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에 너무 감동해 나중에 그 불상의 얼굴을 숭산스님 영어법문집 《선의 나침판》의 표지로 썼다.
나는 마치 비밀의 성을 탐사하는 사람처럼 경주의 모든것에 놀라고 가슴이 뛰었다. 이윽고 불국사 대웅전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는 내 마음속에 이번에는 간절한 다짐하나가 피어올랐다.
‘아 ! 스님이 되어 한국 땅에서 살고 싶다.’

재미있는 것은 그 후 내가 정말 스님이 되어서 마침내 한국에서 살게되었을 때, 어느 해인가 백일기도를 하기위한 토굴을 찾고 있었다. 마침 동국대에서 만나 친하게 된 원각스님이 나에게 암자 하나를 소개해 줬는데 경주 남산에 있는 천룡사라고 했다.
나는 천룡사를 찾아 남산을 걸어올라가면서 매가 그날 그자리에서 기도하고 참선했던 불상을 발견하고 감회에 젖었다. 그런데 천룡사는 그 불상에서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산등성이에서 멀리 마을들을 굽어보며 한국에 다시오겠다고 다짐했던 그 암자가 바로 천룡사였다. 정말 묘한 인연이였다.
천룡사는 신라시대 때 나라에서 세우고 지원한 護法國寺였다.신라시대 때는 중국승려, 학자들까지 합쳐 1천여명이 먹고 자면서 수행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도 소개가 된 절이다.
지금은 절은 불타고 사라진 채 돌기둥만 여기저기 남아 있는 페사지에 작은 암자만 서 있다.
나는 스님이 된 후 백일기도를 위해 천룡사에 들어서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었다. 갑작스럽게 이뤄진 경주방문, 남산 등산, 전혀 계획하자않았던 남산 석불 앞에서의 참선수행과 그곳에서의 다짐, 그리고 몇년 후 다시 예기치 않았던 천룡사에서의 백일 기도, 돌이켜 보니 그 모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불국사 경내를 거닐면서 출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출가를 생각하자 얼른 부모님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형제와 누나들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니의 여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백하자면 출가하기 전 나에게는 아주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케임브리지 젠센터에 다닐무렵에 처음 만났다. 그녀는 숭산스님의 제자로 케임브리지 젠센터의 지도법사였다. 머리가 아주 좋았다. 그녀의 삶은 온통 참선수행 뿐이었다 모든일에 두려움이 없는 강한 여자였지만 친절하고 다정다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나는 어느날 그녀를 우리 부모님에게까지 소개시켰는데 부모님들은 아주 좋아 했다. 부모님은 우리 두사람이 결혼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다. 그동안 나는 남자친구들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지혜와 교훈을 여러 여자친구로부터 얻었다. 사랑이란 내 삶에 많은것을 경험하게 해주었고, 많은 가르침을 가져다준 귀한 경험이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마침내 그녀를 만나면서 완벽한 영적 파트너(soul mate)를 만났다고 믿었다. 우리는 같이 수행하고 삶의 진지한 문제들을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었다.
나는 불국사 대웅전을 빠져나와 스님들이 내준 절 방에 몸을 눕혔다. 그러나 이 생각 저생각으로 잠을 못 아뤘다. 나는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다른사람에게 받아만 왔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받은 것을 다른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하지 않을 이 고통에 빠진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부터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기위해서 였다.마음 한구석, 늘 진리를 찾고 싶다는 갈망으로 목말라 했다.
그런데 이제 비로서 나의 길을 찾았다. 문만 열고 들어서면 내 앞에 진리의 삶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둘이 걷는 길이아니라 혼자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물론 훌륭한 짝을 만나 같이 수행하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오직 ‘나’만 생각하게된다. 수행과 결혼은 양립하기 힘들다. 젠 센타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보아왔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때문에 예불시간에 빠진 적도 있을 정도인데 결혼을 하면 과연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러니 가족들을 다 버리고 그 살을 저미는 외로움을 감수하면서 출가를 하는 전통이 2천5백 년이나 이어져 오는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생각을 하면서도 무섭게 도리질을 쳤다. 내가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못해, 못해.
그러면 또, 나는 어떻게 살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활과 일상에 묶여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다시 돌아누웠다. ‘그래, 결혼하지 말자, 출가하자.’
나의 이런 결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할까.
내게도 상상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다가오리라. 그러나 내 마음 속 간절한 염원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 아니, 이건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갖고있었던 진정한 바램을 이제야 발견한 것뿐이다.
나는 정말 스님이 되고 싶다.
불국사에서 돌아온 며칠 후 나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몸은 한국을 떠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 다시오게 되리라는 것을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졋다.
미국에 돌아가자 부모님과 친구들은 내 얼굴이 완전히 바뀌였다고 놀라워 했다. 너무 맑아지고 깨끗해졌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에 다시등록하자 저으기 안심하시는 눈치였다.
나는 사간 날 때마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한국에서의 경험에대해 얘길했다. 그들은 호기심을 갖고 내 얘기에 귀를 쫑끗 세웠다.
나는 또한 한국에서 재미있는 선물을 많이 사갔는데 친그들과 부모님은 그것들울 받우며 기뻐하셨다. 그들에게 원앙새 한쌍, 산수화 그림등을 주면서 한국이 얼마나 오랜역사와 문화적 전통응 가지고 있는 나라인지 자랑했다. 불교 신자인 친구들에게는 단주와 불상이 그려진 탱화를 선물했다. 오늘날까지도 내 하버드 친구들 중에는 그때 내가 주었던 염주와 단주를 손에 차고 다니는 친구들이 있다.
그 단시만 해도 미국에는 불교용품 파는 가게가 별로없고 기껏해야 LA나 뉴욕같은 대도시에 가야 겨우 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아주 싼 물건이어도 미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강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
이밖에 한국에서의 사찰경험, 고승들을 비롯한 승려들의 생활, 숭산스님 이야기, 벽암스님 이야기, 같이 수행했던 전세계에서 온 숭산스님의 제자들 이야기 휴지가 날아다니는 화장실 이야기, 우리를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던 보살님 이야기등, 하버드 친구들은 내가 이야기 할 때마다 박장대소를 하고 손뼉을 치며 입을 헤에~~벌리고 들었다.
하버드 친구들과 젠센터 도반들 중 몇몇은 내 얘기에 자극받고 이듬해 한국 신원사에서 동안거를 하기도 했다. 1권 끝

Wednesday, February 8, 2012

만행 오케이 원더풀 인터뷰

만행 오케이 원더풀 인터뷰

신원사에서 수행한지 한 달 반가량 지난 어느날, 아침공양 후 안거를 지휘하는 입승스님(Head monk) 이 “오늘 아침에 숭산 대선사님이 이곳에 오십니다. 법문 후에 여러분 모두를 다 개인적으로 만나실 겁니다. 숭산 대선사께서는 미국포교를 마치고 오늘 아침 아홉시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하셔서 바로 이곳으로 내려오십니다.”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흥분과 설렘에 부풀었다. 청소도 더 열심히 하면서 대 선사님 맞을 준비를 했다.
나는 지난 한 달 반 동안 수행을 아주 열심히 했다. 쉬는 시간도 남들처럼 누워있지 않고 대웅전으로 가서 1천배를 했다.(거의 수행에 걸신이 들려 있었다.) 물론 어려웠지만 어떤때는 아주 행복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좋은 감정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 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좋은 경험에 대한 기억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분노, 두려움, 나쁜기억, 행복, 의심, 욕심, 갈망 같은 온갖 종류의 감정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왔다갔다 하는 생각들 뒤에는 뭔가 좀더 맑은 것, 좀더 순수한 뭔가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행을 하면 할 수록 나는 내 마음이 깨끗해지고 맑아지고 그래서 내얼굴 표정이 바뀌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자동차 유리에 서리가 가득끼어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서리 때문에 바깥이 잘 보이진 않지만 서리를 벗겨내면 바깥풍경이 어떠하리라는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침내 대선사님이 도착하셨다. 그의 에너지와 우리의 에너지가 합쳐져 방안에는 놀랄만큼 활기찬 기운이 넘쳐 흘렀다.
그날은 나와 큰스님과의 네번째 만남이었는데 스님을 만날 때마다 나는 큰스님의 에너지의 맑고 깊음에 감동을 받는다.그의 에너지는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보통 인간에게서 풍겨나오는 에너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선방에 모두모여 큰절을 세 번 올렸다. 그는 환하게 미소지으면서 아주 큰 목소리로 “여러분 모두 안녕하세요”하면서 우리 얼굴을 차례차례 돌아보시며 “얼굴이 아주 좋아요, 하하하”하고 웃으셨다. 이 大人, 큰 깨달음을 얻으신 대선사가 어쩌면 저렇게 아이같은 미소를 지우실수 있을까.
그후 우리는 선방으로 다시 돌아가 참선수행을 하면서 큰스님과의 개인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면담은 선방 옆 방에서 행해졌는데 가끔 흘러나오는 큰 웃음소리에 우리는 수행하면서도 그소리에 귀를 쫑끗 세우고 있었다. 면담을 마치고 오는 사람들마다 아주 환하고 밝은 미소를 띤 채 선방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내차례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일어서려고 하니 사뭇 다리가 아파왔다. 나는 긴장이 되었다. 매번 큰스님을 만날 때마다 겪는 일이지만 그렇게 긴장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실제로 이번 인터뷰는 수행을 시작한 뒤 이뤄지는 본격적인 첫번째 공안 인터뷰였기 때문에 나는 더욱 흥분과 설렘에 몸이 떨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태양이 방 한가운데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환한 미소와 달덩이 같은 얼굴, 빛이나고 있었다. 강하고 맑으면서도 따뜻한 힘이 느껴졌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큰스님이 물으셨다.
“질문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 좋으니 해보셔요.”
나는 고개를 저우며 별로 없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너무 긴장이 돼 무엇부터 여쭈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오 케이, 그럼 내가 하나 질문을 할게요.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미국에서 왔읍니다.”
순간 큰스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케이, 하나더 묻겠읍니다. 부처란 무엇이지요?”
나는 손다닥으로 바닥을 쳤다. 탕.
“오케이, 원더풀, 그다음은?”
“벽은 하얗고 선사님 눈이 갈색입니다.”
“좋아요, 좋아요, 원더풀.”
큰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아주 행복한 표정이 되셨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다.
“왜 하늘은 푸르지요?”
“……이이돈…노우.”
“좋아, 좋아, 그런 마음을 갖고 정진하세요. 온리 고 스트레이트 돈 노우 (Only Go Straight Don’t Know)>”
그는 항상 주장자(긴 지팡이)를 들고다니시는데 주장자로 내 단전을 가볍게 치셨다.
“이 센터가 튼튼해져야 해요. 지금은 좀 약해요. 오케이?”
“예, 알겠읍니다. 선사님”
나는 내친 김에 말을 이어나갔다.
“선사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자 제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선사님의 가르침은 저를 비롯한 우리모두에게 가장 위대한 복음입니다. 저는 지금 록펠러보다도 더 부자 같읍니다.”
그는 박장대소 했다.
“텡큐, 텡큐, 하지만내가 당신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당신 자신안에 이미 수백만 달러가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모를 뿐입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나는 스님 방을 걸어나오면서 너무 너무 행복했다.
큰스님을 만난 뒤 내 수행은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갔다.

벽암 큰스님
나는 이 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신원사 조실스님이신 벽암 큰스님이다.
벽암 큰스님은 이틀에 한 번씩 우리에게 법문을 하셨다.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 스님이 옆에서 통역을 해주셨다.벽암 큰그님은 신원사의 큰스님인데 한국 조계종단에서 매우 존경하는 큰스님 중 한 분이다.
벽암 큰스님은 법문 때마다 우리에게 “여러분들은 아주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숭산 큰스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스승에게 뭘 배우려면 먼 길을 걸어 스승이계신 깊은 산으로 가야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선사는 여러분이 수행하는 곳으로 직접오신다. 이 얼마나 영광되고 행복된 일이냐. 이 기회를 절대 낭비하지 말아라”고 강조하셨다.
그는 60대 후반이 다 되어가는 노스님이었는데도 각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철처럼 강했다. 벽암 큰스님에 대해 한국 스님들은 아렇게 말씀들을 하셨다. 그 노스님은 매우 어려운 분이라고
어느 날 벽암 큰스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몇 년 전, 조계종에서 교육원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어요. 당시 나는 한번도 웃은 적이 없었지요. 많은 스님들이 나를 두려워했습니다. 무섭다고 피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나는 여전히 무서운 표정으로 일을 했지요. 그게 스님의 도리에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ㅏ. 한국 불교 사회는 유교사회이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많이 웃는 사람을 실없다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숭산 큰스님을 뵈었는데 활짝웃고 아주 행복한 얼굴이더라 이겁니다. 여러분들 모두 아시다시피 그는 위대한 선사님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선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하고 선사님 주변에 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요.
그래서 나는 약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내 스타일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서점으로 뛰어갔지요. 그리고는 《웃음의 미덕》인가하는 제목을 발견하고 선뜻 그 책을 샀읍니다. 무슨 항공사 스튜디어스인가가 쓴 책이었다고 가억되는데 아마 예절교육이나 그런것을 가르치려는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 책은 미소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는데 나름대로 나에게 인상적이었지요. 그 후 나는 ‘미소 수행을 하기로 결심했읍니다. 웃기 싫어도 억지로 미소를 띄려고 노력한거지요. 그런데 그후로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따르기 사작했읍니다. 숭산스님에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벽암 큰스님의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벽암 큰스님은 늘 그렇게 우리에게 ,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얘기하시는 것처럼 다정하게 삶의 지혜를 주셨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그이 이야기와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어느 날 누군가 벽암 큰스님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50년간 스님 생활 하시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르침 하나를 주십시요.”
그러자 큰슨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화장실에서 이빨 닦을 때 물로 입가심하면서 서서 하지말고 앉아서 하라는 것 왜냐하면 입가심하고 나서 물 벧을 때 옆 사람에게 물이 튀니까.”
우리는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고 그의 어린아이 같은 맑고 순수한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

Sunday, February 5, 2012

만행 김치 한입 베어물고

만행 김치 한입 베어물고

미국내에 있는 숭산스님의 모든 젠센터는 순전히 한국식으로 운영된다. 식사 때마다 김치 깍두기는 물론 된장찌게, 두부, 김 등 한국 음식이 많이 나온다. 물론 미국음식도 나오지만 말이다. 일단 젠센터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채식주의자인 탓도있고 사찰에서는 술,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채식 위주로 된 한국음식은 정말인기가 좋다. 특히 두부는 인기 ‘캡’이다. 식탁에 나오기 무섭게 동이난다. 매일 옥수수차, 보리차를 마신다. 김치도 인기가 좋다. 김치는 매일 모자란다. 특히 라면에 먹는 김치맛은 아주 일품이다.
내가 처음 김치맛을 보던 날, 나는 그때부터 김치와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 맛보기 전에는 그 시큼한 냄새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감히 맛보기조차 꺼려했다.
케임브리지 젵센터로 처음이사를 해서 도반들과 함께 밥을 먹는 식탁에 김치가 나왔다. 나는 냄새때문에 거둘떠 보기도 싫은데 다른 친구들은 너무 잘 먹는 거였다. 친구들은 나에게 한번 시도를 해보라고 재촉했다. 몇 번 망설이다 드디어 밥을 한 숟기락 가득 입에넣고 김치한쪽을 입에 넣었다. 와! 그때 경험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독자 여러분에게 김치에대한 첫경험을 기억해내라고 하면 아마 자신이 없을 것이다. 워낙 오래 전 부터 먹어온 것일 테니 그 기억을 떠올리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다 이미 성인이 다 된 다음에 맛본 것이다. 그 느낌이나 그때 맛, 모든것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수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수많은 종류의 음식을 먹어보았다.그중에서도 특히 인도 음식을 좋아했다.
그런데 김치를 처음 먹었을 때의 경험은 말로표현할 수 없는 강한 것이었다. 나는 김치를 한입 베어물고 는 너무 맛이있어서 그날 김치 한 접시를 다 비워버렸다. 그 뒤부터는 식사 때마다 김치를 먹었다. 친구들은 내가 김치에 완전히 중독이 되었다며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말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의 매일 김치와 밥을 먹었다. 오히려 빵과 수프는 가끔 먹을 정도 였다.
어느 날 법수스님은 ‘된장국이라는 것을 식탁에 내놓았다. 김치에 이미 자신감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된장국도 과감하게 시도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정말 맛있었다. 김치경험보다 더 독특한 것이었다. 김치가 강한 맛이라면 된장은 깊은 맛이라고나 할까. 독자 여러분은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된장국을 먹으면서 마치 고향음식을 먹는듯한, 아주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불렀던 동요를 듣는 것 같은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습관 같은 것 말이다.
나중에 전생에 대해 얘기하겠지만 김치나 된장국의 맛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기억 그 자체였다. 나는 한국음식을 먹으면서 어서 빨리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나는 그 해 여름 아주 열심히 수행했다.
다시 큰스님을 빕고 싶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내내 큰스님은 한국에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숭산스님의 영어 법문집 두 권을 거의 외우다 시피 열심히 읽었는데 하나는 이미 소개한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라는 책이었고 다른하나는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이라는 책이었다.《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는 1979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숭산스님의 영어법문집으로 큰스님의 책으로서는 고전에 해당하는 책이었다.
하버드대에 다닐 때 마사토시 교수님으로부터 그 책을 받은 이후 큰스님을 만난 뒤에도 여러 번 읽었지만 그 무렵에는 아예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 책이 서양에 소개된 동양불교책으로는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책은 마국사회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아주 큰 공헌을 한 책이며 보면 볼수록 의미가 새겨지는 책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대부분 불교책들은 부처니 마음이니 법문이니 생각이니 의식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큰스님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큰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대로 ‘고통은 생각에서 온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책에서 설명을 해봐야 읽는 이로 하여금 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그리하여 더 많은 고통을 가져온다고 했다. 더 많이 설명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오히려 불교속에서 또 하나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대신 큰스님은 제자들이 큰스님에게 짊문을 하는 바로 그 순간 제자인 마음속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의 고통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순간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말해 ‘진리’ 혹은 ‘부처’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빠진 우리에게 자기마음을 볼 수 있는 맑은 거울을 들어미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너의 이 순간 마음이다.
그 맑은 거울이란 바로 큰스님의 깨달음의 거울이다. 혹독한 수행을 통해 그가 얻은 깨달음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베프는 것이다.
큰스님은 ‘마음공부’ 오직 ‘마음공부’ 하는 것만이 진리를 깨닫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상조하셨다. 요즘사람들은 너무 많은 지식을 공부하기 때문에 책은 더이상 필요없다고 했다.
큰스님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눈을 감기 바로직전, 죽는 순간에 아무리 1천개의 박사학위가 있어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냐”
나는 그 여름 큰스님의 말씀을 새기다보니 새록새록 감동이 넘쳐흘렀다.
큰스님은 “내 말을 믿지마라, 너 스스로 너 자신을 알아야한다. 오직 수행하라 나는 단지 여러분의 본 성품을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것을 찾아줄 수 없다. 당신 스스로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쇼펜하우어조차도 이렇게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는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 의식에 대해 ‘얘기’하고 생각에 대해 ’얘기’ 하고 삶의 의지WILL에 대해 언급했지만 자기의 가르침으로부터 독립해 그것을 어떻게 각자 자기의 것으로 만들 것이냐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
생과 사에 완벽하게 설명했지만 그 진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을 철저히 검토하여 그것의 진리를 재발견하라.”
“나는 너회들에게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너회들의 몫이니라.”
부처님의 기르침은 부처 당신이 추구하던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을 설명하는 가이드 북 같은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불자’가 된다는 것은 부처를 하나의 신이아닌 길잡이로 깨달음의 상징으로 여기고 부터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도그마가 아니라 길道인 그의 기르침, 즉 불법에 귀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공동체, 그 길을 따라 여행하는 동반자들의 집단에 귀의 하는 것이다. 불교는 주인의 승낙없이 억지로 문을 밀고 들어가려 하지 않으며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불교에서는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큰스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내 말은 충분하지 않다.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면 불교 경전이나 성경, 이 세상 진리를 가르친다는 모든 가르침은 악마의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생각과 집착을 끊고스행을 통해 ‘오직 모를 뿐’ 이라는 마음으로 돌아오면 모든 가르침, 불교경전, 성경이 완벽히 그대로 진리가 될 것이다. 진리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바깥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창 밖에 자동차소리, 얼굴에 스치는 바람소리 이 모든것이 진리다. 우주는 언제나 항상 매순간 우리에게 훌륭한 법문을 준다. 말과 언어는 여러분을 가르칠 수없다. 오직수행, 수행하라”고하셨다.
이 때문에 나는 모든 책을 한쪽으로 치우고 참선수행에 몰두했다. 책 없는 그의 가르침이야말로 내가 여태껏 받았던 어느 가르침보다 귀중한 것아었다.
드디어 서울로
드디어 한국에 갈 시간이 다 되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한국 절에가서 수행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들은(당연히)펄쩍 뛰셨다. 그분들의 실망과 충격을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왜 학교를 휴학했느냐. 그것도 1년씩이나. 뭐? 한국엘 가겠다고? 그것도 절에가서 수행을 해야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 들어가자마자 거의 1년넘게 젠센터에서 살았는데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서도 늘 걱정을 하고 계셨다. 부모님은 늘 나의 결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여 주셨건만 그 부분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역정까지 내시면서 꾸짖으셨다.
그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마침내 “1년 휴학까지는 이해하겠다. 그런데 왜 하필 한국, 그것도 절이냐”하고 물어오셨다.
독자여러분들이 좀 깁분 나쁘게 생각하실지 모르겟지만 한국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은 88올림픽 전후였다. 우리 부모님도 구세대이시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별로 아시는 게 없었다. 아니, 동양 전체에대해 잘 모르고 계셨다. 그러니 내가 한국에 간다고 했을 때 마치 달나라나 화성이라도 가는 것처럼 놀란표정을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의 그 수많은 친ㆍ’인척 중에서 오직 한 분만이 한국과 인연이 있었다. 그분은 외삼촌 즉 내 어머니의 남동생이었다.
외삼촌은 군인으로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 그것도 한국에 주둔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으로 무기를 공수하는 일을 맡았었다고 한다. 몇 달간 부산에 살았던 적은 있지만 전쟁에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
어쨋든 나는 1990년 11월 27일 마침내 뉴욕 존 에프 케네디JFK 공항에서 서울 김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모님에 대한 부담과 한국에서의 수행에대한 기대감이 섞인 채 말이다.
그때가지도 나는 이 춟발이 내 인생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또다른 출발이 되리라곤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비행기안에서 한국관광 책을 읽다가 잠이들었다. 문득 잠이 깼을 때는 일본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랍고 흥분되었다. 아, 드디어 내가 태어난 곳 지구의 반대편 동양나라에 가까이 왔구나, 이 지구상에서 몇 안되는 오랜역사를 가진나라로 가고 있구나.
비행기가 일본을지나 한국에 가까이 가고있다는 스크린자막을 보면서 흥분에 가슴이 설렜다. 바깥은 어스름 저녁, 나의 온 신경은 오직 한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잠시 후 비행기 창 밖으로 불ㅂ빛들이 보였다. 작은 도시같았다. 스튜어디스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지금 막 부산으로 비행기가 들어섰읍니다. 발 아래 보이는 불빛이 부산 땅입니다.
나는 ‘부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외삼촌을 떠올렸다. 잠시 후 스튜어디스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발 밑에 보이는 곳은 광주 땅입니다.”
‘광주, 광주...... 아하...... 광주...... 바로 광주항쟁이 있었던 곳이겠구나.'
나는 비행기의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항쟁이 일어났던 당시 상황의 흔적을 그 먼곳에서 찾아내보기라도 해겠다는 듯 비행기 밖 불빛들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내 심장은 두근두근거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한국 절을 지나고 있을까'하고 생각했다. 케임부리지 젠센터 법수스님의 방에서 보았던 그 사찰 사진들, 푸른산, 안개, 그 평화로운 절의 모습.......
나는 밤의 그 어둠의 땅을 내려다 보면서 그때 그 사진에서 본 산들이 어디있을까, 절의 불빛을 내가 알아볼 수 있을까 하면서 창 밖이 뚫어져라 내다보고 있었다. 마치 비행기를 처음 탄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너무 설렜다.
시계를 보니 한국시간으로 저녁아홉시 50분.
아마 이 나라 스님들은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지금 절에서 주무시고 있겠구니.
"비행기가 곧 착륙하겠으니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요."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비행기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동안 전세계 많은 도시들을 여행하고 수십 번씩 비행기를 타고 내렸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비행기가 점차 고도를 낯췄다. 아, 마침내 큰스님 땅에 닿고 있구나. 그리고 큰스님인 고봉대선사, 또 고봉대선사의 스승이신 만공대성사, 그리고 한국 선승의 위대한 스승 경허대선사...... 그분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가르침을 펴신 이 땅에 드디어 내가 발을 딛는구나. 참선수행의 나라, 아름다운 불상이 있는 나라, 고풍스런 기와집과 깊은 산에 사찰들이 있는 이 나라를 마침내 내 발로 찾는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떤표정일까. 아마도 모두 부처님의 모습일 거야. 모두 참선수행을 열심히하는 사람들일 테니 말이야. 아, 사람들 표정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비행기 바퀴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밖으로 혹시 절 지붕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고 머리를 완전히 창에 박고 있었다. 내눈에 처음 발견되는 절의 불빛은 어느 절 불빛일까.
드디어 차츰 고층빌딩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네온사인이 화려했다. 멀리 희미하게 빨간 점 들이 점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가만있자 저게 뭘까. 비행기가 점점 지상가까이 내려가자 그것이 무엇인지 뚜렸하게 보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빨간 점이란 다름아닌 십자가였다.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 수백 개에 달했다. 오둠 속에 빨갛게 점점이 박혀있는 십자기 네온사인.
나는 그동안 여러나라를 여행했지만 그렇게 십자가가 많은 나라는 처음보았다. 더군다나 밤에 빛나는 네온사인 십자가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 이거 불교의 나라 한국 맞아? 아마 스튜어데스가 안내 방송을 잘못한 것은 아닐까. 필리핀에 도착했는데 서울이라고 잘못얘기한게 아닐까. 어떻게 사찰과 불교의 나라인 한국에 이렇게 십지가가 많을 수가 있어? 그래 아마 비행기가 주유 때문에 필리핀에 들렀다가 서울로 가겠지'
드니어비행가가 땅에 닿으면서 바닥에 뭔가 희끗희끗한 것이 눈에 띄었는데 알고보니 눈이었다. 필리핀은 눈이 안 내리는 곳이잖아, 서울이 맞긴 맞는 모양이네.......
다음순간 , 안내방송이 나왔다.
"엘컴 투 김포 에어포트 서울 코리아."
내 마음속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는 서둘러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어떤 나라에 도착해 비행기 트랩을 내리면 모든나라에는 그 나라마다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냄새가 있다. 예를들면 몇 년전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릴 때 그 냄새는 좀 이상했다. 그렇게 상쾌한 냄새는 아니었다. 홍콩과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나라 냄새는 나를 좀 불편하게 했다.
그런데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 코로 들어오는 냄새는 아주 낮익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와본나라같지 않았다. 열다섯 시간동안 좁은 비행기좌석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발을 딛고 선 대지에서 올라오는 기운은 내 온몸의 세포를 하나하나 깨우기 시작했다.
몸이 좀 떨렸다. 그건 단지 추워서만 아니었다는 것이 내 오랜 여행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본능적 직감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무심스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심스님은 숭산스님 밑에서 출가한 미국인 스님으로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우리는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스님의 차를타고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 도착했다. 창 밖으로 비치는 처음보는 서울의 모습,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때가 밤 열한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가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청소년들이 오후 세 시만되면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서 텔레비전을 보기 때문에 밤에는 거리에서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밤 열한시가 넘었는데 이 많은 학생들이 학교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다니.......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24시간 가게문을 열어놓고 열심히 일하던 뉴헤이븐의 한국수퍼와 식료품점, 한국사람들을 떠올렸다.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로구나. 학생들까지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다니.......'
존경심이 일었다.
김포공항에서 수유리 화계사로 가는동안 무심스님은 나에게 이것저것 말씀을 건넸는데 시실 나는 처음보는 서울 창 밖 풍경에 사로잡혀 그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

Thursday, February 2, 2012

만행 하버드란 동굴

만행 하버드란 동굴

큰스님과 면담이끝난 뒤 짐을 꾸려 다시 보스턴으로 향했다.
보스턴으로가는 버스안에서 나는 오직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직 수행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제 책은 더이상 관심이 없어졌다. 글쓰기나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만약 내 본성을 모른다면 그 모든 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그 모든 철학 책을 다 어디에 쓸 것인가. 그것으로부터 얻은 그 수많은 지식을 다 어디에 쓸 것인가.
나는 버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 비친 내모습, 여전히 혼란 스럽긴 했지만 뭔가 결연해 보였다. 나는 이미 내 남은 인생동안 숭산 큰스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스님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나중 문제다. 큰스님은 마치 마음의 병을 고치는 침술사처럼 내가 어디에 병이 있는지 진맥만 짚어보고도 아시는 것 같앗다. 내눈만 보고도 나에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동안 나에게 그런확신을 갖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리하고 직접적이면서도 따뜻했다.
나와 그의 인연은 무엇일까. 어떤 종류의 것일까.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더군다나 그는 내 니라 사람도 아닌, 잘 얼지도 못하는나라 한국에서 태어난 외국인이 아닌가. 혹 내가 뭔가 길을 잘못 들어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과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내 남은 인생은 이제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외에 더 무엇이 나를 만족시킬 것인가.
그때부터 나는 공부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교슈님들의 가르침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건 시간 낭비야. 시간낭비. 이런 생각만 자꾸 일었다.
그전엔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수업 때마다 교수님들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듣고 노트하는 열성적인 학생 이었다. 그런데 숭산 큰스님과의 만남뒤에 접하는 교수님들의 강의는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열심히 교수님들의 생각을 받아적는 친구들이 오히려 로봇같아 보였다.. 왜 남의 지식을 복사하는 거야. 우리는 정말 우리자신의 생각이 뭔지 알아야 하잖아.
교수님들도 마참가지였다.
‘진리란 누구누구에 따르면 뭐뭐뭐고 찰학이란 누구누구가 말한바에 의하면 이러이러한 것이고…….”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있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교수님의 애기를 그대로 적고 있었다. 왼쪽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앞에 앉은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뒷자리 친구도 보나마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히는 이 친구들이 단지 지식 복사기에 불과한 것 아닌가.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는 아주 성능좋은 복시기에 다름아닌 것 아닌가.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찾기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내 경험이 필요하다. 여태까지도 그런 가르침을 찾기위해 책을뒤지고 교수님들을 찾아다녔지만 도움이 안 되었지 않는가. 그런식으로는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들이 동굴에 갇혀있다고 했다. 그리고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진짜 자기모습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큰스님을 만난 뒤 나는 하버드애말로 그 동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들은 칠판에 그림자를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실제의 그림자가 아니라 누군가 그려놓은 다른그림자를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1년 내내 하버드를 억지로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90년 5월에 기말숙제를 모두 제출하는 동시에 1년동안 휴학계를 냈다. 켐퍼스를 걸어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나는 학교를 휴학하자 마자 공사판으로 뛰어들었다. 공사판일은 내가 여름방학 때마다 간혹했던 아르바이트일이라 익숙했다. 우리 부모님은 대학 1학년 때 내 등록금을 보조해주긴 하셨지만 워낙 형제들이 많아 내게 계속 등록금을 대주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우리 형제들은 대부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혼자서 돈을벌며 학교를 다녔다.
나는 그동안 식당 종업원, 출판사 일, 사무실에서 자료정리, 복사일, 공사판에서 벽돌을 짊어져 나르고 페인트칠 하는 일 등을 방학 때마다 하면서 등록금을 벌었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에 가기위한 돈을벌기위해 공사판일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매일아침 저녁으로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했다. 나의 수행은 점점 더 깊어갔다. 일 때문에 아주 피곤했지만 곧 한국에가서 집중수행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한편,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으로 달려가 한국에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에 관한책은 그리많지 않았다. 읽을만한 책도 없었거니와 겨우 손에 들어오는 책들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아주 오래된 책들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국불교와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만나기 전에 한국에 대해 오직 두 가지 경험만 했다. 80년대 중반 예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해도 한국에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예일대학은 미국에서 일곱번째로 가난한 뉴헤이븐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는 원래 백인들이 많이 살고있었지만 어느 틈엔가 백인들이 모두떠나 가난한 흑인들만 사는 슬럼이 되어버렸다. 예일대학교수들 중에는 뉴헤이븐을 떠나 먼 곳에서 출퇴근하는 분도 계셨다. 이처럼 완전히 죽은도시였기 때문에 활기도 없었고 이렇다할 가게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작고 깨끗한 구멍가계와 식료품점들이 눈에띠기 사작했다. 간판도 아주선명하고 깨끗했으며 무엇보다 비깥에 내놓은 과일, 야채, 식료품을 비롯한 생필품들이 신성하고 깨끗했다.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었다.
슬럼가는 밤이되면 위험하기 때문에 함부로 나다니지 못한다. 따라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상가들은 서터를 내리가 바쁘다. 그런데 유독 한국가게만큼은 밤늦게까지 문을 열었다. 어떤가게들은 24시간 영업을하는 곳도 있었다. 자정이 넘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하다 배가 출출하거나 혹은 파티를하다가 맥주기 떨어졌거나 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가게에 가면된다’고 생각하고 새벽 한 시건 두시건 그들은 우리의 가대에 어긋나지 않게 문을열어 놓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기말고사를 준비하다 문득 맥주생각이 나 친구들 몇명과 함께 학교앞에있는 한국수퍼를 찾은적이 있었다. 주인인 듯한 남자와 한 젊은이가 과일과 야채를 다듬고 있었는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 나는 주인 남자에게 저 젊은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인데도 묵묵히 열심히 아버지의 일을 돕는 아들의 모습이 그렇게 대단해 보일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국가게는 또 약속을 잘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했으면서도 손님들이 찾는 물건이 없으면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내일 반드시 그 물건을 갖다 놓겠다”고 약속했고 어김없이 그 약속을 지켰다.
나는 미국에서 그렇게 친절하고 따뜻한 정이 넘치는 가게를 본적이 없었다. 나뿐 아니라 예일대학교수, 학생들이 모두 한국가게 단골들이었고 한국가게는 나날이 번창했다.
그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변호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1987년 5월 어느 날로 기억되는데 나는 그날 〈뉴욕 타임스〉를 보다 1면 중앙에 실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는 노태우 대통령의 6.29 선언이 나오기 직전으로 한국에서의 데모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중무장을 한 두명의 경찰이 경찰봉으로 누군가를 가로막고 있었다. 상대편은 다름아닌 스님이었다. 당당하면서도 밝고 순수한 얼굴을 한 스님은 경찰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자신이 들고있던 우산을 앞세워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중무장을 한 경찰들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반면 스님은 아무것도 가진 것없이 겨우 우산 하나뿐이었는데도 그렇게 당당한 표정일 수가 없었다. 누가 막는 자이고 누가 제지를 당하는 쪽인지 얼핏 분간이 안 되었다.
나는 그 사진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것을 오려 네 배로 확대복사해 친구들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당시 미국의 신문에는 한국의 데모소식이 많이 실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비록 광주항쟁을 고등학교 때 신문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 미국의 신문에는 전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내전이 보도된다 — 내게는 광주항쟁도 그것들 중 하나였다. 나 같은 외국인들의 눈에는 광주항쟁이 그저 남아프리카나 중남미의 시위와 별다른 게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 데모대나 시위대 사진들 중에서 그날 1987년 5월 무장한 경찰에 맞서 싸우던 그토록 당당한 스님의 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승려의 위엄과 두려움없는 표정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렇다고 얼굴에 적의가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당당함, 그 자체였다. 정작 온몸을 무장한 경찰들이 멈칫하고 있었다.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도 먼저 접했던 책들이 인본 불교 책이었다. 하버드 대학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도 한국불교에 관한 책은 전무했다. 장서보유고가 세계적인 하버드 대학의 도서관만 해도 그 당시 일본 불교에 관한 책이 5천여 권 티벳 불교에 관한 책이 2천여 권에 달했는데 정작 한국 불교에 관한 책은 숭산 큰스님의 영어법문집 다섯권 정도가 전부였다. 원효ㆍ서산ㆍ경허대사 같은 한국의 위대한 고승들의 책은 하나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겠지만 아직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다 숭산 큰스님을 만나면서 비로서 한국과 한국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처음들은 한국말은 아마도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들었던 한국말 염불이었을 것이다. 뜻도 하나도 모르는 말을 발음기호만 보고 따라했지만 내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었다.
그러던 내가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한국인 한 분을 아주 가까이서 뵐 기회를 만났는데 그분은 젠센터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던 법수스님이라는 분이다. 법수스님은 하버드에 입학할 준비를 하고 계셔서 내가 영어를 가르쳐드리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친해졌다.
그 스님은 아주 선심이 두텁고 친절하고 천진한 분이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어느 닐 스님이 출타한 것을 모르고 스님의 침실에 들어갔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어쩌면 남자가 사는 방이 그렇게 깨끗하고 깔끔한지........ 그렇게 정리를 잘하고 사는 남자는 처음 보았다. 성격도 깔끔한 분이었다.
방을 나오다 벽에 걸려있는 큰 달력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한국의 사찰들이 사진으로 실린 달력이었다. 열두 장에 담긴 한국의 사찰들은 아주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한국의 사찰들을 사진을로 접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운문사 쌍계사 등 한국의 유명 사찰들이었다. 한 장 한 장 달력을 넘기면서 받았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없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아름다운 사진에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부끄러운 듰 얹혀있는 기와지붕, 아름답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건물의 선, 아침 안개 사이로 보일 듰 말 듰 엿보이는 절집..........아 저곳에 한번 가보았으면....... 내눈으로 저 아름다운을 꼭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마음 한 견에선 반드시 그런기회가 오리라는 확신이 피어올랐다. 열두 장의 사진이 끝나자 너무 아쉬웠다. 더 많은 사진이 보고 싶었다.
그날 저녁, 법수스님에게 내가 방안에 있는 한국 사찰 달력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얘기했더니 아주 좋아하시면서 사찰 사진집 한 권을 건네주었다. 인쇄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역시 감명깊게 보았다. 그런데 그 책의 글이 모두 한국말이어서 갈증만 더 일어났다.
서점과 도서관에가서 한국문화와 관련된 책을 뒤졌다. 그런데 만족할 만할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는 많은 동양문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 일본이나 중국문화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미술이나 한국문화에 대한 소개는 전혀 없었다. 나는 좀 당혹스럽기도 했고 실망감도 들었다. 이렇게 한국에 대한 것을 찾을 수가 없다니, 더군다나 한국불교에 대한 것은 전무하다시피했다.
오직 이 달력? 이 사진집? 이 정도 뿐인가.
얼른 납득 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젠센터에와서 그것도 한국 스님이 계셨기에 망정이지 그 달력을 못 보았다면 한국사찰에 대한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영원히 없었을 것 아닌가.
나는 법수스님에게 한국사찰에 대한 사진을 더 찾아내라고 졸라대면서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했다. 법수스님은 나름대로 열심히 나를 가르치려 했지만 영어가 서툴렀던 관계로 그다지 도움이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법수스님의 삶을 통해 살아있는 한국불교의 생생한 경험을 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가난과 청빈의 삶이었다. 법수스님의 짐이라곤 간단한 걸망 하나가 전부였다. 옷도 한두벌에 불과했고 돈도 없었다. 그런데도 스님의 얼굴은 아주 맑았다. 스님은 누구에게나 찬절했으며 뭐라도 생기면 홀라당 남에게 다 줘버렸다.
나는 점점 더 불교에 관심을 갖게되어, 젠센터에 살면서 수행을 하게 되었다. 사실 법수스님을 만나기 전까지 스님이란 직업은 좀 별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카톨릭 수사난 신부와는 완전히 다은세계의 사람, 미국인의 눈으로보면 좀 히피성향의 사람들이 스님이 된다고도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법수스님을 통해 승려생활을 보다 가까이 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무소유이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살아가는 저 충만함, 저 여유로움, 나는 점점 불교 수행자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 스님으로 사는 것도 아주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밤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다가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목탁소리를 따라 홀린 듯 소리를 쫓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가 새벽 두 시인가 세시였던 한밤중이었는데, 법수스님이 혼자 법당에 앉아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계신 것이 이닌가.
나는 문간에 기대 한참동안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청아하게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속에 맘아있던 온갖 찌꺼기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태초에 어디에선가 울려퍼지는 원시의 목소리가 물결을 타듯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신비스럽기도 하고 좀 슬프기도 했다. 오직 두 개의 양초 불빛에 기대어 염불하며 앉아있는 스님의 모습에서 원형질의 순수함이 묻어났다.
그의 염불소리는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고대의 세계로 안내하는 듯 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공간으로 나를 데려가는 듯 했다.
그때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진한 향수라라까, 내가 태어났으나 기역하지 못하는 어머니 자궁같은 세계, 그런세계로 내 몸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 한국도, 미국도, 아프리카도 아닌, 어쩌면 이 지구에는 없는 어떤 별에서의 여행자 같은 느낌, 언제인지, 어느 곳인지 도대체 이름 붙이거나 설명할 수없는 그런 곳으로 내가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주 친숙하고 낯익은 곳, 그러면서도 너무 신비한 곳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보니 한 시간 가량을 그 소리에 취해서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러고도 다음낭 아침예불을 위해 기산목탁소리가 울려퍼질 때까지 잠을 아루지 못했다.
그 ㅟ 몇 차례 나는 법수스님의 새벽예불에 초대받지 않은 관객이었다. 그런 날 밤이면 잠자리에 돌아와서도 어김없이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반드시 법수스님을 찾아가 어제하신 염불이 무엇이냐 하면서 이것저것 여쭈었다.
'달마 게이트' Dharma gate라는 말이있다. 자기자신을 불가의 세계로 이끈 안내자라고 할까. 부모님은 내 몸을 주신 분이라면 달마 게이트는 내 정신을 새로 태어나게 문을 열어준 문이다. 숭산 큰스님이 법, 즉 달마 그 자체라면 법수스님은 나에게 달마 게이트였다. 부처님께서는 누구든지 달마 게이트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작년에 지리산 상선암에서 백일기도를 하던 중 그 법수스님이 경상도 어느 절에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밤낮을 눈물로 지샌 적이 있다.
그 맑고 고운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니....... 오직 극락왕생만을 빌 뿐이다.

Sunday, January 29, 2012

만행 공안인터뷰 공안수행




公安인터뷰, 공안수행

나는 사흘간의 수련동안 처음으로 공안인터뷰라는 것을 했다. 이 공안인터뷰는 숭산 큰스님의 아주 독특한 가르침으로, 비로소 나는 큰스님의 가르침 스타일대로 그를 만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공안방법이 우리들 생각의 집착을 끊게하는 가히 혁명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숭산 큰스님은 학국불교의 수행전통을 서양의식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키셨는데 이 공안인터뷰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公安과 화두가 무엇인지부터 집고 넘어가 보자.
참선에 입문한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 어떤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할 때 그 경지가 어느정도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때 필요한 것이 공안(선종에서 도를 깨치게 하기위하여 내는 과제)이다. 즉 제자들이 수행을 통해 깨달은 한쪽을 스승이 깨달은 한쪽과 맞춰보는 것이다. 마치 깨진 거울을 맞추듯 말이다. 공안은 이같은 깨달음의 경지를 확인하는 것 외에 그 자체가 수행이므로 공안수행이라고도 한다. 스승과의 문답을 통해 제자는 자신의 수행을 돌아보고 모든생각을 끊어 다시수행에 전념하는 것이다.
禪수행을 통ㅎ해 모든생각을 끊고 생각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몇 십년동안 신문, 방송,잡지, 책 등을 통해 내 머릿속에 입력된 온갖지식, 그리고 그것이 빚여내는 망상을 하루 아침에 없애 몸과 정신을 통해 우리 머릿속의 온갖 잡생각을 사정없이 뚝뚝 잘라내 제자들이 쉽ㄱ고 빠르게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셨다. 온갖 복잡한 생각을 모두 끊어 제자들에게 ‘오직 모르겠다’는 본질적인 마음으로 돌아가게 한다.
한편 화두수행이란 공안 질문을 통해 스승이 던지신 질문, 그 실마리를 붙잡고 계속 參究스행하는 것이다. 먹을 때나 일할 때나 명상수행할 때나 차를 마실 때나 화두를 강하고 맑게잡고 있으면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불교에서는 비구, 비구니들은 스승한테 한 가지 화두를 받아 깨달음을 얻을 때 까지 참구 수행한다. 앉을때나 설 때나 잠을 잘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화두를 잡고있는다. 그런 화두수행을 통해 뭔가 깨달음을 얻으면 스승은 그것을 공안을 사용해 테스트한다.
큰스님은 언젠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있다.
예날사람들의 생각은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다. 잡 생각이 지금사람들보다 별로없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화두하나를 잡으면 수년 수개월동안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때로 아주 깊은산에 들어가 수행하면 생활은 더 단순해져 깨달음을 얻기가 쉬웠다. 그런데 요즈음은 다르다. 자유가 많아진 만큼 선택할 것도 많아졌고 그에따른 지식이나 정보도 많이 필요해졌다. 사는것이 훨씬 복잡해졌다.
서양은 동양보다 더 복잡하다. 더구나 우리 젠센터에서처럼 각자직업을 갖고 수행하는 사람들은 아예머리깎고 산에들어가 살며 스행하는 사람들보다 더많은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복잡하고 바쁜생활을 한다. 가족이 있고 다양한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자유를 사람들에게 주고있지만 생각과 삶은 더 복잡해졌다.미국의 절므은사람들을보아라. 무옷이든지 할 수 있지않은가. 심지어 인간관계에서의 제약도 없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 할 수도있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할 수도있다. 이렇게 할수 있는 일은 많아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정하고 선택해야 할 릴은 더 많아졌다. 따라서 옛날처럼 오직화두하나만 오래들고앉아 있는 수행은 요즘사람들에게 너무어렵다…… 공안인터뷰를 통해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을 탁탁 끊어내야한다.
그래서 숭산 큰스님 절에서는 자주 공안인터뷰 수행이 벌어진다. 주말을 이용한 3일 특별수련 때는 매일, 여름과 겨울철의 3개월 특별수련(보통 안거러고 한다.) 때는 한사람당 일주일에 세 번씩 지도법사들과 공안인터뷰를 한다. 나의 첫번째 공안인터뷰는 1990년 1월경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숭산스ㅡ님의 제자인 무등스님과 이루어졌다. 그는 재미교포였던 한국인이었다.
저녁예불을 마치고 그와 마주앉았다. 나는 그에게 먼저 절을 했다. 온화한 미소를 띤 그는 나에게 먼저 “질문이 있어요?”하고 물었다. 나는 겸연적게 웃으면서 “너무많아 무엇부터 여쭤야 할지 모르겠읍니다.”하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온갖 궁금증으로 머리가 터질지경이었다. 무든스님은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드리우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내가먼저 묻겠어요. 당신은 하버드 대학원에 다니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니 어떤질문이든 대답할 수 있겠지요. 우선 아주쉬운 질문하나를 하겠읍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고 했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중국의 조주선사에게 한 제자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읍니까? 하고 물었읍니다. 그러자 조주선사께서는 ‘없다’라고 잘라 말씀하셨읍니다. 자, 이제 제가 묻겠읍니다.(그러면서 그는 왼쪽팔에 차고있던 시계를 풀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시계는 불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나는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당혹스러웠다. 할말을 잃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오갔지만 무슨말을 던져야 할지 판단이 서질않았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자 잠시후 그는 활짝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하버드에 다니는 수재인데 대답을 못하는군요. 아이들도 답할 수 있는 질문인데 말이에요. 당신의 머릿속엔 쓸데없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군요. 하하하.”
그이 방을 물러나와 다시 선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참선수해을 계속했다. 그때는 1월 한겨울이었는데도 내 몸에선 식은땀이 흘렀고 심장은 쿵쿵거렸다. 내가 그렇게 왜소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런 가단한 질문에 대답을 못하다니……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이 질문이 뭘 의미하는지조차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생전 태어나서 그런 질문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나에게 한번도 그런유의 질문을 한 사람도 없었다. 부끄러움과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참선수행과 공안수행에 대해 강한호기심이 일었다.
불성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나는 정ㅁ말 내 본성을 찾고 싶었다. 지식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있는 경험으로말이다. 지금 이 길에서 과연 누가나를 도와줄 수 있는가. 누가 나의 길을 대산할 수 있는가. 나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진한 외로움 뒤에 순전히 혼자 이 진리의 길을 가야 한다는 굳은 신념이 일었다. 나를 찾으리라. 반드시 찾으리라…….

나의 마지막 스승

내가 숭산 큰스님을 비로서 개인적으로 만난것은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2월경이었다. 그때 큰스님은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프라비던스 젠센터 ‘홍법원’에 계셨다. 당시 홍ㅂ법원에는 90일간의 동안거가 진행되고 잇었는데 큰스님께서는 전세계를 무대로 강의와 법문을 하시다 잠시 잠간씩 짬을내서 안거 때마다 프리비던스 젠센터에 오셔서 안거 수행자들에게 법문과 공안인터뷰를 하곤 하셨다.
케임브리지 젠센터의 도반들은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짐을 꾸려 프라비던스로 갔다. 홍법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주말도 아닌 평일 저녁시간이었는데 무려 5백명이나 모여 있었다. 인근 부리운대학, 차로 두 시간 반이나 떨어진 예일대학, 역시 차로 한 시간이나 떨어진 보스턴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은 물론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샐러리맨들, 주부등까지 모여 있었다.
그날 숭산 큰스님의 법문은 사전에 별 예고도 없었다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며 케임브리지 지도법사들의 놀란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로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드디어 큰스님니 선방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두 달 전 하버드대학 대강의실에서 멀리서 처음 뵌 이후 비로서 가까이서 뵙게 된 것이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큰스님 얼굴을 보았다. 온화한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큰스님은 선방안에 아름다운 공명을 만들면서 법문을 시작했다.

오랜옛날 세상은 단순했읍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복잡해졌읍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사람 때문이에요. 사람이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만 해도 지구상 총인구는 20억에 불과했읍니다. 인류가 이 지구상에 살기시작한 이래 수백만 년이 지났건만 그전까지만 해도 인구 성장은 그렇게 급격하지 않았읍니다. 고작 많아야 20억정도에서 왔다갔다했지요. 그런데 지금 (1990)은 무려 50억에 달합니다. 제 2차대전이 끝난 지 50여 년밖에 안 지났는데그동안 무려 30억 인구가 늘어난 것입니다.제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는 아주 복잡해졌읍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지고 삶이 복잡해졌읍니다. 그러다보니 고통의 종류도 많아지고 정도도 깊어졌읍니다. 이 모든것은 이 지구상의 인구가 너무많은데서 온 것입니다.
뭔가 신비하고 내 가슴에 탕 전율이 올 말을 기대했건만 큰스님은 난데없이 인구이야기를 꺼내셨다. 호기심이 일긴 했지만 별로 신기할 것은 없었다. 그저 당연한 말씀 아닌가.

정작본론은 그 다음부터였다.

왜 인구가 이렇게 갑자기 늘어났을까? 그리고 세상은 왜 이렇게 갑자기 복잡해졋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고기를 즐겨먹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고기를 별로 잘 먹지 않았읍니다. 심지어 아시아 사람들은 1년 가야 한두 번, 끽해야 명절같은 날ㄹ 겨우고기구경을 했지요. 하지만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기를 먹습니다. 서양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구요.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영혼, 즉 정신의 에너지ㅣ가 있읍니다. 그리고 이것은 몸이 죽는다고 함께 죽는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이 세계에서 수십만 수백만 동물이 인간의 먹이로, 혹은 놀잇감이나 장신구용으로 한꺼번에 죽어갑니다. 동물의 몸이 죽으면 그 순간 동물의 의식은 몸에서 떨어집니다. 이 세상의 인과관계는 황상 명확합니다. 이 죽는 동물들에서 0.00001퍼센트가 사람이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적은 숫자가아닙니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론이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에너지가 다른형태로 바뀌는 물리학입니다.
여러분들 뉴욕이나 보스턴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이 동물의 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읍니다. 그들의 마음속엔 인간과 동물의 의식이 섞여있읍니다. 동물들은 오직 자기들만의 종족번식을 위해 싸우며 다른종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폭력이 생겨나고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부모와 스승을 죽이고 많은 나라의 독재자들이 군대를 동원해 국민들을 죽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요즘 이런상황은 더 심각해졌읍니다. 오로지 돈을위해서 친구와 부모를 죽이고 동물을 죽이고 바다를 죽이고 지구를 오엽시킵니다. 여러분 자신을 들여다 보십시요 원래우리마음은 순수하고 맑습니다. 조금욕심이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지배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동물은 욕심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지구는 통제불가능한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읍니다. 우리는 우리 본래의 의식과 마음의 씨인 이 본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나라 아느민족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나 종교 그 자체로는 이 세상을 도울 수 없습니다. 지식인들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노력하면 뭔가 겉모습을 약간 변형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합니다.
쉽고도 재미있는 그러면서도 한ㅁ마디 한마디 버릴것이 없는 말씀이었다. 나는 큰감동을 받았다.
큰스님늬 말씀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자연스럽게 여기저기 둘러앉아 녹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마침뉴욕대학에서 온 학생들과 얘기했는데 그들 역시 큰스님 말씀에 진ㄴ한 감명을 받은 듯 했다. 그들은 본래 큰스님을 뉴욕대학에 초청하는 문제를 사의하러 왔는데 큰스님의 일정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참석자 중에는 예일대학법대를 다니는 학생도 있었는데 그의말이 아주 인상적이였다.
그는 법대에 들어가자마자 희망에 부풀었섰다고 했다. 법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찼었다고 한다. 그러나 곧 자신의 이상이 헛된 것이었음을 느꼈다고 했다. 법은 단지 비지니스일 뿐 사회를 변화시키자못하며, 법을 바꾼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겉의 변화일 뿐 이 세계를 궁극적으로 바꿀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예를들어 미국은 남아프리카보다 더 훌륭한 법체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폭력지수, 교도소 죄수들의 비율은 남아프리카보다 훨씬 더 높다. 사회를 법으로 바끄겠다는 생각,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헛된 것임을 깨달을즈음 숭산 큰스님을 만났다고 한다. 중여한 것은 바깥이 아니라 안, 우리의 마음이라는 큰스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고 수행에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 미국의 건강한 인텔리들을 만났다는 사실에 무척 고무되었다. 늘 겉과 속이 다른, 생활과 말이 다른사람들만 보며 실망 했는데 그날 밤 그곳에서 만난사람들은 달랐다. 자신이 처한 곳에서 열심히, 순수하고 겸손하게 ‘빛’을 찾고 있었으며 숭산 큰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덧 어둠이 짙게 깔렸을 즈음 한 미국인 스님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 3게월씩 집중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안거라고도 합니다. 특히 한국의 ‘신원사’라는 절에서 하는 겨울안거 프로그램은 집중수행을 하고 싶은 여러분에게 아주좋을 것 같읍니다. 관심있는 사람은 신청하면 참여할 수 있읍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신청서를 썼다. 이번겨울은 놓쳤고 내년겨울 프로그램이었다. 당시나는 대학원 1학년 신학기였는데 공부를 잠시 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좋다 내년 1년은 휴학을 하자. 공부보다도 진리를 찾는것이 더 급하다.

Wednesday, January 25, 2012

만행 하버드 신학대학입학

만행 하버드 신학대학원 입학

19989년 9월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 나는 하버드에서 비교종교학에 관한 논문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독교적 신념을 갖고 살다가 진리를 찾는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방황을 거친 끝에 불교를 만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물교는 나에게 공부를 해보고 싶은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직 인연이 안 닿아서 나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우선 책으로 먼저 불교를 공부 해야만 했다.
겉으로는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학문을 하겠다고 내세웠지만 실제 나의 관심은 불교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내 안에서 조차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수십 년 동안 내 안에서 길러온 신념을 버린다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에머슨 등을 통해 신에대한 일종의 부담은 덜었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전보다 더 고통스러워졌다.
연인과 막상 헤어졌을 때 마음속에서는 약간의 해방감마져 느끼지만 결국은 가슴을 칼로 저며내는 듯한 이별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 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회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밀씀을 쫓아 마침내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끝이아니라 사작이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뭔가를 더 버려야 했다. 해방된 노예처럼 자유로웠지만 그만큼의 다른 뭔가를 대신 지불해야 했다.
그때까지 나의 모든 철학적 사색, 진리에 대한 탐구는 오로지 책을 통해서였다. 진정한 스승을 아직 만나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수녀님, 신부님, 수도사님들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분들의 가르침에는 어떤 한계가 느껴졌다. 한 단계 더 높은 도약을 원하는 나에게 그분들의 말씀은 성이차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기생각, 자기믿음, 자기스승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진리를 찾아 방황하다가 어느순간,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갈라진 땅의 거대한 벼랑끝에 내가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오룻이 혼자서 오직 혼자서 힘으로 이 거대한 틈새를 건너 뛰어야 한다는 사실앞에서 두렵고 당혹스러웠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은 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뿐 아니라 철학이나 종교를 폭넓게 공부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대부분 학생들은 절반밖에 안된다. 나머지 절반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거나 무신론자들이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은 전세계의 종교와 인종이 함께 만나는 지구촌 대학원이다. 많은 학생들이 나처럼 교과서나 교수님들의 가르침 이외에 영적인 수행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입학한 첫날부터 대학원 분위기가 열려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랬던것은 학교내에 좋은 불교강좌들이 개설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생활은 무척 재미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에머슨, 쇼펜하우어에 대해 같이 공부할 수 있었고 무슨 책이든 읽고 교수님과 얘기할 수 있었다. 또 불교를 비롯한 동양철학도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마침 학교안에는 노자사상 공부가 유행이었는데 특히 노자의 《도덕경》은 너도나도 읽는 베스트 셀러였다.피어싱 안 하고 《도덕경》 안보면 요새 젊은이가 아니라는 우스겟소리가 있을 정도로 당시 하버드에는 노자열풍이 불었었다.
나 역시 노자와 장자의 저작을 스터디까지 해가며 열심히 읽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무위자연’ 無爲自然.
나는 그런개념을 처음 들었다. 그것은 여태껏 내가 생각하고 살아온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배운개념속에서의 삶이란 오직 뭔가를 하는 것, 뭔가 얻으려면 뭔가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위자연은 삶에서 마무것도 만들려 하거나 가지려 하지 말라고 했다.
장자의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숲에 나무 두 구루가 서 있었다. 한 나무는 아주 오래돼 밑둥부터 썩은 나무였고 다른 나무는 아주 훌륭한 나무였다. 그 나무는 늘 옆의 늙고 못생긴 나무를 업신여겼다. 죽는 날만 기다리는 아무쓸모없는 나무라고 놀려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이 나무를 하려홨다.
숲을 둘러보던 남뭇꾼은 대번에 훌륭한 나무 한 그루를 알아보고 도끼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 나무는 고통에 못이겨 문물을 흘리면서 옆의 나무에게 이렇게 물었다.
“넌 어떻게 칼이나 도끼에 상하거나 찍혀 베어지지 않고 그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니?”
그러자 늙은 나무가 말했다.
“나는 못생기고 늙어서 그들에게 소용없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살아남는 거야.”
카아, 이런 역설이 어디 있는 가. 살려면 주고 얻으려면 버려라.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개설된 노자 장자 강죄에는 학생들이넘쳐났다. 어떤학생은 책에서 그치치않고 삶에서 노장사상을 구현하려고까지 했다. 학교를 버리고, 여지친구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무위자연의 삶을 산다며 산으로 들어갔다. 수염과 머리칼도 그대로 기르고 옷도 안 갈아입고 심지어 목욕도 잘 하지 않았다.
그들의 용기가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그런방식은 뭔가 나하고는 어울리지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노자가 말한 자유란 ‘몸의 자유가 아니라 ‘마음의 자유’ 아닌가. 흔히 ‘무위’라 하면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상에 올라가 눈 감고 책상다리로 앉아있는 것으로 생각 하지만 진정한 무위란 그런게 아닌 것 같았다.
1995년〈현암사〉에서 펴낸 《도덕경》풀이에[보면 편역자인 오강남교수가 ‘무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붙였다.
무위란 물론 ‘행위가 없음’Non-action이다. 그러나 가만히 읹아서 무위도식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아니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이에ㅔ서 발견되는 인위적행위, 과장된행위, 계산된 행위, 쓰데없는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어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위, 그런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 無爲之爲 즉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이런 행동방식, 이런 마음가짐, 아런 초월적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 하는일은 참된 일이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만큼 자유인인가?
그렇다, 나는 얼마만큼 자유인인가? 어떻게 나는 ‘무위’의 경지를 얻을 것인가? 어쨋든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하버드의 인기강좌
하버드 대학원의 첫 학기 때 마사토시 나가토미 교수로부터 불교강의를 들었다. 그는 하버드에서 아주 존경받는 불교학자였다. 그는 20년도안 하버드에서 불교를 가르쳤고 많은 제자들이 미국전역으로 흩어져 유명한 불교학자와 작가로 성장했다.
미국 불교 연ㄱ구에 큰 영향을 끼친 미사토시 교수의 강의는 하버드에서도 아주 유명해 매강좌마다 수강생으로 붐볐다. 심지어 하버드 법대와 경영대학원 학생들까지 그의 강의를 듣기위해 몰려들었다. 인근 보스턴 지역에있는 MIT, 보스턴 대학교 학생들도 와서 청강을하고 교환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가 개설한 제목은 ‘불교의 자연과’이었다. 마사토시 교수는 아주 스마트하면서도 다정다감했고 수업은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늘 앞자리에 앉아 그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럴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는 느낌아었다.당시 하버드에서 가장 인기를 꿀었던 강좌가 인터냇 강좌와 함께 불교 강좌였을 정도로 불교열풍이 대단했던 시기였다. 거의 한 달에 한번씩은 전세계 훌륭한 고승들, 학자들이 와서 강의를 했다. 티벳의 달라이 라마는 단골인기 강사였고 인도, 스리랑카, 팁벳, 일본의 큰스님, 학자들이 초청되어 왔다.
이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마사토시 교수의 강의는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는 본래 인도 티벳 불교를 전공했는데 일본불교도 함께 강의했다. 한국 불교강의는 없었다. 나는 그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내가 아주 열심히하고 진지했기 때문에 교수님역시 나에게 많은 관신을 가져주었다. 나는 강의시간은 물론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그의 연구실로 찾아가 여러가지 질문을 하곤 했다. 교수님은 아주 너그럽고 친절했다. 당신이 아는 모든 지식이며 책을 나에게 전해주고 싶어하셨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책을 빌려주지않는 교수로 유명했는데 나에게만큼은 무슨 책이든 다 가져다 보라고 했을 전도였다.
나는 미사토시 교수를 통해 禪불교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달마대사, 조주, 마조, 임제, 육조, 혜능 등 중국 선불교와 위대한 선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1989년 가을, 교수님이 책을 한 권 추천해 주셨다.《육조단경》이라는 책이었다.교수님은 그 책이 ‘선에 관한 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소개하셨다.
나는 점점 선불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책에나와 있는것은 단지 말일 뿐이고, 이곳은 중국도 아니니 절이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불성을 얻기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그냥아무산이나 들어가서 무조건 다리를 꼬고앉아 참선을 하면 되나? 스승이 필요하다. 나를 가르쳐줄 스승은 어디에 있는가. 심지어 나는 이렇게 까지 생각했다. 왜 하필 미국땅에 태어나 이 고생을 하는가.
12억 인구의 중국인들은 나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다.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장자, 노자, 혜능에 이르기까지 중국 성인들의 책은 나에게 너무나 가깝게 다가왔지만 그건 단지 책이었다. 책 속에 있는 활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살아있는 스승이 필요했다.
물론 내 옆에는 마사토시 교수가 있었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스승이었지만 단지 학자였다. 처음 한동안은 그를 선사처럼 존경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는 교수님이 나에게 지식은 줄 수 있으나 근원적인 나의 곰민은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아의 생각을 교수님역시 잘알고 계셨기에 내가 뭔가 여쭙고 답을 기다리면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폴, 나는 단지 교수에 불과해, 그 이상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단다” 혹은 “네가 방금한 그런질문은 오직 너의 스승만이 대답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라고 하셨다.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마치 마라톤 경기에 나가 죽을힘을 다해 뛰어 이제 마침내 저 멀리 종착점이 보이는데 더이상 뛰지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같은 낭패감이 들엇다. 그동안 하버드에 초청되어온 수많은 승려들의 강의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면담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나와 인연이 닿는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기대를하고 찾아가보면 그냥학교에서 만나는 학자나 종교인 분위기만 느껴질뿐 성에 차지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마사토시 교수로부터 숭산스님의 강의를 들어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나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캠퍼스 몇 곳에서 포스터도 흘긋 본 기억이났지만 그냥 지나쳤었다. 또 한 사람의 그저그런 승려 아니면 불교학자려니 생각했다.
나는 당시 희망이라곤 없었다. 무엇에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물론 그날, 내 인생의 축을 바꾸었던 1989년 12월의 그날, 마사토시 교수가 나에게 숭산 큰스님의 강의에 꼭 오라고 하시면서 ‘살아있는 生佛’이라고 극찬하데 대해 약간호기심이 통하긴 했다. 여태껏 수 많은 불교승려들이 학교에 왔다 갔지만 교수님께서 생불이라고 칭한 사람은 달라이 라마를 빼고 숭산스님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날아침, 리포트를 내려 교수님 방에 찾아갔을 때,교수님은 한국의 숭산스님 이야기를 하면서 책꽂이를 한참 두지셨다. 그러더니 문고판처럼 아주얇은 책을 애게 건네셨다.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Dropping Ashes on the Buddha, (여시아문 출판사에서 최근 《부처님께 재를 떨면》의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라는 희한한 제목의 책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 책은 선불교책 중에서도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나는 ㅅㅁ드렁하게 그책을 받아들고 잠깐 뒤적인 뒤 가방에 넣고 교수님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날 숭산스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숭산스님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나는 미친 듯이 그 책부터 꺼내 펴들었다.
아! 그때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교수나 승려로부터도 이런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불교책의 99.99퍼센트는 불교, 마음, 법문, 의식, 본성품, 불성, 空 등에 대해 ‘그것들은 이러절한 것’이라고 설명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책은 방금 내가 듣고 온 그이 강의처럼 질문과 대답을 통해, 심지어 어떤 질문에 대해 또 다른 질문을 통해 되물음으로서 명쾌한 답변을 애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마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기존의 불교 승려나 학자들은 남들이 마음에 대한 정의부터 읊기 시작한다. ‘금강경에 따름면 마음은 어떤어떤어떤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미음을 이러이러하게 설명한다’ 고 또 ‘설명’하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단어와 말, 이론, 아이디어를 사용해서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숭산스님은 ‘말이 없는 것’을 설명하려들지 않았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책 말고는 처음 접하는 방식이었다.
숭산스님은 학생들의 질문마다 그의 경험을 섞어서 학생들이 갖고있는 생각으로부터 해답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답이란 질문자의 고통과 어려움을 깨끗하게 해결하는 데 맞닿아 있었다.
‘아 이것이 바로 한국 불교인가.’
나는 그날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Sunday, January 22, 2012

만 행 관세움보살을 만나다.

만행 관세음보살을 만나다.

1989년 봄, 피리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미 하버드 대학원 입학 허가서를 받아놓은 새태였기 때문에 준비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학비를 벌어야 했다.
나는 뉴욕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예일 대학이라는 졸업장 때문에 좋은 직장에 쉽게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이상 부모님에게 더이상 손을 벌릴 수 없었고 대학원 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하는 직장생활은 힘들었짐만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뉴욕 생활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의 근본적 방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밤이되면 허무감을 견딜 수 없어 매일 밤 술을 마셨다.
당시 나는 불교를 오로지 책을 통해서만 접했다. 그 당시 불교는 내게 지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개념적으로는, 머릿속으로는 불교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겉으로 보여지는 내 삶은 그럴듯했다. 미국의 내로라 하는 할리우드 스탇들과 대기업 경영진이 주고객인 법률사뮤소에서 돈도 꽤나 많이 벌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았고 미음속으로는 고민이 쌓여갔다. 견딜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달려갔다. 무릎을 꿇고 몇 시간 동안이나 간절히 가도를 올렸다.
‘주여, 제가 가야할 길을 일러주십시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길은 잠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내 마찬가지였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더이상 아무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간절히 기도를 올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쓸데없는 짓’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기도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러한 사실이 나를 더욱더 절망에 빠지게 했다..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매일 밤 나는 집에가서 일기를 썼다. 밤을 새워 대학노트에 몇 페이지씩 끄적거렸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내 맘대로 하지 못하겠다.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더이상 쓸모없는 일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에머슨, 쇼펜하우어 모두, 신은 우리가 만든 것이며 우리 마음이 신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신이 넚다면 나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데카르트는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길을 걸으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사람을 만나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받았던 모든 교육, 내가 했던 모든 경험들이 마야흐로 한 가지 생각에 모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누구……인가. 누구인가..’…
절망의 바다를 걷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아주 귀한 경험을 하게된다. 돌이켜 생각하면 할수록 그날은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중요한 날이다.
ㅍ쳥소 사무실에서 친하게 지내던 변호시 돈이 나를 파티에 초대했다. 자기친구들이 나를보고 싶어한다며 일이 끝나면 함께 가자고 했다. 그와 나는 무척 친하게 지냈는데 아마 자기친구들에게 내 얘기를 많이 한 듯 했다. 우리는 그날 일을 마치고 파티가 열리는 카페로 가기전에 몇몇친구들과 먼저만나 포켓볼을 쳤다. 나는 포켇볼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게임이 끝나고 우리는 테이불로 옮겨 술을 마셨다. 내 주위 모든사람들은 아주 즐거운 표정들이넜다. 나 역시 겉으로는 즐거운 척했지만 마음속은 허전하고 외로웠고 절망적이었다. 옆에 읹아있던 돈이 내 표정을 읽었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거야? 힘내.”
잠시후 으리는 파틱가 열리는 뉴욕시내의 나주 유명한 술집으로 옮겼다. 택시를 타고가ㅏ는 사이에도 내 맘은 너무 허전했다. 창밖으로 연인인 듯한 남녀가 팔짱을끼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지나가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처럼ㅁ 보였다. 아주 무서운 악몽을 꾸고있는 것 같았다. 사는것이 아무의미가 없었고 모든 것이 헛되었다.
보고 먹고즐길거리가 많은 뉴욕의 한복판에서 하버드, 프린스턴, 버클리 등 명문대학을 아온 동 많은 수재들과 함께 거의 매일 밤을 이렇게 놀고 마시지만 삶이란 그런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내 친구들의 삶이란 무엇인가. 사회와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그들은 사회의 최상층부 진입을 가다리는 대기자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삶은 무었인가. 오늘은 술집, 내일은 당구장, 카페, 디스코텍, 그들이 관심을 갖는것은 좋은배우자, 좋은차, 좋은집, 좋은직장…….온통 그런것들뿐이었다. 아무도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나역시 마찬가지였다. 속으로는 수행자의 삶을 꿈꾼다고 하면서도 나를 꼬드기는 세상의 유혹에 쉽사리 넘어갔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른다.결국 그런삶은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삶이 아닌가. 평생 쳇바퀴를 돌 듯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둥물원 우리란 무었인가? 내가만든 것 이닌가. 그래놓고 빠져나올 수 없더고?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갇힌 삶을 즐기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택시에서 내려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걸었다. 걸으면서도 계속 아런생각을 했다.
‘이런 삶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게 뭐지? 모든사람들이 마치 꿈속에서 살고있는 것같이, 뉴욕시의 마천루 같은 꿈,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가. 꿈꾸는 사람은 결코 서로를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어, 모든사람들은 각자가 자기들만의 꿈을갖고 그 세계에 갇혀있는 것 아니가. 어떤사람은 변호사의 꿈, 어떤사람은 은행원의 꿈, 어떤사람은 좋은 여자친구를 갖고 싶다는 꿈, 어떤사람은 훌륭한 아버지의 꿈, 그러면 내 꿈은? 종교를 갖지 않은 철학자가 되겠다는 꿈? 더이상 책은 필요없어. 뭔가 행동이 필요해.’
마침내 술집에 도착했다. 술집에 들어가자 이미 도착했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반겼다. 자리를 잡고 앉자 아름다운 여자들이 다가와 달콤한 키스세례를 퍼부었다.
돈이 나를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나는 친구들과 악수를 할 때마다 그들의 반응에 놀랐다. 상대방은 내 얼굴을 보고 흠칫놀라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내가 더 놀랐다. 내 깊은 마음속을 들키지나 않았나 부끄럽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나 역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날 밤, 내 마음은 검정 숯검댕이가 얹힌 듯 답답했다. 여러사람들이 나에게 말을걸어왔지만 마무것도 흥미롭지 않았다.
어느덧 나는 혼자가되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히려 그게 편했다. 그때였다. 아차! 이리기장을 당구장에 놓고 온 것이다. 그즈음 나는 일기장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순간순간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감정을 나한테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일기장에는 지난 몇 달동안의 나의 모든것이 담겨 있었다.
친구들ㅇ[ 얘기했던; 그곳으로 전화해서 내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짐만 나는 서둘러 술집을 나와 당구장으로 향했다. 일기장도 일기장이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어서 빨리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뉴욕의 아름다운 밤거리를 걸으면서도 허무감에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믿었던 하느님은 그러면 환상이었나.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가. 이모든 고통을 나혼자 고스란히 헤쳐가야 하는가.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나는 이제 다음단계로 나아가야 함을 알았다. 그러나 방향을 모르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하버드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철학책을 파고드는 건 더이상 도움이 안 돼. 쇼펜하우어도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아 !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갑자기 일기장을 찾는즉시 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나의 모든 생각이 적혀있는 일기장이란 나의 고통스런 삶을 대변하는 상징물아닌가…… .오히려 그것을 쓰고 읽을 때마다 고통이 더하는 것 아닌가. 일기장은 쓰레기에 불과해. 그래. 일기장을 찾는 즉시 버리자.
당구장은 브루크린 다리근처에 있었다. 브루클린 다리는 맨허튼에서 브루클린을 잇는 이스트 강에 서 있는 다리로서 뉴욕에서 아주 아름다운 다리다. 나는일기장을 이스트강에 던지기로 작정했다.
일기장을 버리면 마치 나의 고통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뒤를 이어 많은 생각들이 자나갔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나는 그때 환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시 소크라테스를 읽고 있었는데 그가말한 영혼의 불멸설에 관해 심취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지금 이생은 많은 인생시리즈 중 한 막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생은 단지 전생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생에서 내생의 환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강물에 몸을 던져 환생을 경험해 볼수도 있지않을까. 어쩌면 이 끝없는 심연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지도 몰라. 그래, 그들이 말하는 것을 내 행동으로 경험해보자.’
그런깊은 생각에 잠겨 길을걷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옆에다가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야, 너 돈 좀 있냐?”
웬 뚱뚱한 흑인 거지가 계단에 낮아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주 누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재수없이 걸렸다는 생각을하고 눈살을 찌푸렸는데 잠시후 느의 환한 미소와 눈동자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의 눈동자가 너무 맑았던 것이다. 그 뚱뚱한 흑인거지 주변에는 친구들인 듯한 홈리스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더러운 머리칼, 제멋대로 자란수염, 각종오물로 뒤덮여 있는듯한 악취, 그들은 큰 양주병을 돌려가며 마시고 있었다. 뚱뚱한 흑인은 그 한가은데 앉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에게서 풍겨나온 분위기가 아주 따뜻하고 여유로웠다.
“야, 돈 좀 있으면 내놓고 가지 그래?”
본능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페다발이 쥐어졌다.
본래 파티에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최소한 2백에서 3백 달러는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 내 호주머니에는 3백달러라는 큰돈이 있었다.
아무생각없이 그것 모두를 그에게 건넸다.
그 순간 돈이란 나에게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했다. 잠시후면 브루크린다리에 가서 몸을 던질텐데 이 돈이 무슨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내가 지페다발을 건네자 갑자기 그들이 달려와 내 손에서 돈을 낚아채고는 이내 함성을 지르고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 뚱뚱한 흑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미소를 머금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는 터덜터덜 그 옆에 가 앉았다.
누군가 자기들이 먹고있던 양주병을 나에게 건넸다. 한 모금 들이키라는 권유였다. 양주병 주둥아리 주변은 재 같은 게 덕지덕지 붙어 너무더러웠다. 평소같으면 손도대지 않았을 텐데 그날 나는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다.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계속 나에게 미소만 보냈던 뚱뚱한 흑인이 내게 말을 건넸다.
“야, 아름이 뭐야?”
“ 폴. ” “무슨 일 있어? 왜 얼굴이 그 모양이야?”
“사는 게 재미없어.”
그러자 그는 “하 하 하 “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뒤 이렇게 물었다.
“오늘 며칠인지 알아?” “글쎄 3월 29일 , 30일?”
그러자 그는 크게 웃으며 두툼하고 큰 손바닥으로 내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아니야, 오늘은 네 생일이야.”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갑자기 어리둥절한 나는 아렇게 대꾸했다.
“내 생일은 11월 달이야.”
“아니야, 오늘이 바로 네 생일이라니까. 나중에 내가 한 얘기를 떠올리면 이해하게 될 거야.”
나는 한참동안 그의눈을 쳐다보았다. 검고 깊으면서도 따뜻한 눈.
“자, 그러면 내가 생일 축하노래 하나 불러주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잔하면서도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로 흑인 영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주 순수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노래를 부르는 그의 얼굴은 마치 교회에서 성가를 부르는 듯 평온하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순간 가슴속에서 뭔가 벅차고 회망찬 것이 치밀어오르는 느낌아었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그와 함께 앉아있던 거지 친구들이 내가 준 돈으로 술과 안주거리를 사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에 앉아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셨다.
나는 잠시후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밤에는 어디서 자지?”
“지하철, 길거리 모두가 내 잠자리지.”
“뭐 갖고 싶은 것은 없어?”
“하하하, 이 바람 이 공기 모든 게 내것이야. 더 이상 뭐가 필요해, 하하하.”
그의 상쾌하고 환한 웃음이 너무 부러웠다. 내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졌다. 일기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내 아파트로 다시돌아왔다.
다음날, 잠이 깨었을 때 마는 뭔가에 쫓기듯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리고 참선센터 zen Center 의 전화번호를 찾기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해서 난생처음 젠센터를 찾아 본격적으로 참선수행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둔기로 얻어맞은 충격같은 느낌,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 흑인거지야말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내게 손을 내밀어준 관세음보살이었다.

Saturday, January 21, 2012

만행 고뇌의 밤들

萬行 고뇌의 밤들
친구들은 졸업을하고 대학원에 간다, 취직을 한다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공부를 더 할 생각이었다. 우선 쇼펜하우어를 더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나는 졸업식을 마친 후 내 가장 친한 친구 스티브와 함께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스위스 극경과 가까운 불랙 포리스트 프라이부르트에 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어학연수원에 등록해 독일어를 배웠다 중세의 아름다움을 그대고 간직한 프라이부르크는 독일에서도 유명한 교육 도시인데 철학자 하이데거가 살면서 그의 가르침을 편 곳이기도 하다.
나는 하루종일 학교에서 독일인 친구들과 함께 온갖 철학적 이슈들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밤에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면 뭔가 손에서 빠져나간 듯한 허무감이 들었다. 비록 그렇게 많은 시간을 진지하게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부제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건만 가슴에는 허무감이 밀려왔다.
그러던 나는 다시 ‘불교를 만났다. 철학과 학생 엔츠라는 친구와 아주 친해졌는데, 그는 그 대학 불교동아리 회장이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은 독일의 명문학교다. 그런데 그 학교의 학생들은 불교에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기위해 일본이나 태국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일부는 일본, 태국, 스리랑카 등지의 절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엔츠는 그들의 리더격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엔츠의 아파트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엔츠의 방에는 큰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가 가부좌를 틀고앉아 명상에 잠긴 모슴이었는데 벽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을 정도로 아주 큰 것이었다. 엔츠는 얘기를 할 때나 차를 마실 때나 항상 그 사진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는 그자리를 ‘엔츠의 자리’ 라고 불렀다. 그의 자리에는 넓고 큰 방석이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참선할 때 앉는 방석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참선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엔츠는 불상 사진 앞에 항상 향을 피워 놓았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 깊이 심취해 있었는데 한 때 스리랑카 절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티벳과 스리랑카의 승려들을 동아리 세미나에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했다. 그의 왼쪽 팔에는 인도에서 산 듯한 염주가 항상 끼워져 있었다.
엔츠의 아버지는 종교개혁을 주창했던 루터교의 목사이자 그 대학교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행동에 대해 한번도 꾸짖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주 사이가 좋아 나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엔츠를 통해 불교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속해잇는 불교동아리는 그 대학에서 머리가 좋고 진지한 생각을 하는 친구의 모임이었다. 다들 공부도 잘했고 삶의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햇다. 마는 엔츠의 권유로 대학 구내서점에가서 참선에관한 독일책을 샀는데 신기하게도 그것은 카톨릭 신부님이 쓰신 책이었다.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핫 교수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참선수행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카토릭 신부님이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버금가는 위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불교라는 게 무엇이길래 저들이 저렇게 심취해 있나. 신부님까지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참선수행을 추천하다니…….’
차츰차츰 진리에 다가가고 있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갈수록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아득함을 느꼈던 시절이었다. 그 안개가 걷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년간 독일 생활을 끝내고 파리로 갔다. 마침 대학 친구들 몇몇이 파리 아파트를 빌려놓았으니 놀러오라고 초청한 것이다. 나는 파리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며 1년여를 보냈다. 그곳에서 음악방송 dj에서부터 모델, 대학생, 지식인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재미있던 것은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참선과 요가에 심취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파리생활이 값졌던 것은 그곳에서 철학자 에머슨을 만난 것이었다. 어느 날, 친구의 아파트에 놀러갔다가 에머슨 수상집을 발견하곤 집어들었다.
위대한 철학자 에머슨은 미국의 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 철학운동의 주창자였다. 에머슨은 원래 보스텅의 유명한 교회 복사였다. 보스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귀 미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또 뛰어나 수필가이기도 했다. 대학교에서 나는 에머슨을 접하긴 했지만 그때는 그의 가르침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파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는 그가 새롭게 보였다. 에머슨이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초청돼 축사를 하게 되었다. 그가 그날 한 연설은 나중에 ‘신학대학원 축사’ Divinity School Address라는 고유명사로까지 명명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신이 아니다. 단지 우리 인간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자신 각자가 갖고 있는 본성, 진리, 지혜다. 인간들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어, 즉 우리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대상으로 만들어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지만, 그는 단지 인간이다. 나와 여러분들처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것은 당시 교단에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에머슨은 그날 연설 이후로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출입이 금지되었을 정도엿다. 그러나 그 이후 에머슨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초월주의 운동을 이끄는 주창자가 되었다. 그는 1800년대에 미국과 유럽 사회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미국 철학의 기초자라고 할 수있다. 결국 에머슨은 생애 말엽 하버드에서 가장 존경받는 철학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하버드 철학관 홀은 ‘에머슨 홀’로 명명되기에 이른다.
에머슨은 ‘진리란 우리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자기속에 진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바깥에있는 어떤 것이 아닌 내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그림자……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이라는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초월주의의 기초다.
나는 출가한 오늘날까지도 쇼펜하우어와 에머슨을 탐독한다. 나중에 일있는데 에머슨이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도 쇼펜하우어였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무릎을 쳤다.
“진정한 사람, 진정한 철학, 진정한 제도, 진리는 바로 마음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파리에서 에머슨의 책을 읽으며 나는 감동을 받았다. 에머슨은 미국인의 목소리로 참다운 사상을 얘기한, 내가 만난 첫 미국인 이었다.
나는 학원, 지하철, 버스, 카페 등 어디가든 그의 책을 끼도 다녔다. 쇼펜하우워 이후 더 이상 높은 경지를 발견할 수 없다고 믿었는데 나는 그디어 미국인의 목소리를 통해 그것을 찾은 것이다. 그건 너무나 감동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느 더욱 나를 놀라게 한 에머슨이 유명한 에세이를 읽게 되었느데 다름아닌 〈초월주의란 무엇인가〉였다. 그는 초월주의란 “다름아닌 자기자신을 발견해 믿는것”이라고 말했다.그리고 모든 순간에 모든 경험에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이닌가!
“예를 들면 불교신자들이 초월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문장을 읽는순간 너무 놀라 의지에서 나자빠질뻔 했다.
다시, 또다시, 이 불교라는 말과 마주쳤다. 도대체 이 불교라는게 뭐야? 아니 에머슨 조차도 불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다니…….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수도사나 신부가 되겠다는 어릴 적부터 항상 갖고 있었던 열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파리에 있을때 아주 유명한 여러 카톨릭 수도원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나를 받아들여 달라고 불어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들은 흔쾌히 오라고 했다. 그리고 특별 수련 시간표도 보내줬다. 그러나 정작 그들로부터 답장을 받았을 때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과연 수도사들의 수련에 참여한다 해도 무엇을 할 것인가. 하루종일 예배와 기도, 그게 전부이지 않을까?
그 동안에도 나는 계속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점점 그 복음의 의미를 바꿔가기 시작했다. 더이상 신에게 진리를 찾아달라고 기도할 수 없었다. 예수님에게 더 이상 지혜를 가져다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예배나 기도같은 종교적인 활동도 잘 할 수 없게 되었다.그것들은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지만 쇼펜하우어, 에머슨, 키르케고르는 나에게 예수님의 진리를 내 속에서 찾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수많은 번뇌의 밤을 보낸 끝에 수도사행을 포기했다.

Friday, November 11, 2011

4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알고 싶을 뿐

그럭저럭 평온한 나날이 지속됏지만 내 마음속 의문들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카톨릭 사립학교로 전학오고 성당 복사직을 맡게 되면서 종교적 신심은 더욱 강해졌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종교에대한 의문들이 함께 커갔다. 패트릭 형과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내가 새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면서 성당도 열심히 다니고 하자 자연히 종교적인 주제가 화제가 되엇고, 나는 형에게 앞으로 크면 신부가 되겠다는 얘길 자주 했다. 형 역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좋은 신부가 되라고 하면서 교회 역사에 대한 재미잇는 얘길 많이 들려주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중세 카톨릭 교회의 횡포에 대해 흥미가 갔다.

십자군 전쟁을 하고 사람을 죽인 암흑의 중세 한가운데 교회가 있었다.나중에 카톨릭 신부들은 돈을 내면 죄까지 면제해준다며 사람들을 현혹했다. 스페인을 포함한 전유럽에는 신의 이름으로 서슬 푸른 종교재판이 자행되었다. 개종을 강요하는 것은 물론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람을 생으로 불에 태워 죽이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 인디언들에게는 백인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며 동물 취급을 했고 남미 같은 곳에는 선교사라는 이름을 내걸고 종교인들을 보내 그곳 문화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는 일도 했다.” (독자 여러분들 중에 로보트 드 니로 주연의 〈미션〉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형은 이런 내용을 담은 중세 교회사에 대한 책을 나에게 빌려주곤 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하버드 대학 교수님들 같은 지식인들이 쓴 책이었다. 형은 또 현대사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종교인들의 소극성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특히 나치 통치 기간 동안 카톨릭 교회가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진정한 종교인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나는 형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떻게 남에게 자기가 믿는 종교만 옳다며 이를 믿으라고 강요할 수 잇을까.

당시 우리집 길 건너 바로 앞에는 아주 아름다운 교회가 하나 있었다. 건물도 웅장한 데다 그곳에서는 항상 아름다운 성가가 울려퍼졌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들은 그 교회에 가지 않고 오히려 차를 타고 10분쯤은 가야 하는 먼 성당에 다니셨다. 나는 그게 의문이었다. 왜 가까운 교회를 놔두고 먼 곳을 다니는 걸까.

어느날 집 앞에서 야구를 하다 야구공이 그 교회 담장을 넘는 바람에 그곳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똑같은 성경책, 똑같은 십자가, 그런데 그곳 목사님이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이상했다. 괜히 뭔가 꺼리시는 얼굴이었다. 왜 그럴까.

어느 날 어머니께 여쭈었다.

엄마, 왜 우리는 저 교회에 가질 않나요?”

앞에서도 얘기 했지만 나의 어머니는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분인데다 끊임없이 공부하시고 모든 일에 관심이 많은 지식인이었다. 그런 어머니도 나의 질문에는 마치 내가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시는 거였다.

안 돼, 안 돼, 그 교회는 가면 안 돼. 그 교회는 우리가 다니는 성당과는 다르단다.”

나에게는 논리적으로 납득이 잘 안 되는 대답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교회는 개신교 교회엿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든 카톨릭이든 똑같은 스승(예수님)을 믿고 똑같은 성경으로 똑같은 가르침을 받고 똑같이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에서 똑같은 예수님 십자가 밑에서 똑같은 노래를 부르는데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회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는데 진리란 것이 어떤 때는 맞고 어떤 때는 틀리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는가. 어떤 상황과 어떤 조건에서도 흠이 없는 완벽한 결정체여야 하지 않는가.

또한 성당 복사직으로 일하면서 나는 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미사 때는 사람들 앞에 서서 진행을 도왔는데 그것은 자리에 앉아 미사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앞에서 보니 사람들의 표정이 별로 진지하지 않았고, 말로는 신을 사랑한닥고 하면서 주일마다 신의 축제에 참여하게 되어서 감사하다고 했지만 정작 얼굴 표정은 즐겁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마지못해 성당에 오는 것처럼 보였고 표정은 무뚝뚝했으며 마치 뭔가 쫓기는 사람들 처럼 미사 내내 사계를 들여다 보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신부님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날은 미사 시작 전에 가끔 오르간 연주자에게 성가가 너무 길면 바쁜 일요일에 할 일이 많은 신도들이 싫어하고 지루해하니까 되도록 짧은 성가를 연주하라 주문 하기도 했다.

미사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시는 기쁨의 축제인데 왜 사람들은 그것을 의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일까. 어린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이런 의문들은 드디어 학교생활에까지 이어졌다.

6학년 어느 날 채풀 시간이었다. 당시 채풀을 담당했 한 수녀님이 계셨는데 나는 그수녀님에게 당돌한 질문을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지금 그 수녀님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주제는 예수님의 사랑에 관한 것이였다.

예수님은 사랑이다. 성당은 예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성당에 들어가는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 들어가는 것처럼 경건해야 한다.”

이윽고 강의가 끝날 무렵 수녀님은 우리에게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망설이다 손을 들었다. 지금까지 마음속에 묻어왔던 의문들을 풀고 싶었다. 수녀님은 사랑스러운 눈길을 내게 보냈다. 나는 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 수녀님께 여쭈었다.

수녀님, 예수님이 사랑이라면 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는 건가요?”

순간 수녀님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잠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더니 점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셧다. 나는 너무 무서워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내 질문을 한 것을 후회했다.

수녀님은 마침내 이렇게 소리치셨다.

어떻게 감히 어린 네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느냐. 당장 자리에 앉아라.”

그녀는 마치 사탄이라도 만났다는 듯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뭔가 대단한 잘못을 저질러 수녀님을 화나게 했다는 생각 때문에 놀라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정말 궁금해서 겨우 용기를 내어 여쭤본 것이었는데, 울고 싶을 정도였다. 수녀님은 어린 나에게 모욕을 당하셨다고 느끼셨는지 더이상 말씀을 잇지 못하시더니 수업이 채 끝나기도전에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교실 안은 아이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찼다. 친구들은 모든 게 내 잘못이라도 되는 듯 나를 탓하는 눈빛으로 저회들끼리 소곤댔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수녀님이 다시들어와 수업을 진행하셨다. 아무일도 없었던 듯 시간은 흘러갔지만 나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 때문에 수업시간 내내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패트릭 형에게 학교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회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잖아.

나는 진리를 찾기 위해 궁금한 것을 여쭈어 보았을 뿐인데 수녀님은 왜 그렇게 화를 내셨을까?” 패트릭 형은 살며시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처다보더니 아리송한 말을 던졌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그리고 형은 혼자말처럼 이렇게 말했는데 는 그 말이 잠자리에들어서도 잊혀지지 않았다.

아마 그 수녀님 같은 분들은 진리를 찾고 싶어하는 너 같은 학생을 두려워할걸…….”

나는 수녀님께 대든게 결코 아니었다. 정말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신의 사랑과 믿음에는 한치의 의혹도 없엇지만 정말 신의 사랑과 믿음을 내 몸에 체화해 큰 믿음으로 만들고 싶엇다. 그런데 수녀님의 반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니야 내가 틀린 게 아니야,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결연함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셨어

며칠 뒤 다시 그 수녀님의 채풀 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수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현실과 가르침을 꿰맞추려고 노력했다. 나름대로 합리화를 해가면서 가르침을 새기려 노력했던 것이다. 그날 강의 요지는 하나님과 어린이였다. 수녀님은 하나님은 모든 어린이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느님을 믿으면 천당으로 갈 것이며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것이다라는 말로 말씀을 맺으셨다.

나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또 손을 들었고, 순간 수녀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수녀님, 하느님께서 우리 어린이들을 사랑하신다면 왜 어떤 친구들은 태어날 때부터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지요? 또 어떤 친구는 아예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을 안고 태어나기도 하잖아요? 제 큰누나는 산부인과 간호사인데 매일 평균 대여섯 명 정도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식사시간에 병원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주곤 합니다. 그런데 어떤날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지느러미처럼 서로 어서 태어나는 아이, 어떤 날은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한 아이, 심지어 어떤아이는 머리가 열려서 태어나는 경우도 있대요. 팔다리가 없거나 엉뚱한 데 붙어 있거나 하는 경우는 예사고요, 누나는 그런 얘기를 전하면서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립니다. 도대체 그런 아이들에게 베푸는 신의 사랑이란 어떤 종류의 사랑입니까?”

수녀님의 얼굴은 흙비치 되었고,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꽉 깨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이번에는 당당하게 수녀님의 눈길을 받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교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이윽고 터짙 수녀님의 목소리.

미스터 뮌젠, 나가, 나는 너 같은 나쁜 생각을 가진 어린이한테는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그러니 당장 나가.”

그리하여 나는 교실 밖으로 나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벽에 코를 처벅고 서 있어야 했다. 마침 다른 수업 때문에 교실을 옮기느라 옆으로 지나가던 동급생들이 , 폴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저러고 서 있냐?” “아니, 재는 그 유명한 뮌젠네 아이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하며 수근대는 바람에 창피했지만 꾹 참았다.

수업이 끝나자 수녀님이 나에게 다가오셨다. 너무 화가 복받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당혹스런 눈빛이었다. 눈에는 빨갛게 핏발이 곤두섰고 그렁그렁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앞으로 모든 일은 네가 하기 나름이다. 계속 내 수업을 듣고 싶으면 건방지게 굴지 말아라. 너는 내 수업을 방해할 자격이 없어.”

나 역시 지지 않았다.

수녀님, 저는 정말 제가 궁금한 것을 여쭈었을 따름입니다.”

그러자 수녀님은 더이상 나와 대화하기가 싫다 는 듯 나는 너의 질문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라며 획 돌아 걸어가셨다.

그날 방과 후 나는 교장 선생님 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일이 생각보다 커지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분명 부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갈텐데 이를 어쩌나. 이 학교로 전학와 처음 들어가 보는 교장실 육중한 문을 살며시 열자 했빛이 들어오는 창 위로 큰 액자가 눈에 들어 왔다. “나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내 속의 나에게 이렇게 밀했다.

그래 겁낼 것 없어. 나는 다만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이윽고 교장 선생님이 손짓해 가까이 다가앉았다. 교장 선생님도 수녀님이었는데 아주 엄한 분이어서 우리는 그녀를 아주 무서워했다.

네가 수업시간에 한 행동을 모두 들었다. 나는 네가 어디서 그런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수업시간에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너 스스로를 잘 통제해야한다. 너는 네가 가진 생각을 다른 사름들 앞에서 함부로 얘기해선 안 된다. 선생님 말씀을 믿고 잘 따라야 해.”

적어도 교장 선생님만큼은 나를 조금이라도 이해해주실 줄 알았는데 교장 선생님 방을 나오면서 나는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 일을 겪은 후 나는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물론 여전히 모범생이엇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가르침은 나의 생각을 아주 넓고 깊게 햇지만 어떤 가르침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활짝 피려는 꽃잎을 옆에서 힘으로 막아 피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한 것은 절대 아니였다. 나는 내 마음속 의문들이 종교적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할 것이라 확싱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진정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있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나는 어느 형제보다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 평일에도 혼자 성당에 가 기도를 하고 올 정도였다. 그리고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정말 존경했다. 언젠가 신부나 수도사가 되겠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뭔가 석연치 않은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생각은 점점 나를 크게변화시켜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