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행 큰스님이 미국 속으로
큰스님이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간 해는 1972년이었다. 나이 마흔 여섯 살 때 일이다. 당시 큰스님은 한국 근대사의 큰 스승 경허스님의 맥을 잊는 고봉 대선사으로부터 1949년 법을 전해받은 뒤 조계종 청담 종정스님과 함께 조계종단을 이끌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그는 한국의 유명한 선승이었다.
그러나 큰스님은 그 모든 명예와 지위를 다 버리고 서양인들에게 불법을 전하기 위해 훌쩍 미국으로 간 것이다. 큰스님은 미국에 도착해 로드아일랜드 프라비던스에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 이웃들은 대부분 가난한 흑인들이었다. 작은 불상, 목탁, 죽비, 향 만을 들고 미국으로 간 큰스님은 아파트에 작은 법당을 꾸미고 혼자서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하고 참선수련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존경받는 스님이었다. 그를위해 요리도해주고 빨래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는 그러나 미국에선 철저히 혼자였다. 게다가 영어도 전혀 못했다. 미국 가서 고생할 거라며 신도들이 주는 보시도 마다하고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미국에서 스님이 첫번째로 한 일은 세탁소의 세탁기계 수리공, 큰스님은 본래 기계에 관한 한 전문가다. 아침예불과 참선이 끝나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세탁소로 출근해 저녁 늦게까지 고장난 세탁기계들을 수리하고 청소를 하고 온갖 잡일을 했다. 고된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 저녁밥을 짓고, 저녁예불을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안락하고 편안한 한국에서 추앙받는 큰스님의 지위를 훌훌 다 벗어 던지고 미국에서 맨바닥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은 서양인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고 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세탁소에 빨랫감을 맡기러 들어왔다가 허름한 차림의 머리깎은 한국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난히 맑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잡아당긴 것이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한국의 숭산스님 아니십니까?”
그는 근처 부라운 대학에서 동양문명사를 가르치는 리오 프르덴(Leo Pruden) 교수였다. 불교문화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그동안 숭산스님을 사진에서만 뵙고도 대뜸 알아본 것이었다.
작은 키에 삭발한 머리, 기름때 묻은 작업복, 가슴에는 ,미스터 리’(Mr. Lee)라는 명찰뿐이었지만, 프르덴 교수는 그가 숭산스님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르덴 교수의 놀라움에 큰스님은 “잉글리쉬 노노”(저 영어 못해요.)만 연방하셨다고 한다. 프루덴 교수는 큰스님 말씀을 알아듣고 일본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본말이라면 큰스님도 유창했기 때문에 드디어 두사람간에 말문이 트였다.
“제가 한국에서 온 숭산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이런 차림으로 일하고 계십니까? 스님ㅇ에 관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 알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불교를 좀 알려주고 싶어 2년 전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들에게 불교를 알려주려면 우선 그들의 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곳에서 일하면서 많은 미국인들을 접하려 한 것이지요. 말은 젼혀 안 통해도 눈빛과 태도만 보아도 되니까요.”
큰스님은 단순히 생계유지를 위해 세탁소에서 일을한 게 아니었다 미국인들의 의식과 문화를 알기위해 수행을 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제스처하는지 빠짐없이 관찰해 그들 의식의 본질과 속성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갖고있는 뷸성이란 서로 다른얼굴, 서로다른 외모, 서로다른 표현방식, 서로다른 문화속에서도 하나라는 것을 큰스님은 굳게 믿었던 것이다.
프루덴 교수는 너무 감동했다. 이어 곧 자신의 제자들을 큰스님께 소개했다. 큰스님 이야기를 전해들은 학생들은 너도나도 큰스님의 아파트로 찾아가 가르침을 듣기 원했다. 큰스님은 항상 큰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고 손수 된장찌개와 칼국수, 김치를 만들어 대접했다. 재미있게도 그들의 만남은 프루덴 교수의 통역으로 일본어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큰스님이 왜 굳이 세탁소에서 일을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때마다 큰스님은 “불교의 진정한 실천은 나를 죽이는 下心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이 하심의 실천은 달라이라마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세계에서 추앙받는 영적 지도자이지만 대통령을 만날 때나, 길거리에서 거지를 만날 때도 표정과 모습이 한결같다.)
그렇게 2년여가 흘렀다. 믾은 힉생들이 큰스님과 함께 정례적인 예불과 강연을 원했으며 예일 대학 졸업생 두 명이 승려가 됨으로서 비로서 큰스님의 제자들이 탄생했다. 바야흐로 한국 선불교가 미국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큰스님과 한 나이 든 제자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려 한다.
이 일화는 서양, 특히 미국인들이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그들의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일화다.그리고 큰스님의 가르침 스타일이 얼마나 폭넓고 유연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느날처럼 큰스님은 법당으로 들어 오셔서 높은 연단에 앉으셨다. 막 법문을 시작할 무렵, 큰스님은 한 나이 많은 지도법사가 나이어린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지도법사는 큰스님의 오랜 제자 중 한 분으로 관음선종 패밀리안에서도 나이가 많은 축에 드는 분이었다.
“아니, 법사님, 왜 그렇게 뒤에 앉아 계세요? 이리 앞으로 나와 앉으세요.”
큰스님의 제안에 선뜻 자리를 옮기리라 생각되었던 그는 의외로 고집을 피웠다.
“큰스님, 저는 이 자리가 좋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같이 앉아야 그들과 어울리지요, 언제나 앞줄에 앉아 있으면 저는 그 사람들 얼굴을 보기가 힘듭니다.”
“하하하, 당신은 존경받는 지도법사입니다. 여기 보세요, 다른 지도법사님들은 모두 앞에 앉아 계시잖아요. 이게 우리 전통입니다.” 그러자 대뜸 지도법사님의 입에서 항의성 언사가 튀어나왔다.
“큰스님, 그건 그저 오래된 낡은 전통입니다. 그리고 그건 큰스님이 세우신 전통이지 우리의 본래전통은 아니지 않습니까.”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과연 큰스님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다들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세운 전통이 아닙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앞에 앉고 젊은 사람들이 뒤에앉아야 젊은 사람들이 앞에 앉은 스승들을 보고 ‘아 나도 열심히 수행해서 앞에가 앉아야지’ 할 것 아닙니까. 하하하.”
큰스님의 웃음소리덕택에 냉랭했던 법당 분위기가 이내 누구러졌다. 큰스님 말씀이 이어졌다.
“이건 우리가 가르침을 받기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에요, 알겠어요?”
“큰스님은 형식에 집착하고 계시군요.”
“그러고 보니 무리 법사님은 무형식에 집착하고 계시군요.”
두 분의 질문과 대답으로 법당 분위기는 다시 싸늘해졌다. 법당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충 이쯤에서 지도법사님이 고집을 꺾으시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법사님은 막무가내였다.
“큰스님께서 강조하는 전통은 그저 오래된 한국 스타일에 불과합니다 그건 미국 스타일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먼저 온 사람이 앞자리에 앉습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에 걸맞는 수행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스님은 손을 훼훼 내저으셨다.
“이건 한국도, 불교 전통도 아닙니다. 그저 자연법칙입니다. 숲에 한번 가보세요. 큰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지요? 큰나무는 키가 커서 했빛도 잘 받고 빗물도 잘받습니다. 뿌리도 크고 단단합니다. 하지만 어린 나무들은 이 큰 나무들에 가려 햇빛도 별로 못 받고 비도 흠뻑 못 맞읍니다. 뿌리는 작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오랜시간이 흐르면 이 어린 나무들이 점점 자랍니다. 열심히 살려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더 강해지지요. 노력하지 않는 나무들은 자랄 수 없습니다. 이건 자연법칙입니다. 동양 전통도, 한국 전통도, 불교 전통도 아닙니다. 알겠읍니까?”
그제서야 법사님 입에서 “예”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머리숙여 깊이 절한 뒤 큰스님 말씀대로 앞줄에 가 앉았다.
큰스님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법문을 시작하셨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일화다.
불교를 처음 접한 미국인들은 이처럼 모든일에 의문을 갖고 도전을 한다.
‘이것을 여쭈어보면 큰스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실까’ 하는 거리낌이 없다. 그렇다고해서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니까 무조건 따라해라’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뭘 몰라서 그렇다고 따지거나 꾸짖을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환자에게 약을 먹이겠다고 나선 의사가 먼저 환자를 이해하고 포옹하고 설득해야 한다.
큰스님은 우리 서양인들의 의식구조를 꿰뚫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처방을 내린다. 이것이 바로 서양인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중요한 이유다.
큰스님은 우리와 다른나라에 태어났고 나이도 많지만 우리의 생각을 너무도 잘 안다. 어떤 때는 정작 우리보다 더 잘 우리 마음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나이를 넘어, 국적을 넘어, 성을 넘어, 종교를 넘어 큰스님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훌륭한 의사다.
또 한 편의 일화는 숭산스님의 초능력에 대한 것이다. 큰스님의 말씀을 빌려 소개하겠다.
어느 날 뉴헤이븐 젠센터에 다니는 학생 한 사람이 큰스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선사님께서는 초능력을 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가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사가 있다면 위대한 사람로 칭송받을 것입니다. 마음의 병뿐 아니라 육체의 병도 고친다고 말이지요. 왜 선사님께서는 예수님처럼 눈먼사람의 눈을 뜨게 한다든지 앉은뱅이를 서게 한다든지 미친사람을 제정신이 돌아오게 한다든지 물 위를 걷게 한다든지 하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십니까? 혹은 기적을 행하시기위해 노력하시지는 않나요? 만약 선사님께서 그런 이적을 행하셨다는 소문이 퍼지면 선사님의 가르침이나 불교에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될 텐데요.”
큰스님이 이렇게 답하셨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스승들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적은 단지 어떤 ‘기술’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스승이 기적을 통해 사람을 설득시키려 한다면 사람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기적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신도들은 바른길을 배우려하지않고 쉽게가는 길만을 배우려 하지요. 의사가 아픈환자에게 병을 고쳐줄 약을 준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에게 또 다른 병을 준다면 그 의사를 명의라고 하겠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어떤 선사가 물위를 걷는 것을 보고 아! 나도 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선에 입문한다면 실제 참선수행에 들어가서는 선수행이 아주 어렵고 지루하고 심지어 기적을 행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선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그만둘 것입니다.
훌륭한 선사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아니라 사람들의 업을 바로아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세세생생 만들어 놓은 업을 녹이려면 오직 우리 자신이 그것을 원할 때만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의 병을 치료할 많은 명약들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을 우리 입에 직접넣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눈먼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뭔가 쉽고 빠른길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기병을 고치기위해 자기가 노력하는 것이아니라 남이 해주길 바랍니다. 그건 마치 아이를 기르는 엄마의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모든 것을 해준다면 아이는 엄엄마에 모든 것을 의존할 것입니다. 훌륭한 엄마는 ‘아이가 혼자하는 법’을 가르치는 엄마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라서 강해지고 독립적이 됩니다.
여기에 자기자신을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칩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릅니다. 심지어 그가 세수를 하고 발을 씻은 물을 영험하다고해서 약으로 마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말 그들의 병이 그 물을 마시고 나았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그병을 고치신 것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는 마음이 그들의 병을 고친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믿는 마음이 없으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초능력이란 사람의 나쁜 업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기술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나사렛을 일으켜 세우셨다 하더라도 나사렛의 나쁜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나사렛은 죽습니다.
부처님 살아 생전에 제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아주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느 명상에 잠겼다가 카필라 왕국이 전쟁으로 곧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 달려갑니다.
‘헉헉, 부처님 이주일만 지나면 카필라성에 전쟁이나 폭삭 무너집니다. 알고 계십니가?’
‘물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백성들을 구허려 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할 업이다. 그것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그제자는 부처님께 아주 실망을 했습니다. 아니,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계시다니……. 제자는 초능력을 발휘해 카필라성을 작은 밥그릇에 담아 이른바 도솔촌이라고 하는 천국에 갖다 놓았읍니다.그곳은 아주 평화롭고 고요한 곳이었습니다. 드디어 위험하리라 생각했던 일주일이 아무일 없이 지났습니다. 제자는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나서 다시 밥그릇을 지구 카필라성에 갖다놓았읍니다. 그런데 제자가 밥뚜껑을 열자, 그안에 담아두었던 카필라성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전쟁을 일으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로 이렇습니다. 초능력이란 단지 기술입니다. 여러분들은 카드놀이를 할 때 도사처럼 카드를 감추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술의 하나입니다. 초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 누군가 기적을 행하고 싶다면 그것을 어떻게하는지 배우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눈이 예리한 진정한 스승이라면 초능력을 가르쳐주는것이아니라 제자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제자들이 나쁜 업을 녹여내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없읍니다. 오직 바른 관점 바른 수행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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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March 16, 2012
Thursday, March 15, 2012
만행 숭산 큰스님
만행 숭산 큰스님
숭산 행원 큰스님은 1927년 평양남도 순천에서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건축가였다. 넓은 과수원을 소유하고 있어서 마을에서는 손꼽히는 부자였다. 큰스님은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특히 과학과 엔지니어링 분야에 재주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는 일본 식민지 상태였던 데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총력전으로 매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민에 대한 통치와 억압정책도 한층 강화되고 있었다. 대부분 학교 선생님들은 일본인 이였고 모든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일본 어린이들은 한국 어린이들보다 모든면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1944년 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한다. 거기서 일본군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하여 단파 라디오를 만드는 놀라운 솜씨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기를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마침내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집에서 돈 5백 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주 국경선 지대를 물샐 틈 없이 감시하던 순찰대에게 들키고 말아 성공하지 못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해방을 맞았다.
큰스님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와서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당시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찬반도의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연합군이 점령하게 되어 남한과 북한사이의 모든 의사소통과 왕래가 어렵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6ㆍ25로 분단이 영구화되면서 큰스님도 북한에 계시던 부모님과 연락이 두절되어 다시는 부모님을 뵐 수 없게 되었다.
대학시절은 그에게 격변과 방황의 시기였으며, 한편으로는 그의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그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했던 시기였다.
소년시절 그는 일본에 저항하는 활동에 동참했었다. 당시에는 대항해야 할 적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후에는 모든상황이 불분명하고 유동적으로 변했다. 남한의 공산주의 당원들은 학생들을 선동하여 당시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려고 시도하였으며, 남북한 모두를 공산주의 체제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결국 남북한은 갈등이 격화되어 동족간에 6ㆍ25라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큰스님은 이 같은 격동의 현장을 지나오면서 정치적인 활동이나 학문적인 연구가 조국을 위하는 길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고민이 생길 때마다 책을 파고들었지만 어디에도 해답은 없었다. 마침 그때 친구 한 사람이 《금강경》한 권을 선물해주었다. 큰스님은 그 책을 읽다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것은 곧 지나가는 것이다. 만일 지니가는 모든것들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면 그때 진정한 당신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게 되었다. 이 구절을 읽는순간 큰스님은 마음으로부터 모든혼란과 갈등을 씻어낼 방도를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불교경전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리고 스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간다. 큰스님은 1948년 10월 마곡사라는 절에서 계를 받았다. 오직 필요한 것은 수행뿐이라는 생각에 가득찼던 큰스님은 계를 받은지 10일 뒤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이라는 곳에서 1백 일동안의 은둔 수련을 하였다. 그는 하루에 20시간 동안 “신묘장구 대다리니”를 암송하고 식사로는 솔잎가루만 먹으며 지냈다.
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까지, 새벽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하루 두 차례에 걸쳐 두시간씩 모두 네 시간만 자면서 혹독하게 수행했다. 때로는 얼음물에 알몸으로 들어가 몇 시간씩 견디면서 배고품과 잠의 유혹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런데 곧 의심과 번민이 엄습해왔다.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가? 왜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는가? 지금이라도 조용한 마을의 작은 절로 내려가서 일본승려들처럼 결혼도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짐을 쌋다 풀었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일은 떠나야지, 내일은 떠나야지,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이내 머리가 맑아져 그는 다시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행 50일이 지났을 때 그의 몸은 매우 약해져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매일 밤 무서운 환상이 나타났다. 호랑이와 악마들이 그의 앞에 서서 울부짖고, 귀신들이 나타나 그를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켜댔다. 매일 밤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렸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다. 무처님이 경을 가르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곤 하였다. 80일이 끝나갈 무렵 스님은 몸과 마음이 이전보다 더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살갗도 솔잎처럼 파랗게 변했다.
드디어 마지막 1백일이 되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두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자신의 음성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깨달았다. 바위, 강,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고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무위로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圓覺山下非今路
배낭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背囊行客非古人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濯濯履聲貫古今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可可鳥聲飛上樹,
그 후 선사는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선사를 만났다. 고봉선사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 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다. 숭산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선사로부터 점검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다. 고봉선사 앞으로 간 숭산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하면서 목탁을 디밀었다. 이물음에 고봉선사는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다.
“어떻게 참선을 해야 합니까?”
고봉선사가 말하였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기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숭산스님은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 될지를 몰라 “모릅니다”라고 했다.
고봉선사는 “모르면 의심 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수행법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해 봅과 여름동안에 숭산스님은 행선(行禪, 각처로 돌아다니며 선을 닦는 일)을 하였다. 가을이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100일간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스님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승산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다. 다음날 밤에는 법당 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다. 누군가 왔따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 하는 소문이 쫙 퍼졌다.
셋째 날에 그는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 밖에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선사의 방 앞 댓돌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웠다. 결국 그는 붙잡히게 되었다.
다음날 그느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았다.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스님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비구니들은 그르 미워 했지만) 스님은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맨 처음으로 그는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다.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비구니 큰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했느데,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숭산스님을 꾸짖었다. 그때 숭산스님은 웃으며 “이 세상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라고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선사였다. 숭산스님은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다.
“스님, 제가 어잿밤에 삼세제불(과거 ㆍ현재 ㆍ 미래에 나타나는 모든 부처)를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선사는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선사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 보았다. 그런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다.
숭산스님이 말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선사가 웃으며 “아하!”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없이 술술 답하였다. 드디어 춘성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스님은 고봉선사를 찾아 길을 떠났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선사를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숭산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채 고봉선사의 절을 찾아갔다. 그가 고봉선사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다.
“제가 어제 저녘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냐?”하고 고봉선사가 말했다.
숭산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주십시요.”
이 말에 고봉선사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선사의 손을 치우고 장판위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이게 스님이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선사가 빙긋이 웃고 말했다.
“나쁘진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다만 몇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선사는 1천7백가지 공안중 어려운 것을 골라물었는데, 숭산스님은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다. 이를 본 고봉선사가 말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그였다. 얼굴이 벌게져서 또 다른 “如如한” 답을 말했다. 고봉선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참다못한 숭산스님은 화가났고 또 실망했다.
“춘성 ㆍ 금봉 ㆍ 금오 선사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하라.”
50여분간 고봉선사와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했다. 그때 감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卽如’의 답인 것이었다.
고봉선사는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1949년 1월 25일, 숭산스님은 고봉선사로부터 법을 전수받아 이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고봉선사가 주었던 최초의 傳法아었다.
전법식이 끝나고 고봉선사는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백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당시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큰스님은 이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왜곡시켜놓은 한국의 불교전통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조계종의 총무원 부장을 지내면서 조계종의 개혁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러는 중에도 모교인 동국대학교에 창설된 선 명상센터에서 참선을 지도했다. 그리고 비구니들이 정진하고있는 보문사를 비롯하여 서울에 있는 다섯개의 절에서 참선지도자로 초빙되었다.
1966년, 큰스님은 일본에 건너간다. 그곳에서 불교와 종교의 해악에대한 북한의 선전에 의하여 끊임없이 현혹되며 정신적 안내자 없이 생활하고있는 재일교포에게 종교적인 구심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위하여 동경에 절을 건립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1972년, 일본에서의 포교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판단될 즈음, 미국에서 참선에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더군다나 자유로운 정신적 토양위에서 히피들도 많이 생기고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미국이야말로 참선불교를 뿌리내릴 수 있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홀홀 단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숭산 행원 큰스님은 1927년 평양남도 순천에서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건축가였다. 넓은 과수원을 소유하고 있어서 마을에서는 손꼽히는 부자였다. 큰스님은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특히 과학과 엔지니어링 분야에 재주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는 일본 식민지 상태였던 데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총력전으로 매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민에 대한 통치와 억압정책도 한층 강화되고 있었다. 대부분 학교 선생님들은 일본인 이였고 모든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일본 어린이들은 한국 어린이들보다 모든면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1944년 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한다. 거기서 일본군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하여 단파 라디오를 만드는 놀라운 솜씨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기를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마침내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집에서 돈 5백 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주 국경선 지대를 물샐 틈 없이 감시하던 순찰대에게 들키고 말아 성공하지 못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해방을 맞았다.
큰스님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와서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당시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찬반도의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연합군이 점령하게 되어 남한과 북한사이의 모든 의사소통과 왕래가 어렵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6ㆍ25로 분단이 영구화되면서 큰스님도 북한에 계시던 부모님과 연락이 두절되어 다시는 부모님을 뵐 수 없게 되었다.
대학시절은 그에게 격변과 방황의 시기였으며, 한편으로는 그의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그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했던 시기였다.
소년시절 그는 일본에 저항하는 활동에 동참했었다. 당시에는 대항해야 할 적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후에는 모든상황이 불분명하고 유동적으로 변했다. 남한의 공산주의 당원들은 학생들을 선동하여 당시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려고 시도하였으며, 남북한 모두를 공산주의 체제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결국 남북한은 갈등이 격화되어 동족간에 6ㆍ25라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큰스님은 이 같은 격동의 현장을 지나오면서 정치적인 활동이나 학문적인 연구가 조국을 위하는 길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고민이 생길 때마다 책을 파고들었지만 어디에도 해답은 없었다. 마침 그때 친구 한 사람이 《금강경》한 권을 선물해주었다. 큰스님은 그 책을 읽다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것은 곧 지나가는 것이다. 만일 지니가는 모든것들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면 그때 진정한 당신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게 되었다. 이 구절을 읽는순간 큰스님은 마음으로부터 모든혼란과 갈등을 씻어낼 방도를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불교경전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리고 스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간다. 큰스님은 1948년 10월 마곡사라는 절에서 계를 받았다. 오직 필요한 것은 수행뿐이라는 생각에 가득찼던 큰스님은 계를 받은지 10일 뒤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이라는 곳에서 1백 일동안의 은둔 수련을 하였다. 그는 하루에 20시간 동안 “신묘장구 대다리니”를 암송하고 식사로는 솔잎가루만 먹으며 지냈다.
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까지, 새벽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하루 두 차례에 걸쳐 두시간씩 모두 네 시간만 자면서 혹독하게 수행했다. 때로는 얼음물에 알몸으로 들어가 몇 시간씩 견디면서 배고품과 잠의 유혹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런데 곧 의심과 번민이 엄습해왔다.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가? 왜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는가? 지금이라도 조용한 마을의 작은 절로 내려가서 일본승려들처럼 결혼도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짐을 쌋다 풀었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일은 떠나야지, 내일은 떠나야지,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이내 머리가 맑아져 그는 다시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행 50일이 지났을 때 그의 몸은 매우 약해져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매일 밤 무서운 환상이 나타났다. 호랑이와 악마들이 그의 앞에 서서 울부짖고, 귀신들이 나타나 그를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켜댔다. 매일 밤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렸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다. 무처님이 경을 가르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곤 하였다. 80일이 끝나갈 무렵 스님은 몸과 마음이 이전보다 더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살갗도 솔잎처럼 파랗게 변했다.
드디어 마지막 1백일이 되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두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자신의 음성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깨달았다. 바위, 강,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고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무위로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圓覺山下非今路
배낭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背囊行客非古人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濯濯履聲貫古今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可可鳥聲飛上樹,
그 후 선사는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선사를 만났다. 고봉선사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 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다. 숭산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선사로부터 점검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다. 고봉선사 앞으로 간 숭산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하면서 목탁을 디밀었다. 이물음에 고봉선사는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다.
“어떻게 참선을 해야 합니까?”
고봉선사가 말하였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기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숭산스님은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 될지를 몰라 “모릅니다”라고 했다.
고봉선사는 “모르면 의심 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수행법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해 봅과 여름동안에 숭산스님은 행선(行禪, 각처로 돌아다니며 선을 닦는 일)을 하였다. 가을이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100일간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스님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승산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다. 다음날 밤에는 법당 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다. 누군가 왔따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 하는 소문이 쫙 퍼졌다.
셋째 날에 그는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 밖에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선사의 방 앞 댓돌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웠다. 결국 그는 붙잡히게 되었다.
다음날 그느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았다.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스님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비구니들은 그르 미워 했지만) 스님은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맨 처음으로 그는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다.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비구니 큰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했느데,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숭산스님을 꾸짖었다. 그때 숭산스님은 웃으며 “이 세상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라고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선사였다. 숭산스님은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다.
“스님, 제가 어잿밤에 삼세제불(과거 ㆍ현재 ㆍ 미래에 나타나는 모든 부처)를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선사는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선사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 보았다. 그런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다.
숭산스님이 말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선사가 웃으며 “아하!”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없이 술술 답하였다. 드디어 춘성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스님은 고봉선사를 찾아 길을 떠났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선사를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숭산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채 고봉선사의 절을 찾아갔다. 그가 고봉선사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다.
“제가 어제 저녘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냐?”하고 고봉선사가 말했다.
숭산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주십시요.”
이 말에 고봉선사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선사의 손을 치우고 장판위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이게 스님이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선사가 빙긋이 웃고 말했다.
“나쁘진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다만 몇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선사는 1천7백가지 공안중 어려운 것을 골라물었는데, 숭산스님은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다. 이를 본 고봉선사가 말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그였다. 얼굴이 벌게져서 또 다른 “如如한” 답을 말했다. 고봉선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참다못한 숭산스님은 화가났고 또 실망했다.
“춘성 ㆍ 금봉 ㆍ 금오 선사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하라.”
50여분간 고봉선사와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했다. 그때 감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卽如’의 답인 것이었다.
고봉선사는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1949년 1월 25일, 숭산스님은 고봉선사로부터 법을 전수받아 이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고봉선사가 주었던 최초의 傳法아었다.
전법식이 끝나고 고봉선사는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백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당시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큰스님은 이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왜곡시켜놓은 한국의 불교전통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조계종의 총무원 부장을 지내면서 조계종의 개혁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러는 중에도 모교인 동국대학교에 창설된 선 명상센터에서 참선을 지도했다. 그리고 비구니들이 정진하고있는 보문사를 비롯하여 서울에 있는 다섯개의 절에서 참선지도자로 초빙되었다.
1966년, 큰스님은 일본에 건너간다. 그곳에서 불교와 종교의 해악에대한 북한의 선전에 의하여 끊임없이 현혹되며 정신적 안내자 없이 생활하고있는 재일교포에게 종교적인 구심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위하여 동경에 절을 건립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1972년, 일본에서의 포교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판단될 즈음, 미국에서 참선에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더군다나 자유로운 정신적 토양위에서 히피들도 많이 생기고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미국이야말로 참선불교를 뿌리내릴 수 있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홀홀 단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Tuesday, March 13, 2012
만행 과학적이기 때문에
만행 과학적이기 때문에
불교가 서양인, 특히 지식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한마디로 얘기하라고 하면 ‘과학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금세기의 위대한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불교 교리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었던 사람은 아니였지만 불교야말로 어떤 경지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 종교가 돼야한다. 그동안 종교는 자연세계를 부정해왔다. 모두 절대자가 만든 것이라고만 해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종교는 자연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똑같이 존중한다는 생각에 가반을 두어야한다. 자연세계와 영적인 부분의 통합이야말로 진정한 통합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야말로 이러한 내 생각과 부합한다고 본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현대의 과학적 요구에 상응하는 종교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말하고 싶다.”
불교는 물론 과학은 아니다. 불교는 인간의 동정심, 착한마음 등 인간의 지혜에 대한 가르침에 더 중점을 두지만 그 기본 교리는 과학적 논리성과 정합성에 맥이 닿아있다.
현대인들은 ‘종교는 죽었다’고 말한다.
속도와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인간복제까지 논의되는 마당에 종교는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신과 진리를 숭배하기에는 이 세상에 숭배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가져다 준 인간생활의 흭기적인 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테크롤로지 과학에는 ‘영혼’이 빠져있다.
한번 상상해보자. 이 세계를 모두 과학과 테크놀로지로만 가득채우게 될 때,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워크맨, 노트북 컴퓨터, 게임기, 호출기, 휴대폰으로 무장(?)하고 서울 명동과 신촌, 압구정동, 신사동을 걷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그 안에서, 절저히 자기만의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삶이 이전 부모세대들의 삶보다 발전되고 행복해졌는가? 어쩌면 부모 세대들보다 더 큰 소외와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의 발전으로 우리는 유익한 생활도구를 얻고 보다 편리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채워지지않는 것이있다.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 장 프랑수와 르벨은 “과학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닿는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이 인간의 의문들에대해 해답을 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욱 냉정하게 사고 서로를 더 소외시키고 있는 것 같다.
과학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모든문제를 해결해 줄 도깨비 방망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이미 과학에 대한 맹신이 빚은 뒤틀림 현상은 세계곳곳, 특히 서구사회에서 속속 나타나고 있다.
서구의 역사는 과학발전의 역사다. 좀더 나은거, 좀더 편리한 것, 좀더 빠른 것을 위해 오직 앞으로 나아갔다. 끝도 없는 전진을하다 어느 순간 ‘왜?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앞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선도 악도 아니다. 그리고 과학이 우리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어떤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과학은 그저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이나 숟가락, 혹은 자동차 같은 ‘도구’일 뿐이다.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과학이주는 유익성과 해악성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을 사용하는 ‘우리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한다. 우리가 만일 진정한 우리의 실체를 알 수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때 참된 자유를 얻게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자유를 나와 더불어 살고 있는 다른사람을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해답이 나오는 것이다.
최근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저명한 과학자 한 분이 재미있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는 불교신자가 아니지만 이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교리를 실천에 옮긴다면 현재 이 세계기 당면한 수많은 문제들, 예를 들어 환경파괴, 희귀동물의 멸종, 쓰레기 처리, 폭력문제, 존족간 전쟁, 과잉 인구문제, 묘지 증가에 따른 토지 낭비 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본다. 불교의 인과론, 일체중생이론 등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불교는 과학보다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많이 한다. ‘마음은 무엇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마음과 생각의 실체를 표현하는 단어나 말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오직 수행을 통한 경험으로 찾을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물질의 근원점을 모색해도 실체의 성격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닿아있다. 거기에 인간의 영혼이 불어넣어져 비로소 방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숭산 큰스님이 불교와 과학에 대해 하신 말씀을 적어본다. 이 글은 최근〈물병자리〉출판사에서 변역되어 나온 큰스님의 편지글인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에 수록되어 있다.
어느 날 , 한 제자가 큰스님께 이렇게 물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과학 연구와 참선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군요 과학자들은 영속적이고 반복이 가능하며 의사전달이 가능한 경험을 토대로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을 끊어야 한다고 하시지만 과학자들이 만드는 세계관이란 어차피 개념적일 수밖에 없읍니다. 물리적으로 인과 관계가 뚜렸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고도로 이론적인 세계관과 참선의 관점을 하나로 절충할 수 있습니까?”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과학을 공부하면서 의문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이 우주가 115가지 원소로 생성되였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그 115가지 원소는 어디서 왔을까.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그것은 無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무극이란 끝이없어 텅 빈 상태입니다. 나는 선생님께 다시 여쭈었습니다. 무극을 어떻게 볼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무지개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햇빛은 아무 색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물방울과 접촉해 무지개를 만든다. 만일 1백명의 사람들이 무지개를 보았다면 1벡개의 무지개가 있는 것이요. 아부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무지개는 없는 것이다. 네가 무지개를 보고 있다면 네 앞에 무지개가 있는 것이다.
이어 선생님은 갖가지 색이 배열된 희전판 하나를 가지고 오신 뒤 원판을 돌리셨읍니다. 원판에는 아무 색도 보니지 않았지만 원판이 멈추자 많은 색이 보였읍니다.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입니다.
이 세상 만물도 이와 같읍니다. 모든 것이 공에서 생겨나 공으로 돌아갑니다.
초보수준의 과학자라면 1+2=3 수준에 멈춥니다.’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과학자라면 1+2=0 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바로 이 단계가 색즉시공 공즉시공의 단계이지요.
그러나 좀더 나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1, 2, 3,과 0은 누가 만드는가? 누가 색과 공을 만드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數라든지, 色이라든지, 空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개념입니다. 그리고 개념은 바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이 있기 전엔 너도,나도, 색도, 공도, 없읍니다. 생각이 있기 전에는 모든 것이 眞空속에 있는 그대로 있을 따름입니다. 색은 색이요, 공은 공입니다.
우리의 인식 세계는 컴퓨터와 같습니다. 컴퓨터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식 또한 ‘무언가’가 조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과학이라는 학문체계를 세웠읍니다. 그 ‘무언가’가 우리의 인식을 조종하고 과학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무언가’를 찾는 것이 禪입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1+2=3과 1+2=0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만일 이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면 ‘오직 모르는’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요.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읍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가도 확인하지 마십시요. 억지로 인식하려고 하지도 마십시요.
어떤것도 억지로 만들려 하지말고 올바른 인식과 올바른 과학을 터득해 생사윤희를 뛰어넘어 중생을 번뇌에서 제도하시기 바랍니다.
불교가 서양인, 특히 지식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한마디로 얘기하라고 하면 ‘과학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금세기의 위대한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불교 교리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었던 사람은 아니였지만 불교야말로 어떤 경지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 종교가 돼야한다. 그동안 종교는 자연세계를 부정해왔다. 모두 절대자가 만든 것이라고만 해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종교는 자연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똑같이 존중한다는 생각에 가반을 두어야한다. 자연세계와 영적인 부분의 통합이야말로 진정한 통합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야말로 이러한 내 생각과 부합한다고 본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현대의 과학적 요구에 상응하는 종교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말하고 싶다.”
불교는 물론 과학은 아니다. 불교는 인간의 동정심, 착한마음 등 인간의 지혜에 대한 가르침에 더 중점을 두지만 그 기본 교리는 과학적 논리성과 정합성에 맥이 닿아있다.
현대인들은 ‘종교는 죽었다’고 말한다.
속도와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인간복제까지 논의되는 마당에 종교는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신과 진리를 숭배하기에는 이 세상에 숭배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가져다 준 인간생활의 흭기적인 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테크롤로지 과학에는 ‘영혼’이 빠져있다.
한번 상상해보자. 이 세계를 모두 과학과 테크놀로지로만 가득채우게 될 때,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워크맨, 노트북 컴퓨터, 게임기, 호출기, 휴대폰으로 무장(?)하고 서울 명동과 신촌, 압구정동, 신사동을 걷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그 안에서, 절저히 자기만의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삶이 이전 부모세대들의 삶보다 발전되고 행복해졌는가? 어쩌면 부모 세대들보다 더 큰 소외와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의 발전으로 우리는 유익한 생활도구를 얻고 보다 편리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채워지지않는 것이있다.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 장 프랑수와 르벨은 “과학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닿는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이 인간의 의문들에대해 해답을 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욱 냉정하게 사고 서로를 더 소외시키고 있는 것 같다.
과학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모든문제를 해결해 줄 도깨비 방망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이미 과학에 대한 맹신이 빚은 뒤틀림 현상은 세계곳곳, 특히 서구사회에서 속속 나타나고 있다.
서구의 역사는 과학발전의 역사다. 좀더 나은거, 좀더 편리한 것, 좀더 빠른 것을 위해 오직 앞으로 나아갔다. 끝도 없는 전진을하다 어느 순간 ‘왜?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앞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선도 악도 아니다. 그리고 과학이 우리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어떤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과학은 그저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이나 숟가락, 혹은 자동차 같은 ‘도구’일 뿐이다.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과학이주는 유익성과 해악성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을 사용하는 ‘우리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한다. 우리가 만일 진정한 우리의 실체를 알 수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때 참된 자유를 얻게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자유를 나와 더불어 살고 있는 다른사람을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해답이 나오는 것이다.
최근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저명한 과학자 한 분이 재미있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는 불교신자가 아니지만 이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교리를 실천에 옮긴다면 현재 이 세계기 당면한 수많은 문제들, 예를 들어 환경파괴, 희귀동물의 멸종, 쓰레기 처리, 폭력문제, 존족간 전쟁, 과잉 인구문제, 묘지 증가에 따른 토지 낭비 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본다. 불교의 인과론, 일체중생이론 등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불교는 과학보다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많이 한다. ‘마음은 무엇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마음과 생각의 실체를 표현하는 단어나 말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오직 수행을 통한 경험으로 찾을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물질의 근원점을 모색해도 실체의 성격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닿아있다. 거기에 인간의 영혼이 불어넣어져 비로소 방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숭산 큰스님이 불교와 과학에 대해 하신 말씀을 적어본다. 이 글은 최근〈물병자리〉출판사에서 변역되어 나온 큰스님의 편지글인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에 수록되어 있다.
어느 날 , 한 제자가 큰스님께 이렇게 물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과학 연구와 참선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군요 과학자들은 영속적이고 반복이 가능하며 의사전달이 가능한 경험을 토대로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을 끊어야 한다고 하시지만 과학자들이 만드는 세계관이란 어차피 개념적일 수밖에 없읍니다. 물리적으로 인과 관계가 뚜렸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고도로 이론적인 세계관과 참선의 관점을 하나로 절충할 수 있습니까?”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과학을 공부하면서 의문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이 우주가 115가지 원소로 생성되였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그 115가지 원소는 어디서 왔을까.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그것은 無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무극이란 끝이없어 텅 빈 상태입니다. 나는 선생님께 다시 여쭈었습니다. 무극을 어떻게 볼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무지개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햇빛은 아무 색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물방울과 접촉해 무지개를 만든다. 만일 1백명의 사람들이 무지개를 보았다면 1벡개의 무지개가 있는 것이요. 아부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무지개는 없는 것이다. 네가 무지개를 보고 있다면 네 앞에 무지개가 있는 것이다.
이어 선생님은 갖가지 색이 배열된 희전판 하나를 가지고 오신 뒤 원판을 돌리셨읍니다. 원판에는 아무 색도 보니지 않았지만 원판이 멈추자 많은 색이 보였읍니다.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입니다.
이 세상 만물도 이와 같읍니다. 모든 것이 공에서 생겨나 공으로 돌아갑니다.
초보수준의 과학자라면 1+2=3 수준에 멈춥니다.’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과학자라면 1+2=0 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바로 이 단계가 색즉시공 공즉시공의 단계이지요.
그러나 좀더 나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1, 2, 3,과 0은 누가 만드는가? 누가 색과 공을 만드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數라든지, 色이라든지, 空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개념입니다. 그리고 개념은 바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이 있기 전엔 너도,나도, 색도, 공도, 없읍니다. 생각이 있기 전에는 모든 것이 眞空속에 있는 그대로 있을 따름입니다. 색은 색이요, 공은 공입니다.
우리의 인식 세계는 컴퓨터와 같습니다. 컴퓨터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식 또한 ‘무언가’가 조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과학이라는 학문체계를 세웠읍니다. 그 ‘무언가’가 우리의 인식을 조종하고 과학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무언가’를 찾는 것이 禪입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1+2=3과 1+2=0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만일 이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면 ‘오직 모르는’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요.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읍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가도 확인하지 마십시요. 억지로 인식하려고 하지도 마십시요.
어떤것도 억지로 만들려 하지말고 올바른 인식과 올바른 과학을 터득해 생사윤희를 뛰어넘어 중생을 번뇌에서 제도하시기 바랍니다.
Monday, March 12, 2012
만행 사랑과 자비는 하나
만행 사랑과 자비는 하나
1985년 초 숭산스님은 미국에 있는 한 카톨릭 수도원으로부터 법문과 함께 참선수행을 지도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 수도원은 켄터키주에있는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미국 카톨릭 교단 안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진 곳이다. 아마 천주교 신자분들들은 그 이름을 익히 다 아실 것이다.
겟세마니 수도원은 그 유명한 토마스 머튼수사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토마스 머튼은 미국 지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자서전은 지금까지 필독서로 불릴 정도로 스테디 셀러다.
머튼 수사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사가 되었으며 겟세미니 수도원에서 청춘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다 중년에 접어든 1950년대 초반 장자를 비롯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많은 불교경전을 읽으면서 수도원안에서 혼자 참선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참선에 심취한 머튼 수사는 나중에 불교와 참선에 대한 책을 쓰기까지 했다. 당시 그는 카톨릭 교단에서 아주 존경받는 수도사이자 미국 지식인들 중 영향력 있는 인사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동양사상과 불교에 대한 관심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1950년대는 철학자, 문인 등 미국 지성인들이 본격적으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다. 그전부터 작은 파문을 던지며 미국 지식인 사회에 물결을 만들었던 불교가 비로소 파도처럼 폭발하는 시기라고나 할까.
머튼 수사는 그 파도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분이다. 벌써 그때부터 동양의 선사들은 물론 달라이라마와도 편지 교류를 했다. 수도사들은 평생 수도원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점점 불교와 참선수행에 몰두한 그는 마침내 수도원장님께 동양을 여행해보고 싶다며 몇 년 동안 수도원을 떠나 있겠다고 청한다. 오랜 숙고 끝에 원장은 마침내 허락을 내리고, 그는 생애 처음으로 동양구경을 하게 된다.
그는 먼저 인도로가 달라이라마와 조우 했다. 두 사람은 형제’처럼 보일 정도로 아주 좋은 친구 사이였다. 머튼수사는 인도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아시아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런데 1969년 대만을 여행하는 도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뜰 당시는 베트남 전쟁의 절정기였는데 머튼 수사는 해외를 돌아다니며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존경받는 지성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한마디는 아주 영향력이 높았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그의 견해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가 하는 의문을 아직까지 갖고있다.
어쨌든 머튼 수사는 미국에 불교가 뿌리내리는 데, 특히 카톨릭ㆍ기독교 신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가 비명횡사한 후 겟세미니 수도원에는 새 원장이 취임하는데 그는 수도사들에게 불교 공부를 일절 금지시켰다. 당시 머튼 수사의 영향으로 수도원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젊은 수도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수도사들은 하는 수 없이 잠시 불교공부를 접고 있다가 1984년 새 원장이 취임하자 이때가 기회다 싶어 원장에게 불교 공부를 하고 싶다고 청했다. 그러면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의 선사들을 초청해 참선수행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겟세마니 수도사들은 미국에서도 매우 유명하고 수행을 열심히하는 훌륭한 수도사들이다.
그 유명한 머튼수사의 똑똑한 후예들이 참선수행을 하겠다며 고른 불교선사가 바로 숭산 큰스님이다. 당시에는 미국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린 뒤라 일본의 유명한 선사도 많고 티벳의 고승들도 많았는데 이들 모두 제치고 바로 한국인인 숭산 큰스님을 초청한 것이다. 이것은 아주 역사적인 일이었다.
1984년부터 6년 동안 그들은 매년 일주일간 큰스님을 초청해 법문도 듣고 공안인터뷰도 하고 참선수행도 햇다. 큰스님은 참선수행 때 수도사들에게 ‘하느님은 어디서 오시는가’ ‘하느님과 우리의 마음은 같은가 다른가’ 하는 화두를 주셨다.
더욱 특기할 만한 일은 큰스님께서 수도사들과 함께 성당미사를 같이 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카톨릭 역사에서 엄청난 일이 아닐 수없다.
1991년 8월 겟세마니 수도원 벤지민 수사님은 숭산 큰스님에대한 수필을 하나 써서 발표했는데 큰 스님의 가르침에대한 존령심과 고마움이 곳곳에 베어있다.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하면 좋을 듯해 여기에 옮겨 적는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숭산 대선사님께서 이곳 겟세마니 수도원에 오신다 우리수도사들은 선사님을 맞을 준비에 바쁘다.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한 준비를 하는 것은 이니다. 방에 있는 의자와 책상가구들을 모두 치우고 참선할 때 쓰기위한 큰 방석을 갖다놓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지금 이곳에는 선사님을 뵙기위해 미국 전역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들, 겟세마니 인근 운둔지에서 수행하는 사람들, 멀리 테레사와 풀로리다에서 온 참선수행자들, 그리고 캐나다에서 온 한국인들까지 모여들어 조용한던 수도원이 모처럼 시끌벅적하다.
대선사님이 이곳 수도원에 매년 이렇게 오셔서 참선 지도를 해주신게 벌써 5년째다.
그의 방문은 항상 맑은 통찰력을 얻기 위한 도전과 그것을 얻고 나서 얻는 기쁨의 절묘한 결합 그 자체이다.
왜” 그는 애 이곳에 오는가?
왜 카톨릭 수사인 우리가 불교승려인 그의 설법에 참여하며 몇시간씩 안자 참선수행을하고 생전처음듣는 공안문답과의 처절한 투쟁을 하는가? 왜 우리는 매년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오는가?
대선사님을 처음 뵙던 날 나는 이렇게 여쭈었다.
“왜 선사님은 이곳에 오셨습니까?”
머릿속에 온갖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나에게 그의 대답은 정말 걸작이었다.
“하하하 당신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들은 수도사이므로 수도원을 떠날 수 없으니 내 젠센터에 오실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당신들이 오는 것보다 내가오는게 쉽지요 안 그래요? 하하하.”
이 간결함, 이 단순함, 이 진실함,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인 것을, 우리 수도사들의 생활이야말로 진실함과 간결함 그자체가 아닌가.
그날 참선수행이 끝나고 묵으실 숙소로 안내하면서 나는 대선사님께 “수도원 수사들과 처음 생활하셔서 약간 불편하실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대선사님께서는 “우리 스님들 생활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세벽에 일어나 찬송을 부르고 경정을 읽고 밥을 먹은 뒤 묵언하고 그리고 일하는 생활 아니겠어요” 우리 스님들은 머리를 깎고 이렇게 잿빛 승복을 입는 대신에 수사님들은 긴 예복을 입고있고…… 겉은 달라도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답하셨다.
새길수록 훌륭한 말씀이다.
4세기경 기독교 신앙을 견결히 디지기 위한 정신무장운동이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 사막으로 가 혹독한 수행을 했다. 그들의 경험과 지혜는 시편이나 회고담 형태로 전해 내려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토머스 머튼 수사가 쓴 《사막의 지혜》(The Wisdom of Desert)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날 대수도원장 마크는 또 다른 대수도원장 아르세니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소유의 삶이란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이지요. 우리 수도원이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을 때 우리는 그때 비로소 기쁨을 느끼지 않을까요. 우리 수도원의 한 수사님은 자기 방 앞에 싹을 내어 핀 야생화를 보고 야생화 뿌리까지 뽑아냈습니다’
그러자 아르세니우스는 이렇게 응대했다
글세요, 제 생각엔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영적인 방식대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꽃이 없이 살 수 없다면 무소유라고 해서 야생화를 꺾어버릴수는 없겠지요.’”
대선사님께서 쓰신 영어법문집 《세계일화》(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야말로 우리 수도원 골방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싹을 피우고 있는 야생화가 아닐까. 우리가 이 꽃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대선사님께서는 내 방에 들르셔서 내 책상 앞에 싹을 틔우고 있는 당신의 저서 《세계일화》를 발견하시고 아주 기뻐하셨다. 대선사님은 내 수도생활에 한 송이 야생화 꽃 을 피우기 위한 씨를 뿌리셨으며 이제 그 꽃은 아주 잘 자라고 있다.
대선사님은 우리와 함께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미사드리고 하는 모든 일에 함께 참여하셨다.
만약 여러분이 대선사님께 불교수행자가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선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따지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그저 노래하십시요. 기도하십시요.”
대선사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게 아니다. 사막의 수도사가 발견한 꽃이 새로운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가르침은 항상 우리 주변에 널려 있으며 우리 마음안에 있다.
매일 우리는 찬송하고 일하고 음식준비하고 마릇바닥을 닦으면서 진리와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사람을 돕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목 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기위하여 내가 마실물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수사들의 일이라고 하셨지 않은가.
대선사님, 여기서 얘기하는 ‘나’란 도대체 누구입니까!
대선사님 고맙습니다.
수도사들 중에는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 불교 선사들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사람도 있다. 미국 예수회 신부인 요셉 게네디는 일본선사밑에서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 몇 년 전 ‘선사’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수도복을 벗은 게 아니었다. 그는 현재 신부님과 수녀님을 만날수가 있다. 어떤 수녀님들은 기도의 일환으로 절 (108배, 1천80배, 3천배)수행을 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몇몇 카톨릭 수녀님과 이태리 수녀님들이 계룡산 신원사와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동안거와 하안거에 참여하시기도 했다. 그때만큼은 수녀복을 벗고 말이다. 진리를 찾기위해 과감한 용기를 갖고 도전하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에 우리 스님들은 큰 감동을 받는다. 때때로 한국의 동안거 ㆍ하안거에 스페인 ㆍ영국 ㆍ 독일의 카톨릭 신부님들도 참여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낫다거나 위대하다고 강조하기 위함이 ‘절대’ 아니다. 기독교 신자들이나 카톨릭 신자들이 요즘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도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 모두 종교를 넘어 참선수행을 통해 신앙의 질을 높일 수 있고 자기가 믿는 신념에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아야기하고 싶을 따름이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시도하고 있다.
베네딕토 카톨릭 수도원의 수녀로서 ‘국제 수도사회’ 총무를 맡고 있기도 한 메리 미가렛 핑크 수녀는 1997년 10월 〈타임〉지 인터뷰에서 “미국 불교도들은 교회나 성당 같은 구조적 도움없이도 각자 개개인이 자신이 딛고있는 현장에서 하루하루 매순간 순간 영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점은 우리모두가 배워야 할 점”이라며 “이 같은 점에서 참선수행은 어느 졸교인에게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참선수행은 종교간에 대립이나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종교를 있는 그대로 더욱 깊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물의 겉모습만 을 보고 판단한다면 진정한 내면의 진리는 잃어버린다. 내면의 진리란 모든종교를 뛰어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위대한 분이다. 당신 자신을버린 사랑과 자비로 헌신하신 진정한 인간이다. 그는 겨우 33년을 살았을 뿐인데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는 그의 가르침 안에서 발전되어왔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사랑과 자비로 가득한 삶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인간이다. 예수님은 나를 길러준 분이다. 지금도 나는 매일매일 그의 가르침 안에서 살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이렇게 내가 스님이 될 수 있도록 인도했으며 이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나 자신과 다른사람을 위해 살게 만들었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힘이 솟는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위대한 인간이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것만큼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다름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석가모니 가르침을 배우고 숭배하고 그것을 생활에서 녹여내기 위해 수행하고있다.
나는 기독교의 목표가 다른 종교와 싸워서 독자적인 교단을 만드는데 있지 않다고 본다.
“가장 하찮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바로 나에게 하는 행동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일대학과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나는 교수님들로부터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 사후 그의 가르침을 글로옮기는 과정에서 자기들끼리 교단을 만들거나 기존교단에서 분리하기 위해 새로운 사실을 첨가하거나 지니치게 강조했다는 것을 배운 적이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언제나 넓은 길, 위대한 길, 그리고 열린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다. 노래하는 새소리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로 표현되는 것이다. 얼굴레 스치는 바람, 밖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말씀이며 부처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왜 부처님의 대자 대비심과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여러분이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넓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얻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사랑과 자비로 이끄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과 자비가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985년 초 숭산스님은 미국에 있는 한 카톨릭 수도원으로부터 법문과 함께 참선수행을 지도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 수도원은 켄터키주에있는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미국 카톨릭 교단 안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진 곳이다. 아마 천주교 신자분들들은 그 이름을 익히 다 아실 것이다.
겟세마니 수도원은 그 유명한 토마스 머튼수사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토마스 머튼은 미국 지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자서전은 지금까지 필독서로 불릴 정도로 스테디 셀러다.
머튼 수사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사가 되었으며 겟세미니 수도원에서 청춘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다 중년에 접어든 1950년대 초반 장자를 비롯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많은 불교경전을 읽으면서 수도원안에서 혼자 참선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참선에 심취한 머튼 수사는 나중에 불교와 참선에 대한 책을 쓰기까지 했다. 당시 그는 카톨릭 교단에서 아주 존경받는 수도사이자 미국 지식인들 중 영향력 있는 인사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동양사상과 불교에 대한 관심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1950년대는 철학자, 문인 등 미국 지성인들이 본격적으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다. 그전부터 작은 파문을 던지며 미국 지식인 사회에 물결을 만들었던 불교가 비로소 파도처럼 폭발하는 시기라고나 할까.
머튼 수사는 그 파도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분이다. 벌써 그때부터 동양의 선사들은 물론 달라이라마와도 편지 교류를 했다. 수도사들은 평생 수도원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점점 불교와 참선수행에 몰두한 그는 마침내 수도원장님께 동양을 여행해보고 싶다며 몇 년 동안 수도원을 떠나 있겠다고 청한다. 오랜 숙고 끝에 원장은 마침내 허락을 내리고, 그는 생애 처음으로 동양구경을 하게 된다.
그는 먼저 인도로가 달라이라마와 조우 했다. 두 사람은 형제’처럼 보일 정도로 아주 좋은 친구 사이였다. 머튼수사는 인도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아시아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런데 1969년 대만을 여행하는 도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뜰 당시는 베트남 전쟁의 절정기였는데 머튼 수사는 해외를 돌아다니며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존경받는 지성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한마디는 아주 영향력이 높았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그의 견해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가 하는 의문을 아직까지 갖고있다.
어쨌든 머튼 수사는 미국에 불교가 뿌리내리는 데, 특히 카톨릭ㆍ기독교 신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가 비명횡사한 후 겟세미니 수도원에는 새 원장이 취임하는데 그는 수도사들에게 불교 공부를 일절 금지시켰다. 당시 머튼 수사의 영향으로 수도원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젊은 수도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수도사들은 하는 수 없이 잠시 불교공부를 접고 있다가 1984년 새 원장이 취임하자 이때가 기회다 싶어 원장에게 불교 공부를 하고 싶다고 청했다. 그러면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의 선사들을 초청해 참선수행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겟세마니 수도사들은 미국에서도 매우 유명하고 수행을 열심히하는 훌륭한 수도사들이다.
그 유명한 머튼수사의 똑똑한 후예들이 참선수행을 하겠다며 고른 불교선사가 바로 숭산 큰스님이다. 당시에는 미국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린 뒤라 일본의 유명한 선사도 많고 티벳의 고승들도 많았는데 이들 모두 제치고 바로 한국인인 숭산 큰스님을 초청한 것이다. 이것은 아주 역사적인 일이었다.
1984년부터 6년 동안 그들은 매년 일주일간 큰스님을 초청해 법문도 듣고 공안인터뷰도 하고 참선수행도 햇다. 큰스님은 참선수행 때 수도사들에게 ‘하느님은 어디서 오시는가’ ‘하느님과 우리의 마음은 같은가 다른가’ 하는 화두를 주셨다.
더욱 특기할 만한 일은 큰스님께서 수도사들과 함께 성당미사를 같이 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카톨릭 역사에서 엄청난 일이 아닐 수없다.
1991년 8월 겟세마니 수도원 벤지민 수사님은 숭산 큰스님에대한 수필을 하나 써서 발표했는데 큰 스님의 가르침에대한 존령심과 고마움이 곳곳에 베어있다.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하면 좋을 듯해 여기에 옮겨 적는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숭산 대선사님께서 이곳 겟세마니 수도원에 오신다 우리수도사들은 선사님을 맞을 준비에 바쁘다.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한 준비를 하는 것은 이니다. 방에 있는 의자와 책상가구들을 모두 치우고 참선할 때 쓰기위한 큰 방석을 갖다놓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지금 이곳에는 선사님을 뵙기위해 미국 전역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들, 겟세마니 인근 운둔지에서 수행하는 사람들, 멀리 테레사와 풀로리다에서 온 참선수행자들, 그리고 캐나다에서 온 한국인들까지 모여들어 조용한던 수도원이 모처럼 시끌벅적하다.
대선사님이 이곳 수도원에 매년 이렇게 오셔서 참선 지도를 해주신게 벌써 5년째다.
그의 방문은 항상 맑은 통찰력을 얻기 위한 도전과 그것을 얻고 나서 얻는 기쁨의 절묘한 결합 그 자체이다.
왜” 그는 애 이곳에 오는가?
왜 카톨릭 수사인 우리가 불교승려인 그의 설법에 참여하며 몇시간씩 안자 참선수행을하고 생전처음듣는 공안문답과의 처절한 투쟁을 하는가? 왜 우리는 매년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오는가?
대선사님을 처음 뵙던 날 나는 이렇게 여쭈었다.
“왜 선사님은 이곳에 오셨습니까?”
머릿속에 온갖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나에게 그의 대답은 정말 걸작이었다.
“하하하 당신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들은 수도사이므로 수도원을 떠날 수 없으니 내 젠센터에 오실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당신들이 오는 것보다 내가오는게 쉽지요 안 그래요? 하하하.”
이 간결함, 이 단순함, 이 진실함,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인 것을, 우리 수도사들의 생활이야말로 진실함과 간결함 그자체가 아닌가.
그날 참선수행이 끝나고 묵으실 숙소로 안내하면서 나는 대선사님께 “수도원 수사들과 처음 생활하셔서 약간 불편하실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대선사님께서는 “우리 스님들 생활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세벽에 일어나 찬송을 부르고 경정을 읽고 밥을 먹은 뒤 묵언하고 그리고 일하는 생활 아니겠어요” 우리 스님들은 머리를 깎고 이렇게 잿빛 승복을 입는 대신에 수사님들은 긴 예복을 입고있고…… 겉은 달라도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답하셨다.
새길수록 훌륭한 말씀이다.
4세기경 기독교 신앙을 견결히 디지기 위한 정신무장운동이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 사막으로 가 혹독한 수행을 했다. 그들의 경험과 지혜는 시편이나 회고담 형태로 전해 내려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토머스 머튼 수사가 쓴 《사막의 지혜》(The Wisdom of Desert)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날 대수도원장 마크는 또 다른 대수도원장 아르세니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소유의 삶이란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이지요. 우리 수도원이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을 때 우리는 그때 비로소 기쁨을 느끼지 않을까요. 우리 수도원의 한 수사님은 자기 방 앞에 싹을 내어 핀 야생화를 보고 야생화 뿌리까지 뽑아냈습니다’
그러자 아르세니우스는 이렇게 응대했다
글세요, 제 생각엔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영적인 방식대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꽃이 없이 살 수 없다면 무소유라고 해서 야생화를 꺾어버릴수는 없겠지요.’”
대선사님께서 쓰신 영어법문집 《세계일화》(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야말로 우리 수도원 골방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싹을 피우고 있는 야생화가 아닐까. 우리가 이 꽃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대선사님께서는 내 방에 들르셔서 내 책상 앞에 싹을 틔우고 있는 당신의 저서 《세계일화》를 발견하시고 아주 기뻐하셨다. 대선사님은 내 수도생활에 한 송이 야생화 꽃 을 피우기 위한 씨를 뿌리셨으며 이제 그 꽃은 아주 잘 자라고 있다.
대선사님은 우리와 함께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미사드리고 하는 모든 일에 함께 참여하셨다.
만약 여러분이 대선사님께 불교수행자가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선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따지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그저 노래하십시요. 기도하십시요.”
대선사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게 아니다. 사막의 수도사가 발견한 꽃이 새로운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가르침은 항상 우리 주변에 널려 있으며 우리 마음안에 있다.
매일 우리는 찬송하고 일하고 음식준비하고 마릇바닥을 닦으면서 진리와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사람을 돕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목 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기위하여 내가 마실물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수사들의 일이라고 하셨지 않은가.
대선사님, 여기서 얘기하는 ‘나’란 도대체 누구입니까!
대선사님 고맙습니다.
수도사들 중에는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 불교 선사들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사람도 있다. 미국 예수회 신부인 요셉 게네디는 일본선사밑에서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 몇 년 전 ‘선사’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수도복을 벗은 게 아니었다. 그는 현재 신부님과 수녀님을 만날수가 있다. 어떤 수녀님들은 기도의 일환으로 절 (108배, 1천80배, 3천배)수행을 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몇몇 카톨릭 수녀님과 이태리 수녀님들이 계룡산 신원사와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동안거와 하안거에 참여하시기도 했다. 그때만큼은 수녀복을 벗고 말이다. 진리를 찾기위해 과감한 용기를 갖고 도전하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에 우리 스님들은 큰 감동을 받는다. 때때로 한국의 동안거 ㆍ하안거에 스페인 ㆍ영국 ㆍ 독일의 카톨릭 신부님들도 참여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낫다거나 위대하다고 강조하기 위함이 ‘절대’ 아니다. 기독교 신자들이나 카톨릭 신자들이 요즘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도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 모두 종교를 넘어 참선수행을 통해 신앙의 질을 높일 수 있고 자기가 믿는 신념에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아야기하고 싶을 따름이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시도하고 있다.
베네딕토 카톨릭 수도원의 수녀로서 ‘국제 수도사회’ 총무를 맡고 있기도 한 메리 미가렛 핑크 수녀는 1997년 10월 〈타임〉지 인터뷰에서 “미국 불교도들은 교회나 성당 같은 구조적 도움없이도 각자 개개인이 자신이 딛고있는 현장에서 하루하루 매순간 순간 영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점은 우리모두가 배워야 할 점”이라며 “이 같은 점에서 참선수행은 어느 졸교인에게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참선수행은 종교간에 대립이나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종교를 있는 그대로 더욱 깊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물의 겉모습만 을 보고 판단한다면 진정한 내면의 진리는 잃어버린다. 내면의 진리란 모든종교를 뛰어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위대한 분이다. 당신 자신을버린 사랑과 자비로 헌신하신 진정한 인간이다. 그는 겨우 33년을 살았을 뿐인데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는 그의 가르침 안에서 발전되어왔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사랑과 자비로 가득한 삶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인간이다. 예수님은 나를 길러준 분이다. 지금도 나는 매일매일 그의 가르침 안에서 살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이렇게 내가 스님이 될 수 있도록 인도했으며 이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나 자신과 다른사람을 위해 살게 만들었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힘이 솟는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위대한 인간이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것만큼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다름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석가모니 가르침을 배우고 숭배하고 그것을 생활에서 녹여내기 위해 수행하고있다.
나는 기독교의 목표가 다른 종교와 싸워서 독자적인 교단을 만드는데 있지 않다고 본다.
“가장 하찮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바로 나에게 하는 행동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일대학과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나는 교수님들로부터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 사후 그의 가르침을 글로옮기는 과정에서 자기들끼리 교단을 만들거나 기존교단에서 분리하기 위해 새로운 사실을 첨가하거나 지니치게 강조했다는 것을 배운 적이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언제나 넓은 길, 위대한 길, 그리고 열린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다. 노래하는 새소리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로 표현되는 것이다. 얼굴레 스치는 바람, 밖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말씀이며 부처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왜 부처님의 대자 대비심과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여러분이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넓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얻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사랑과 자비로 이끄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과 자비가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Sunday, March 11, 2012
만행 스님과 신부님
만행 스님과 신부님
미국에서 불교가 얼마나 기독교 신자들에게 널리 퍼지고 있으며 요즘 기독교 신자들이 참선을 얼마나 배우려 하는지 내 경험을 들려드리겠다.
나는 1997년 가을 일주일 동안 노스캐롤리나의 랄레이란 곳에있는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으로부터 불교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웨이크 포리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침례교 대학이다. 아주 보수적인 곳으로 알려져있음며 남주 침례교 전통을 잘 따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권위있는 대학이며 매년 수많은 목사들이 그학교에서 배출된다. 그런 학교가 불교 승려, 그것도 한국 승려를 초청해 불교에 대한 기르침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비행기표는 물론 호텔방과 식사 제공에 높은 강연료까지 주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이 위치해 있는 미국 남부는 지금까지도 북부 사람들이 너무 자유분망하다는 일종의 편견을 갖고 있을 정도로 자기들이 기독교적 전통을 아주 잘따르는 지역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토종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까지 이어져 외국인이나 외국 문물에 대해서는 좀 까다로운 성향까지 있다.
그런데 그런 대학이 불교 승려를 초청했다는 것은 대단히 흭기적인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의 몇몇강죄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기로 했다. 대학당국은 나에게 참선에 대해 세번에 걸쳐 워크숍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대학 학장님은 목사이면서 신학대학원의 교수로 재직중인 빌 레너드씨로 아주 신심이 깊은 침례교 신자였다. 빌 학장님은 미국에서 침례교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가장 존경받는 학자로서 나처럼 하버드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편 그 학교 校牧은 토마스 크리스트만 이라는 분이었다.
아주 나이가 많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만큼이나 유명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과 판단은 미국 침례교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토마스 목사님은 선교를 위해 전세계 안 가본 곳이 없는 분이다. 빌 학장님과 토머스 목사님은 내 불교 강좌에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참여했다. 수업시간 시작 전에 정확하게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으며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실제 참선 실습에 들어가서는 어찌나 열심히 참여하는지 내심 무척 강동을 받았다. 특히 토마스 목사님은 정말 다정다감하고 종교적 신앙심이 두터우며 따뜻한 분이었다.
참선 실습하던 첫날, 목사님은 “태어나서 처음 참선이라는 것을 해보는 역사적인 날”이라며 어린아이처럼 설례셨다. 실습이 끝나고 각자 소감을 말하는데 토마스 목사님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선수행을 하기 전에는 목사로서 불교 수행을 한다는 주위의 이목에 약간 신경쓰였는데 실제 참선을 해보니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나는 깜짝 놀라 무슨 문제인지 여쭈었다.
“아니, 참선하려고 앉아 있기가 이렇게 여려운 줄 몰랐어요. 나는 10분도 앉아 있기가 힘든데 스님께서는 어쩌면 그렇게 30분, 한 시간씩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계십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학생들과 우리들은 모두 파안대소를 했다.
일주일 동안의 불교강의와 참선수행 갈의가 끝날 무렵 목사님은 내게 참선수행이야말로 목회생활을 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면서 매년 대학 전직원과 교수들이 한꺼번에 특별 수련을 받도록 도와줄 수 없는지 청해왔다.
나는 그 제안에 너무 기뻤다. 하지만 불행이도 청을 받아들일 수 가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동안거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음 가회로 미뤄달라며 그의 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미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참선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나를 비롯한 많은 스님들은 이처럼 자주 법문 및 참선강의 요청을 받는다. 미국에서 주지로 있을 때 내 법문의 거의 60 퍼센트는 교회나 성당에서 이뤄졌다. 어떤때는 아예 주일날 교회 예베당에 가서 짧은 법문을 하고 오기도 했다.
머리를 깎고 잿빛승복을 입은 불교 승려가 교회나 성당에서 법문을 하는 일은 미국에서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주지로 있기도 했었던 프라비던스 젠센터 홍법원 옆 도시에는 아주 큰 교회(The First Unitarian Universalist Church)가 하나 있다 미 교회는 부라운 대학 근처에 있어서 그 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많이오는 교회다. 로드아일랜드에서는 제일 오래되였고 큰 교회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인 톰 목사님은 항상 불교 경전 가르침과 참선수행을 해오셨다는 것이 아니가.
톰 목사님은 신도들 중에서 참선에 관심을 갖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아예 프라비던스 젠센터로 찾아가라고 세세하게 약도까지 그려줘 가면서 설명을 한다.
마침 그렇게 해서 젠센터에 온 사람이 하도 목사님 얘기를 하길래, 내가 먼저 톰 목사께 전화를 해 신도들에게 프라비던스 젠센터를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 됐다. 우리는 서로 교회와 젠센터를 오가며 차를 마시고 좋은 대화를 나눴다.
톰 목사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다. 매순간 예수님의 기르침에 따라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분이며, 신도들을 사라과 자비로 이끌기위해 매진하는 분이다. 그리고 아주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익히고 실천하려고 햇다.
너느 날 톰 목사님은 농반진반으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같으면 내가 도대체 기독교 신자인지 불교 신자인지 구분이 안 갈때가 있답니다. 교회에 살긴 하지만 매일 불경을 일고 참선수행을 하고 시간날 때마다 현각스님이나 티벳 승려들을 만나 부처님의 말씀을 얘기하고 심지어 주일날 설교때도 불법을 전하니 이것참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이것이 바로 현재 미국땅에서 일어나는 현실이다.
미국 개신교 교단에서 이처럼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불교에 대해 매우 열린 마음을 갖고 배우려 하고 있고 참선수행도 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프라비던스 젠센터의 주지일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일주일 전 나는 두 개의 유명한 개신교 교회로부터 법문 초청을 받았다.
이 두 강의 모두 일요 예배시간에 이루워졌다. 한 교회는 미국 뉴포트에있는 교회(The Unitarian Church of Newport)였다. 그곳은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시에 위치해 있는데 뉴포트는 미국의 부자가 모여서 사는 최상류층 동네다. 록펠러, 벤더빌트, 제이피 모건 기업의 창업자 일가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따라서 그 교회에 다니는 신도들도 미국의 최상류층 사람들이다.
또 다른 교회는 메사추세츠주 샤론시에 있는 교회(The Unitarian Church of Sharon Massachusetts)였다. 이 교회는 보스턴과 가까워서 많은 하버드 동문들이 다니고 있었으며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다니는 교회다.
두 교회 모두 법문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이 반응이 너무 뜨거워 나도 놀랐을 정도였다. 교회 사람들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한번 법문을 해달라고 청했다. 그들은 심지어 교회안에 정규적인 참선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며 지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요즘은 대학교에 별도의 참선 프로그램이 마련되기도 한다. 내가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대학원에 있는 작은 성당인 앤도버 채풀에서는 매일 불교식 참선수행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었다. 일본스님이 지도를 하셨는데 매일 아침여섯 시부터 점심시간 이후까지 진행되였다. 그 프로그램에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많은 하버드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참석했다.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니까 대학원 측에서는 아예 참선 방석도 사고 불교 경전도 갖다놓고 향까지 피어놓아 제법 근사한 법당까지 꾸며놓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캠퍼스 다른 한켠에서는 하버드 대학원의 메인 강당인 메모리얼 홀에서 불교 강의가 열렸다.
아마 KBS에서 방영한 일요스페셜 〈만행〉을 보신 분들은 뒷부분의 한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나의 도반인 폴란드 스님인 현문스님과 내가 기독교 교회에서 참선을 지도하고 있는 장면 말이다.
그곳은 부라운 대학안에 있는 성당 매닝 채풀이었다. 십자가와 마리아상이 있은 성당에서 승복을 입고 삭발한 내가 참선을 지도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으리라.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이 참선수행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큰 대학에는 교회나 성당이 있고 학교안에서 가장크고 조용한 공간이 그곳이다.
브라운 대학 학생들은 총장님과 목사님께 예베당을 참선룸으로 써도 되는지 여쭈었고 총장님과 목사님은 허락을 내렸다. 아니, 허락을 넘어서 참선수행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항상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참선할 때 쓰는 방석, 향, 염불책, 심지어 한국에서 목탁과 죽비까지 수입해 주셨을 정도다.
나는 또 뉴욕에 있는 컬럼비야 대학옆 연합 신학대학원 강좌에 자주 초청돼 법문을하고 참선수행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미 한국인 비구니이자 한국인인 정현경 박사가 낸 것이다. 그녀는 대학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미국 학생들이 아주 존경하는 교수 중 한 사람아었다.
프라비던스 젠센터에서는 카톨릭 신자와 불교 신자들이 아예 함께 선방에 앉아 참선수행을 한다.
그 프로그램은 대광스님과 켑빈 훈트 신부님이 함께 주도를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행에 너무 참여하고 싶어해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다. 어떤 때는 뉴잉글랜드 지역 신부님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한다.
대광스님은 미국은 물론 한국의 수덕사, 신원사, 화계사에서 수년동안 참선수행을 하신 분이다. 그는 네브라스카의 장로교집안에서 태어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부모님들은 장차 대광스님이 목사가 됐으면 하고 바랐다고 한다.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전공인 사회학 공부를 계속해 교수가 되었다. 그러다 1979년 숭산스님을 만나 아예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것이다.
케빈 훈트 신부님은 25년동안이나 참선수행을 해오신 분이다.
대광스님보다도 더 오래됐다. 신부님은 수행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시곤 하는데 특히 카톨릭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대광스님과 케빈훈트 신부님은 법문도 함께하시고 불교의 참선수행과 기독교적 믿음에 관한 질문에 함께 답한다. 이 수행 프로그램은 금새 유명해져서 이제 대광스님과 케벤 훈트 신부님은 케임브리지 젠센터와 시카고 젠센터 등에서도 참선지도를 하고 계신다.
미국에서 불교가 얼마나 기독교 신자들에게 널리 퍼지고 있으며 요즘 기독교 신자들이 참선을 얼마나 배우려 하는지 내 경험을 들려드리겠다.
나는 1997년 가을 일주일 동안 노스캐롤리나의 랄레이란 곳에있는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으로부터 불교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웨이크 포리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침례교 대학이다. 아주 보수적인 곳으로 알려져있음며 남주 침례교 전통을 잘 따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권위있는 대학이며 매년 수많은 목사들이 그학교에서 배출된다. 그런 학교가 불교 승려, 그것도 한국 승려를 초청해 불교에 대한 기르침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비행기표는 물론 호텔방과 식사 제공에 높은 강연료까지 주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이 위치해 있는 미국 남부는 지금까지도 북부 사람들이 너무 자유분망하다는 일종의 편견을 갖고 있을 정도로 자기들이 기독교적 전통을 아주 잘따르는 지역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토종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까지 이어져 외국인이나 외국 문물에 대해서는 좀 까다로운 성향까지 있다.
그런데 그런 대학이 불교 승려를 초청했다는 것은 대단히 흭기적인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의 몇몇강죄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기로 했다. 대학당국은 나에게 참선에 대해 세번에 걸쳐 워크숍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대학 학장님은 목사이면서 신학대학원의 교수로 재직중인 빌 레너드씨로 아주 신심이 깊은 침례교 신자였다. 빌 학장님은 미국에서 침례교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가장 존경받는 학자로서 나처럼 하버드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편 그 학교 校牧은 토마스 크리스트만 이라는 분이었다.
아주 나이가 많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만큼이나 유명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과 판단은 미국 침례교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토마스 목사님은 선교를 위해 전세계 안 가본 곳이 없는 분이다. 빌 학장님과 토머스 목사님은 내 불교 강좌에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참여했다. 수업시간 시작 전에 정확하게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으며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실제 참선 실습에 들어가서는 어찌나 열심히 참여하는지 내심 무척 강동을 받았다. 특히 토마스 목사님은 정말 다정다감하고 종교적 신앙심이 두터우며 따뜻한 분이었다.
참선 실습하던 첫날, 목사님은 “태어나서 처음 참선이라는 것을 해보는 역사적인 날”이라며 어린아이처럼 설례셨다. 실습이 끝나고 각자 소감을 말하는데 토마스 목사님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선수행을 하기 전에는 목사로서 불교 수행을 한다는 주위의 이목에 약간 신경쓰였는데 실제 참선을 해보니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나는 깜짝 놀라 무슨 문제인지 여쭈었다.
“아니, 참선하려고 앉아 있기가 이렇게 여려운 줄 몰랐어요. 나는 10분도 앉아 있기가 힘든데 스님께서는 어쩌면 그렇게 30분, 한 시간씩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계십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학생들과 우리들은 모두 파안대소를 했다.
일주일 동안의 불교강의와 참선수행 갈의가 끝날 무렵 목사님은 내게 참선수행이야말로 목회생활을 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면서 매년 대학 전직원과 교수들이 한꺼번에 특별 수련을 받도록 도와줄 수 없는지 청해왔다.
나는 그 제안에 너무 기뻤다. 하지만 불행이도 청을 받아들일 수 가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동안거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음 가회로 미뤄달라며 그의 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미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참선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나를 비롯한 많은 스님들은 이처럼 자주 법문 및 참선강의 요청을 받는다. 미국에서 주지로 있을 때 내 법문의 거의 60 퍼센트는 교회나 성당에서 이뤄졌다. 어떤때는 아예 주일날 교회 예베당에 가서 짧은 법문을 하고 오기도 했다.
머리를 깎고 잿빛승복을 입은 불교 승려가 교회나 성당에서 법문을 하는 일은 미국에서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주지로 있기도 했었던 프라비던스 젠센터 홍법원 옆 도시에는 아주 큰 교회(The First Unitarian Universalist Church)가 하나 있다 미 교회는 부라운 대학 근처에 있어서 그 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많이오는 교회다. 로드아일랜드에서는 제일 오래되였고 큰 교회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인 톰 목사님은 항상 불교 경전 가르침과 참선수행을 해오셨다는 것이 아니가.
톰 목사님은 신도들 중에서 참선에 관심을 갖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아예 프라비던스 젠센터로 찾아가라고 세세하게 약도까지 그려줘 가면서 설명을 한다.
마침 그렇게 해서 젠센터에 온 사람이 하도 목사님 얘기를 하길래, 내가 먼저 톰 목사께 전화를 해 신도들에게 프라비던스 젠센터를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 됐다. 우리는 서로 교회와 젠센터를 오가며 차를 마시고 좋은 대화를 나눴다.
톰 목사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다. 매순간 예수님의 기르침에 따라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분이며, 신도들을 사라과 자비로 이끌기위해 매진하는 분이다. 그리고 아주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익히고 실천하려고 햇다.
너느 날 톰 목사님은 농반진반으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같으면 내가 도대체 기독교 신자인지 불교 신자인지 구분이 안 갈때가 있답니다. 교회에 살긴 하지만 매일 불경을 일고 참선수행을 하고 시간날 때마다 현각스님이나 티벳 승려들을 만나 부처님의 말씀을 얘기하고 심지어 주일날 설교때도 불법을 전하니 이것참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이것이 바로 현재 미국땅에서 일어나는 현실이다.
미국 개신교 교단에서 이처럼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불교에 대해 매우 열린 마음을 갖고 배우려 하고 있고 참선수행도 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프라비던스 젠센터의 주지일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일주일 전 나는 두 개의 유명한 개신교 교회로부터 법문 초청을 받았다.
이 두 강의 모두 일요 예배시간에 이루워졌다. 한 교회는 미국 뉴포트에있는 교회(The Unitarian Church of Newport)였다. 그곳은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시에 위치해 있는데 뉴포트는 미국의 부자가 모여서 사는 최상류층 동네다. 록펠러, 벤더빌트, 제이피 모건 기업의 창업자 일가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따라서 그 교회에 다니는 신도들도 미국의 최상류층 사람들이다.
또 다른 교회는 메사추세츠주 샤론시에 있는 교회(The Unitarian Church of Sharon Massachusetts)였다. 이 교회는 보스턴과 가까워서 많은 하버드 동문들이 다니고 있었으며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다니는 교회다.
두 교회 모두 법문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이 반응이 너무 뜨거워 나도 놀랐을 정도였다. 교회 사람들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한번 법문을 해달라고 청했다. 그들은 심지어 교회안에 정규적인 참선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며 지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요즘은 대학교에 별도의 참선 프로그램이 마련되기도 한다. 내가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대학원에 있는 작은 성당인 앤도버 채풀에서는 매일 불교식 참선수행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었다. 일본스님이 지도를 하셨는데 매일 아침여섯 시부터 점심시간 이후까지 진행되였다. 그 프로그램에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많은 하버드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참석했다.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니까 대학원 측에서는 아예 참선 방석도 사고 불교 경전도 갖다놓고 향까지 피어놓아 제법 근사한 법당까지 꾸며놓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캠퍼스 다른 한켠에서는 하버드 대학원의 메인 강당인 메모리얼 홀에서 불교 강의가 열렸다.
아마 KBS에서 방영한 일요스페셜 〈만행〉을 보신 분들은 뒷부분의 한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나의 도반인 폴란드 스님인 현문스님과 내가 기독교 교회에서 참선을 지도하고 있는 장면 말이다.
그곳은 부라운 대학안에 있는 성당 매닝 채풀이었다. 십자가와 마리아상이 있은 성당에서 승복을 입고 삭발한 내가 참선을 지도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으리라.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이 참선수행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큰 대학에는 교회나 성당이 있고 학교안에서 가장크고 조용한 공간이 그곳이다.
브라운 대학 학생들은 총장님과 목사님께 예베당을 참선룸으로 써도 되는지 여쭈었고 총장님과 목사님은 허락을 내렸다. 아니, 허락을 넘어서 참선수행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항상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참선할 때 쓰는 방석, 향, 염불책, 심지어 한국에서 목탁과 죽비까지 수입해 주셨을 정도다.
나는 또 뉴욕에 있는 컬럼비야 대학옆 연합 신학대학원 강좌에 자주 초청돼 법문을하고 참선수행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미 한국인 비구니이자 한국인인 정현경 박사가 낸 것이다. 그녀는 대학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미국 학생들이 아주 존경하는 교수 중 한 사람아었다.
프라비던스 젠센터에서는 카톨릭 신자와 불교 신자들이 아예 함께 선방에 앉아 참선수행을 한다.
그 프로그램은 대광스님과 켑빈 훈트 신부님이 함께 주도를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행에 너무 참여하고 싶어해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다. 어떤 때는 뉴잉글랜드 지역 신부님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한다.
대광스님은 미국은 물론 한국의 수덕사, 신원사, 화계사에서 수년동안 참선수행을 하신 분이다. 그는 네브라스카의 장로교집안에서 태어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부모님들은 장차 대광스님이 목사가 됐으면 하고 바랐다고 한다.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전공인 사회학 공부를 계속해 교수가 되었다. 그러다 1979년 숭산스님을 만나 아예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것이다.
케빈 훈트 신부님은 25년동안이나 참선수행을 해오신 분이다.
대광스님보다도 더 오래됐다. 신부님은 수행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시곤 하는데 특히 카톨릭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대광스님과 케빈훈트 신부님은 법문도 함께하시고 불교의 참선수행과 기독교적 믿음에 관한 질문에 함께 답한다. 이 수행 프로그램은 금새 유명해져서 이제 대광스님과 케벤 훈트 신부님은 케임브리지 젠센터와 시카고 젠센터 등에서도 참선지도를 하고 계신다.
Friday, March 9, 2012
만행 나는 불교로 개종했는가
만행 나는 불교로 개종 했는가
돌아켜보니 어느새 스님 생활 10년이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카톨릭 신자가 불교신자로, 그것도 수행자가 되었느냐고묻는다. 이른바 개종한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참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불교로 개종했는가?’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한번도 내가 종교를 바꿨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물론 기독교나 카톨릭이라는 하나의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분명 개종을 한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너무 바보같고 불쌍한 인간이다. 이 세계의 유일한 진리를 버리고 다른 길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서울에서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데 아주 열정에 찬,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찬 기독교 신자들이 나에게 다가와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가끔 일깨워주곤 한다. 그들은 내가 잿빛 승복을 입고 절에 가서 금불상 앞에 절을 한다면 죽어 지옥에 갈 것이 뻔하다고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한번도, 한순간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참선수행을 하고 경전을 읽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내 자신이 놀라곤 한다. 나는 매일 열심히 맑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 결코 나 혼자만의 안일을 위해 살지않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빌고 또 빈다. 이런 마음은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학창시절에도 가져보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러나 지하철에서 내게 안타까운 말을 던지는 그 사람들은 이런 내 마음을 잘 보지 못한다. 나의 미음이 비록 평화롭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오직 그들은 내 겉보습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 행복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지례 결론을 내려버린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행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 마포에 있는 ‘법화정사’라는 절에서 일요일 오후마다 강의를 했다.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지하철을 탓다. 일요일이었는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내가 탄 지하철 칸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열차 가운데 서서 열심히 소리를 지르며 얘기를 시작했다. 아주 우렁차고 열정적이며 힘이 넘치는 목소리여서 처음에 나는 그가 펜이나 우산을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읽던 책을 마저읽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남자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점점 더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귀에 바짝대고 뭔가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다. 처음엔 그 사람 말이 워낙 빨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뿔사, 우산 파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잠시 후 나는 그가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천히 들어보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오직 성경만 읽어라. 오직 예수님만 믿어라. 예수님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
나는 처음에 하도 놀라 온몸에 전율을 느껴졌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단전으로 숨을 싶게 들이쉬고 내쉬었다.를 반복했다. 물론 그전에도 이런글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어 이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가까이 와서 소리치는 경우는 없었다. 좀 당혹스러웠다.
그는 나에게 뭔가 계솟 얘기를 해댔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흥분에 가득찼다.
“조심하라, 사탄들이 권하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 마라.”
그는 내 귀에 똑바로 서서 쉬지않고 퍼부어댔다. 나는 점점 더 앞으로 밀려나 지하철문 유리창에 안경이 닿을 정도까지 되었다. 나는 결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 일들을 여러 번 겪고 나서 내가 다짐한 것은 그런 사람들과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면 그 사람들은 더 화를 낸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의 무관심에는 아랑곳없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다른 종교를 믿지 마라. 그것들은 악마의 가르침이다. 만약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귀를 귀울이면 당신은 지옥으로 간다. 오직 예수님만이 당신의 전부다. 온 힘을 다 바쳐 예수를 믿어라 오직 예수만이 당신을 구한다. 금불상에 절하지 말라. 금불상에 절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라. 그것은 악마의 길로 빠지는 길이다. 신은 결코 이것을 허락하지 읺을 것이다. 우리가 IMF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고 우리나라에 금불상이 하도 많아 하느님이 우리를 벌주셨기 때문이다. 제발 그렇게 하지마라. 오직 예수만이 우리와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다.”.
나는 계속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사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단전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평온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내 주의 사람들은 내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안타까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대해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는 계속 내 뒤에서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성경을 읽으세요! 성경을 읽으세요 !”
나는 속으로 약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그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수십번도 더 읽었는데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성경을 따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는 이해해줄까. 마침내 그는 내 옆을 떠났다. 그리고는 이내 열차안에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한국에 사탄의 종교가 판을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함니다.”
이런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내겐 별 특별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화계사 국제선원 스님들 모두가 겪는 일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미국인이면서 승복을 입은 내가 정작 자기 동포들보다 더 안타까운지 나를 향해 아주 절절한 목소리로 외치곤 한다. 어서 빨리 하느님을 찾아 천당에 가야한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교회 팸플랫을 내 주머니에 찔러놓기도 하고 자기 네 교회에 나와 예배를 꼭 보라고 간곡하게 권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내 팔목을 잡아 끌기까지 하면서 소리를 지른다.
“당신 미국에서 온 것 맞지요. 미국 아저씨. 미국은 예수님 나라 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사탄의 가르침을 믿읍니까?”
그리고 아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지하철에 탄 사람들을 향해 “악마의 말을 전하는 사탄”이라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성경만이 진리를 담고 있고 불경은 지옥으로 이끄는 죄의 말이라고 성토한 뒤 일일이 성경구절을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예수님께 감사하고 있으며 예수님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하는지 성경책에서 글귀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한번 시도 했다가 큰 모욕을 당한 적이 있어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무슨 대응이라도 할라치면 ‘어찌 감히 이런 옷(승복을 가리키며)을 입고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느냐’고 따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나를 따라 내려 내 앞길을 막으며 나와 논쟁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얘기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내 부모님이 나에게 베푸셨듯,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은 부모님 같은 사랑으로, 아니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못나고 어리석고 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크신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당신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군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지하철 내 옆자리에 아기를 안은 엄마가 앉아 있었다. 그 아기는 눈이 파란 사람을 처음 보았는지 자꾸 내 얼굴을 보고 방실방실 웃어댔다.(나는 한국의 아기들을 너무 좋아한다.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기들을 이 세상 어디서도 모지 못했다.) 나는 아기가 웃을 때마다 같이 웃어 주었다. 그렂자 그 아기는 더욱더 활짝 웃으면서 이윽고 그작은 팔을 쭉 뻗어 내 옷을 만지작 거리면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기엄마가 아기의 팔을 확 낚아채더니 말도 아직 제대로 못 알아들을 것 같은 아이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떼끼, 안돼, 이 아저씨는 사탄이야, 나쁜 사람이야.”
그러더니 아예 자리를 털고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겨 앉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쿵쿵거렸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기독교의 종주국이라 할 미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한번도 개종했다는 생각을 안 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는 언제나 개종자일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참진리의 길을 떠나 잘못된 길로 들어선 사탄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성경에 쓰여 진 말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며 그 외외 모든 것은 惡의 일이라고한다.
이것은 진정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일이다. 예수님은 결코 종교를 만든 적이 없다. 교단을 만든적도 없다. 제자들 둥 네가 옳다, 너만 내 진정한 제자다 하신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항상 매춘부들과 세리들과 범죄자들과 소외자들과 함께하면서 당시 이스라엘 성직자들에게 ‘내침’이 아니라 ‘포옹’의 삶과 정신을 증거하셨다.
이 점이 바로 예수님을 위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는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과 자비가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에 나셨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위대한 가르침은 아주 좁은 소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로 인해 오염되고 있다. 그들은 위대하고 자비로운 지혜의 가르침을 증오의 독트린으로 변질시켰다.
한국에는 예수님의 이 위대한 자비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심지어 수많은 절들이 파괴되고 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절은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곳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절이란 귀중한 문화적 유산이자 재산이다. 우리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절이 훼손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경험할 때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이 이 현대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지 기가 막혀한다.
1996년, 내가 묵고있던 화계사에 세 번이나 불이 났다. 경찰은 기독교인을 범인으로 추정했다. 화계사는 불탄 절을 다시 세우고 개 보수하느라 1억여 원을 들여야 했다. 나를 비롯한 국제선원 스님들은 그 공사 때문에 며칠 밤낮을 매달려야 했다. 일을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놀람과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까지 일었다.
‘이곳은 우리가 사는 집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들이 믿는 신념과 우리가 믿는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집에 그것도 세번씩이나 불을 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행동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이 미국보다는 닫힌나라다.
미국에는 수잭 개의 사찰이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나라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불교 사찰에 불을 지른다든지 탱화를 훼손한다든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만약 이처럼 다른 문화, 전통에 대한 파괴 행위가 일어난다면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들고 일어나 데모를 할 것이다. 각자가 믿는 종교적 신념이 무엇이건 간에 미국사람들은 상대방이 신성한 공간이라고 믿는 곳을 훼손하는 일은 바로 자기들이 믿는 신성한 공간을 훼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큼은 그것도 오랜 불교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불교사찰에 대한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행위가 계속 일어나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나는 종교간의 불신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남남통일부터 해야 한다. 먼저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서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을 인정해줘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분노와 탄식을 쏟아내며 불에탄 법당을 수리하고 있을 때 우리의 절망을 한꺼번에 씼어준 위대한 분이 나타났다.
물탄 법당을 쓸고 닦고 정신이 없었는데 이웃 한국신학대학에서 한 교수님이 학생들과 함께 갑작스럼게 화계사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도는 흉물이된 법당을 둘러보시더니 주지스님께 깊은 사죄의 뜻을 전달했다. 신성한 법당에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일어난 것에 대해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깊은 사죄를 하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놀랐다. 한국에는 온통 닫힌 생각과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분도 계셨구나. 우리가 아직 한국을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
그 교수님은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의 김경재 목사님이셨다. 목사님은 함께 온 학생들과 법당을 둘러보셨다. 우리는 너무 기뻤다.
그닐 그 목사님과 학생들의 방문은 당장 수행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겠다고 울분에 찬 비애를 터뜨리기도 했던 우리 국제선원 스님들에게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그 일로 완전히 친구가 되었다. 일주일 후 김 교수님은 그의 화계사 방문이 단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었음을 입증하셨다. 주지스님을 다시 찾아오셔서 국제선원 스님 한 분에게 불교 강의를 좀 맟아 달라고 하신 것이다. 비록 한국신학대학과 화계사가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그런 일은 개교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건 정말 ‘사건’ 이었다.
나는 최근 한국에 이런열린 사고를 가진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15년 전 선철 큰스님은 영어로 번역된 법문인 《가야산의 울림》 (Echoes from Kaya Mountain) 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존경을 표현하셨다.
작년 겨울 남원 실상사에 갔다가 “성탄절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보고 너무 기뻤다. 그런데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더 기쁜일이 있었다. 한국신학대학 총학생회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석가탄신일을 경축합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을 교문앞에 걸어놓은 것이다. 참으로 기쁘고 기쁜일이다.
숭산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독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얘기들은 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방법으로 구전되어오는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神과 인간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신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버려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버려야 할 신이 있다면 아직 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워싱턴에 살고 있는 성공회 목사님 한 분이 우리와 함께 참선을 하기위해 종종 젠센터로 오십니다. 나는 그 목사님 초대로 가끔 워싱턴 성당에서 법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神을 죽일 수 없다면 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신은 이름도 형태도 없으며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신을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을 죽여야 진정한 신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래야 비로소 기독교와 선불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돌아켜보니 어느새 스님 생활 10년이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카톨릭 신자가 불교신자로, 그것도 수행자가 되었느냐고묻는다. 이른바 개종한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참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불교로 개종했는가?’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한번도 내가 종교를 바꿨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물론 기독교나 카톨릭이라는 하나의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분명 개종을 한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너무 바보같고 불쌍한 인간이다. 이 세계의 유일한 진리를 버리고 다른 길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서울에서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데 아주 열정에 찬,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찬 기독교 신자들이 나에게 다가와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가끔 일깨워주곤 한다. 그들은 내가 잿빛 승복을 입고 절에 가서 금불상 앞에 절을 한다면 죽어 지옥에 갈 것이 뻔하다고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한번도, 한순간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참선수행을 하고 경전을 읽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내 자신이 놀라곤 한다. 나는 매일 열심히 맑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 결코 나 혼자만의 안일을 위해 살지않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빌고 또 빈다. 이런 마음은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학창시절에도 가져보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러나 지하철에서 내게 안타까운 말을 던지는 그 사람들은 이런 내 마음을 잘 보지 못한다. 나의 미음이 비록 평화롭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오직 그들은 내 겉보습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 행복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지례 결론을 내려버린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행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 마포에 있는 ‘법화정사’라는 절에서 일요일 오후마다 강의를 했다.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지하철을 탓다. 일요일이었는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내가 탄 지하철 칸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열차 가운데 서서 열심히 소리를 지르며 얘기를 시작했다. 아주 우렁차고 열정적이며 힘이 넘치는 목소리여서 처음에 나는 그가 펜이나 우산을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읽던 책을 마저읽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남자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점점 더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귀에 바짝대고 뭔가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다. 처음엔 그 사람 말이 워낙 빨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뿔사, 우산 파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잠시 후 나는 그가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천히 들어보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오직 성경만 읽어라. 오직 예수님만 믿어라. 예수님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
나는 처음에 하도 놀라 온몸에 전율을 느껴졌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단전으로 숨을 싶게 들이쉬고 내쉬었다.를 반복했다. 물론 그전에도 이런글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어 이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가까이 와서 소리치는 경우는 없었다. 좀 당혹스러웠다.
그는 나에게 뭔가 계솟 얘기를 해댔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흥분에 가득찼다.
“조심하라, 사탄들이 권하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 마라.”
그는 내 귀에 똑바로 서서 쉬지않고 퍼부어댔다. 나는 점점 더 앞으로 밀려나 지하철문 유리창에 안경이 닿을 정도까지 되었다. 나는 결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 일들을 여러 번 겪고 나서 내가 다짐한 것은 그런 사람들과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면 그 사람들은 더 화를 낸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의 무관심에는 아랑곳없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다른 종교를 믿지 마라. 그것들은 악마의 가르침이다. 만약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귀를 귀울이면 당신은 지옥으로 간다. 오직 예수님만이 당신의 전부다. 온 힘을 다 바쳐 예수를 믿어라 오직 예수만이 당신을 구한다. 금불상에 절하지 말라. 금불상에 절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라. 그것은 악마의 길로 빠지는 길이다. 신은 결코 이것을 허락하지 읺을 것이다. 우리가 IMF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고 우리나라에 금불상이 하도 많아 하느님이 우리를 벌주셨기 때문이다. 제발 그렇게 하지마라. 오직 예수만이 우리와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다.”.
나는 계속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사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단전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평온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내 주의 사람들은 내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안타까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대해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는 계속 내 뒤에서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성경을 읽으세요! 성경을 읽으세요 !”
나는 속으로 약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그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수십번도 더 읽었는데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성경을 따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는 이해해줄까. 마침내 그는 내 옆을 떠났다. 그리고는 이내 열차안에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한국에 사탄의 종교가 판을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함니다.”
이런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내겐 별 특별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화계사 국제선원 스님들 모두가 겪는 일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미국인이면서 승복을 입은 내가 정작 자기 동포들보다 더 안타까운지 나를 향해 아주 절절한 목소리로 외치곤 한다. 어서 빨리 하느님을 찾아 천당에 가야한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교회 팸플랫을 내 주머니에 찔러놓기도 하고 자기 네 교회에 나와 예배를 꼭 보라고 간곡하게 권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내 팔목을 잡아 끌기까지 하면서 소리를 지른다.
“당신 미국에서 온 것 맞지요. 미국 아저씨. 미국은 예수님 나라 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사탄의 가르침을 믿읍니까?”
그리고 아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지하철에 탄 사람들을 향해 “악마의 말을 전하는 사탄”이라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성경만이 진리를 담고 있고 불경은 지옥으로 이끄는 죄의 말이라고 성토한 뒤 일일이 성경구절을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예수님께 감사하고 있으며 예수님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하는지 성경책에서 글귀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한번 시도 했다가 큰 모욕을 당한 적이 있어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무슨 대응이라도 할라치면 ‘어찌 감히 이런 옷(승복을 가리키며)을 입고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느냐’고 따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나를 따라 내려 내 앞길을 막으며 나와 논쟁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얘기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내 부모님이 나에게 베푸셨듯,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은 부모님 같은 사랑으로, 아니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못나고 어리석고 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크신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당신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군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지하철 내 옆자리에 아기를 안은 엄마가 앉아 있었다. 그 아기는 눈이 파란 사람을 처음 보았는지 자꾸 내 얼굴을 보고 방실방실 웃어댔다.(나는 한국의 아기들을 너무 좋아한다.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기들을 이 세상 어디서도 모지 못했다.) 나는 아기가 웃을 때마다 같이 웃어 주었다. 그렂자 그 아기는 더욱더 활짝 웃으면서 이윽고 그작은 팔을 쭉 뻗어 내 옷을 만지작 거리면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기엄마가 아기의 팔을 확 낚아채더니 말도 아직 제대로 못 알아들을 것 같은 아이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떼끼, 안돼, 이 아저씨는 사탄이야, 나쁜 사람이야.”
그러더니 아예 자리를 털고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겨 앉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쿵쿵거렸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기독교의 종주국이라 할 미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한번도 개종했다는 생각을 안 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는 언제나 개종자일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참진리의 길을 떠나 잘못된 길로 들어선 사탄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성경에 쓰여 진 말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며 그 외외 모든 것은 惡의 일이라고한다.
이것은 진정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일이다. 예수님은 결코 종교를 만든 적이 없다. 교단을 만든적도 없다. 제자들 둥 네가 옳다, 너만 내 진정한 제자다 하신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항상 매춘부들과 세리들과 범죄자들과 소외자들과 함께하면서 당시 이스라엘 성직자들에게 ‘내침’이 아니라 ‘포옹’의 삶과 정신을 증거하셨다.
이 점이 바로 예수님을 위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는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과 자비가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에 나셨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위대한 가르침은 아주 좁은 소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로 인해 오염되고 있다. 그들은 위대하고 자비로운 지혜의 가르침을 증오의 독트린으로 변질시켰다.
한국에는 예수님의 이 위대한 자비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심지어 수많은 절들이 파괴되고 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절은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곳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절이란 귀중한 문화적 유산이자 재산이다. 우리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절이 훼손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경험할 때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이 이 현대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지 기가 막혀한다.
1996년, 내가 묵고있던 화계사에 세 번이나 불이 났다. 경찰은 기독교인을 범인으로 추정했다. 화계사는 불탄 절을 다시 세우고 개 보수하느라 1억여 원을 들여야 했다. 나를 비롯한 국제선원 스님들은 그 공사 때문에 며칠 밤낮을 매달려야 했다. 일을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놀람과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까지 일었다.
‘이곳은 우리가 사는 집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들이 믿는 신념과 우리가 믿는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집에 그것도 세번씩이나 불을 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행동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이 미국보다는 닫힌나라다.
미국에는 수잭 개의 사찰이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나라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불교 사찰에 불을 지른다든지 탱화를 훼손한다든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만약 이처럼 다른 문화, 전통에 대한 파괴 행위가 일어난다면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들고 일어나 데모를 할 것이다. 각자가 믿는 종교적 신념이 무엇이건 간에 미국사람들은 상대방이 신성한 공간이라고 믿는 곳을 훼손하는 일은 바로 자기들이 믿는 신성한 공간을 훼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큼은 그것도 오랜 불교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불교사찰에 대한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행위가 계속 일어나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나는 종교간의 불신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남남통일부터 해야 한다. 먼저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서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을 인정해줘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분노와 탄식을 쏟아내며 불에탄 법당을 수리하고 있을 때 우리의 절망을 한꺼번에 씼어준 위대한 분이 나타났다.
물탄 법당을 쓸고 닦고 정신이 없었는데 이웃 한국신학대학에서 한 교수님이 학생들과 함께 갑작스럼게 화계사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도는 흉물이된 법당을 둘러보시더니 주지스님께 깊은 사죄의 뜻을 전달했다. 신성한 법당에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일어난 것에 대해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깊은 사죄를 하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놀랐다. 한국에는 온통 닫힌 생각과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분도 계셨구나. 우리가 아직 한국을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
그 교수님은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의 김경재 목사님이셨다. 목사님은 함께 온 학생들과 법당을 둘러보셨다. 우리는 너무 기뻤다.
그닐 그 목사님과 학생들의 방문은 당장 수행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겠다고 울분에 찬 비애를 터뜨리기도 했던 우리 국제선원 스님들에게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그 일로 완전히 친구가 되었다. 일주일 후 김 교수님은 그의 화계사 방문이 단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었음을 입증하셨다. 주지스님을 다시 찾아오셔서 국제선원 스님 한 분에게 불교 강의를 좀 맟아 달라고 하신 것이다. 비록 한국신학대학과 화계사가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그런 일은 개교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건 정말 ‘사건’ 이었다.
나는 최근 한국에 이런열린 사고를 가진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15년 전 선철 큰스님은 영어로 번역된 법문인 《가야산의 울림》 (Echoes from Kaya Mountain) 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존경을 표현하셨다.
작년 겨울 남원 실상사에 갔다가 “성탄절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보고 너무 기뻤다. 그런데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더 기쁜일이 있었다. 한국신학대학 총학생회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석가탄신일을 경축합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을 교문앞에 걸어놓은 것이다. 참으로 기쁘고 기쁜일이다.
숭산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독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얘기들은 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방법으로 구전되어오는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神과 인간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신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버려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버려야 할 신이 있다면 아직 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워싱턴에 살고 있는 성공회 목사님 한 분이 우리와 함께 참선을 하기위해 종종 젠센터로 오십니다. 나는 그 목사님 초대로 가끔 워싱턴 성당에서 법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神을 죽일 수 없다면 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신은 이름도 형태도 없으며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신을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을 죽여야 진정한 신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래야 비로소 기독교와 선불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Thursday, March 8, 2012
만행 미국 불교의 열풍
미국의 불교 열풍
현재 미국에는 무려 1천 5백여만 명이 참선이나 비파사나 명상, 요가수행 등 동양식 수행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중 스스로 불교 신도를 자임하는 사람은 약 5백만 명 선으로 추산되고 비아시아계는 약 1백50만 정도이다.
미국은 서구의 불교붐은 달라이라마의 개인적 인기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1994년 미국의 ABC방송의 인기 높은 프로그램인 피터 제닝스의 ‘나이트 뉴스’는 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미국의 ‘불교 인구’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면서 1994년 현재 미국 인구의 4백만에서 6백만 명이 불교신자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 내 수 많은 기독교 종파들 중 그 어떤 종파보다도 많은 숫자라고 덧붙였다.
1994년 6월과 11월 사이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 〈USA 투데이〉 〈뉴스위크〉 〈뉴욕메거진〉 등 저명한 잡지에서도 당시 일기 시작한 불교붐을 주요기사로 다루었다.
1997년 10월 〈타임〉지는 유명배우인 브래드 피트를 표지 사진으로 한 커버 스토리로 ‘불교에 매혹된 미국’ 이라는 기사를 다루었다. 불교에 관심있는 지식인들과 할리우드 배우들을 소개했다. 이 기사는 프랑스 유명 영화감독 장 자크 아노의 말을 인용하면서 서양에서 불교는 이제 더 이상 낯선 종교가 아니라고 했다. 〈타임〉지에 따르면 1997년 10월 당시 미국의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은 무려 1천2백 권의 불교서적을 판매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마 1천 3백여 권 정도로 늘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한편 1998년 돈 모리알이라는 미국 사회학자는 《미국의 불교신자》라는 책을 내면서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불교센터, 수련원, 명상센터의 리스트와 전화번호를 작성했는데 그 페이지 수가 무려 350페이지나 됐다. 미국 내에서 불교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 책은 수개월 동안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올랐었다. 발간 당시 책에 수록된 불교 사찰과 참선수련센터는 총 429개였는데 1995년 개정판에 따르면 1천62개로 7년 만에 무려 세 배가 넘게 증가했다.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999년 현재 1천6백 개가 넘을 것이라고 한다
요즘 미국에서는 이 같은 열기를 반영하듯 매년 불교 잡지가 새로 창간되고 있으며 수백 개의 불교 관련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불교 잡지는 〈트리사이클〉(Tricycle)로 매달 20만 부가 팔린다. 이 잡지는 미국의 영향력있는 지식인들인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 알렌 긴즈버그 (Allen Ginsburg). 독일의 위대한 지성 위르겐 하버마스 (Jugen Habermas) 등 당대의 논객들이 주요 칼럼니스트이다. 탁월한 상상력으로 지적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호세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강의록도 발췌되어 실린다.
이 잡지 창간과 발간의 ‘돈줄’은 그 유명한 록펠러 일가이다. 록펠러 일가는 이뿐 아니라 지난 35년 동안 미국의 불교 포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특히 뉴욕시 북쪽에 거대한 일본식 사찰을 건축하는 데 거금을 냈다. ‘대보살사’라 명명된 이 절은 일본에 있는 대형사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지어져 유명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일본 목재를 들여와 일본인 목수의 손으로 직접 지었다 또한 록펠러 일가는 리처드 기어가 뉴욕시에 건립한 티베트 불교 포교 밑 티베트 난민지원센터인 〈티베트 하우스〉의 운영도 돕고 있다.
록펠러 일가의 한 사람인 스티븐 록펠러는 보스턴 북쪽에 있는 미들베리 대학의 불교학 교수로서 달라이라마를 가장 가까이에서 돕는 미국인 중의 한 사람이다.. .
지난 몇 년간 베스트 셀러가 된 책 중에는 불교 신자들이 쓴 책이거나 유명한 작가들이 쓴 불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미국의 일간지인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 목록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집계로 정평이 나 있다. 소설 부문과 비소설 부문으로 나뉘어 열 종씩 총 스무 종의 베스트 셀러가 매주 선정돼 소개 된다. 이중 비소설 부문에는 소설을 제외한 모든 장르의 책이 포함되기 때문에 특히 학자들은 너나할것없이 비소설 부분 베스트 셀러에 관심을 갖는다. 이 비소설 무문 베스트 셀러의 목록이야말로 요즘 미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인들이 무엇을 생가하며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 8월말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비소설 부문 10대 베스트 셀러에는 달라이라마의 책 두 권이 나란히 순위에 올랐다. 《행복의 기술》(The Art of Happiness)과 《새천년의 윤리》(Ethics for the Millennium)가 그것들이다.
2년 전에는 《티베트 경전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 (The Tibetan Book of Living and Dying)이 1위를 차지, 미국 전역에서 무려 1천만 부 이상이 팔렸다.
지난해 비소설 부문 1위는 《승려와 철학자》 (Monk and Philosopher)였다. 저자는 부자 관계로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한 사람은 승려다
아버지 장 프랑수아 르벨(Jean Francois Revel)은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중 한 사람이고 그의 아들 마티유 리카르( Mattieu Ricard)는 장차 프랑스 노벨상 기대주였다. 미티유는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프랑스 과학자 자크 모노(Jacque Monor) 의 조교를 지냈으며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구기관으로 꼽히는 파스티르 연구소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그러다 티베트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다.
“연구를 열심히 해서 과학 발전에 기여하는 삶도 값진 것 아니었겠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마티유는 이렇게 대답했다.
“운이 좋게도 저는 이 세상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사람들과 교류했습니다. 위대한 음악가들도 사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만나면서 ‘저것이 내가 열망하는 것인가? 나는 그들처럼 되고 싶은가? 라는 의분이 생겼습니다.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비록 그런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발휘하는 천재성을 빼면 가장 소박한 인간적인 완성, 예를 들자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든가 선량함 혹은 진실함이 동반되지 안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러다 인도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티베트의 우대한 스승 칸규르 린포제를 만났습니다. 단 3주일 동안 그를 만났을 뿐인데 저에겐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그저 선량함이 흐르는 70세의 노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분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서 저는 소위 ‘명상’이라는 것을 하는 듯한, 다시 말해 그분의 면전에서 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그분의 인격, 그분의 존재 자체였습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그분의 인격, 그분의 존재 자체였읍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깊이, 힘, 고요함이 제 정신을 열었던 것입니다.
영화에도 불교적 상상력을 도입해 흥행에 성공한 경우가 많다. 작년에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불록버스터 〈매트릭스〉는 곳곳에 불교적 세계관이 잘 녹아 있는 영화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올해 여름, 한국에서도 개봉돼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는 요즘 미국인들이 동양 사상, 특히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급기야 불교적 세계관을 대중문화까지 접목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다.
영화의 주인공인 네오는 컴퓨터 해커인데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닐 것 같다는 의심을 안고 산다. 그러나 스승 모피스를 만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이를 타파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 모피스는 네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다만 문을 열어주었을 따름이다.
모피스는 네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는 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꿈을 현실이라고 믿으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감각에 집착하며 흔들려 살고 있는 것이다.”
네오는 모피스외 그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그전까지 살아온 모든 일들이 헛된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꿈에서 깨어나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고통의 잠에서 깨우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피스는 네오에게 마음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영화는 불교의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주인공인 키아누 리브스를 비롯하여 감독, 시나리오 작가 모두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또 지난 여름 전 미국에서 6주 동안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 〈식스 센스〉는 죽은 사람의 의식을 볼 줄 알고 그 사람들돠 이야기를 나누는 신비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 역시 한국에 개봉돼 화제가 됐었다. 이 영화는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전생이나 환생에 대한 개념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불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인텔리 계층이다. 엘 고어 부통령이 불교 신자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다. 정치인이기 때문에 특정종교를 믿고 있다고 얘기하진 않지만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불교 교리에 감동과 존경을 보내고 있는지는 환경문제에 대한 그의 베스트 셀러인 《Earth in the Balance》에 잘 나와 있다고 보고 있다.
고어는 이 책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중생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지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고어 부통령이 읽은 수많은 불교책, 그리고 불교 학자들, 환경운동가들과의 대화에서 연유한 것들이다. 그는 또 달라이라마와도 정기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
불교는 미국에서만 인기 있는 게 아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독일, 영국, 네덜란드에서는 불교신자들의 숫자가 가하학적으로 늘고 있다. 프랑스 학자들은 향후 2,3년안에 프랑스에서 불교가 카톨릭과 회교에 이어 세번째로 신자가 많은 종교가 될 것이라고 한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아놀드 토인비 경은 죽기 2,3년 전에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기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이 나왔다.
“미래 역사가들이 만약 20세기 역사를 쓴다면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이었다고 쓸 것 같습니까?”
그들은 토인비의 입에서 제2차 세계대전, 원자폭탄 발명, 히틀러의 등장, 공산주의 확산, 비행기의 발명, 정보통신의 비약적인 발전 등이 나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이 서양에 전파된 것이지요.”
그 자라에 있었던 대부분 사람들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토인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현재 미국에는 무려 1천 5백여만 명이 참선이나 비파사나 명상, 요가수행 등 동양식 수행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중 스스로 불교 신도를 자임하는 사람은 약 5백만 명 선으로 추산되고 비아시아계는 약 1백50만 정도이다.
미국은 서구의 불교붐은 달라이라마의 개인적 인기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1994년 미국의 ABC방송의 인기 높은 프로그램인 피터 제닝스의 ‘나이트 뉴스’는 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미국의 ‘불교 인구’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면서 1994년 현재 미국 인구의 4백만에서 6백만 명이 불교신자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 내 수 많은 기독교 종파들 중 그 어떤 종파보다도 많은 숫자라고 덧붙였다.
1994년 6월과 11월 사이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 〈USA 투데이〉 〈뉴스위크〉 〈뉴욕메거진〉 등 저명한 잡지에서도 당시 일기 시작한 불교붐을 주요기사로 다루었다.
1997년 10월 〈타임〉지는 유명배우인 브래드 피트를 표지 사진으로 한 커버 스토리로 ‘불교에 매혹된 미국’ 이라는 기사를 다루었다. 불교에 관심있는 지식인들과 할리우드 배우들을 소개했다. 이 기사는 프랑스 유명 영화감독 장 자크 아노의 말을 인용하면서 서양에서 불교는 이제 더 이상 낯선 종교가 아니라고 했다. 〈타임〉지에 따르면 1997년 10월 당시 미국의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은 무려 1천2백 권의 불교서적을 판매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마 1천 3백여 권 정도로 늘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한편 1998년 돈 모리알이라는 미국 사회학자는 《미국의 불교신자》라는 책을 내면서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불교센터, 수련원, 명상센터의 리스트와 전화번호를 작성했는데 그 페이지 수가 무려 350페이지나 됐다. 미국 내에서 불교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 책은 수개월 동안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올랐었다. 발간 당시 책에 수록된 불교 사찰과 참선수련센터는 총 429개였는데 1995년 개정판에 따르면 1천62개로 7년 만에 무려 세 배가 넘게 증가했다.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999년 현재 1천6백 개가 넘을 것이라고 한다
요즘 미국에서는 이 같은 열기를 반영하듯 매년 불교 잡지가 새로 창간되고 있으며 수백 개의 불교 관련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불교 잡지는 〈트리사이클〉(Tricycle)로 매달 20만 부가 팔린다. 이 잡지는 미국의 영향력있는 지식인들인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 알렌 긴즈버그 (Allen Ginsburg). 독일의 위대한 지성 위르겐 하버마스 (Jugen Habermas) 등 당대의 논객들이 주요 칼럼니스트이다. 탁월한 상상력으로 지적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호세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강의록도 발췌되어 실린다.
이 잡지 창간과 발간의 ‘돈줄’은 그 유명한 록펠러 일가이다. 록펠러 일가는 이뿐 아니라 지난 35년 동안 미국의 불교 포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특히 뉴욕시 북쪽에 거대한 일본식 사찰을 건축하는 데 거금을 냈다. ‘대보살사’라 명명된 이 절은 일본에 있는 대형사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지어져 유명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일본 목재를 들여와 일본인 목수의 손으로 직접 지었다 또한 록펠러 일가는 리처드 기어가 뉴욕시에 건립한 티베트 불교 포교 밑 티베트 난민지원센터인 〈티베트 하우스〉의 운영도 돕고 있다.
록펠러 일가의 한 사람인 스티븐 록펠러는 보스턴 북쪽에 있는 미들베리 대학의 불교학 교수로서 달라이라마를 가장 가까이에서 돕는 미국인 중의 한 사람이다.. .
지난 몇 년간 베스트 셀러가 된 책 중에는 불교 신자들이 쓴 책이거나 유명한 작가들이 쓴 불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미국의 일간지인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 목록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집계로 정평이 나 있다. 소설 부문과 비소설 부문으로 나뉘어 열 종씩 총 스무 종의 베스트 셀러가 매주 선정돼 소개 된다. 이중 비소설 부문에는 소설을 제외한 모든 장르의 책이 포함되기 때문에 특히 학자들은 너나할것없이 비소설 부분 베스트 셀러에 관심을 갖는다. 이 비소설 무문 베스트 셀러의 목록이야말로 요즘 미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인들이 무엇을 생가하며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 8월말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비소설 부문 10대 베스트 셀러에는 달라이라마의 책 두 권이 나란히 순위에 올랐다. 《행복의 기술》(The Art of Happiness)과 《새천년의 윤리》(Ethics for the Millennium)가 그것들이다.
2년 전에는 《티베트 경전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 (The Tibetan Book of Living and Dying)이 1위를 차지, 미국 전역에서 무려 1천만 부 이상이 팔렸다.
지난해 비소설 부문 1위는 《승려와 철학자》 (Monk and Philosopher)였다. 저자는 부자 관계로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한 사람은 승려다
아버지 장 프랑수아 르벨(Jean Francois Revel)은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중 한 사람이고 그의 아들 마티유 리카르( Mattieu Ricard)는 장차 프랑스 노벨상 기대주였다. 미티유는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프랑스 과학자 자크 모노(Jacque Monor) 의 조교를 지냈으며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구기관으로 꼽히는 파스티르 연구소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그러다 티베트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다.
“연구를 열심히 해서 과학 발전에 기여하는 삶도 값진 것 아니었겠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마티유는 이렇게 대답했다.
“운이 좋게도 저는 이 세상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사람들과 교류했습니다. 위대한 음악가들도 사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만나면서 ‘저것이 내가 열망하는 것인가? 나는 그들처럼 되고 싶은가? 라는 의분이 생겼습니다.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비록 그런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발휘하는 천재성을 빼면 가장 소박한 인간적인 완성, 예를 들자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든가 선량함 혹은 진실함이 동반되지 안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러다 인도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티베트의 우대한 스승 칸규르 린포제를 만났습니다. 단 3주일 동안 그를 만났을 뿐인데 저에겐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그저 선량함이 흐르는 70세의 노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분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서 저는 소위 ‘명상’이라는 것을 하는 듯한, 다시 말해 그분의 면전에서 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그분의 인격, 그분의 존재 자체였습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그분의 인격, 그분의 존재 자체였읍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깊이, 힘, 고요함이 제 정신을 열었던 것입니다.
영화에도 불교적 상상력을 도입해 흥행에 성공한 경우가 많다. 작년에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불록버스터 〈매트릭스〉는 곳곳에 불교적 세계관이 잘 녹아 있는 영화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올해 여름, 한국에서도 개봉돼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는 요즘 미국인들이 동양 사상, 특히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급기야 불교적 세계관을 대중문화까지 접목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다.
영화의 주인공인 네오는 컴퓨터 해커인데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닐 것 같다는 의심을 안고 산다. 그러나 스승 모피스를 만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이를 타파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 모피스는 네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다만 문을 열어주었을 따름이다.
모피스는 네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는 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꿈을 현실이라고 믿으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감각에 집착하며 흔들려 살고 있는 것이다.”
네오는 모피스외 그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그전까지 살아온 모든 일들이 헛된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꿈에서 깨어나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고통의 잠에서 깨우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피스는 네오에게 마음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영화는 불교의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주인공인 키아누 리브스를 비롯하여 감독, 시나리오 작가 모두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또 지난 여름 전 미국에서 6주 동안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 〈식스 센스〉는 죽은 사람의 의식을 볼 줄 알고 그 사람들돠 이야기를 나누는 신비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 역시 한국에 개봉돼 화제가 됐었다. 이 영화는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전생이나 환생에 대한 개념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불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인텔리 계층이다. 엘 고어 부통령이 불교 신자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다. 정치인이기 때문에 특정종교를 믿고 있다고 얘기하진 않지만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불교 교리에 감동과 존경을 보내고 있는지는 환경문제에 대한 그의 베스트 셀러인 《Earth in the Balance》에 잘 나와 있다고 보고 있다.
고어는 이 책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중생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지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고어 부통령이 읽은 수많은 불교책, 그리고 불교 학자들, 환경운동가들과의 대화에서 연유한 것들이다. 그는 또 달라이라마와도 정기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
불교는 미국에서만 인기 있는 게 아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독일, 영국, 네덜란드에서는 불교신자들의 숫자가 가하학적으로 늘고 있다. 프랑스 학자들은 향후 2,3년안에 프랑스에서 불교가 카톨릭과 회교에 이어 세번째로 신자가 많은 종교가 될 것이라고 한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아놀드 토인비 경은 죽기 2,3년 전에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기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이 나왔다.
“미래 역사가들이 만약 20세기 역사를 쓴다면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이었다고 쓸 것 같습니까?”
그들은 토인비의 입에서 제2차 세계대전, 원자폭탄 발명, 히틀러의 등장, 공산주의 확산, 비행기의 발명, 정보통신의 비약적인 발전 등이 나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이 서양에 전파된 것이지요.”
그 자라에 있었던 대부분 사람들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토인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Wednesday, March 7, 2012
만행 서양의 불교 바람
만행 서양의 불교 바람
세계적 농구스타인 마이클 조던, 세계적 연화배우인 리처드 기어, 카아누 리브스, 해리스 포드, 톰 행크스, 브래드 피트, 윌리엄 데포, 맥 라이언, 스티븐 시걸, 에디 머피, 우피 골드버그, 우마 서먼, 가수 마돈나, 티나 터너, 레너드 코헨,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이름만 듣고도 아하 그 사람! 하고 탄성을 내지르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은 요즘 하나같이 참선수행과 불교에 심취해있는 세계적 스타들이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이니 사실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마이클 조던이 참선수행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타임〉지는 1999년 1월 그의 은퇴를 다룬 커버 스토리 기상에서 조던이 선수시절 매일 참선수행을 해왔는데 그로 인해 경기에서 더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소개했다. 〈타임〉지는 참선수행이 개인플레이가 강하던 조단을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선수로 변모시켰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가 소속한 시카고 불스가 우승했을 때였다. 그의 옆에 몰려든 수백 명의 기자중 한 기자가 “상대편 유타 재즈 선수들은 시카고 불스 선수들보다 젊고 빠른데 어떻게 이길 수가 있었느냐”고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조던은 “참선수행의 힘”이라고 잘라 말했다.
“참선수행이 우리 팀을 한마음으로 만들었다. 필 잭슨 감독은 지난 28년 동안 일본 선사 밑에서 참선수행을 해왔다. 그는 시카고 불스에 신인선수가 들어올 때마다 스즈키 로쉬의《선의 마음 ,초발심》이라는 책을 권한다.그리고 참선수행 프로그램 참여를 권유한다. 나 역시 감독의 권유로 참선을 시작했다. 참선은 나의 급한 성격을 열정과 자신감으로 뒤바꿔놓았다.”
리처드 기어는 마이클 조던과 함께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불교신자이다. 그는 달라이 라마와도 아주 가까운 사이이고 현재 티벳 불교의 잔파와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수 백만 달러를 기부해 인도와 티벳에 있는 티벳 사찰을 지원한다. 또 미국에 티벳 불교 전파와 티벳 독립 운동을 지휘하는 뉴욕 ‘티벳 하우스’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미국 국회에도 초청돼 티벳의 실지 상황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증언했다.동료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포교를 하고 기금을 모아 전세계 티벳 난민과 스님들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1997년 중국 장쩌민 주석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에서 공식 만찬이 열리던 날 리처드 기어는 미국의 수많은 티벳불교 신자들과 티벳 해방을 외치는 큰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활동은 중국 정부의 미음을 사, 그는 현재 중국 입국이 금지된 사람이다.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ABC 방송의 ‘오프라 윈프리 쑈’에 출연, 불교에 관한 특별대담을 가져 전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았었다.
리처드 기어는 영화배우로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왔다고 한다. 지난 25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 시간 이상은 참선을 했다고 하니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엔 일본승려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8, 9년 전 우연히 티벳 여행을 갔다가 티벳 불교에 반해 지금은 열렬한 티벳 불교 신자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언론 매채와의 인터뷰 때마다 “출가를 해 스님이 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리처드 가어는 1998년 1월 그동안 티벳과 네팔, 인도의 티벳 망명자 거주지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인 ‘쑨례자”라는 전시회를 달라이 라마의 대만 방문에 맞춰 열었다.
그는 대만에 도착해 기자회견에서 “나는 기독교인이었으나 항상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허털감을 갖고 있었다.”며 “그러나 달라이 람말를 통해 ㅂ불교를 만나 모든 것에 의문을 제게할 용기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미돈나는 요즘 요가에 심취해 있다. 그녀는 스타가 된 뒤 인터뷰할 때마다 한상 남자친구나 섹스 이야기뿐이었는데 최근에 자신이 영적인 수행의 하나로 요가를 하고 있다고 밝혀 관심을 모았다.
어렸을 때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이제 전생이나 내생에 대해서도 강하게 믿는다고 했다.
헤리슨 포드, 스티븐 시걸 역시 독실한 불교 신자다. 특히 티벳 불교에 심취해 있다. 그들은 기회가 나면 티벳이나 네팔, 인도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온다.
팝송 ‘I’m your man’으로 유명한 가수 레너드 코헨은 지금 63세인데 지난 30년 동안 일본 선사 밑에서 참선수행을 해왔다. 그는 현재 출가해 일본 불교를 포교하는 스님으로 살고 있다.
티벳 불교
미국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티벳 불교와 한국 불교는 어떤 면에서 아주 비슷하다. 둘 다 大慈大悲心과 智慧를 강조 한다. 스승들은 아주 힘이 넘쳐흐른다. 또 두나라 불교 모두 사머니즘 색채가 있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각자의 나라에 뿌리깊게 박혀 있던 사머니즘 전통과 불교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두 불교 모두 수행 스타일이나 가르침 스타일이 비슷하기 때문에 한 사찰에서 같이 수행하기도 한다.
미국 내에서 달라이 라마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에반스톤에 있는 ‘세계 新思考협회’의 이사 바바라 필즈 번스탄인은 달라이 라마를 가르켜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이래 인종과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유일한 지도자”라고 극찬했다.
올해 여름 한국의 광복절인 8월 15일에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달라이 라마 강연에는 무려 4만여 청중이 운집했다. 연예 공연 흥행집회를 빼면 교황말고 이처럼 많은 사람을 모은 집회는 없다.고 한다. 미언론들은 현재 미국에 세번째 아시아 사상붐이 일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달라이 라마와 티벳 불교가 이 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거 두 차례 있었던 아시아 열풍은, 19세기 불교와 힌두교에서 영향받은 초월주의 열풍과 60년대 자본주의와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각광받았던 불교붐이었다. 현재 달라이라마가 주도하고 있는 세번째 열풍은 티벳 불교와 일본 불교, 선 등의 아시아 사상으로 이들 사상은 물질문명에 신물이 난 미국인들의 정신적 도피처로 광범위한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 언론인들의 분석이다. 여깅에 리처드 기어, 스티븐 시걸, 줄리아 로보츠, 해리슨 포드, 미틴 스콜세지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티벳〈 불교의 홍보에 나서면서 달라이라마 붐을 형성해가고 있다.
달라이라마는 뉴욕 센트럴 파크 강연뿐 아니라 8월 한 달 동안 미국을 여행하며 강연했다. 특히 이중에는 인디아나주도 포함되어 있었다.인디애나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적 문화가 강한 곳인데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달라이 라마의 강연을 경청했다.
지난 8월 17일터 달라이라마가 방문중인 인디애나주의 불루밍턴에서는 오래 전부터 행사준비를 해왔다고 한다. 현지 티벳 문화센터는 행사 장소에 수 천명을 수용할 텐트를 세우고 에어컨 시걸을 완료했다. 행사기간 12일 동안 투입되는 예산은 2백만 달러, 8월 28일 시카고 자연사 박물관에서 열렸던 달라이라마 강연회의 125달러짜리 입장권은 사전에 거의 매진 됐다.
달라이라마와 가까운 서양의 수도승 니콜라스 브리랜드 뉴욕 티벳 센터 소장은 달라이라마의 미국방문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총책임자다. 달라이라마와의 인연은 1979년 인도에서 그의 사진을 찍으면서 시작됐다. 당시로선 드믈게 명상과 수행에 관심을 가진 벽안의 청년에게 달라이라마는 첫 미국행의 공식 카메라맨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뉴욕 대학 출신의 사진작가 니콜라스는 이후 티벳 불교에 심취, 수도승이 되기로 결심했다.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의 할머니 다이애나는 패션잡지 〈하버스 바자〉의 편집장을 지낸 패션계의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녀는 생전에 손자의 결심에 실망하여 의절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외교관, 어머니는 시인, 동생은 최고급 남성복을 만드는 아르마니의 수석 부사장이다.
니콜라스는 티벧센터 초대소장인 키용라 아토 린포체를 만나 다시 태어났다. 14년간 인도 사원에서 고행을 한 그는 이제 “전기도 전화도 뜨거운 물도 없는 인도의 사원 생활보다 맨해튼 생활이 더 힘들다”고 토로한다.
세계적 농구스타인 마이클 조던, 세계적 연화배우인 리처드 기어, 카아누 리브스, 해리스 포드, 톰 행크스, 브래드 피트, 윌리엄 데포, 맥 라이언, 스티븐 시걸, 에디 머피, 우피 골드버그, 우마 서먼, 가수 마돈나, 티나 터너, 레너드 코헨,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이름만 듣고도 아하 그 사람! 하고 탄성을 내지르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은 요즘 하나같이 참선수행과 불교에 심취해있는 세계적 스타들이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이니 사실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마이클 조던이 참선수행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타임〉지는 1999년 1월 그의 은퇴를 다룬 커버 스토리 기상에서 조던이 선수시절 매일 참선수행을 해왔는데 그로 인해 경기에서 더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소개했다. 〈타임〉지는 참선수행이 개인플레이가 강하던 조단을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선수로 변모시켰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가 소속한 시카고 불스가 우승했을 때였다. 그의 옆에 몰려든 수백 명의 기자중 한 기자가 “상대편 유타 재즈 선수들은 시카고 불스 선수들보다 젊고 빠른데 어떻게 이길 수가 있었느냐”고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조던은 “참선수행의 힘”이라고 잘라 말했다.
“참선수행이 우리 팀을 한마음으로 만들었다. 필 잭슨 감독은 지난 28년 동안 일본 선사 밑에서 참선수행을 해왔다. 그는 시카고 불스에 신인선수가 들어올 때마다 스즈키 로쉬의《선의 마음 ,초발심》이라는 책을 권한다.그리고 참선수행 프로그램 참여를 권유한다. 나 역시 감독의 권유로 참선을 시작했다. 참선은 나의 급한 성격을 열정과 자신감으로 뒤바꿔놓았다.”
리처드 기어는 마이클 조던과 함께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불교신자이다. 그는 달라이 라마와도 아주 가까운 사이이고 현재 티벳 불교의 잔파와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수 백만 달러를 기부해 인도와 티벳에 있는 티벳 사찰을 지원한다. 또 미국에 티벳 불교 전파와 티벳 독립 운동을 지휘하는 뉴욕 ‘티벳 하우스’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미국 국회에도 초청돼 티벳의 실지 상황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증언했다.동료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포교를 하고 기금을 모아 전세계 티벳 난민과 스님들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1997년 중국 장쩌민 주석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에서 공식 만찬이 열리던 날 리처드 기어는 미국의 수많은 티벳불교 신자들과 티벳 해방을 외치는 큰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활동은 중국 정부의 미음을 사, 그는 현재 중국 입국이 금지된 사람이다.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ABC 방송의 ‘오프라 윈프리 쑈’에 출연, 불교에 관한 특별대담을 가져 전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았었다.
리처드 기어는 영화배우로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왔다고 한다. 지난 25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 시간 이상은 참선을 했다고 하니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엔 일본승려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8, 9년 전 우연히 티벳 여행을 갔다가 티벳 불교에 반해 지금은 열렬한 티벳 불교 신자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언론 매채와의 인터뷰 때마다 “출가를 해 스님이 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리처드 가어는 1998년 1월 그동안 티벳과 네팔, 인도의 티벳 망명자 거주지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인 ‘쑨례자”라는 전시회를 달라이 라마의 대만 방문에 맞춰 열었다.
그는 대만에 도착해 기자회견에서 “나는 기독교인이었으나 항상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허털감을 갖고 있었다.”며 “그러나 달라이 람말를 통해 ㅂ불교를 만나 모든 것에 의문을 제게할 용기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미돈나는 요즘 요가에 심취해 있다. 그녀는 스타가 된 뒤 인터뷰할 때마다 한상 남자친구나 섹스 이야기뿐이었는데 최근에 자신이 영적인 수행의 하나로 요가를 하고 있다고 밝혀 관심을 모았다.
어렸을 때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이제 전생이나 내생에 대해서도 강하게 믿는다고 했다.
헤리슨 포드, 스티븐 시걸 역시 독실한 불교 신자다. 특히 티벳 불교에 심취해 있다. 그들은 기회가 나면 티벳이나 네팔, 인도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온다.
팝송 ‘I’m your man’으로 유명한 가수 레너드 코헨은 지금 63세인데 지난 30년 동안 일본 선사 밑에서 참선수행을 해왔다. 그는 현재 출가해 일본 불교를 포교하는 스님으로 살고 있다.
티벳 불교
미국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티벳 불교와 한국 불교는 어떤 면에서 아주 비슷하다. 둘 다 大慈大悲心과 智慧를 강조 한다. 스승들은 아주 힘이 넘쳐흐른다. 또 두나라 불교 모두 사머니즘 색채가 있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각자의 나라에 뿌리깊게 박혀 있던 사머니즘 전통과 불교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두 불교 모두 수행 스타일이나 가르침 스타일이 비슷하기 때문에 한 사찰에서 같이 수행하기도 한다.
미국 내에서 달라이 라마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에반스톤에 있는 ‘세계 新思考협회’의 이사 바바라 필즈 번스탄인은 달라이 라마를 가르켜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이래 인종과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유일한 지도자”라고 극찬했다.
올해 여름 한국의 광복절인 8월 15일에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달라이 라마 강연에는 무려 4만여 청중이 운집했다. 연예 공연 흥행집회를 빼면 교황말고 이처럼 많은 사람을 모은 집회는 없다.고 한다. 미언론들은 현재 미국에 세번째 아시아 사상붐이 일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달라이 라마와 티벳 불교가 이 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거 두 차례 있었던 아시아 열풍은, 19세기 불교와 힌두교에서 영향받은 초월주의 열풍과 60년대 자본주의와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각광받았던 불교붐이었다. 현재 달라이라마가 주도하고 있는 세번째 열풍은 티벳 불교와 일본 불교, 선 등의 아시아 사상으로 이들 사상은 물질문명에 신물이 난 미국인들의 정신적 도피처로 광범위한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 언론인들의 분석이다. 여깅에 리처드 기어, 스티븐 시걸, 줄리아 로보츠, 해리슨 포드, 미틴 스콜세지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티벳〈 불교의 홍보에 나서면서 달라이라마 붐을 형성해가고 있다.
달라이라마는 뉴욕 센트럴 파크 강연뿐 아니라 8월 한 달 동안 미국을 여행하며 강연했다. 특히 이중에는 인디아나주도 포함되어 있었다.인디애나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적 문화가 강한 곳인데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달라이 라마의 강연을 경청했다.
지난 8월 17일터 달라이라마가 방문중인 인디애나주의 불루밍턴에서는 오래 전부터 행사준비를 해왔다고 한다. 현지 티벳 문화센터는 행사 장소에 수 천명을 수용할 텐트를 세우고 에어컨 시걸을 완료했다. 행사기간 12일 동안 투입되는 예산은 2백만 달러, 8월 28일 시카고 자연사 박물관에서 열렸던 달라이라마 강연회의 125달러짜리 입장권은 사전에 거의 매진 됐다.
달라이라마와 가까운 서양의 수도승 니콜라스 브리랜드 뉴욕 티벳 센터 소장은 달라이라마의 미국방문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총책임자다. 달라이라마와의 인연은 1979년 인도에서 그의 사진을 찍으면서 시작됐다. 당시로선 드믈게 명상과 수행에 관심을 가진 벽안의 청년에게 달라이라마는 첫 미국행의 공식 카메라맨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뉴욕 대학 출신의 사진작가 니콜라스는 이후 티벳 불교에 심취, 수도승이 되기로 결심했다.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의 할머니 다이애나는 패션잡지 〈하버스 바자〉의 편집장을 지낸 패션계의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녀는 생전에 손자의 결심에 실망하여 의절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외교관, 어머니는 시인, 동생은 최고급 남성복을 만드는 아르마니의 수석 부사장이다.
니콜라스는 티벧센터 초대소장인 키용라 아토 린포체를 만나 다시 태어났다. 14년간 인도 사원에서 고행을 한 그는 이제 “전기도 전화도 뜨거운 물도 없는 인도의 사원 생활보다 맨해튼 생활이 더 힘들다”고 토로한다.
Wednesday, February 22, 2012
만행 어디에 있던지 그리운 한국
만행 어디에 있든지 그리운 한국
어느 날 큰스님께서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서울 화계사 생활이 4년째로 넘어가던 1997년 3월경 이었다. 큰스님께서 개인적으로 나를 부르시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는 사뭇 긴장했다. 그런데 큰스님은 난데없이 이런 말씀을 꺼내셨다.
“현각스님, 우리 미국 본사인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 자리가 비었습니다. 나는 스님께서 이 주지일을 좀 맡아주었으면 좋겠네요.”
프라비던스 젠 센터는 큰스님이 미국에 세운 첫 번째 절이다. 미국에 큰스님이 세운 젠 센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가장 큰 절이다. 커다란 선방이 세 개나 되고 주변에 땅도 아주 넓으며 절 입구에는 높이가 25미터나 되는 크고 높은 7층 목탑이 있다. 아주 아름다운 절이다. 그 절 주지가 된다는 것은 관음선종, 즉 숭산 큰스님 패밀리에서는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다.
나는 큰스님의 제의에 깜짝 놀랐다. 내가 그곳 주지 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 우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지직을 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큰스님은 기쁜 얼굴로 나에게 제안하고 계셨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큰스님,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행을 도해야 합니다.”
“아니에요. 현각스님은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
“큰스님, 저는 아직 너무 어려요.”
내가 하도 완강하니까 큰스님은 좀 실망하시는 눈치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나는 모처럼 내게 하신 큰스님의 청을 거절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죄송했다.
그런데 며칠 후 큰스님이 또 나를 불렀다.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다시 주지일을 권하리라. 아니나다를까.
“현각스님, 프라비던스에는 젊은 스님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현각스님의 에너지가 필요해요. 다른사람은 할 수 없어요. 현각스님만이 할 수 있어요.”
참으로 난감했다.
왜 큰스님은 내 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나를 곤란하게 하실까. 큰스님께서 나에게 주지 일을 부탁하셨으나 내가 거절했다는 소식이 화계사 국제선원에 쫙 퍼지자 스님들은 저마다 부러움 섞인 한마디씩을 던졌다.
“와, 현각스님 대단하다. 큰스님이 프라비던스 젠센터를 맡겼다고? 와, 큰 스님이 얼마나 현각 스님을 믿고 계신지 알 수 있는 증거야, 좋겠다, 현각스님.”
그런데 정작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두 번째 제의를 받던 날 나는 마치 마음속의 큰 비밀을 털어놓는 듯 비장하게 말씀 드렸다.
“큰스님, 저는 미국에 갈 수가 없읍니다”
마음속은 찢어지는 듯했다. 큰스님의 청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큰스님은 의아해하셨다.
“이건 현각스님에게 큰경험이 될 수 있어요. 왜 안 가려고 하지요?”
그래, 사실대로 말씀 드리자.
“큰스님, 사실은 정말 한국을 떠나고 싶지않읍니다. 제 일은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저는 정말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 사람들과 같이 살고 싶습니다.”
하하하, 큰스님께서 무릎을 치시며 웃으셨다.
“아이고, 그런 일이면 됐어 됐어. 난 무슨 큰 사정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영원히 미국가서 사는 것 아닌데 뭘 그래요. 당분간 떠나 있는 거에요. 당장 짐 싸세요.”
“큰스님, 정말 죄송합니다. 전 정말 한국을 떠나기 싫어요.”
나는 완강했다. 큰스님은 좀 놀라는 눈치셨다. 잠시 후 ‘알았다’며 나가보라고 하시는데 실망의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조용히 방을 물러나왔다.
그 소식을 들은 스님들이 “현각스님, 왜 그런 좋은 제의를 거절하세요? 아주 훌륭한 일이에요. 미국으로 가세요” 하며 재촉했다..
다시 사흘이 지났다.
큰스님이 나를 또 부르셨다. 나는 만약 이번에 큰스님이 제의를 해오시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 큰스님이 그렇게 권하시면 갈 수 밖에 없지.
나는 그분의 방으로 들어갔다. 큰스님은 다시 나에게 주지직을 맡으라고 권하셨다.
“현각스님,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당신을 원합니다.”
프라비던스 젠센터는 서울 화계사 다음으로 중요한 절이다. 미국에 세워진 숭산스님의 국제교구 본사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 나를 보내려고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간청을 하시는데 어떻게 또 거절한다는 말인가.
“알겠습니다. 그러면 2년만 하면 안 될까요? (보통 주지가 되면 5, 6년은 일해야 한다.) 2년 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럼 그럼, 그렇게 하세요.”
“동안거도 할 수 있습니까?”
“그럼, 현각스님이 주지니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알겠습니다. 미국으로 가겠습니다.
마침내 1997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나는 한국에서 다기섿트, 참선 방석, 서예작품, 한국 미술품 등을 가지고 가 젠센터를 완전히 한국식 전통 사찰로 꾸몄다.
어느 정도 주지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매일 한국가는 꿈을 꾸었다. 가슴속은 너무 슬프고 답답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듯 내게 많은 한국 선물을 보내줬다. 김치는 물론 한국 과자, 뽕짝 ∙ 가야금CD를 비롯해 그림, 염주, 김, 녹차,책, 잡지 등 한국에 관한 것은 모조리 보냈다. 나는 그것들을 읽고 듣고 먹으면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 친구가 CD 두 장을 보내왔는데 <서편제>와 <김덕수 사물놀이 패> CD 였다. 나는 CD 플레이어에 그것을 올려놓고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의 산하와 사람들이 너무 그리웠다.
‘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어느 날 조각가인 쌍둥이 동생 그랙이 주말에 나를 자기가 살고 있는 뉴욕 아파트로 초청했다. 동생 친구들 중에는 예술가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몇몇이 불교에 관심이 있다고 해 저녁에는 그들도 만나보기로 했다.
나는 동생과 시간을 보내다 저녁 약속 시간이 돼 나갈 준비를 하다 갑자기 CNN 방송에서 나온 프로그램 광고를 보았다. 곧이어 아홉 시에 〈 북한의 실상〉 (inside North Korea)이란 제목으로 북한을 취재한 보도 프로그램을 방영한다는 것이었다. 안내 방송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들 사진이 지나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랙에게 아홉 시에 저 프로를 꼭 봐야 하니 밥 먹다가 시간이 되면 일어나겠노라고 말했다. 그랙은 친구들이 얼마나 형을 가다렸는데 말도 안 된다며 마음을 바꾸라고 종용했다.
나는 동생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기계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일어날 시간이 되자.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서운해하는 눈길이 등뒤에 꽂혀있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그랙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내 TV를 지켜보았다. 먹지 못해 뼈만 남은 아이들, 퀭한 눈들, 몸은 완전히 말라붙어 머리만 기형적으로 큰 아이들, 너무 슬퍼 눈물이 흘렀다. 저들도 한국 사람 아닌가. 그런데 왜 저들에게 저런 천형과 같은 고통이 내리는 것일까.
많은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보았지만 그렇게 눈물을 흘려가며 본 적은 없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그랙이 들어왔다. 그랙도 내가 걱정이 됐는지 친구들과 그냥 차만 마시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형?”
“저것 좀 봐라. 저런 고통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
“형, 저건 우리나라 일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저 나라가 바로 내 나라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내 말에 그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형이 완전히 미쳤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뒤부터는 미국 생활이 더 힘들어졌다. 주지 생활도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이뤄졌다.
그 해 11월에 화계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 〈아라랑〉 국제방송에서 외국 스님의 만행기를 촬영하고 싶다고 요청이 왔다는 것이다. 여러 스님들이 의논한 결과 현각스님이 적격인 것 같으니 빨리 서울로 돌아와 촬영에 임하라는 말이었다.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싶어 좀 당황했지만 일단 한국에 갈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 내심 너무 기뻤다. 더구나 이번 일이 국제 선원을 홍보하고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해 더욱 마음이 움직였다. 또 큰스님께서도 좋은 일이라며 허락하셨다고 하니 금상첨화였다.
나는 드디어 그 해 10월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한국의 땅 냄새가 뼈에 사무치는 것 같았다. 아…… 이 그리운 냄새와 공기.
제작진들과 만나 한국의 산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은 한 달간 진행되었다. 힘들었지만 한국에 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미국에 돌아가 짐을 풀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한국에 IMF가 터져 온 나라가 6∙25이래 최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걱정이 돼서 신문, 방송을 끼고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뉴스를 틀어놓고 전날 밤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점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날이 갈수록 경제는 약화되고 있다는 소식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뉴욕 타임스〉 1면에 난 사진을 보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기를 업은 한국의 아줌마, 두꺼운 스웨터를 껴입은 할머니들이 은행 앞에 장사진을 친 사진이었다. 그 사진아래에는 한국이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는 설명과 함께 전국의 한국인들이 아기 돌 반지며 결혼반지까지 내놓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슬픔에 복 바쳐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라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이 착한 사람들.
미국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너도나도 한마음이 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인 것이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래 바로 이런 것 때문이야. 내가 그토록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나라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 것을 내놓는 사람들, 마음 한 켠에선 자랑스러운 마음까지 일었다. IMF 위기조차도 그들의 이런 순수한 마음까지 빼앗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할 수 있다’ 는 마음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나는 그때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큰스님께 전화를 했다.
“큰스님임…… 돌아가고 싶어요.”
“한국으로 보내주세요.”
아마 내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큰스님에게 이런 어린애 같은 간청도 가능했으리라. 한국의 승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쨌든 나의 간청에 큰스님도 어쩔 수가 없으셨는지 어느 날 미국으로 직접 전화를 해서 “좋다, 지도법사를 한 분 구했으니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로 당장 한국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 때가 1998년 1월 말이었다.
어느 날 큰스님께서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서울 화계사 생활이 4년째로 넘어가던 1997년 3월경 이었다. 큰스님께서 개인적으로 나를 부르시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는 사뭇 긴장했다. 그런데 큰스님은 난데없이 이런 말씀을 꺼내셨다.
“현각스님, 우리 미국 본사인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 자리가 비었습니다. 나는 스님께서 이 주지일을 좀 맡아주었으면 좋겠네요.”
프라비던스 젠 센터는 큰스님이 미국에 세운 첫 번째 절이다. 미국에 큰스님이 세운 젠 센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가장 큰 절이다. 커다란 선방이 세 개나 되고 주변에 땅도 아주 넓으며 절 입구에는 높이가 25미터나 되는 크고 높은 7층 목탑이 있다. 아주 아름다운 절이다. 그 절 주지가 된다는 것은 관음선종, 즉 숭산 큰스님 패밀리에서는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다.
나는 큰스님의 제의에 깜짝 놀랐다. 내가 그곳 주지 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 우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지직을 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큰스님은 기쁜 얼굴로 나에게 제안하고 계셨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큰스님,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행을 도해야 합니다.”
“아니에요. 현각스님은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
“큰스님, 저는 아직 너무 어려요.”
내가 하도 완강하니까 큰스님은 좀 실망하시는 눈치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나는 모처럼 내게 하신 큰스님의 청을 거절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죄송했다.
그런데 며칠 후 큰스님이 또 나를 불렀다.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다시 주지일을 권하리라. 아니나다를까.
“현각스님, 프라비던스에는 젊은 스님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현각스님의 에너지가 필요해요. 다른사람은 할 수 없어요. 현각스님만이 할 수 있어요.”
참으로 난감했다.
왜 큰스님은 내 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나를 곤란하게 하실까. 큰스님께서 나에게 주지 일을 부탁하셨으나 내가 거절했다는 소식이 화계사 국제선원에 쫙 퍼지자 스님들은 저마다 부러움 섞인 한마디씩을 던졌다.
“와, 현각스님 대단하다. 큰스님이 프라비던스 젠센터를 맡겼다고? 와, 큰 스님이 얼마나 현각 스님을 믿고 계신지 알 수 있는 증거야, 좋겠다, 현각스님.”
그런데 정작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두 번째 제의를 받던 날 나는 마치 마음속의 큰 비밀을 털어놓는 듯 비장하게 말씀 드렸다.
“큰스님, 저는 미국에 갈 수가 없읍니다”
마음속은 찢어지는 듯했다. 큰스님의 청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큰스님은 의아해하셨다.
“이건 현각스님에게 큰경험이 될 수 있어요. 왜 안 가려고 하지요?”
그래, 사실대로 말씀 드리자.
“큰스님, 사실은 정말 한국을 떠나고 싶지않읍니다. 제 일은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저는 정말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 사람들과 같이 살고 싶습니다.”
하하하, 큰스님께서 무릎을 치시며 웃으셨다.
“아이고, 그런 일이면 됐어 됐어. 난 무슨 큰 사정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영원히 미국가서 사는 것 아닌데 뭘 그래요. 당분간 떠나 있는 거에요. 당장 짐 싸세요.”
“큰스님, 정말 죄송합니다. 전 정말 한국을 떠나기 싫어요.”
나는 완강했다. 큰스님은 좀 놀라는 눈치셨다. 잠시 후 ‘알았다’며 나가보라고 하시는데 실망의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조용히 방을 물러나왔다.
그 소식을 들은 스님들이 “현각스님, 왜 그런 좋은 제의를 거절하세요? 아주 훌륭한 일이에요. 미국으로 가세요” 하며 재촉했다..
다시 사흘이 지났다.
큰스님이 나를 또 부르셨다. 나는 만약 이번에 큰스님이 제의를 해오시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 큰스님이 그렇게 권하시면 갈 수 밖에 없지.
나는 그분의 방으로 들어갔다. 큰스님은 다시 나에게 주지직을 맡으라고 권하셨다.
“현각스님,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당신을 원합니다.”
프라비던스 젠센터는 서울 화계사 다음으로 중요한 절이다. 미국에 세워진 숭산스님의 국제교구 본사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 나를 보내려고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간청을 하시는데 어떻게 또 거절한다는 말인가.
“알겠습니다. 그러면 2년만 하면 안 될까요? (보통 주지가 되면 5, 6년은 일해야 한다.) 2년 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럼 그럼, 그렇게 하세요.”
“동안거도 할 수 있습니까?”
“그럼, 현각스님이 주지니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알겠습니다. 미국으로 가겠습니다.
마침내 1997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나는 한국에서 다기섿트, 참선 방석, 서예작품, 한국 미술품 등을 가지고 가 젠센터를 완전히 한국식 전통 사찰로 꾸몄다.
어느 정도 주지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매일 한국가는 꿈을 꾸었다. 가슴속은 너무 슬프고 답답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듯 내게 많은 한국 선물을 보내줬다. 김치는 물론 한국 과자, 뽕짝 ∙ 가야금CD를 비롯해 그림, 염주, 김, 녹차,책, 잡지 등 한국에 관한 것은 모조리 보냈다. 나는 그것들을 읽고 듣고 먹으면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 친구가 CD 두 장을 보내왔는데 <서편제>와 <김덕수 사물놀이 패> CD 였다. 나는 CD 플레이어에 그것을 올려놓고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의 산하와 사람들이 너무 그리웠다.
‘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어느 날 조각가인 쌍둥이 동생 그랙이 주말에 나를 자기가 살고 있는 뉴욕 아파트로 초청했다. 동생 친구들 중에는 예술가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몇몇이 불교에 관심이 있다고 해 저녁에는 그들도 만나보기로 했다.
나는 동생과 시간을 보내다 저녁 약속 시간이 돼 나갈 준비를 하다 갑자기 CNN 방송에서 나온 프로그램 광고를 보았다. 곧이어 아홉 시에 〈 북한의 실상〉 (inside North Korea)이란 제목으로 북한을 취재한 보도 프로그램을 방영한다는 것이었다. 안내 방송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들 사진이 지나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랙에게 아홉 시에 저 프로를 꼭 봐야 하니 밥 먹다가 시간이 되면 일어나겠노라고 말했다. 그랙은 친구들이 얼마나 형을 가다렸는데 말도 안 된다며 마음을 바꾸라고 종용했다.
나는 동생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기계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일어날 시간이 되자.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서운해하는 눈길이 등뒤에 꽂혀있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그랙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내 TV를 지켜보았다. 먹지 못해 뼈만 남은 아이들, 퀭한 눈들, 몸은 완전히 말라붙어 머리만 기형적으로 큰 아이들, 너무 슬퍼 눈물이 흘렀다. 저들도 한국 사람 아닌가. 그런데 왜 저들에게 저런 천형과 같은 고통이 내리는 것일까.
많은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보았지만 그렇게 눈물을 흘려가며 본 적은 없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그랙이 들어왔다. 그랙도 내가 걱정이 됐는지 친구들과 그냥 차만 마시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형?”
“저것 좀 봐라. 저런 고통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
“형, 저건 우리나라 일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저 나라가 바로 내 나라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내 말에 그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형이 완전히 미쳤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뒤부터는 미국 생활이 더 힘들어졌다. 주지 생활도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이뤄졌다.
그 해 11월에 화계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 〈아라랑〉 국제방송에서 외국 스님의 만행기를 촬영하고 싶다고 요청이 왔다는 것이다. 여러 스님들이 의논한 결과 현각스님이 적격인 것 같으니 빨리 서울로 돌아와 촬영에 임하라는 말이었다.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싶어 좀 당황했지만 일단 한국에 갈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 내심 너무 기뻤다. 더구나 이번 일이 국제 선원을 홍보하고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해 더욱 마음이 움직였다. 또 큰스님께서도 좋은 일이라며 허락하셨다고 하니 금상첨화였다.
나는 드디어 그 해 10월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한국의 땅 냄새가 뼈에 사무치는 것 같았다. 아…… 이 그리운 냄새와 공기.
제작진들과 만나 한국의 산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은 한 달간 진행되었다. 힘들었지만 한국에 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미국에 돌아가 짐을 풀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한국에 IMF가 터져 온 나라가 6∙25이래 최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걱정이 돼서 신문, 방송을 끼고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뉴스를 틀어놓고 전날 밤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점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날이 갈수록 경제는 약화되고 있다는 소식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뉴욕 타임스〉 1면에 난 사진을 보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기를 업은 한국의 아줌마, 두꺼운 스웨터를 껴입은 할머니들이 은행 앞에 장사진을 친 사진이었다. 그 사진아래에는 한국이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는 설명과 함께 전국의 한국인들이 아기 돌 반지며 결혼반지까지 내놓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슬픔에 복 바쳐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라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이 착한 사람들.
미국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너도나도 한마음이 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인 것이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래 바로 이런 것 때문이야. 내가 그토록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나라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 것을 내놓는 사람들, 마음 한 켠에선 자랑스러운 마음까지 일었다. IMF 위기조차도 그들의 이런 순수한 마음까지 빼앗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할 수 있다’ 는 마음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나는 그때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큰스님께 전화를 했다.
“큰스님임…… 돌아가고 싶어요.”
“한국으로 보내주세요.”
아마 내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큰스님에게 이런 어린애 같은 간청도 가능했으리라. 한국의 승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쨌든 나의 간청에 큰스님도 어쩔 수가 없으셨는지 어느 날 미국으로 직접 전화를 해서 “좋다, 지도법사를 한 분 구했으니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로 당장 한국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 때가 1998년 1월 말이었다.
Tuesday, February 21, 2012
만행 부모님전 상서
만행 부모님전 상서 萬行 父母任 前上書
나는 지금까지 큰스님에게 두 번 혼찌검이 난 일이 있다. 모두 스님 생활 초창기 때의 일인데, 그대 어떻게나 혼이 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빨개진다.
나는 큰스님 일행과 함께 미국 프라비던스 젠센터로 돌아왔다. 처음엔 스님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 동안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스님이 되니까 사람들이 ‘이것은 안 돼’ ‘저건 하면 안 돼’ 하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유롭기 위해 스님이 된 것인데 사람들의 그런 간섭이 좀 참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만 스님이 되였지 마음속은 아직도 ‘나’ 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너는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났다는 자만심 말이다.
며칠 뒤, 큰스님의 법문이 있던 날이었다. 마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스님들과 같은 줄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큰스님이 들어오시면서 나를 보시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는 게 아닌가.
“갓 출가한 승려가 뒤로 앉아야지, 어떻게 감히 다른 스님들과 함께 앞자리에 앉는가.”
어찌나 화를 내시던지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큰스님의 말씀대로 뒤로 물러가 앉으면서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스님 생활이 너무 어렵다고 느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약은 입에 쓰지만 병을 치료하려면 그 쓴 약도 먹어야 한다. 나를 죽여야 한다. 나를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 에게 한없이 되뇌었다.
또 한번 혼찌검이 난 것은 부모님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과연 내가 스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놀라실까. 어떻게 이 일을 알려야 하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렇게 ‘버리지 못하고’ 고통에 허우적대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도반스님 중 한 분이 내 고통을 눈치챘는지 큰스님께 여쭈어보면 뭔가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제안하셨다. 나는 용기를 내 큰스님을 뵙기로 했다.
어느 날 밤, 큰스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미침 큰스님께서는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는지 두루마기를 벗고 계셨다.
큰스님은 베개를 제자리에 놓으며 나를 맞이하셨다.
“무슨 일이지요?”
한밤중에 난데없는 방문이기도 했고 내 얼굴이 무척 안돼 보였는지 큰스님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 부모님 문제를 말씀 드렸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스님은 이렇게 소리치셨다.
“부처님은 가족과 왕궁을 다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 가셨읍니다. 오직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케이?”
그리고는 일어서서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갑작스런 큰스님의 꾸지람에 당혹스러웠다. 주무시는 시간을 방해한 것도 죄스러운데 잠을 마다하고 방을 나가버리시니 이런 큰일이 어디 있는가 방문 닫히는 소리가 얼마나 무섭고 컸던지 나는 기절할 뻔했다.
큰 스님으로부터 받은 그 꾸지람은 그때 두 번이 다였지만 어떤 말씀, 어떤 위로보다 더 큰 가르침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큰스님의 꾸지람을 잊지 못한다. 그 이후에도 내 마음속에 주저와 안일한 마음이 일 때면 큰스님의 그때 그 목소리를 되새기며 버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마침내 마음을 정리했다.
내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나는 자판을 두드리면서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부모님 가슴을 면도날로 슥슥 긋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편지를 받고 고통에 빠질 부모님 머리 위에서 잔인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께.
저는 지금 중국에서 한 달 동안의 수행을 막 끝내고 돌아온 길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주 재미있고 신비했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을 다시 뵙게 돼 기뻐요. 지난 여행은 아주 행복한 여행이었고 그 수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제가 정말 행운아 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모님께 몇 년 동안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을 말씀 드리려 합니다.
저는 스님이 되기로 했습니다. 이미 지난 달 9월 7일 중국 남화사라는 절에서 숭산 큰스님 밑에서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부모님들께서 얼마나 충격을 받고 놀라실지, 두 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의 행동이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저는 출가를 생각해왔으니까요.
부모님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나중에 커서 평생을 종교 수행자로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것을 말이에요. 물론 그러한 제 결정은 때로 흔들리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했지만 이제 비로소 저는 제 길을 찾았습니다. 출가를 결정하기까지 제 마음속에 가장 큰 부담은 부모님과 여자친구였어요. 만약 그녀와 결혼을 하면 수도자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생각이 많았던 거지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녀와 결혼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계시겠지요.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여자입니다. 지난 3년동안 저희 둘의 관계는 그 어떤 연인 사이보다 완벽한 동반자 관계였읍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훌륭한 사이라 하더라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결국 ‘나’에 갇히고 맙니다. 내 아내, 내 자식들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저의 머릿속에는 지금 결혼을 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삶이 무엇이냐, 죽음이 무엇이냐,라는 의문이 가득해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계속 남아 있는 한 결혼을 한다 해도 가족에게 온전히 몰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 자신을 모르고서 지금 누군가와 편안하고 따뜻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녀를 만난 이후 표정이 더 밝아지고 짜증도 덜 부린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녀라고 믿고 계시지요?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저의 변화는 맑고 강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다름아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하루하루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저의 강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젠센터에 갔던 이유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의 본성을 깨달아 이 고통의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는 결심에 따라 ‘수행’을 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물론 저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고 지난 3년간 제 생애 처음으로 가장 편안하고 열정적이며 완벽한 연인 관계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둘의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생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들은 계속 남아 있었으며 더 깊어지고 강해졌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지난 며칠 동안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스님이 되겠다는 제 결심을 어떻게 부모님과 그녀에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저나 그녀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그녀는 지금 강연 차 유럽에 가 있읍니다.
저는 불교나 숭산 스님 때문에만 출가한 게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 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출가한 것입니다.
진리를 어떻게 찾을 것이냐 하는 점에서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입니다.
순수하고 맑은 길은 무엇입니까.
어머니, 아버지. 저는 그것을 찾고 싶습니다. 사회나 남들이 저에게 규정하는 기준이나 잣대에 따라 로봇처럼 살지 않고 제 본성을 찾아 살고 싶습니다.
아마 부모님은 종교 수행자가 되는 것까진 좋은데 카톨릭 신부나 수도사를 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보지도 듣지도 못한 한국인 승려 밑에서 불교 수행자가 되느냐고 기막혀하실 것입니다. 물론 카톨릭 신부나 수도사의 길이 옳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바는 결국 하나이니까요..
하지만 참선수행이야말로 제 마음을 알고 진리를 깨닫게 하는 가장 강한 도구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요즘에는 심지어 카톨릭 수도사님들이나 신부님, 수녀님, 목사님들도 참선수행을 하신답니다.
저는 제 스승이신 숭산 큰스님이 저를 가장 잘 알고 제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분이라는 것을 강하게 믿고 있읍니다. 큰스님은 오직 제가 저의 본성을 찾기를 바라고 계시며 이미 많은 가르침을 주셨읍니다. 제가 오직 참된 나를 찾을 때에라야만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 저의 작은 존재가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 .
‘스님’이란 말을 듣고 당혹스러우시겠지요.
카톨릭 수도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은 속세와는 좀 격리돼서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합니다.하지만 불교수행자들은 약간 다릅니다.
불가에서 얘기하는 ‘스님’이란 ‘스승’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 살며 서로 돕습니다. 스님이란 신도들에게 그저 길을 안내해주고 함께 일하는 동반자들일 뿐입니다. 일반 신도들과 다른 점이라면 매일 보다 열심히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특히 제가 출가하려는 ‘관음선종’에서 스님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마다 변호사 ∙의사∙목수∙회사원 등 직업을 갖고 있듯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겉의 직업은 달라도 내면의 직업은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의 본성을 찾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님이란 직업은 아주 특별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세속에서 얘기하는 돈이나 사회적 명예, 혹은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직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 다른 사람을 돕는 생활에 일평생을 바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 생은 물론 다음 생, 다음 생, 世世生生 이 세상의 고통과 함께 부대끼면서 말입니다.
‘참선’이란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순간순간에 이런 맑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아주 혹독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미 풋내기 스님으로서 이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집중적인 수행입니다. 그리고 제가 마음속에 가져온 의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평생 깊은 산속에 쳐 박혀 그저 바윗돌에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하늘을 응시하는 일을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돕는 거시입니다.
옛 선승이 하신 말씀을 하나 옮겨볼게요.
인간의 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
삶은 구름처럼 왔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본래 구름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 우리 인생의 오고 감
모두 이와 같다.
그러나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맑은 게 하나 있다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순수하고 맑든 게 있다.
그렇다면 맑고 깨끗한 것이 무엇인가?
아버지, 어머니. 저는 바로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저의 불효를 용서하세요.
제가 가는 이 길이 두 분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열심히 살아서 저의 본성과 진리를 찾으면 저는 중생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져서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저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앞이 안보여 벌써 몇 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지 모릅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두 분 가슴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
제가 가는 이 길이 그렇게 고생해서 저를 키운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길이라 하더라도 저의 겉 모습에 너무 괘념치 말아주세요. 저는 죽을 때까지 두 분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 살아갈 것이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얼마나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아시잖아요.
스티브, 존, 태드…….저의 가장 친한 친구들 부모님은 하나같이 이혼했어요. 그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보냈는지 모두 알고 계시지요. 얼마 전에 에이즈로 죽은 조지는 어렸을 적 부모의 이혼으로 고통스러워하다 마약에 손대 결국 에이즈에 걸린 거예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렇게 화목합니다. 저희 형제들은 커갈수록 더 우애로 뭉치고 있고요. 이 모든 행복은 두 분의 작품입니다. 저희 아홉 형제에게 두 분이 베풀어주신 사랑과 헌신, 희생으로 저희들은 이제 이렇게 사회의 훌륭한 일원으로 성정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다 갚아야 할지요.
방법은 ‘단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평생 사는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귀한 존재가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길이기도 하고요.
거듭 밀씀드리지만 겉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안은 하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정말 사랑합니다.
저는 항상 두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1992년 10월 12일
아들 폴 올림
몇 년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편지 첫 구절을 읽고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까지 다 읽기는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뭔가 이해하고 계셨다. 평소에 내가 종교적인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런 나에게 ‘너는 특별한 아이’라고 격려해주셨다. 만약 수도사나 신부가 되었더라면 어머니는 아주 기뻐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스님이라니, 더군다나 부모님은 내 여자친구를 딸처럼 생각 하셨는데 그녀까지 잃을 생각을 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셨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지금 부모님은 나의 삶에 대단한 격려를 보내신다. 그리고 불교가 점점 더 미국에서 영향력을 얻고 있다 보니 나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신다.
출가 후 몇 년 동안은 집에 가서도 가족들과 불교에 대해 전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엔 나에 대한 배신감이 가득 차 있는데 내 말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지나 내가 편집한 숭산 스님의 영어 법문 집 두 권을 보내드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읽으시더니 아주 감명 깊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생화학박사다. 그리고 엄청난 독서광이다, 역사, 철학, 신학, 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있고 아주 넓은 상상력을 가지신 문이다.
어머니께서는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아주 높은 가르침이다. 이제야 네가 출가한 이유를 알겠구나. 이 선의 가르침은 모든 종교의 종착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존재에 대해 이렇게 높은 가르침을 몬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나는 애 오랜 종교적 믿음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다”면서 그러나 “나는 너의 길도 인정하마” 라고 말씀하셨다.
아 ! 위대한 나의 어머니.
빈손으로 가는 게
나는 지금까지 큰스님에게 두 번 혼찌검이 난 일이 있다. 모두 스님 생활 초창기 때의 일인데, 그대 어떻게나 혼이 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빨개진다.
나는 큰스님 일행과 함께 미국 프라비던스 젠센터로 돌아왔다. 처음엔 스님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 동안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스님이 되니까 사람들이 ‘이것은 안 돼’ ‘저건 하면 안 돼’ 하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유롭기 위해 스님이 된 것인데 사람들의 그런 간섭이 좀 참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만 스님이 되였지 마음속은 아직도 ‘나’ 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너는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났다는 자만심 말이다.
며칠 뒤, 큰스님의 법문이 있던 날이었다. 마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스님들과 같은 줄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큰스님이 들어오시면서 나를 보시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는 게 아닌가.
“갓 출가한 승려가 뒤로 앉아야지, 어떻게 감히 다른 스님들과 함께 앞자리에 앉는가.”
어찌나 화를 내시던지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큰스님의 말씀대로 뒤로 물러가 앉으면서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스님 생활이 너무 어렵다고 느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약은 입에 쓰지만 병을 치료하려면 그 쓴 약도 먹어야 한다. 나를 죽여야 한다. 나를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 에게 한없이 되뇌었다.
또 한번 혼찌검이 난 것은 부모님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과연 내가 스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놀라실까. 어떻게 이 일을 알려야 하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렇게 ‘버리지 못하고’ 고통에 허우적대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도반스님 중 한 분이 내 고통을 눈치챘는지 큰스님께 여쭈어보면 뭔가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제안하셨다. 나는 용기를 내 큰스님을 뵙기로 했다.
어느 날 밤, 큰스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미침 큰스님께서는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는지 두루마기를 벗고 계셨다.
큰스님은 베개를 제자리에 놓으며 나를 맞이하셨다.
“무슨 일이지요?”
한밤중에 난데없는 방문이기도 했고 내 얼굴이 무척 안돼 보였는지 큰스님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 부모님 문제를 말씀 드렸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스님은 이렇게 소리치셨다.
“부처님은 가족과 왕궁을 다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 가셨읍니다. 오직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케이?”
그리고는 일어서서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갑작스런 큰스님의 꾸지람에 당혹스러웠다. 주무시는 시간을 방해한 것도 죄스러운데 잠을 마다하고 방을 나가버리시니 이런 큰일이 어디 있는가 방문 닫히는 소리가 얼마나 무섭고 컸던지 나는 기절할 뻔했다.
큰 스님으로부터 받은 그 꾸지람은 그때 두 번이 다였지만 어떤 말씀, 어떤 위로보다 더 큰 가르침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큰스님의 꾸지람을 잊지 못한다. 그 이후에도 내 마음속에 주저와 안일한 마음이 일 때면 큰스님의 그때 그 목소리를 되새기며 버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마침내 마음을 정리했다.
내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나는 자판을 두드리면서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부모님 가슴을 면도날로 슥슥 긋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편지를 받고 고통에 빠질 부모님 머리 위에서 잔인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께.
저는 지금 중국에서 한 달 동안의 수행을 막 끝내고 돌아온 길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주 재미있고 신비했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을 다시 뵙게 돼 기뻐요. 지난 여행은 아주 행복한 여행이었고 그 수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제가 정말 행운아 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모님께 몇 년 동안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을 말씀 드리려 합니다.
저는 스님이 되기로 했습니다. 이미 지난 달 9월 7일 중국 남화사라는 절에서 숭산 큰스님 밑에서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부모님들께서 얼마나 충격을 받고 놀라실지, 두 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의 행동이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저는 출가를 생각해왔으니까요.
부모님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나중에 커서 평생을 종교 수행자로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것을 말이에요. 물론 그러한 제 결정은 때로 흔들리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했지만 이제 비로소 저는 제 길을 찾았습니다. 출가를 결정하기까지 제 마음속에 가장 큰 부담은 부모님과 여자친구였어요. 만약 그녀와 결혼을 하면 수도자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생각이 많았던 거지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녀와 결혼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계시겠지요.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여자입니다. 지난 3년동안 저희 둘의 관계는 그 어떤 연인 사이보다 완벽한 동반자 관계였읍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훌륭한 사이라 하더라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결국 ‘나’에 갇히고 맙니다. 내 아내, 내 자식들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저의 머릿속에는 지금 결혼을 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삶이 무엇이냐, 죽음이 무엇이냐,라는 의문이 가득해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계속 남아 있는 한 결혼을 한다 해도 가족에게 온전히 몰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 자신을 모르고서 지금 누군가와 편안하고 따뜻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녀를 만난 이후 표정이 더 밝아지고 짜증도 덜 부린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녀라고 믿고 계시지요?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저의 변화는 맑고 강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다름아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하루하루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저의 강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젠센터에 갔던 이유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의 본성을 깨달아 이 고통의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는 결심에 따라 ‘수행’을 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물론 저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고 지난 3년간 제 생애 처음으로 가장 편안하고 열정적이며 완벽한 연인 관계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둘의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생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들은 계속 남아 있었으며 더 깊어지고 강해졌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지난 며칠 동안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스님이 되겠다는 제 결심을 어떻게 부모님과 그녀에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저나 그녀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그녀는 지금 강연 차 유럽에 가 있읍니다.
저는 불교나 숭산 스님 때문에만 출가한 게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 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출가한 것입니다.
진리를 어떻게 찾을 것이냐 하는 점에서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입니다.
순수하고 맑은 길은 무엇입니까.
어머니, 아버지. 저는 그것을 찾고 싶습니다. 사회나 남들이 저에게 규정하는 기준이나 잣대에 따라 로봇처럼 살지 않고 제 본성을 찾아 살고 싶습니다.
아마 부모님은 종교 수행자가 되는 것까진 좋은데 카톨릭 신부나 수도사를 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보지도 듣지도 못한 한국인 승려 밑에서 불교 수행자가 되느냐고 기막혀하실 것입니다. 물론 카톨릭 신부나 수도사의 길이 옳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바는 결국 하나이니까요..
하지만 참선수행이야말로 제 마음을 알고 진리를 깨닫게 하는 가장 강한 도구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요즘에는 심지어 카톨릭 수도사님들이나 신부님, 수녀님, 목사님들도 참선수행을 하신답니다.
저는 제 스승이신 숭산 큰스님이 저를 가장 잘 알고 제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분이라는 것을 강하게 믿고 있읍니다. 큰스님은 오직 제가 저의 본성을 찾기를 바라고 계시며 이미 많은 가르침을 주셨읍니다. 제가 오직 참된 나를 찾을 때에라야만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 저의 작은 존재가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 .
‘스님’이란 말을 듣고 당혹스러우시겠지요.
카톨릭 수도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은 속세와는 좀 격리돼서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합니다.하지만 불교수행자들은 약간 다릅니다.
불가에서 얘기하는 ‘스님’이란 ‘스승’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 살며 서로 돕습니다. 스님이란 신도들에게 그저 길을 안내해주고 함께 일하는 동반자들일 뿐입니다. 일반 신도들과 다른 점이라면 매일 보다 열심히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특히 제가 출가하려는 ‘관음선종’에서 스님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마다 변호사 ∙의사∙목수∙회사원 등 직업을 갖고 있듯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겉의 직업은 달라도 내면의 직업은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의 본성을 찾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님이란 직업은 아주 특별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세속에서 얘기하는 돈이나 사회적 명예, 혹은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직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 다른 사람을 돕는 생활에 일평생을 바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 생은 물론 다음 생, 다음 생, 世世生生 이 세상의 고통과 함께 부대끼면서 말입니다.
‘참선’이란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순간순간에 이런 맑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아주 혹독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미 풋내기 스님으로서 이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집중적인 수행입니다. 그리고 제가 마음속에 가져온 의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평생 깊은 산속에 쳐 박혀 그저 바윗돌에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하늘을 응시하는 일을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돕는 거시입니다.
옛 선승이 하신 말씀을 하나 옮겨볼게요.
인간의 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
삶은 구름처럼 왔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본래 구름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 우리 인생의 오고 감
모두 이와 같다.
그러나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맑은 게 하나 있다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순수하고 맑든 게 있다.
그렇다면 맑고 깨끗한 것이 무엇인가?
아버지, 어머니. 저는 바로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저의 불효를 용서하세요.
제가 가는 이 길이 두 분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열심히 살아서 저의 본성과 진리를 찾으면 저는 중생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져서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저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앞이 안보여 벌써 몇 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지 모릅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두 분 가슴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
제가 가는 이 길이 그렇게 고생해서 저를 키운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길이라 하더라도 저의 겉 모습에 너무 괘념치 말아주세요. 저는 죽을 때까지 두 분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 살아갈 것이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얼마나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아시잖아요.
스티브, 존, 태드…….저의 가장 친한 친구들 부모님은 하나같이 이혼했어요. 그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보냈는지 모두 알고 계시지요. 얼마 전에 에이즈로 죽은 조지는 어렸을 적 부모의 이혼으로 고통스러워하다 마약에 손대 결국 에이즈에 걸린 거예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렇게 화목합니다. 저희 형제들은 커갈수록 더 우애로 뭉치고 있고요. 이 모든 행복은 두 분의 작품입니다. 저희 아홉 형제에게 두 분이 베풀어주신 사랑과 헌신, 희생으로 저희들은 이제 이렇게 사회의 훌륭한 일원으로 성정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다 갚아야 할지요.
방법은 ‘단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평생 사는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귀한 존재가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길이기도 하고요.
거듭 밀씀드리지만 겉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안은 하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정말 사랑합니다.
저는 항상 두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1992년 10월 12일
아들 폴 올림
몇 년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편지 첫 구절을 읽고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까지 다 읽기는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뭔가 이해하고 계셨다. 평소에 내가 종교적인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런 나에게 ‘너는 특별한 아이’라고 격려해주셨다. 만약 수도사나 신부가 되었더라면 어머니는 아주 기뻐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스님이라니, 더군다나 부모님은 내 여자친구를 딸처럼 생각 하셨는데 그녀까지 잃을 생각을 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셨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지금 부모님은 나의 삶에 대단한 격려를 보내신다. 그리고 불교가 점점 더 미국에서 영향력을 얻고 있다 보니 나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신다.
출가 후 몇 년 동안은 집에 가서도 가족들과 불교에 대해 전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엔 나에 대한 배신감이 가득 차 있는데 내 말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지나 내가 편집한 숭산 스님의 영어 법문 집 두 권을 보내드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읽으시더니 아주 감명 깊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생화학박사다. 그리고 엄청난 독서광이다, 역사, 철학, 신학, 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있고 아주 넓은 상상력을 가지신 문이다.
어머니께서는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아주 높은 가르침이다. 이제야 네가 출가한 이유를 알겠구나. 이 선의 가르침은 모든 종교의 종착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존재에 대해 이렇게 높은 가르침을 몬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나는 애 오랜 종교적 믿음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다”면서 그러나 “나는 너의 길도 인정하마” 라고 말씀하셨다.
아 ! 위대한 나의 어머니.
빈손으로 가는 게
Monday, February 20, 2012
돌이킬 수 없는 일
돌이 수 없는 일
스님이 된지 2개월쯤 뒤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서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얼굴이 완전히 반쪽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때까지 기다릴게요.”
나는 그네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잡겠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 미쳤어요? 우리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데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어요?”
나는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버리는 것이 아니야. 나 자신을 모르면 나는 당신조차 사랑할 수 없어, 아니, 이 세상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그 순간의 고통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것 인가. 그녀의 사랑 없이는 난 하루도 못 살 것 같은 그런 날이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구나. 순간 마음속으로 요동을 쳤다. 이렇게 소중한 사랑을 버리고 내가 찾는 길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거 완전히 미친 것 아니야?
그녀와 겪은 이별의 고통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예견한 바였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도 알고 있었다. 비록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크다 할지라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정작 내가 놀랐던 것은 내 가슴을 찌르는 칼을 바로 내가 잡고 있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 심장을 찌르는 것은 다름아닌 내 손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고통을 만들고 있으며 동시에 내 가슴에도 고통을 만들고 있다.
아무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한 사랑과 편안함과 달콤함이 보장된 길을 거부하고 고통의 가시밭길을 가라고 내 등을 떠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이 순간, 내 마음을 바꾸면 이 아름답고 훌륭하고 지혜로우며 특별한 사람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저 찰라적인 것이었다.”
스님이 되겠다는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한 것이 아닌가. 수 년동안의 세월을 오직 머릿속에 스님이 되고 싶다, 아니다 하는 마음으로 싸워왔고 미침내 결정을 내린 것이다.
헛되고 쓸모 없는 경쟁과 마음의 고통을 안고 위선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결론 말이다. 그리고 이미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종교적 가르침이 뭔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생각은 내 안에서 진리에대한 탐구라는 불을 피우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 그런 모든 고민과 회의를 통해 얻은 결론을 바꿀 수 없다. 진정 내가 이 여인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이 길로 돌아올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분명 나 자신을 끊임없이 증오하고 학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가서 겪을 고통은 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그녀와 내 자식들이 함께 짐져야 할 고통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게 그런 고통을 줄 수가 있는가.
설서, 내가 정말 완벽하고 행복한 나만의 세계를 가진다 한들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은 어쩔 것인가. 나 혼자만이 행복하고 나 혼자만이 즐거운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 고통의 본질에 대한 이 심오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 수많은 철학책,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던 종교는 나 에게 해답을 주지 못했으므로 혼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
“수행하면서 각자 서 있는 곳에서 열심히 살자.”
내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 나를 지나쳐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에도 내 마음속에서는 ‘이제라도 늦지 않아 그녀를 붙잡아, 얼른 뛰어가 그녀를 안으란말이야’ 하고 서리치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쾅’
순기, 온 세상의 소리와 시간이 다 멈춘 듯 정적과 침묵의 세계에 나 홀로 놓여졌다는 진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이제야 모든 것을 벗어 던졌다는 홀가분함도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방안에 홀로 서 있었다.
이제 내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더 이상 붙잡을 것도 더 이상 주저할 것도 더 이상 미련이 남을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 나의 사랑은 끝났다.
http://blog.koreadaily.com/hankw2010/509427
스님이 된지 2개월쯤 뒤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서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얼굴이 완전히 반쪽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때까지 기다릴게요.”
나는 그네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잡겠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 미쳤어요? 우리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데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어요?”
나는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버리는 것이 아니야. 나 자신을 모르면 나는 당신조차 사랑할 수 없어, 아니, 이 세상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그 순간의 고통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것 인가. 그녀의 사랑 없이는 난 하루도 못 살 것 같은 그런 날이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구나. 순간 마음속으로 요동을 쳤다. 이렇게 소중한 사랑을 버리고 내가 찾는 길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거 완전히 미친 것 아니야?
그녀와 겪은 이별의 고통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예견한 바였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도 알고 있었다. 비록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크다 할지라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정작 내가 놀랐던 것은 내 가슴을 찌르는 칼을 바로 내가 잡고 있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 심장을 찌르는 것은 다름아닌 내 손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고통을 만들고 있으며 동시에 내 가슴에도 고통을 만들고 있다.
아무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한 사랑과 편안함과 달콤함이 보장된 길을 거부하고 고통의 가시밭길을 가라고 내 등을 떠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이 순간, 내 마음을 바꾸면 이 아름답고 훌륭하고 지혜로우며 특별한 사람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저 찰라적인 것이었다.”
스님이 되겠다는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한 것이 아닌가. 수 년동안의 세월을 오직 머릿속에 스님이 되고 싶다, 아니다 하는 마음으로 싸워왔고 미침내 결정을 내린 것이다.
헛되고 쓸모 없는 경쟁과 마음의 고통을 안고 위선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결론 말이다. 그리고 이미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종교적 가르침이 뭔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생각은 내 안에서 진리에대한 탐구라는 불을 피우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 그런 모든 고민과 회의를 통해 얻은 결론을 바꿀 수 없다. 진정 내가 이 여인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이 길로 돌아올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분명 나 자신을 끊임없이 증오하고 학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가서 겪을 고통은 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그녀와 내 자식들이 함께 짐져야 할 고통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게 그런 고통을 줄 수가 있는가.
설서, 내가 정말 완벽하고 행복한 나만의 세계를 가진다 한들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은 어쩔 것인가. 나 혼자만이 행복하고 나 혼자만이 즐거운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 고통의 본질에 대한 이 심오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 수많은 철학책,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던 종교는 나 에게 해답을 주지 못했으므로 혼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
“수행하면서 각자 서 있는 곳에서 열심히 살자.”
내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 나를 지나쳐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에도 내 마음속에서는 ‘이제라도 늦지 않아 그녀를 붙잡아, 얼른 뛰어가 그녀를 안으란말이야’ 하고 서리치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쾅’
순기, 온 세상의 소리와 시간이 다 멈춘 듯 정적과 침묵의 세계에 나 홀로 놓여졌다는 진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이제야 모든 것을 벗어 던졌다는 홀가분함도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방안에 홀로 서 있었다.
이제 내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더 이상 붙잡을 것도 더 이상 주저할 것도 더 이상 미련이 남을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 나의 사랑은 끝났다.
http://blog.koreadaily.com/hankw2010/509427
Sunday, February 19, 2012
만행 '현각'으로 대시 태어나다
만행 ‘현각’으로 다시 태어나다
우리가 갈 곳은 남중국 조계산에 있는 ‘남화사’라는 절로서 六祖 혜는대사 638~713가 살고 수행하면서 가르침을 전한 곳이었다.
육조 혜능대사는 중국의 선종 일조인 達磨大師, ?~528로부터 6대가 되는 선사다. 속세에서 그는 그냥 노씨라고만 불렀다. 지금의 광동성 조경부 신흥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날마다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해야 했다. 그러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장터에서 어느 스님이 자나가면서 외우던 《금강경》소리를 듣고 마음에 열린 바가 있었다. 그는 그 스님을 따라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 황매산에 가서 五祖 弘忍大師를 뵙고, 그가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만 찧으면서 행자생활을 했다.
오조스님이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할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올렸다. “마음은 밝은 거울이므로 부지런히 닦아 티끌이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글을 본 노행자는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이 묻을까”하고 화답했다.
오조스님은 마침내 그에게 법을 전하고 부처님의 법통을 상징하는 가사와 발우를 전해주었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을 피해 남쪽으로 돌아가 18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 비로소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소양의 조계산에서 선법을 크게 일으켜 그 법을 이은 제자만 40여명이나 되었다. 그는 당나라 현종 때 76세로 입적하였다.
남화사는 바로 육조 혜능대사가 살면서 수행하시던 곳이니 중국선종의 법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절인 데다 그곳이 위치한 조계산의 아름을 따 대한불교 조계종이 탄생하게 되니 이만저만 역사가 있는 절이 아니다. 남화사에는 혜능대사의 시신이 대웅전 법당 제단에 참선하며 앉은 자세를 그대로 미라로 보관돼 있다. 그런 유서 깊고 역사적인 절에 숭산 큰스님이 방문한다는 건 일대 사건이었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 정부가 외국 스님의 방문을 허락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거니와 당시 국교도 이뤄지지 않은 나라의 사람을 초청 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육조 혜능대사가 살고 가르친 곳에서 큰스님이 가르침을 펴니, 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우리의 스승이신 큰스님이 중국 선종의 뿌리가 되는 절에 가셔서 중국 스님들에게 가르침을 펴시다니 정말 기쁜 일이었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입국해 마침내 남화사에 도착했다. 남화사는 아주 크고 웅장한 절 이었다. 그렇게 큰 절은 처음 보았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곳에 계신 승려들이 모두 나와 마치 부처가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에 존경을 담아 인사를 했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큰스님이 이렇게까지 존경을 받고 계시다니……. 우리는 깜짝 놀랐다. 어떤 스님들은 멀리서 큰스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뛰어와 땅바닥에 그대로 앉아 절을 했고 큰스님이 법당으로 들어가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은 같은 중국 땅 안에서도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스님들은 숭산 큰스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이 남화사까지 오신 분들도 있었다. 그저 한마디라도 큰스님께 여쭈어 법문을 들을 기회를 가져보기 위해서였다.
남화사 주지는 중국 안에서 가장 존경 받는 스님이라고 했다. 주지스님은 큰스님이 마치 외국의 대통령이라도 되는 듯 예를 다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곳 승려들이 얼마나 큰스님의 가르침에 목이 말라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셨다. 중국 승려들의 이 같은 환대는 정말 상상 밖이었다.
큰스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들은 즉시 대웅전으로 가 큰절을 올리고 육조 혜능대사 앞에도 큰절을 올렸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육조 혜능대사는 열반하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래커와 방부제로 보존된 얼굴과 손, 참선하는 모습으로 붉은 가사를 입고 그대로 앉아 계셨다. 우리 모두가 지금 참선수행을 통해 우리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이 위대한 스승 앞에 우리는 천천히 삼배를 올렸다.
물론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몸이다. 방부처리된 미라에 불과하다. 신성하다거나 어떤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에 존경과 감사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리는 삼배를 올리며 모든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해내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우리는 남화사 큰 선방에서 3일간의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중국비구, 비구니∙ 신돋,f까지 우리일행에 동참했다. 다들 아주 열심히 참선수행을 했다.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안장 있었다. 미국인 스님인 도안스님은 중국 스님들 에게 공안인터뷰를 하시기도 했다. 그 광경은 매우 재미 있었다. 여기 육조 혜능대사의 땅에서, 우리가 현재 수행하는 참선수행의 길을 열어주신 분들 중 위대한 성인 한 분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곳에서 그의 중국인 제자들이 서양에서 온 푸른 눈 스님한테 가르침을 받고 공안수행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재미있고 역사적인 광경인가.
진리를 위해서라면 국적도 자만심도 모두 버리고 배우려 하는 중국 스님들을 보면서 이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하심’下心을 실천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3일 용맹정진에 참여해 다른 비구와 비구니들과 함께 선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중국 스님이 나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죽비치는 소리가 세번나고 우리는 참선에 들어갔다.
참선수행 규율이 중국은 약간 독특했다. 선방을 주관하는 입승스님은 죽비를 치면 선방문을 일단 잠가버린다. 따라서 늦으면 선방에 들어올 수 없고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조용히 참선을 하면서 나는 내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아직도 고통의 바다에서 헤염치고 있었다. 왜 출가를 주저하느냐.내가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냐. 내 어깨에는 아직도 바위처럼 너무 큰 짐이 올려져 있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참선에 전진하면 할수록 고통만이 가득 찼다. 우리는 한 시간 참선하고 10분동안 절 주변을 도는 걷기 명상을 하는 식으로 3일동안 수행을 했다.
이튿날이었다
느는 여전히 내 안에 큰 물음을 잡고 늘어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선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걸으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
그날 오후쯤이었다. 나는 참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 내 맘이 ‘확’ 하고 열린 것이다. 아주 깨끗하고 맑은 길이 내 앞에 열린 기분이었다. 더 이상 잡생각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몸에는 힘이 솟았다. 이것을 생각 이전의 원점인 상태라고 하는가. 더 이상 어떤 고통도 분노도 자책도 없어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감이 차 올랐다.
이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일종의 깊은 바라봄이라고 할까. 나의 모든 고통은 환상이며 착각이라는 느낌과 함께 안개가 일시에 걷히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 명상이 1초처럼 지나갔다. 입승 스님이 쉬는 시간을 위해 죽비를 쳤는데도 나는 계속 앉아 있었다. 나는 영원히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 다음 한 시간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그 전까지 내가 경험했던 어떤 행복감, 만족감보다 큰 것이었다.
나는 점점 더 깊이 내 안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 시간이 끝나자 옆의 승려 한 분이 나를 톡톡 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 뒤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런 경험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나와 사물에 대한 깊은 자가, 깊은 완성…… 이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성큼성큼 큰스님 방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그때는 스님들이 아무나 큰스님 방문을 두드리지 못하도록 했다. 큰스님께서 빡빡한 일정 때문에 피곤하셔서 굳이 큰스님을 뵈려면 비서스님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똑똑똑.
“누구세요?”
“접니다. 하버드 학생입니다”(그때 우리 일행들은 나를 하버드 학생이라고 불렀다.)
“오, 들어오세요.”
큰스님은 방에 편안하게 앉아 계셨다.
그는 방으로 들어서는 내 얼굴을 잠시 보시더니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신 듯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큰 스님이 이렇게 물으셨다.
“무슨 문제가 있어요?”
큰스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지만 이미 내 얼굴만 보시고는 뭔가 이해하신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고 계셨지만 뭔가 내 속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신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스님이 도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다 일고 있으시다는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큰스님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오직 그 가르침을 등불 삼아 평생을 살겠습니다.”
“원더풀, 원더풀,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내일 모래 受戒式이 있는데 잘됐네요. 하하하. 아주 잘됐어요.”
그 수계식이란 본래 남화사 중국 스님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계를 받았는데도 숭산 큰스님 밑에서 다시 계를 받고 싶다고 전해와 수계식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선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六祖 慧能大師가 계셨던 절에서 1백 명 중국 스님들과 한 명의 미국인 스님이 계를 받는다니, 아주 재미있어요, 재미있어, 하하하.”
드디어 이틀 뒤 受戒式 날.
수염과 머리를 깨끗하게 깎았다. 나의 사형스님인 도문스님이 도와주셨다. 나는 비로소 스님이 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런데 도문스님은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자신이 처음 삭발할 때의 경험을 들려주셨다. 어찌나 재미있게 말씀해주시는지 스님과 이야기하면서 긴장된 마음이 풀렸다.
마침내 1992년 9월 7일.
조계산 대웅전. 육조대사의 몸 바로 옆에서 나는 숭산 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스님이 되었다. ‘폴 뮌젠’에서 ‘현각’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우리가 갈 곳은 남중국 조계산에 있는 ‘남화사’라는 절로서 六祖 혜는대사 638~713가 살고 수행하면서 가르침을 전한 곳이었다.
육조 혜능대사는 중국의 선종 일조인 達磨大師, ?~528로부터 6대가 되는 선사다. 속세에서 그는 그냥 노씨라고만 불렀다. 지금의 광동성 조경부 신흥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날마다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해야 했다. 그러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장터에서 어느 스님이 자나가면서 외우던 《금강경》소리를 듣고 마음에 열린 바가 있었다. 그는 그 스님을 따라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 황매산에 가서 五祖 弘忍大師를 뵙고, 그가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만 찧으면서 행자생활을 했다.
오조스님이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할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올렸다. “마음은 밝은 거울이므로 부지런히 닦아 티끌이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글을 본 노행자는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이 묻을까”하고 화답했다.
오조스님은 마침내 그에게 법을 전하고 부처님의 법통을 상징하는 가사와 발우를 전해주었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을 피해 남쪽으로 돌아가 18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 비로소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소양의 조계산에서 선법을 크게 일으켜 그 법을 이은 제자만 40여명이나 되었다. 그는 당나라 현종 때 76세로 입적하였다.
남화사는 바로 육조 혜능대사가 살면서 수행하시던 곳이니 중국선종의 법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절인 데다 그곳이 위치한 조계산의 아름을 따 대한불교 조계종이 탄생하게 되니 이만저만 역사가 있는 절이 아니다. 남화사에는 혜능대사의 시신이 대웅전 법당 제단에 참선하며 앉은 자세를 그대로 미라로 보관돼 있다. 그런 유서 깊고 역사적인 절에 숭산 큰스님이 방문한다는 건 일대 사건이었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 정부가 외국 스님의 방문을 허락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거니와 당시 국교도 이뤄지지 않은 나라의 사람을 초청 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육조 혜능대사가 살고 가르친 곳에서 큰스님이 가르침을 펴니, 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우리의 스승이신 큰스님이 중국 선종의 뿌리가 되는 절에 가셔서 중국 스님들에게 가르침을 펴시다니 정말 기쁜 일이었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입국해 마침내 남화사에 도착했다. 남화사는 아주 크고 웅장한 절 이었다. 그렇게 큰 절은 처음 보았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곳에 계신 승려들이 모두 나와 마치 부처가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에 존경을 담아 인사를 했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큰스님이 이렇게까지 존경을 받고 계시다니……. 우리는 깜짝 놀랐다. 어떤 스님들은 멀리서 큰스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뛰어와 땅바닥에 그대로 앉아 절을 했고 큰스님이 법당으로 들어가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은 같은 중국 땅 안에서도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스님들은 숭산 큰스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이 남화사까지 오신 분들도 있었다. 그저 한마디라도 큰스님께 여쭈어 법문을 들을 기회를 가져보기 위해서였다.
남화사 주지는 중국 안에서 가장 존경 받는 스님이라고 했다. 주지스님은 큰스님이 마치 외국의 대통령이라도 되는 듯 예를 다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곳 승려들이 얼마나 큰스님의 가르침에 목이 말라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셨다. 중국 승려들의 이 같은 환대는 정말 상상 밖이었다.
큰스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들은 즉시 대웅전으로 가 큰절을 올리고 육조 혜능대사 앞에도 큰절을 올렸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육조 혜능대사는 열반하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래커와 방부제로 보존된 얼굴과 손, 참선하는 모습으로 붉은 가사를 입고 그대로 앉아 계셨다. 우리 모두가 지금 참선수행을 통해 우리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이 위대한 스승 앞에 우리는 천천히 삼배를 올렸다.
물론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몸이다. 방부처리된 미라에 불과하다. 신성하다거나 어떤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에 존경과 감사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리는 삼배를 올리며 모든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해내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우리는 남화사 큰 선방에서 3일간의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중국비구, 비구니∙ 신돋,f까지 우리일행에 동참했다. 다들 아주 열심히 참선수행을 했다.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안장 있었다. 미국인 스님인 도안스님은 중국 스님들 에게 공안인터뷰를 하시기도 했다. 그 광경은 매우 재미 있었다. 여기 육조 혜능대사의 땅에서, 우리가 현재 수행하는 참선수행의 길을 열어주신 분들 중 위대한 성인 한 분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곳에서 그의 중국인 제자들이 서양에서 온 푸른 눈 스님한테 가르침을 받고 공안수행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재미있고 역사적인 광경인가.
진리를 위해서라면 국적도 자만심도 모두 버리고 배우려 하는 중국 스님들을 보면서 이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하심’下心을 실천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3일 용맹정진에 참여해 다른 비구와 비구니들과 함께 선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중국 스님이 나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죽비치는 소리가 세번나고 우리는 참선에 들어갔다.
참선수행 규율이 중국은 약간 독특했다. 선방을 주관하는 입승스님은 죽비를 치면 선방문을 일단 잠가버린다. 따라서 늦으면 선방에 들어올 수 없고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조용히 참선을 하면서 나는 내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아직도 고통의 바다에서 헤염치고 있었다. 왜 출가를 주저하느냐.내가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냐. 내 어깨에는 아직도 바위처럼 너무 큰 짐이 올려져 있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참선에 전진하면 할수록 고통만이 가득 찼다. 우리는 한 시간 참선하고 10분동안 절 주변을 도는 걷기 명상을 하는 식으로 3일동안 수행을 했다.
이튿날이었다
느는 여전히 내 안에 큰 물음을 잡고 늘어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선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걸으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
그날 오후쯤이었다. 나는 참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 내 맘이 ‘확’ 하고 열린 것이다. 아주 깨끗하고 맑은 길이 내 앞에 열린 기분이었다. 더 이상 잡생각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몸에는 힘이 솟았다. 이것을 생각 이전의 원점인 상태라고 하는가. 더 이상 어떤 고통도 분노도 자책도 없어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감이 차 올랐다.
이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일종의 깊은 바라봄이라고 할까. 나의 모든 고통은 환상이며 착각이라는 느낌과 함께 안개가 일시에 걷히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 명상이 1초처럼 지나갔다. 입승 스님이 쉬는 시간을 위해 죽비를 쳤는데도 나는 계속 앉아 있었다. 나는 영원히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 다음 한 시간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그 전까지 내가 경험했던 어떤 행복감, 만족감보다 큰 것이었다.
나는 점점 더 깊이 내 안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 시간이 끝나자 옆의 승려 한 분이 나를 톡톡 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 뒤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런 경험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나와 사물에 대한 깊은 자가, 깊은 완성…… 이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성큼성큼 큰스님 방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그때는 스님들이 아무나 큰스님 방문을 두드리지 못하도록 했다. 큰스님께서 빡빡한 일정 때문에 피곤하셔서 굳이 큰스님을 뵈려면 비서스님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똑똑똑.
“누구세요?”
“접니다. 하버드 학생입니다”(그때 우리 일행들은 나를 하버드 학생이라고 불렀다.)
“오, 들어오세요.”
큰스님은 방에 편안하게 앉아 계셨다.
그는 방으로 들어서는 내 얼굴을 잠시 보시더니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신 듯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큰 스님이 이렇게 물으셨다.
“무슨 문제가 있어요?”
큰스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지만 이미 내 얼굴만 보시고는 뭔가 이해하신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고 계셨지만 뭔가 내 속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신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스님이 도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다 일고 있으시다는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큰스님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오직 그 가르침을 등불 삼아 평생을 살겠습니다.”
“원더풀, 원더풀,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내일 모래 受戒式이 있는데 잘됐네요. 하하하. 아주 잘됐어요.”
그 수계식이란 본래 남화사 중국 스님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계를 받았는데도 숭산 큰스님 밑에서 다시 계를 받고 싶다고 전해와 수계식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선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六祖 慧能大師가 계셨던 절에서 1백 명 중국 스님들과 한 명의 미국인 스님이 계를 받는다니, 아주 재미있어요, 재미있어, 하하하.”
드디어 이틀 뒤 受戒式 날.
수염과 머리를 깨끗하게 깎았다. 나의 사형스님인 도문스님이 도와주셨다. 나는 비로소 스님이 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런데 도문스님은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자신이 처음 삭발할 때의 경험을 들려주셨다. 어찌나 재미있게 말씀해주시는지 스님과 이야기하면서 긴장된 마음이 풀렸다.
마침내 1992년 9월 7일.
조계산 대웅전. 육조대사의 몸 바로 옆에서 나는 숭산 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스님이 되었다. ‘폴 뮌젠’에서 ‘현각’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Thursday, February 16, 2012
만행 큰스님과의 면담
만행 큰스님과의 면담
큰 스님은 내가 스님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훨씬 전부터 알고 계셨다. 하버드를 졸업하기 6개월 전에 프라비던스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특별 면담을 신청해놓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만남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 큰 스님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심지어 그의 방문에 노크했었을 때의 내 심리상태와 노크소리까지도 죄다 기억하고 있다.
내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큰스님께서는 가부좌를 틀고 아주 편한 자세로 앉아 계셨다. 얼굴은 아주 맑고 빛이 났다. 피부는 마치 아이처럼 부드럽고 깨끗했다.
많은 도반들은 저마다 큰스님과 처음 가진 개인 만남을 추억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큰스님의 말고 빛이 나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깊은 눈에 반했노라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얼굴과 몸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하버드나 예일에서 만난 그 어떤 천재적인 철학자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학자들의 얼굴은 노소를 막론하고 찡그려져 있었으며 어두웠다. 그들은 하루 종일 우리에게 진리와 빛을 가르쳤지만 정작 그들은 지옥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큰스님의 가르침은 말이 아니라 저 얼굴, 저 눈, 저 분위기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내가 삼배를 드리자 그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오! 잘 있었어요?”
“예, 큰스님.”
그는 나를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래, 무슨 질문이 있읍니까?”
늘 그렇듯 따뜻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큰 스님의 가르침을 새기면 새길수록 삶에 아주 깊은 변화가 옵니다. 수행하면 할수록 스님이 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순간, 나는 큰스님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무척 좋아하시리라 생각했는데 그분의 반응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기쁜 표정은 고사하고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뭔가를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큰스님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短珠를 만지작거리기 시작 하셨다. 그 모든 일이 단 2, 3초 안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나에게는 한 시간처럼 길었다.
마침내 그분은 내 눈을 그윽하게 쳐다 보셨다. 더 이상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마 나를 제자로 받지 않으시려는 모양이구나. 내가 큰 실수를 한 게 틀림없어 이를 어쩌지.’
그러더니 갑자기 이렇게 물으셨다.
“남자 형제가 몇인가요?”
도대체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이람.
“다섯 명입니다.”
“아아 그래요, 하하 하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 스님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은 다시 밝아졌고 눈은 빛났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방안 가득 던지셨다.
“오! 댓츠 원더풀, 노 프라불럼.”(Oh ! That’s Wonderful, No problem.)
나는 영문도 몰랐지만 큰스님의 웃음에 적이 안심이 되어 같이 따라 웃었다.
잠시 후 큰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형제가 없이 자랐읍니다. 내 아버지도 그랬고 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였읍니다. 그래서 내가 스님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것은 바로 대를 끊는 것이었지요. 한국에서는 대가 끊기면 엄청난 불효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3대 독자가 스님이 되겠다고 했으니 부모님 충격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불효 중에서도 가장 나쁜 불효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형제가 많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원더풀 원더풀 노 플라불럼.”
그는 다시 웃었다.
나는 큰 스님의 큰 뜻을 그제서야 알아듣고 그의 세심한 배려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그런데 큰스님, 저에겐 다른 큰문제가 있읍니다.”
나는 여자친구 얘기를 했다. 그녀는 큰스님도 잘아는 제자였다. 나는 큰스님께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출가를 할 수 있을지 여쭈었다.
그러자 큰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상태에선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저 수행만 열심히 하십시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희가 올 겁니다. 서로 많은 말을 해봐야 도움이 안 됩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어떤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알겠지요?”
나는 평온해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예, 알겠읍니다. 큰스님, 그렇게 하겠읍니다.”
방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소를 머금고 계시던 큰스님은 강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말씀하셨다.
“스님이 되는 일은 좀더 빠른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빨리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읍니다. 읿반 사람들 역시 깨달을 수 있지요. 하지만 어렵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수행하면서도 마음속은 엄청나게 싸움을 해야 합니다. 아내나 남편을 갖고 아이들을 갖게 면 아무래도 돈도 벌어야 하고 신경 쓸 일이 많아지지요. 그리고 가족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고요. 하지만 당신은 이제 빠른 길로 들어섰읍니다.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하하 하하.”
승복을 빌려입고 중국으로
액크 교수에게 제출할 보고서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스님이 되는 데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지고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느 날 나는 무상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992년 8월이었다. 무상스님은 숭산 스님의 비서 업무를 보고 계셨다.
무상스님은 며칠 후 중국 승려들이 숭산 큰스님을 초청해 가르침을 듣는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다음주에 일행들이 떠난다고 했다. 그런데 이 행사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라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과 남한 사이에는 어떠한 외교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숭산 큰스님의 법문은 공산주의인 중국 땅에서 남한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행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중국 승려들이 세계 모든 위대한 선사들 중에서도 특히 큰스님을 유난히 따른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중국 승려들 몇몇이 홍콩이나 대만, 싱가포르에 갔다가 그곳에서 행하신 숭산 큰스님의 법문과 가르침을 듣고 감동해 본국으로 돌아가 이를 널리 알렸던 것이다. 그들은 영어를 배우면서까지 큰 스님의 영어 법문집을 밀수해 읽기도 했다.
“그럼요, 가야지요.”
무상스님의 제의에 선뜻 가겠다고 대답했다.
드디어 그 달 30일 도안스님, 도문스님 두 분 미국인 스님들과 함께 LA로 떠났다.
나는 비록 그녀와 나 사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비행기를 타면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그리고 우리 사이에 어떤 변화가 올지 어림짐작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약속한 2주일 후에 꼭 돌아오라고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LA에서 무상스님과 만났다. 그리하여 나는 세 미국인 스님들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LA를 떠나기 전 무상스님이 내게 삭발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 고 제안 하셨다. 그는 스님이 되고 싶어 하는 내 마음과,그러면서 질긴 인연을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이번 중국 행이 나에게 뭔가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줄 역사적인 일이 되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다. 나는 흔쾌히 스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완벽한 삭발은 아니었다 .군인 스타일로 머리카락을 약간 남겨놓았다.
무상스님은 내게 승복을 빌려주셨는데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자 기분이 좀 묘했다. 스님이 되는 길로 한발한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들은 내게 잿빛 승복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즐거워하셨다. 나는 정말 승복이 편했다.
신기한 것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스님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내 마음속에 그렇게 끈질기게 자리했던 욕망, 미련, 머뭇거림이 싹 가셨다는 것이었다. 좀더 자유로워졌다고나 할 까. 머리 깎고 승복을 입으면 구속을 받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리고 스님들이 정말 가족 같고 형제처럼 다가왔다. 전보다 훨씬 더 가볍고 자유로운 사람이 된 듯했다.
우리는 마침내 서울 화계사에서 큰스님을 뵈었다.
며칠 동안 화계사에 머물면서 용맹정진 수행을 했다.폴란드 비구 스님 또 다른 미국 비구와 비구니 스님, 독일 비구니 스님들이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우리 모두는 일단 홍콩으로 갔다. 그리고 홍콩에서 하루 쉬면서 향후 중국 일정에 대해 들었다.
나는 홍콩을 떠나 중국으로 가기 전에 큰스님께 출가 문제를 상의하고 싶었다. 이번 중국 여행이야말로 내가 스님이 되는 결정적 기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 삶의 도약이 되어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몯든 것이 명확해졌다. 아직까지도 모든 의심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길밖에는 없었다. 그 동안 내가 걸어온 삶은 출가를 위해 한발 한발 다가선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 동안 했던 모든 고민들은 모두 바보 같은 일일 뿐이었다. 더 이상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스님이 된다는 일, 특히 미국 사회에서 불교 수행자가 되다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승가생활로 들어가는 일은 엄청난 결심이 서지 않고서는 안되는 일이다. 항상 똑 같은 옷을 입어야 하고 머리도 삭발을 해야 한다. 마음은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과연 애 몸이 잘 따라줄 것인가. 내 업은 매 순간 이를 뒤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침내 큰스님의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셔요.”
우렁차고 큰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큰스님께서는 의자에 앉아 계셨다.
“한가지 사의 드릴 게 있는데요.”
“그래요? 뭐든지 말해보세요.”
나는 신발을 벗고 그에게 큰 절을 올렸다.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소리가 큰스님에게까지 들리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몇 달 전 제가 출가하고 싶다는 말씀, 혹 기억하시는 지요. 이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무릎위에 놓인 내 두손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방안에는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건만 등줄기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오, 댓츠 원더풀. 스님이 되고 싶다 구요.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구요. 댓츠 원더풀 베리 베리 원더풀.”
그의 목소리는 힘이 넘쳐흘렀고 얼굴은 미소로 환하게 빛났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스님이 얼마나되고 싶으세요. 90퍼센트? 99퍼센트? 아니면 100퍼센트?”
큰 스님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계셨다. 그 눈빛이 너무 강해 그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은 내가 못 보는 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약간 두려웠다. 그러나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99퍼센트쯤 됩니다. 큰스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큰스님은 내 입에서 ‘99퍼센트’라는 말이 떨어지기 훨씬 전부터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그는 이미 내 마음을 보고 계신다. 다만 애 마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내 입이 얼마나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지 시험하고 계신 거야,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어려운 선택의 상황에 놓인 적이 없었다.
그토록 여러 해 동안 그렇게 많은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지막 한 발을 내딛기가 어렵다니. 그러나 나는 이미 서원을 했다. 내가 내리는 이 결정은 마지막이고 영원한 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습관을 버리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가.
나는 그 1퍼센트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다.
“으음…… 99퍼센트는 좋지 않아요.”
“…….”
“ 스님이 되는 것에 단 1퍼센트라도 주저함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이 1퍼센트가 나중에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이 1퍼센트는 나머지 99센트보다 강합니다. 1퍼센트는 점점 자라 당신의 마음을 완전히 주무를 것입니다. 그러면 포기를 하고 다시 돌아갈 겁니다. 99퍼센트가 명확해져 완전히 100퍼센트가 될 때 나를 다시 찾아오세요. 오케이?”
“예, 알겠습니다. 큰스님.”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 절을 올리고 신발을 신고 방을 나왔다.
수영장에 가서 다이빙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러면 당시 내 마음속에 일었던 주저와 머뭇거림을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빙하러 올라갈 대는 얼마나 자신감에 차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흥분이 이는가. 그러나 일단 다이빙 판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와 물 사이에 거리가 느껴지면서 갑자기 두려움이 일지 않는가. 와아 ! 저 먼 곳을 어떻게 떨어지나…….당시의 내 마음은 바로 그런 심정이었다.
일단 스님이 되면 돌아와서는 안 된다. 다시 승복을 벗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큰스님을 만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부끄러웠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찾고 묻고 생각하고 방황해 결국 여기까지 왔건만 이렇게 여지없이 흔들리다니.
이제 마지막 문만 열면 되는데 이렇게 머뭇거리다니, 이 방해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앞으로 완전히 다른 코드로 살게 될 내 앞날에 대한 두려움인가. 아니면 내 사랑을 잃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인가. 아니면 부모님에게 끼칠 불효에 대한 걱정인가.
물론 나는 내 스승의 가르침을 100퍼센트 믿는다. 그의 가르침과 삶의 지혜는 예일이나 하버드에서 수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철학공부보다 더 위대했던 것이었다. 그토록 찾아 다녔던 진리였다
그런 강한 확신 속에서도 내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이 방해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인가……
못난 폴, 못난 폴……
자책감과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파고들고 싶었다.
큰 스님은 내가 스님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훨씬 전부터 알고 계셨다. 하버드를 졸업하기 6개월 전에 프라비던스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특별 면담을 신청해놓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만남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 큰 스님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심지어 그의 방문에 노크했었을 때의 내 심리상태와 노크소리까지도 죄다 기억하고 있다.
내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큰스님께서는 가부좌를 틀고 아주 편한 자세로 앉아 계셨다. 얼굴은 아주 맑고 빛이 났다. 피부는 마치 아이처럼 부드럽고 깨끗했다.
많은 도반들은 저마다 큰스님과 처음 가진 개인 만남을 추억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큰스님의 말고 빛이 나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깊은 눈에 반했노라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얼굴과 몸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하버드나 예일에서 만난 그 어떤 천재적인 철학자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학자들의 얼굴은 노소를 막론하고 찡그려져 있었으며 어두웠다. 그들은 하루 종일 우리에게 진리와 빛을 가르쳤지만 정작 그들은 지옥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큰스님의 가르침은 말이 아니라 저 얼굴, 저 눈, 저 분위기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내가 삼배를 드리자 그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오! 잘 있었어요?”
“예, 큰스님.”
그는 나를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래, 무슨 질문이 있읍니까?”
늘 그렇듯 따뜻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큰 스님의 가르침을 새기면 새길수록 삶에 아주 깊은 변화가 옵니다. 수행하면 할수록 스님이 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순간, 나는 큰스님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무척 좋아하시리라 생각했는데 그분의 반응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기쁜 표정은 고사하고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뭔가를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큰스님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短珠를 만지작거리기 시작 하셨다. 그 모든 일이 단 2, 3초 안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나에게는 한 시간처럼 길었다.
마침내 그분은 내 눈을 그윽하게 쳐다 보셨다. 더 이상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마 나를 제자로 받지 않으시려는 모양이구나. 내가 큰 실수를 한 게 틀림없어 이를 어쩌지.’
그러더니 갑자기 이렇게 물으셨다.
“남자 형제가 몇인가요?”
도대체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이람.
“다섯 명입니다.”
“아아 그래요, 하하 하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 스님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은 다시 밝아졌고 눈은 빛났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방안 가득 던지셨다.
“오! 댓츠 원더풀, 노 프라불럼.”(Oh ! That’s Wonderful, No problem.)
나는 영문도 몰랐지만 큰스님의 웃음에 적이 안심이 되어 같이 따라 웃었다.
잠시 후 큰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형제가 없이 자랐읍니다. 내 아버지도 그랬고 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였읍니다. 그래서 내가 스님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것은 바로 대를 끊는 것이었지요. 한국에서는 대가 끊기면 엄청난 불효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3대 독자가 스님이 되겠다고 했으니 부모님 충격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불효 중에서도 가장 나쁜 불효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형제가 많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원더풀 원더풀 노 플라불럼.”
그는 다시 웃었다.
나는 큰 스님의 큰 뜻을 그제서야 알아듣고 그의 세심한 배려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그런데 큰스님, 저에겐 다른 큰문제가 있읍니다.”
나는 여자친구 얘기를 했다. 그녀는 큰스님도 잘아는 제자였다. 나는 큰스님께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출가를 할 수 있을지 여쭈었다.
그러자 큰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상태에선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저 수행만 열심히 하십시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희가 올 겁니다. 서로 많은 말을 해봐야 도움이 안 됩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어떤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알겠지요?”
나는 평온해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예, 알겠읍니다. 큰스님, 그렇게 하겠읍니다.”
방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소를 머금고 계시던 큰스님은 강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말씀하셨다.
“스님이 되는 일은 좀더 빠른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빨리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읍니다. 읿반 사람들 역시 깨달을 수 있지요. 하지만 어렵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수행하면서도 마음속은 엄청나게 싸움을 해야 합니다. 아내나 남편을 갖고 아이들을 갖게 면 아무래도 돈도 벌어야 하고 신경 쓸 일이 많아지지요. 그리고 가족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고요. 하지만 당신은 이제 빠른 길로 들어섰읍니다.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하하 하하.”
승복을 빌려입고 중국으로
액크 교수에게 제출할 보고서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스님이 되는 데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지고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느 날 나는 무상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992년 8월이었다. 무상스님은 숭산 스님의 비서 업무를 보고 계셨다.
무상스님은 며칠 후 중국 승려들이 숭산 큰스님을 초청해 가르침을 듣는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다음주에 일행들이 떠난다고 했다. 그런데 이 행사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라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과 남한 사이에는 어떠한 외교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숭산 큰스님의 법문은 공산주의인 중국 땅에서 남한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행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중국 승려들이 세계 모든 위대한 선사들 중에서도 특히 큰스님을 유난히 따른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중국 승려들 몇몇이 홍콩이나 대만, 싱가포르에 갔다가 그곳에서 행하신 숭산 큰스님의 법문과 가르침을 듣고 감동해 본국으로 돌아가 이를 널리 알렸던 것이다. 그들은 영어를 배우면서까지 큰 스님의 영어 법문집을 밀수해 읽기도 했다.
“그럼요, 가야지요.”
무상스님의 제의에 선뜻 가겠다고 대답했다.
드디어 그 달 30일 도안스님, 도문스님 두 분 미국인 스님들과 함께 LA로 떠났다.
나는 비록 그녀와 나 사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비행기를 타면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그리고 우리 사이에 어떤 변화가 올지 어림짐작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약속한 2주일 후에 꼭 돌아오라고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LA에서 무상스님과 만났다. 그리하여 나는 세 미국인 스님들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LA를 떠나기 전 무상스님이 내게 삭발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 고 제안 하셨다. 그는 스님이 되고 싶어 하는 내 마음과,그러면서 질긴 인연을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이번 중국 행이 나에게 뭔가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줄 역사적인 일이 되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다. 나는 흔쾌히 스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완벽한 삭발은 아니었다 .군인 스타일로 머리카락을 약간 남겨놓았다.
무상스님은 내게 승복을 빌려주셨는데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자 기분이 좀 묘했다. 스님이 되는 길로 한발한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들은 내게 잿빛 승복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즐거워하셨다. 나는 정말 승복이 편했다.
신기한 것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스님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내 마음속에 그렇게 끈질기게 자리했던 욕망, 미련, 머뭇거림이 싹 가셨다는 것이었다. 좀더 자유로워졌다고나 할 까. 머리 깎고 승복을 입으면 구속을 받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리고 스님들이 정말 가족 같고 형제처럼 다가왔다. 전보다 훨씬 더 가볍고 자유로운 사람이 된 듯했다.
우리는 마침내 서울 화계사에서 큰스님을 뵈었다.
며칠 동안 화계사에 머물면서 용맹정진 수행을 했다.폴란드 비구 스님 또 다른 미국 비구와 비구니 스님, 독일 비구니 스님들이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우리 모두는 일단 홍콩으로 갔다. 그리고 홍콩에서 하루 쉬면서 향후 중국 일정에 대해 들었다.
나는 홍콩을 떠나 중국으로 가기 전에 큰스님께 출가 문제를 상의하고 싶었다. 이번 중국 여행이야말로 내가 스님이 되는 결정적 기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 삶의 도약이 되어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몯든 것이 명확해졌다. 아직까지도 모든 의심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길밖에는 없었다. 그 동안 내가 걸어온 삶은 출가를 위해 한발 한발 다가선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 동안 했던 모든 고민들은 모두 바보 같은 일일 뿐이었다. 더 이상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스님이 된다는 일, 특히 미국 사회에서 불교 수행자가 되다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승가생활로 들어가는 일은 엄청난 결심이 서지 않고서는 안되는 일이다. 항상 똑 같은 옷을 입어야 하고 머리도 삭발을 해야 한다. 마음은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과연 애 몸이 잘 따라줄 것인가. 내 업은 매 순간 이를 뒤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침내 큰스님의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셔요.”
우렁차고 큰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큰스님께서는 의자에 앉아 계셨다.
“한가지 사의 드릴 게 있는데요.”
“그래요? 뭐든지 말해보세요.”
나는 신발을 벗고 그에게 큰 절을 올렸다.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소리가 큰스님에게까지 들리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몇 달 전 제가 출가하고 싶다는 말씀, 혹 기억하시는 지요. 이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무릎위에 놓인 내 두손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방안에는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건만 등줄기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오, 댓츠 원더풀. 스님이 되고 싶다 구요.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구요. 댓츠 원더풀 베리 베리 원더풀.”
그의 목소리는 힘이 넘쳐흘렀고 얼굴은 미소로 환하게 빛났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스님이 얼마나되고 싶으세요. 90퍼센트? 99퍼센트? 아니면 100퍼센트?”
큰 스님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계셨다. 그 눈빛이 너무 강해 그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은 내가 못 보는 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약간 두려웠다. 그러나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99퍼센트쯤 됩니다. 큰스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큰스님은 내 입에서 ‘99퍼센트’라는 말이 떨어지기 훨씬 전부터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그는 이미 내 마음을 보고 계신다. 다만 애 마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내 입이 얼마나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지 시험하고 계신 거야,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어려운 선택의 상황에 놓인 적이 없었다.
그토록 여러 해 동안 그렇게 많은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지막 한 발을 내딛기가 어렵다니. 그러나 나는 이미 서원을 했다. 내가 내리는 이 결정은 마지막이고 영원한 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습관을 버리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가.
나는 그 1퍼센트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다.
“으음…… 99퍼센트는 좋지 않아요.”
“…….”
“ 스님이 되는 것에 단 1퍼센트라도 주저함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이 1퍼센트가 나중에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이 1퍼센트는 나머지 99센트보다 강합니다. 1퍼센트는 점점 자라 당신의 마음을 완전히 주무를 것입니다. 그러면 포기를 하고 다시 돌아갈 겁니다. 99퍼센트가 명확해져 완전히 100퍼센트가 될 때 나를 다시 찾아오세요. 오케이?”
“예, 알겠습니다. 큰스님.”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 절을 올리고 신발을 신고 방을 나왔다.
수영장에 가서 다이빙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러면 당시 내 마음속에 일었던 주저와 머뭇거림을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빙하러 올라갈 대는 얼마나 자신감에 차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흥분이 이는가. 그러나 일단 다이빙 판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와 물 사이에 거리가 느껴지면서 갑자기 두려움이 일지 않는가. 와아 ! 저 먼 곳을 어떻게 떨어지나…….당시의 내 마음은 바로 그런 심정이었다.
일단 스님이 되면 돌아와서는 안 된다. 다시 승복을 벗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큰스님을 만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부끄러웠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찾고 묻고 생각하고 방황해 결국 여기까지 왔건만 이렇게 여지없이 흔들리다니.
이제 마지막 문만 열면 되는데 이렇게 머뭇거리다니, 이 방해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앞으로 완전히 다른 코드로 살게 될 내 앞날에 대한 두려움인가. 아니면 내 사랑을 잃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인가. 아니면 부모님에게 끼칠 불효에 대한 걱정인가.
물론 나는 내 스승의 가르침을 100퍼센트 믿는다. 그의 가르침과 삶의 지혜는 예일이나 하버드에서 수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철학공부보다 더 위대했던 것이었다. 그토록 찾아 다녔던 진리였다
그런 강한 확신 속에서도 내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이 방해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인가……
못난 폴, 못난 폴……
자책감과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파고들고 싶었다.
Tuesday, February 14, 2012
만행 출가를 결심하다
만행 출가를 결심하다
나는 마침내 하버드를 졸업했다.
하버드의 졸업식은 아주 대단하다. 전세계 사람들이 졸업식에 온다. 졸업생과 가족 모두에게 하버드의 졸업식은 매우 뜻 깊은 가족행사이다.
3백여 년을 쉬지 않고 매년 치러진 그 졸업식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미국인들은 자신이 지금 미국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갖는다. 졸업식장에는 미국은 물론 국내외 저명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졸업식사는 언제나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된다. 하버드의 졸업식에 참가하는 일은 이처럼 의미 있는 일이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 역시 매우 좋아하셨다.
졸업생 가족들에게는 단지 두 장의 무료 티켓만이 제공되기 때문에 참석을 원하는 사람들은 티켓을 사야 한다. 서로 티켓을 사려고 난리이기 때문에 표는 일찌감치 매진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나는 이미 석사 논문을 제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졸업식까지 무려 3주일이나 기다려야 했다. 다른 친구들은 논문 수정작업 때문에 그것도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이미 지도교수로부터 통과를 받은 나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나는 그 즈음 참선수행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한 순간이라도 헛되이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논문이 통과하자마자 프라비던스 젠 센터로 달려가 한 달간 용맹정진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식을 포기할 수박에 없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마태복음 17잔 25절~2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렸을 때부터 나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에는 불빛이 타올랐다. 예수님은 나를 항상 진리의 길로 이끄는 등불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들에 의해 오염되고 있다.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예수님이 납치를 당했다고나 할까. 예수님 가르침을 오직 자신만이 제대로 알고 있고 제대로 된 갈을 걷고 있다고 믿는 인간들에 의해 교회라는 집단, 종교라는 틀, 혹은 제도에 갇혀버렸다.
현실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살아있는 가르침에 따라 평생 살겠다는 나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나를 철학의 길로, 불교의 가르침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출가에까지 이르도록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는 부처님 때문에만 출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출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진리를 찾고 싶다면 부모와 형제자매를 떠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말은 내 잠재의식 속에 깊이 남아 떠나질 않았다. 나는 예수님 말씀대로 가족이라는 둥지 안에서는 절대로 진리를 찾을 수 없음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던가, 아니면 한편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다른 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신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생명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생명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더 중요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새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다.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새를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너희들 중에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를 한치라도 더 늘릴 수 있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아라. 그것은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도 짜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솔로몬이 온갖 영광을 누렸으나 이 꽃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그런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아니 운이 아주 좋았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없는 일이란 없었으며 이제 조금만 노력하면 소위 말하는 인생의 탄탄대로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버드 졸업장이란 내 부모와 친구들에게 그런 내 삶의 하나의 상징이 될 것이다. 이런 어려운 졸업장을 거머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특히 부모님은 얼마나 뿌듯해 하실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직 졸업식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소중한 수행의 경험을 놓칠 수는 없다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3주 동안 단지 졸업식 참여만을 위해 허송세월을 해야 하는가. 그 동안은 할 일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그 당시 나는 집중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불타고 있었다. 나는 이 길에 나 자신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읽고 생가하고 계산하는 일은 그만두자 .나는 위대한 숭산 대 선사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는 살아있는 스승이고 그의 삶에서 풍겨 나오는 엄청난 지혜는 결국 고통에 신음하는 나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시작이다. 논문 제출을 마쳤으니 이제 액크 교수 보고서를 위한 연구를 하기 전에 집중적인 용맹정진 수행을 통해 큰스님의 가르침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마음 먹었다.
몇 년 전 내가 예일 대학을 졸업할 때 우리 식구들 전부가 그 졸업식에 참석해 출하해주었다. 폴이 드디어 예일 대학 동문이 되었다며 부모님 누나, 형, 동생들이 얼마나 기뻐 했던가.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떠오른다. 그 화려했던 날의 캠퍼스.
그러나 대학 졸업 후에도 내 마음속엔 늘 인생에 대한 허무함과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하지 않았나. 그리고 결국 숭산 큰스님을 통해 해담을 얻지 않았나.
나는 가족들 생각이 날 때마다 예수님 생전의 일화를 상기했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아주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창 강연을 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서 사람을 시켜 예수님을 불렀다. “선생님, 어머니와 형제분들이 밖에서 선생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 어머니와 형제가 누구냐?” 하고 되물으셨다. 그리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보아라, 이들이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내 형제와 자매이며 어머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렇다. 이 땅에 부모, 형제, 자매 아닌 이가 누가 있는가. 이 세상에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 보스턴 지하철 역에서 신문지 한 장 깔아놓고 잠자는 사람들, 거리의 거지들, 삶의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 방황하는 혼란에 빠진 남녀들, 거리의 택시 기사들,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도울 수 없었던 그 수많은 노동자들, 식당 웨이터들, 배달부들, 그리고 변호사 자신들, 이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이고 형제들이었다. 내 어머니고 아버지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예수님 가르침 아닌가. 그것이 바로 쇼펜하우어, 에머슨, 키르케고르, 파스칼, 워즈워즈, 셀리, 키즈, 휘트먼 등등 그 수많은 성인들의 가르침 아닌가. 그것이 바로 음악의 성인 베토벤, 구스타프 말러의 가르침 아닌가.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을 얻어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건져내는 일이다.
나는 결국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부모님은 완전히 놀라 자빠지셨다. 나에게 다시 생각해 볼 수 없느냐. 돌이킬 수 없느냐고 몇 번이나 물으셨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만약 진리를 찾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딴생각 하지 말고 똑바로 가야 한다,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건 바로 그 다음날 나는 보스턴으로 갔다. 그리고 프라비던스 젠 센터 옆에 있는 다이아몬드 힐 젠 선방에서 한 달동안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내 남은 인생에 큰 획을 긋는 귀중한 결정을 앞두고 나는 좀더 강해져야 했다.
수행은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어려웠던 시간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아주 빡빡하게 하루 일정을 짰다. 매일매일 1천 80배를 하고 열 네 시간씩 참선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식사는 아침과 점심에 생식가루만 먹기로 했다. 자다가도 밤에 일어나 절을 하고 참선수행을 했다. 그때는 초여름이라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수행 첫 주는 아주 힘들었다. 아침에 침대를 빠져 나올 수가 없는 날도 있었다. 내 머릿속으로는 부모님 얼굴이 계속 떠올랐고 지금’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는 거야’ 하는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형제들과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옆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 살고 있는 여자친구였다. 나는 그녀가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용맹정진 동안 묵언수행을 했기 때문에 그녀와 전화통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출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동안 많은 시간을 그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는 내 마음을 바꾸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함께 수행하는 도반을 만났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면서 우리는 같이 수행하며 남들을 돕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숭산 큰스님의 제자였고 내가 스님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는 한편 내가 마음을 바꾸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첫 주 동안 나는 거의 매일 눈물을 흘렸다. 쉼 없이 절을 하면서도 참선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밤에는 어둠 속에서 뒤척였다. 아침이면 베개가 마치 물에 젖은 듯했던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너무 고통스러워 다 때려치우자 결심하기도 했다.
‘그래 지금 그만둬도 괜찮아, 이 전도면 충분하잖아, 1주일 정도 했으니 할 만큼 한 거야. 이제 나는 보통사람들처럼 살면 돼, 여자 친구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을 것이고 안정된 직장을 찾아 일하면서 주말이나 휴가 떼 젠 센터에서 틈틈이 수행을 하면 될 거야. 부모님들은 돌아온 아들을 보면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를 반겨 하실까. 그들은 나를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나는 그들 어깨에 지워드린 큰 짐을 내려놓게 하는 효자 노릇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의심과 고통 속에서도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거의 2주가 흐르자 내 마음이 서서히 맑아지고 잡생각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침안개가 햇살에 걷히는 것처럼 모든 의심과 고통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보다 명확하게 보였다.
‘그래 출가를 하자.’
용맹정진을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와 나는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리고는 내 결심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녀는 너무나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내가 기도를 하는 동안 결국은 자기 곁으로 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내가 스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더 굳히고 오자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액크 교수에게 보고서를 내야 했기 때문에 수행을 끝낸 뒤 바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나의 미래를 얘기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2년동안 내가 결국엔 스님이 되는 것으로 결론 지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녀와 이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상 출가에 대해 다른 사람하고 얘기해봐야 나를 더 약하게 하고 서로에게 실망만 더 안겨다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일에 더욱 집중했고 적절한 시기가 되면 적절한 인연이 나에게 다가올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하버드를 졸업했다.
하버드의 졸업식은 아주 대단하다. 전세계 사람들이 졸업식에 온다. 졸업생과 가족 모두에게 하버드의 졸업식은 매우 뜻 깊은 가족행사이다.
3백여 년을 쉬지 않고 매년 치러진 그 졸업식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미국인들은 자신이 지금 미국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갖는다. 졸업식장에는 미국은 물론 국내외 저명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졸업식사는 언제나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된다. 하버드의 졸업식에 참가하는 일은 이처럼 의미 있는 일이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 역시 매우 좋아하셨다.
졸업생 가족들에게는 단지 두 장의 무료 티켓만이 제공되기 때문에 참석을 원하는 사람들은 티켓을 사야 한다. 서로 티켓을 사려고 난리이기 때문에 표는 일찌감치 매진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나는 이미 석사 논문을 제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졸업식까지 무려 3주일이나 기다려야 했다. 다른 친구들은 논문 수정작업 때문에 그것도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이미 지도교수로부터 통과를 받은 나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나는 그 즈음 참선수행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한 순간이라도 헛되이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논문이 통과하자마자 프라비던스 젠 센터로 달려가 한 달간 용맹정진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식을 포기할 수박에 없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마태복음 17잔 25절~2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렸을 때부터 나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에는 불빛이 타올랐다. 예수님은 나를 항상 진리의 길로 이끄는 등불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들에 의해 오염되고 있다.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예수님이 납치를 당했다고나 할까. 예수님 가르침을 오직 자신만이 제대로 알고 있고 제대로 된 갈을 걷고 있다고 믿는 인간들에 의해 교회라는 집단, 종교라는 틀, 혹은 제도에 갇혀버렸다.
현실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살아있는 가르침에 따라 평생 살겠다는 나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나를 철학의 길로, 불교의 가르침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출가에까지 이르도록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는 부처님 때문에만 출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출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진리를 찾고 싶다면 부모와 형제자매를 떠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말은 내 잠재의식 속에 깊이 남아 떠나질 않았다. 나는 예수님 말씀대로 가족이라는 둥지 안에서는 절대로 진리를 찾을 수 없음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던가, 아니면 한편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다른 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신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생명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생명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더 중요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새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다.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새를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너희들 중에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를 한치라도 더 늘릴 수 있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아라. 그것은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도 짜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솔로몬이 온갖 영광을 누렸으나 이 꽃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그런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아니 운이 아주 좋았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없는 일이란 없었으며 이제 조금만 노력하면 소위 말하는 인생의 탄탄대로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버드 졸업장이란 내 부모와 친구들에게 그런 내 삶의 하나의 상징이 될 것이다. 이런 어려운 졸업장을 거머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특히 부모님은 얼마나 뿌듯해 하실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직 졸업식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소중한 수행의 경험을 놓칠 수는 없다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3주 동안 단지 졸업식 참여만을 위해 허송세월을 해야 하는가. 그 동안은 할 일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그 당시 나는 집중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불타고 있었다. 나는 이 길에 나 자신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읽고 생가하고 계산하는 일은 그만두자 .나는 위대한 숭산 대 선사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는 살아있는 스승이고 그의 삶에서 풍겨 나오는 엄청난 지혜는 결국 고통에 신음하는 나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시작이다. 논문 제출을 마쳤으니 이제 액크 교수 보고서를 위한 연구를 하기 전에 집중적인 용맹정진 수행을 통해 큰스님의 가르침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마음 먹었다.
몇 년 전 내가 예일 대학을 졸업할 때 우리 식구들 전부가 그 졸업식에 참석해 출하해주었다. 폴이 드디어 예일 대학 동문이 되었다며 부모님 누나, 형, 동생들이 얼마나 기뻐 했던가.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떠오른다. 그 화려했던 날의 캠퍼스.
그러나 대학 졸업 후에도 내 마음속엔 늘 인생에 대한 허무함과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하지 않았나. 그리고 결국 숭산 큰스님을 통해 해담을 얻지 않았나.
나는 가족들 생각이 날 때마다 예수님 생전의 일화를 상기했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아주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창 강연을 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서 사람을 시켜 예수님을 불렀다. “선생님, 어머니와 형제분들이 밖에서 선생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 어머니와 형제가 누구냐?” 하고 되물으셨다. 그리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보아라, 이들이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내 형제와 자매이며 어머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렇다. 이 땅에 부모, 형제, 자매 아닌 이가 누가 있는가. 이 세상에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 보스턴 지하철 역에서 신문지 한 장 깔아놓고 잠자는 사람들, 거리의 거지들, 삶의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 방황하는 혼란에 빠진 남녀들, 거리의 택시 기사들,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도울 수 없었던 그 수많은 노동자들, 식당 웨이터들, 배달부들, 그리고 변호사 자신들, 이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이고 형제들이었다. 내 어머니고 아버지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예수님 가르침 아닌가. 그것이 바로 쇼펜하우어, 에머슨, 키르케고르, 파스칼, 워즈워즈, 셀리, 키즈, 휘트먼 등등 그 수많은 성인들의 가르침 아닌가. 그것이 바로 음악의 성인 베토벤, 구스타프 말러의 가르침 아닌가.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을 얻어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건져내는 일이다.
나는 결국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부모님은 완전히 놀라 자빠지셨다. 나에게 다시 생각해 볼 수 없느냐. 돌이킬 수 없느냐고 몇 번이나 물으셨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만약 진리를 찾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딴생각 하지 말고 똑바로 가야 한다,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건 바로 그 다음날 나는 보스턴으로 갔다. 그리고 프라비던스 젠 센터 옆에 있는 다이아몬드 힐 젠 선방에서 한 달동안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내 남은 인생에 큰 획을 긋는 귀중한 결정을 앞두고 나는 좀더 강해져야 했다.
수행은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어려웠던 시간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아주 빡빡하게 하루 일정을 짰다. 매일매일 1천 80배를 하고 열 네 시간씩 참선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식사는 아침과 점심에 생식가루만 먹기로 했다. 자다가도 밤에 일어나 절을 하고 참선수행을 했다. 그때는 초여름이라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수행 첫 주는 아주 힘들었다. 아침에 침대를 빠져 나올 수가 없는 날도 있었다. 내 머릿속으로는 부모님 얼굴이 계속 떠올랐고 지금’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는 거야’ 하는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형제들과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옆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 살고 있는 여자친구였다. 나는 그녀가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용맹정진 동안 묵언수행을 했기 때문에 그녀와 전화통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출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동안 많은 시간을 그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는 내 마음을 바꾸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함께 수행하는 도반을 만났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면서 우리는 같이 수행하며 남들을 돕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숭산 큰스님의 제자였고 내가 스님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는 한편 내가 마음을 바꾸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첫 주 동안 나는 거의 매일 눈물을 흘렸다. 쉼 없이 절을 하면서도 참선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밤에는 어둠 속에서 뒤척였다. 아침이면 베개가 마치 물에 젖은 듯했던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너무 고통스러워 다 때려치우자 결심하기도 했다.
‘그래 지금 그만둬도 괜찮아, 이 전도면 충분하잖아, 1주일 정도 했으니 할 만큼 한 거야. 이제 나는 보통사람들처럼 살면 돼, 여자 친구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을 것이고 안정된 직장을 찾아 일하면서 주말이나 휴가 떼 젠 센터에서 틈틈이 수행을 하면 될 거야. 부모님들은 돌아온 아들을 보면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를 반겨 하실까. 그들은 나를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나는 그들 어깨에 지워드린 큰 짐을 내려놓게 하는 효자 노릇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의심과 고통 속에서도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거의 2주가 흐르자 내 마음이 서서히 맑아지고 잡생각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침안개가 햇살에 걷히는 것처럼 모든 의심과 고통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보다 명확하게 보였다.
‘그래 출가를 하자.’
용맹정진을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와 나는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리고는 내 결심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녀는 너무나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내가 기도를 하는 동안 결국은 자기 곁으로 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내가 스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더 굳히고 오자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액크 교수에게 보고서를 내야 했기 때문에 수행을 끝낸 뒤 바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나의 미래를 얘기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2년동안 내가 결국엔 스님이 되는 것으로 결론 지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녀와 이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상 출가에 대해 다른 사람하고 얘기해봐야 나를 더 약하게 하고 서로에게 실망만 더 안겨다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일에 더욱 집중했고 적절한 시기가 되면 적절한 인연이 나에게 다가올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Monday, February 13, 2012
만행 하버드 마사토시 지도교수
하버드 마사토시 지도교수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기 될 수 없다. -누가 복음 14장 26절 ~ 28절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잠보심경 제 3:4~436상
현각
1964년 미국 뉴저지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하버드 대학원 재학중 화계사 조실 崇山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1992년 선불교의 전통이 가장 잘 이어지고 있는 한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의 한국 선불교의 본부 격인 참선 전문 사찰 홍법원의 주지를 지냈으며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불교경전의 영어 번역에 힘쓰고 있다. 숭산스님의 설법집 선의 나침판 The Compass of Zen 과 세계일화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오직 모를 뿐 Only Don’t Know을 영어로 엮어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 마사토시 지도교수
드디어 대학원 석사 코스를 마치고 논문을 쓸 차례였다. 이미 지도교수인 마사토시 교수와 함게 의논을 해 한국의 불교와 숭산 큰스님에 대한 논문을 쓰기로 했기 때문에 준비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나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나는 큰스님이 20여 년간 미국 전역에서 행하신 영어 법문을 죄다 모아 녹음기로 녹취를 했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았다.
그 무렵 아주 입맛이 당길만한 제의가 들어왔다.
하버드 종교학과 학과장인 액크 Eck 교수가 ‘미국에 일고 있는 새로운 종교의 등장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는데 내가 한국 불교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나를 찾은 것이었다.
그녀는 미국 사회에서 영향력있는 종교학자와 철학자로 명성이 높은 분이었는데 비파사나 명상수행을 하는 불교 신자이기도 했다.
액크 교수는 인도의 문화와 문명, 철학에 대해서도 박식해 미국에서 손꼽히는 인도 전문가였다.
교수님의 계획은 미국 회사로부터 연구 지원비를 받아 미국내 새로운 종교현상에 대해 연구를 하고 그 자료를 다 모아 책과 CD로 만들어 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인터뷰를 거친 후 교수님 밑에 한국 불교를 연구하는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먼저 논문부터 마무리 해놓고 그녀의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몇 달 후마침내 논문을 써서 마사토시 교수께 드렸다. 교수님은 아주 만족해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박사과정에 들어가라고 강력하게 권하셨다. 내가 아주 훌륭한 학자가 될 것이라고 격려해주엇다. 구구절절 고마운 말씀이지만 나는 학자 생활이란 게 내가 겪어야할 길과는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물론 한때는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나는 정중하게 교수님 제안을 거절했다. 교수님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셨다. “언젠가 마음이 바뀌면 나에게 찾아오라는”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일단 침을 꿀꺽 삼키고 말문을 열었다. “한국 불교가 이 세상에서 몇 안 되는 귀중하고 소중한 문화라고 느끼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공부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학자가 아니라 수행자로서 살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읍니다.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매일 매일 듭니다.”
교수님은 잠시 나를 처다보더니 담배 한 대를 피워 무셨다. 추억에 잠긴 듯 아무 말씀이 없다가 이윽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역시 젊었을 때 스님이 되고 싶었단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도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굳이 후회할 것까진 없지만 내가 수행자의 길을 걸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련한 미련 같은 건 있지.수행자의 길은 어렵겠지만 아주 훌륭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너의 용기있는 결정이 존경스럽다.
교수님은 정말 솔직하게 나이어린 제자 앞에서 당신의 심경을 털어놓으셨다.교수님의 겸손함과 진솔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좀 슬퍼졌다. 마시토시 교수는 하버든 내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으로 존경받고 있는 분이며 학계에서는 이미 거붕이된 분이었다. 몇 년 후면 정년퇴직을 해야 할 나이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피곤해 보였다. 평생 끝도 없는 논문 마감과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과제에 시달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있었다. 내가 스님이 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뜻밖에 교수님으로부터 “나도 한때 스님이 되고 싶었다”는 말이 돌아오자, 나는 그가 나를 이해해 주고있다는 동질감보다 웬지 모르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마사토시 교수는 모든 훌륭한 가르침을 다 알고 있었다. 저작도 엄천나게 많이 남겼고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하지만 이러한 직업 때문에 정작 자기마음, 자기자신을 공부할 시간은 없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나에게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얼굴에는 얼핏 지난 생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게 엿보였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한 것이다. 저토록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노교수가, 이제 모든것을 이뤄냈으리라는 충족감에 가득 차 있어야 할 나이에 아직도 뭔가 아쉬움에 한쪽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어전함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교수님께 고개숙여 깊이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그리고 웬지 그날의 만남이 교수와 제자로서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스님이 되면 교수님과 나는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물론 교수님께서는 지금까지 걸어오신길—학문하는 사람이 걷는 예측 가능한 길 말이다.—을 계속 가실 것이지만 당신이 걸어온 길을 따라 걷던 니는 이쯤에서 헤여져야 한다. 나는 학문이 아닌 道의 길을 가려 하는 것이다.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때 나는 좀 산란했다. 교수님은 내게 불교로 가는 문을 처음 열어주신 분이다.
숭산스님을 만나기 전 그를 먼저 만났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나의 첫번째 스승인 셈이다.마음 한구석에서 그로부터 계속 가르침을 받고 싶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가 나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로부터 한 6, 7년쯤 지났을까. 재작년에 미국 프라비던스 홍법원 주지로 있을 때 아주 슬픈 소식을 들었다. 마사토시 교수님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국에서.
교수님은 불교국제회의 참석차 한국에 오셨다가 미국에 가기 직전 불국사 석굴암 관광을 가셨다고 한다. 워낙 짧은 일정으로 한국에 오셨던 교수님은 미국에 돌아가는 일이 급했는데 한국 스님과 교수들이 하도 권해서 따라나서신 모양이었다 나는 교수님이 왜 그관광에 동행했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한국 불교에 대한 당신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교수님은 당신께서 한국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사실에 꽤 부끄러워하고 계셨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내가 한국 불교에 대해 여쭈어보면 그는 대체로 답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 교수님은 “아이고, 나는 바보야, 한국 불교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쩧게 불교를 가르치는 교수 노릇을 하고 있나” 하면서 농반 진반으로 푸념을 하셨다.
이유야 어쨋든 간에 그는 불국사 관광 때문에 한국 체류를 잠깐 연장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큰 사고로 이어졌다. 한국인 교수님이 운전을 하셨던 모양인데 약간 미숙했던 모양이었다.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가는길이 워낙 꼬불꼬불한 데다가 마주오던 큰 관광버스가 회전을 하면서 교수님 일행이 탄 승용차를 미쳐보지 못하고 덮친 것이였다.. 다행히 버스를 피하기는 했지만 운전기사는 핸들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 차가 옆으로 처박혔다고 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다른 사람들은 경상을 입었다. 그러나 마사토시 교수는 한 달간이나 한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겨우 몸을 운신할 정도로 회복이 된 후에야 미국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프라비던스에서 만난 동창생들에 따르면 교수님께서 지금까지 그때 그 상처 때문에 고생을 하신다고 하니 마음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사고 때문에 정년까지 앞당기셨다고 하니 말이다..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기 될 수 없다. -누가 복음 14장 26절 ~ 28절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잠보심경 제 3:4~436상
현각
1964년 미국 뉴저지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하버드 대학원 재학중 화계사 조실 崇山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1992년 선불교의 전통이 가장 잘 이어지고 있는 한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의 한국 선불교의 본부 격인 참선 전문 사찰 홍법원의 주지를 지냈으며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불교경전의 영어 번역에 힘쓰고 있다. 숭산스님의 설법집 선의 나침판 The Compass of Zen 과 세계일화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오직 모를 뿐 Only Don’t Know을 영어로 엮어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 마사토시 지도교수
드디어 대학원 석사 코스를 마치고 논문을 쓸 차례였다. 이미 지도교수인 마사토시 교수와 함게 의논을 해 한국의 불교와 숭산 큰스님에 대한 논문을 쓰기로 했기 때문에 준비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나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나는 큰스님이 20여 년간 미국 전역에서 행하신 영어 법문을 죄다 모아 녹음기로 녹취를 했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았다.
그 무렵 아주 입맛이 당길만한 제의가 들어왔다.
하버드 종교학과 학과장인 액크 Eck 교수가 ‘미국에 일고 있는 새로운 종교의 등장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는데 내가 한국 불교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나를 찾은 것이었다.
그녀는 미국 사회에서 영향력있는 종교학자와 철학자로 명성이 높은 분이었는데 비파사나 명상수행을 하는 불교 신자이기도 했다.
액크 교수는 인도의 문화와 문명, 철학에 대해서도 박식해 미국에서 손꼽히는 인도 전문가였다.
교수님의 계획은 미국 회사로부터 연구 지원비를 받아 미국내 새로운 종교현상에 대해 연구를 하고 그 자료를 다 모아 책과 CD로 만들어 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인터뷰를 거친 후 교수님 밑에 한국 불교를 연구하는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먼저 논문부터 마무리 해놓고 그녀의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몇 달 후마침내 논문을 써서 마사토시 교수께 드렸다. 교수님은 아주 만족해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박사과정에 들어가라고 강력하게 권하셨다. 내가 아주 훌륭한 학자가 될 것이라고 격려해주엇다. 구구절절 고마운 말씀이지만 나는 학자 생활이란 게 내가 겪어야할 길과는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물론 한때는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나는 정중하게 교수님 제안을 거절했다. 교수님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셨다. “언젠가 마음이 바뀌면 나에게 찾아오라는”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일단 침을 꿀꺽 삼키고 말문을 열었다. “한국 불교가 이 세상에서 몇 안 되는 귀중하고 소중한 문화라고 느끼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공부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학자가 아니라 수행자로서 살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읍니다.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매일 매일 듭니다.”
교수님은 잠시 나를 처다보더니 담배 한 대를 피워 무셨다. 추억에 잠긴 듯 아무 말씀이 없다가 이윽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역시 젊었을 때 스님이 되고 싶었단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도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굳이 후회할 것까진 없지만 내가 수행자의 길을 걸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련한 미련 같은 건 있지.수행자의 길은 어렵겠지만 아주 훌륭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너의 용기있는 결정이 존경스럽다.
교수님은 정말 솔직하게 나이어린 제자 앞에서 당신의 심경을 털어놓으셨다.교수님의 겸손함과 진솔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좀 슬퍼졌다. 마시토시 교수는 하버든 내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으로 존경받고 있는 분이며 학계에서는 이미 거붕이된 분이었다. 몇 년 후면 정년퇴직을 해야 할 나이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피곤해 보였다. 평생 끝도 없는 논문 마감과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과제에 시달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있었다. 내가 스님이 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뜻밖에 교수님으로부터 “나도 한때 스님이 되고 싶었다”는 말이 돌아오자, 나는 그가 나를 이해해 주고있다는 동질감보다 웬지 모르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마사토시 교수는 모든 훌륭한 가르침을 다 알고 있었다. 저작도 엄천나게 많이 남겼고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하지만 이러한 직업 때문에 정작 자기마음, 자기자신을 공부할 시간은 없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나에게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얼굴에는 얼핏 지난 생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게 엿보였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한 것이다. 저토록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노교수가, 이제 모든것을 이뤄냈으리라는 충족감에 가득 차 있어야 할 나이에 아직도 뭔가 아쉬움에 한쪽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어전함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교수님께 고개숙여 깊이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그리고 웬지 그날의 만남이 교수와 제자로서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스님이 되면 교수님과 나는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물론 교수님께서는 지금까지 걸어오신길—학문하는 사람이 걷는 예측 가능한 길 말이다.—을 계속 가실 것이지만 당신이 걸어온 길을 따라 걷던 니는 이쯤에서 헤여져야 한다. 나는 학문이 아닌 道의 길을 가려 하는 것이다.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때 나는 좀 산란했다. 교수님은 내게 불교로 가는 문을 처음 열어주신 분이다.
숭산스님을 만나기 전 그를 먼저 만났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나의 첫번째 스승인 셈이다.마음 한구석에서 그로부터 계속 가르침을 받고 싶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가 나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로부터 한 6, 7년쯤 지났을까. 재작년에 미국 프라비던스 홍법원 주지로 있을 때 아주 슬픈 소식을 들었다. 마사토시 교수님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국에서.
교수님은 불교국제회의 참석차 한국에 오셨다가 미국에 가기 직전 불국사 석굴암 관광을 가셨다고 한다. 워낙 짧은 일정으로 한국에 오셨던 교수님은 미국에 돌아가는 일이 급했는데 한국 스님과 교수들이 하도 권해서 따라나서신 모양이었다 나는 교수님이 왜 그관광에 동행했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한국 불교에 대한 당신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교수님은 당신께서 한국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사실에 꽤 부끄러워하고 계셨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내가 한국 불교에 대해 여쭈어보면 그는 대체로 답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 교수님은 “아이고, 나는 바보야, 한국 불교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쩧게 불교를 가르치는 교수 노릇을 하고 있나” 하면서 농반 진반으로 푸념을 하셨다.
이유야 어쨋든 간에 그는 불국사 관광 때문에 한국 체류를 잠깐 연장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큰 사고로 이어졌다. 한국인 교수님이 운전을 하셨던 모양인데 약간 미숙했던 모양이었다.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가는길이 워낙 꼬불꼬불한 데다가 마주오던 큰 관광버스가 회전을 하면서 교수님 일행이 탄 승용차를 미쳐보지 못하고 덮친 것이였다.. 다행히 버스를 피하기는 했지만 운전기사는 핸들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 차가 옆으로 처박혔다고 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다른 사람들은 경상을 입었다. 그러나 마사토시 교수는 한 달간이나 한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겨우 몸을 운신할 정도로 회복이 된 후에야 미국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프라비던스에서 만난 동창생들에 따르면 교수님께서 지금까지 그때 그 상처 때문에 고생을 하신다고 하니 마음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사고 때문에 정년까지 앞당기셨다고 하니 말이다..
만행 나는 한국 문화에 빚진 사람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 까지 2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재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기 될 수 없다. -누가 복음 14장 26절 ~ 28절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잠보심경 제 3:4~436상
현각
1964년 미국 뉴저지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하버드 대학원 재학중 화계사 조실 崇山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1992년 선불교의 전통이 가장 잘 이어지고 있는 한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의 한국 선불교의 본부격인 참선 전문 사찰 홍법원의 주지를 지냈으며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불교경전의 영어 번역에 힘쓰고 있다. 숭산스님의 설법집 「선의 나침판 The Compass of Zen」과「세계일화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오직 모를 뿐 Only Don’t Know 을 영어로 역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현재 화계사와 계룡산 국제 선원에서 구도자로서 수행정진하고있다. 1999년 10월
나는 한국 문화에 빚진 사람
1991년 9월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 다시 복학했다.
나의 여자친구는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내 마음상태를 금방 알아차렸다. 이미 하버드를 졸업하는대로 한국으로 다시 갈 것이라고 결심했지만 그녀에게 털어놓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미 여자의 육감으로 눈치챈 듯했다.
나는 한국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또 한국 사찰에서의 수행생활도 잊혀지지 않았다. 학교에 복학한 후 젠센터를 나와 아파트를 따로하나 빌려 살았는데 방에 큰 석굴암 불상 사진을 걸어놓기도 했다.
어느 날 하버드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교수님 한 분이우연히 내 아파트에 왔다가 그 사진을 보시더니 너무 아름답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는 한국 미술을 처음 접했다며 이렇게 훌륭한지 몰랐다고 기회가되면 한국에 가복 싶다고 까지 하셨다. 그는 미술을 보는 안목이 세계적인 분으로 하버드 안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ㄴ나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한국가게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김치. 깍두기, 김 등 각종 반찬을 사다 먹었다. 내가 그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주인이나 손님들은 흘끗흘끗 나를 쳐다보았다. 한국가게 손님들 대부분은 한국인들이었는데 웬 껑충한 미국인이 들어와서 김치, 고추장 등 매운 것을 사가니까 매우 신기한 모양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호박죽이었는데 인스턴트 가루이긴 했지만 틈날 때마다 사다가 만들어 먹었다. 친구들에게도 가끔 해주었는데 참 좋아했다. 돈이 좀 생기면 케임브리지 젠센터 옆에있는 한국 식당에 가서 되장찌게, 돌솥비빔밥을 사먹곤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곤 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 나는 한국에 있을 때 한국의 ‘뽕짝’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고속도로 휴계소, 택시 안, 편의점 가게에서 그런 가락의 노래들을 자주 들었는데 나중에서야 나는 그것을 ‘뽕짝’ 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 흐느적 거리는 가락이 너무 좋아서 테이프 몇 개를 사갔다. 가사도 모르는 채 그냥 가락만 듣고 있어도 마냥 좋았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운전할 때나 청소할 때마다 그 테이프를 틀어놓았다. 미국인 찬구들도 아주 재미있어 했다. 심지어 자기들도 듣겟다며 복사를 해간 친구들도 있다.
뽕짝은 아주 순수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좀 슬프기도 했기만 너떤것은 아주 기분이 좋아지게도 했다.
나는 아중에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의 ‘한’ 恨이라는 정서에 대해 듣게 됐는데 그 한이라는 말에 담긴 한국인들의 마음이 내 가슴에도 깊이 전해져왔다. 어쨋든 뽕짝이 한의 정서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얘길 듣고 내가 왜 그렇게 뽕짝에 반했는가. 신비한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돌아온 직후 마음속에 큰 다짐 하나를 했었다. 바로 한국말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하버드에 복학하자마자 한국어 강좌에 등록을 했다.
교수님은 김남희 선생님니신데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의 부인이셨다. 와그너 교수는 하버드에, 아니 미국학계에 처음으로 한국학을 소개하신 분이다. 와그너 교수는 당시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문화와 문학을 가르치고 계셨다.
내가 신청한 한국어 강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수업이 있는 집중강의였다. 수강생은 약 40명 가량 됐는데 미국인은 나와 다른 여학생 단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재미교포 2세, 혹은 3세 글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미국인이었다. 자유분망했고 어른들 앞에서도 거리낌는게 없었다. 완전히 마국 신세대였다. 겉은 한국인 이었지만 속은 미국사람 같다고나 할까.
나는 사실 한국어 강의를 신청하면서 말은 물론이고, 내심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수업시간에 만난 한국인들은 나처럼 까막눈들이 많았다. 어떤 학생들은 듣는 것은 좀되는데 쓰기난 말하기는 업두도 못 냈다.
학생들 중에 한국말을 배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몇명이 안 됐다. 대부분 학생들은 그저 부담이 안 가는 가벼운 강좌를 듣겠다는 의도로 수강하고 있었다. 또 일부 학생들 중에는 부모님의 간청에 못 이겨 억지로 ㅂ배우는 사람도 있었다. 수강생들 대부분은 아예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다거나 갔더라도 어릴 때 잠깐 다녀와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이목구비는 한국인이었지만 전형적인 미국인이 도고 싶어 ‘노력’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미국스타일을 지니치게 쫓는다든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곧바로 따라하고 싶어한다든지, 부모와 할아버지ㆍ할머니 세대의 말은 무조건 무시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엿보였다. 수업시간빼고는 그들이 하는 대화는 한국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미국의 속어와 비어들을 섞어가며 오직 영어만 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국 교포들 중 많ㅇ은 학생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마치 몸에 큰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상실감을 갖고 살고 있었다. 좀 슬펐다. 다만 나는 그들이 한국어 감좌에 올때마다 아주 편안한 느낌을 갖는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아마 교포자녀라는 동류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마치 한가족이라는 느낌이 들 전도로 수업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여느 강좌에서 보여지는 경쟁이라든지 하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예일대 법대, 하버드 법대나 의대 등 내로라 하는 대학을 다니는 수재들이었는데 한국말을 배우는 시간만큼은 어린아이로 돌아오는 듯했다.
어쨋든 나는 1년 동안 하버드를 한국말을 배우는 재미로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 공부는 더이상 흥미가 나지 않았다. 일단 이학은 했으니 학위를 따야한다는 의무감과 부담감만 있을 뿐이었다.
김남희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한국에 대한 다큐멘타리 영상물과 시진을 많이 가져와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학교안이나 밖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 행사도 마련하셨다.학생들 각자가 집에서 준비해오는 경우도 있지만 김 교수님이 직접 미역국, 된장국, 두부, 잡채 등을 만들어서 우리를 먹이기도 하셨다.
교수님은 학생들ㅇ에게 “조상의 나라를 잊으면 안 된다 어떻게 그렇게 자기나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수가 있는냐”면서 그들에게 한국에 관한 어떤 것이라도 가르쳐주고 싶어하셨다.
어느 날 교수님이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을 테니 준비를 해오라”고하지 남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건 여학생듦만 하면 되지요? 순간,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남학생은 한국말 수업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좋아 인기가 좋았다. 교수님도 함께 웃으시더니 이렇게 받아 넘기셨다.
“아니, 평소에는 완전히 미국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더니 갑자기 전형적인 한국남자가 되었네요.”
그러자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학생들이 종이를 무쳐 그에게 던지면서 놀려대기도 했다. 웃음이 가라앉자 교수님이 그에게 물었다.
“학생은 한국 남자예요? 미국 남자예요?”
진지한 선생님 물은에 그 남학생 얼굴이 빨개졌다.
교실안에 잠시 침묵이 흘렸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게 우리들의 고민이지요.”
사실 외국인인 내 입장에서 보더라도 좀 이상할 정도로 그들은 한국문화와 정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나부다도 관심이 넚었다. 어떤 학생들은 애써 잊으려 하거나 의도적으로 소홀하게 여기기도 했다. 한국에 관한 한 그들은 나와 똑같은 외국인 이었다.
나는 그들과의 경험을 통해 이런다짐을 했다. 내게 그렇게 소중하게 다가온 한국 문화, 그리고 숭산 큰 스님이 가르쳐주신 한국의 정신, 이것이 얼마난 소중한 것인지 그들에게 알려주리라. 이미 내 삶은 큰스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므로 나는 한국 문화에 일종의 빛을 진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재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기 될 수 없다. -누가 복음 14장 26절 ~ 28절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잠보심경 제 3:4~436상
현각
1964년 미국 뉴저지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하버드 대학원 재학중 화계사 조실 崇山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1992년 선불교의 전통이 가장 잘 이어지고 있는 한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의 한국 선불교의 본부격인 참선 전문 사찰 홍법원의 주지를 지냈으며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불교경전의 영어 번역에 힘쓰고 있다. 숭산스님의 설법집 「선의 나침판 The Compass of Zen」과「세계일화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오직 모를 뿐 Only Don’t Know 을 영어로 역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현재 화계사와 계룡산 국제 선원에서 구도자로서 수행정진하고있다. 1999년 10월
나는 한국 문화에 빚진 사람
1991년 9월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 다시 복학했다.
나의 여자친구는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내 마음상태를 금방 알아차렸다. 이미 하버드를 졸업하는대로 한국으로 다시 갈 것이라고 결심했지만 그녀에게 털어놓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미 여자의 육감으로 눈치챈 듯했다.
나는 한국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또 한국 사찰에서의 수행생활도 잊혀지지 않았다. 학교에 복학한 후 젠센터를 나와 아파트를 따로하나 빌려 살았는데 방에 큰 석굴암 불상 사진을 걸어놓기도 했다.
어느 날 하버드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교수님 한 분이우연히 내 아파트에 왔다가 그 사진을 보시더니 너무 아름답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는 한국 미술을 처음 접했다며 이렇게 훌륭한지 몰랐다고 기회가되면 한국에 가복 싶다고 까지 하셨다. 그는 미술을 보는 안목이 세계적인 분으로 하버드 안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ㄴ나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한국가게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김치. 깍두기, 김 등 각종 반찬을 사다 먹었다. 내가 그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주인이나 손님들은 흘끗흘끗 나를 쳐다보았다. 한국가게 손님들 대부분은 한국인들이었는데 웬 껑충한 미국인이 들어와서 김치, 고추장 등 매운 것을 사가니까 매우 신기한 모양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호박죽이었는데 인스턴트 가루이긴 했지만 틈날 때마다 사다가 만들어 먹었다. 친구들에게도 가끔 해주었는데 참 좋아했다. 돈이 좀 생기면 케임브리지 젠센터 옆에있는 한국 식당에 가서 되장찌게, 돌솥비빔밥을 사먹곤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곤 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 나는 한국에 있을 때 한국의 ‘뽕짝’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고속도로 휴계소, 택시 안, 편의점 가게에서 그런 가락의 노래들을 자주 들었는데 나중에서야 나는 그것을 ‘뽕짝’ 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 흐느적 거리는 가락이 너무 좋아서 테이프 몇 개를 사갔다. 가사도 모르는 채 그냥 가락만 듣고 있어도 마냥 좋았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운전할 때나 청소할 때마다 그 테이프를 틀어놓았다. 미국인 찬구들도 아주 재미있어 했다. 심지어 자기들도 듣겟다며 복사를 해간 친구들도 있다.
뽕짝은 아주 순수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좀 슬프기도 했기만 너떤것은 아주 기분이 좋아지게도 했다.
나는 아중에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의 ‘한’ 恨이라는 정서에 대해 듣게 됐는데 그 한이라는 말에 담긴 한국인들의 마음이 내 가슴에도 깊이 전해져왔다. 어쨋든 뽕짝이 한의 정서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얘길 듣고 내가 왜 그렇게 뽕짝에 반했는가. 신비한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돌아온 직후 마음속에 큰 다짐 하나를 했었다. 바로 한국말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하버드에 복학하자마자 한국어 강좌에 등록을 했다.
교수님은 김남희 선생님니신데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의 부인이셨다. 와그너 교수는 하버드에, 아니 미국학계에 처음으로 한국학을 소개하신 분이다. 와그너 교수는 당시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문화와 문학을 가르치고 계셨다.
내가 신청한 한국어 강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수업이 있는 집중강의였다. 수강생은 약 40명 가량 됐는데 미국인은 나와 다른 여학생 단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재미교포 2세, 혹은 3세 글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미국인이었다. 자유분망했고 어른들 앞에서도 거리낌는게 없었다. 완전히 마국 신세대였다. 겉은 한국인 이었지만 속은 미국사람 같다고나 할까.
나는 사실 한국어 강의를 신청하면서 말은 물론이고, 내심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수업시간에 만난 한국인들은 나처럼 까막눈들이 많았다. 어떤 학생들은 듣는 것은 좀되는데 쓰기난 말하기는 업두도 못 냈다.
학생들 중에 한국말을 배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몇명이 안 됐다. 대부분 학생들은 그저 부담이 안 가는 가벼운 강좌를 듣겠다는 의도로 수강하고 있었다. 또 일부 학생들 중에는 부모님의 간청에 못 이겨 억지로 ㅂ배우는 사람도 있었다. 수강생들 대부분은 아예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다거나 갔더라도 어릴 때 잠깐 다녀와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이목구비는 한국인이었지만 전형적인 미국인이 도고 싶어 ‘노력’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미국스타일을 지니치게 쫓는다든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곧바로 따라하고 싶어한다든지, 부모와 할아버지ㆍ할머니 세대의 말은 무조건 무시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엿보였다. 수업시간빼고는 그들이 하는 대화는 한국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미국의 속어와 비어들을 섞어가며 오직 영어만 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국 교포들 중 많ㅇ은 학생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마치 몸에 큰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상실감을 갖고 살고 있었다. 좀 슬펐다. 다만 나는 그들이 한국어 감좌에 올때마다 아주 편안한 느낌을 갖는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아마 교포자녀라는 동류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마치 한가족이라는 느낌이 들 전도로 수업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여느 강좌에서 보여지는 경쟁이라든지 하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예일대 법대, 하버드 법대나 의대 등 내로라 하는 대학을 다니는 수재들이었는데 한국말을 배우는 시간만큼은 어린아이로 돌아오는 듯했다.
어쨋든 나는 1년 동안 하버드를 한국말을 배우는 재미로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 공부는 더이상 흥미가 나지 않았다. 일단 이학은 했으니 학위를 따야한다는 의무감과 부담감만 있을 뿐이었다.
김남희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한국에 대한 다큐멘타리 영상물과 시진을 많이 가져와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학교안이나 밖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 행사도 마련하셨다.학생들 각자가 집에서 준비해오는 경우도 있지만 김 교수님이 직접 미역국, 된장국, 두부, 잡채 등을 만들어서 우리를 먹이기도 하셨다.
교수님은 학생들ㅇ에게 “조상의 나라를 잊으면 안 된다 어떻게 그렇게 자기나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수가 있는냐”면서 그들에게 한국에 관한 어떤 것이라도 가르쳐주고 싶어하셨다.
어느 날 교수님이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을 테니 준비를 해오라”고하지 남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건 여학생듦만 하면 되지요? 순간,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남학생은 한국말 수업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좋아 인기가 좋았다. 교수님도 함께 웃으시더니 이렇게 받아 넘기셨다.
“아니, 평소에는 완전히 미국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더니 갑자기 전형적인 한국남자가 되었네요.”
그러자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학생들이 종이를 무쳐 그에게 던지면서 놀려대기도 했다. 웃음이 가라앉자 교수님이 그에게 물었다.
“학생은 한국 남자예요? 미국 남자예요?”
진지한 선생님 물은에 그 남학생 얼굴이 빨개졌다.
교실안에 잠시 침묵이 흘렸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게 우리들의 고민이지요.”
사실 외국인인 내 입장에서 보더라도 좀 이상할 정도로 그들은 한국문화와 정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나부다도 관심이 넚었다. 어떤 학생들은 애써 잊으려 하거나 의도적으로 소홀하게 여기기도 했다. 한국에 관한 한 그들은 나와 똑같은 외국인 이었다.
나는 그들과의 경험을 통해 이런다짐을 했다. 내게 그렇게 소중하게 다가온 한국 문화, 그리고 숭산 큰 스님이 가르쳐주신 한국의 정신, 이것이 얼마난 소중한 것인지 그들에게 알려주리라. 이미 내 삶은 큰스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므로 나는 한국 문화에 일종의 빛을 진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Tuesday, February 7, 2012
만행 꿈의 화계사
꿈의 화계사
마침내 화계사에 도착햇다. 와, 드디어 숭산스님이 계신 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꿈에그리던 화계사, 위대한 선사 고봉스님이 돌아가신 곳 마치 성지 순례를 온 수도자처럼 가슴속에서 경건한 마음이 일었다.
어둠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가와지붕의 아름다운 곡선,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밖이 추우니 빨리 들어가자는 무심스님의 재촉도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화계사 경내로 걸어 들어서면서 좀 이상한 냄새를 느꼈다. 뭔가 퀴퀴하다고 할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공항에 내릴 때 부터 내 코를 자극하던 냄새였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것은 ‘연탄 냄새’였다. 그때가 1990년이었는데 그때만해도 서울의 난방재료는 연탄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연탄이 자취를 감추고 있으니 불과 10녀년 만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드디어 화계사에 방 하나를 배정받고 몸을 눕혔다. 옆에는 나와 미찬가지로 동안거에 참여하기 위해 온 서양사람이 이미 잠든 상태엿다.
그날 밤, 나는 몸이 피곤했는데도 흥분과 감동으로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다. 그러다 살프시 잠이 들엇다. 그러나 곧 너무더운 열기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몸 한쪽이 불에 데인 것같이 뜨거웟다. 온돌의 열기 때문이었다. 나는 덮고있던 담요를 접고 바닥에 깐 뒤에야 겨우 누울 수 있었다.
화계사의 기상시간은 보통 세 시었다. 그런데 나는 두 시 반에 눈을 떠 영 잠을 자지 못했다. 화장실에 갔다가 들어왔더니 룸메이트도 깨어 있었다. 알고보니 프라비던스 젠센터에서 만난적이 있었던 닐잉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나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 큰스님이 지금 이 절에 계시냐고 물었더니 그는 손가락으로 다른 가와집 빌딩을 가리키면서 ‘저곳에 계신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붋빛이 새여나오고 있었다. 그때가 새벽 두 시 40분 이었다.
닐이 나의 놀란표정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큰스님 방에는 항상 두시에 불이켜져.”
“왜?”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녀서 1천배를 하신대.”
나는 감동과 존경심으로 할말을 잃었다 잠시 큰스님이 계신 곳의 불빛을 바라보고 법당으로 갔다. 법당에는 나말고도 약 20여 명의 외국인들이 있었다. 미국, 폴란드, 캐나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전세계에서 동안거를 하기위해 온 사람들과 10여명의 외국인 스님들이었다.
드디어 숭산스님이 법당안으로 들어오셨다. 우리는 모두 삼배를 올렸다.
큰스님은 늘 그러하시듯 하나하나 우리얼굴을 찬찬히 살피셨다..
오! 하버드 스튜던트. 원더풀 원더풀. 하우 아 유 (Oh Wonderful, Wonderful How are you).”l
와 ! 세상에, 큰스님이 나를 알아본 것이다. 단 한번 면담을 하고 두어번 예불시간에 마주쳤을 뿐이었는데 그분이 나를 기억하시고 계셨다.
우리 모두는 같이 염불하고 참선수행하고 발우공양까지 마쳤다.
나는 며칠 뒤부터 있을 계룡산 신원사 동안거를 기다라며 서울구경을 했다 .조계사도 가고 승복도 샀다. 동안거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내일이면 신원사로 향하는 날.
그날 밤 나는 화계사 큰방에서 나처럼 동안거에 참여하기 위해온 10여 명의 외국인들과 함께 마침내 삭발을 했다.
아마독자 여러분들은 출가하지도 않은 일반신도가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깍고 동안거를 하는 전통이 다소 의아할 것이다. 한국 불교의 전통에는 그런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숭산스님의 전통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숭산스님이 그런파격을 하신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서양에서 불교가 점차인기를 얻고있고 동양의 선사들이 존경을 받는다해도 불교의 역사가 아직 짧기 때문에 서양만의 불교전통은 아직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한국불교의 전통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다. 한국ㆍ중국ㆍ일본 불교에서는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승려들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불자들이 수행을 통해 불교를 접한다. 절에가서 뭐뭐뭐 해달라고 빌기위해 불교를 접한다는 이야기다.
큰스님은 열린마음을 갖고계신 분이다. 따라서 우리 미국사람들의 상황과 마음을 잘 읽고 그에 맞춰 불교전통을 만들어오셨다. 오히려 선방스님들은 젠센터에서 별도의 일들을 갖고있기 때문에 일단 승려가 되면 안거수행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비해 신도들은 자기가 마음먹기에 따라 시간을 낼 수도 있고 출가를 하지 않고도 안거수행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또 미국에는 당장에 절을 많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 신도들이나 비구니들 만을 위해 따로 공간을 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큰스님은 동안거, 하안거 때 승려와 신도들이 같이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때 신도들은 스님들처럼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어야 한다.
본래 숭산스님이 지도하시는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서의 첫 동안기 수행은 1984년경 수덕사에서 이루어졌다. 큰스님이 젊었을 때 수덕사에 살면서 수행하셨기 때문에 그곳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큰스님의 스승이신 고봉대선사, 경허대선사 역시 수덕사에서 살면서 수행하셨다.
그런역사 깊은 사찰에서 비구,비구니, 일반 남녀 신자들이 같은 선방에서 함께수행을 하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완전히 혁명적인 일이였다. 많은 한국스님들은 숭산스님의 이런행동이 한국불교를 오엽시킨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일부 스님들은 숭산스님에게 대놓고 ’한국불교를 망친다’고 항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숭산스님은 별 도리가 없었다. 많은 푸른 눈 제자들이 한국에가서 수행하고 싶었는데 그들을 따로따로 수영할 공간이 없었다. 또 비록 출가는 안 했다 하더라도 진정 수행을 원하는 일반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어하셨다.
결국 숭산스님과 수덕사의 오랜인연으로 당시 수덕사 방장스님이셨던 원담 큰스님은 숭산스님의 푸른 눈 제자들이 수덕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매년 안거에 참여하는 미국사람들이 늘어났다. 큰스님은 ‘한국에 가면 한국 참선불교 전통의 뿌리를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미국사람들은 일단 한국에서의 동안거 경험을 필수코스로 여겼다.
사람이 갈수록 늘어 더이상 수덕사 선방에서 수용할수 없는 지경까지 되자 동안거는 1989 계룡산 신원사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3년 뒤인 1992년 마침내 화계사에 국제선원이 따로 만들어지면서 화계사에서도 안거가 가능 해졌다.
요즈음 매년 1백 명이상의 전세계사람들이 큰스님의 지도아래 하안거, 동안거 수행에 참가한다. 그들중 일부는 출가를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아주 많다.
신원사 동안거
신원사 안거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머리를 깎아야하고 승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록 출가는 하지 않았어도 스님과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 아주 엄격한 규율이어서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내가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았어도 출가한 스님은 아니기 때문에 스님들 앞에서는 모든 예를 갖춰야 한다. 안거기간 중 개인 물건은 사과박스 두 개 이외에는 허용이 안 된다. TV, 전화는 물론이고 편지왕래도 안된다. 일체 묵언을 해야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만 빼고는 90일동안 절을 떠나서는 안 된다. 신원사는 아주 오래된 절이다. 공주와 가까운 계룡산 남쪽에 위치해 있다. 선방은 아주 작다.
미국사람들은 넓은 땅에서 공간의 부족함이 없이 살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 대해 유난히 다른나라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여긴다. 처음 경험하는 한국사찰 생활의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것도 많았다. 가장 재미있었던 경험은 화장실 경험이었다. 나는 그렇게 먼 화장실은 처음보았다. 선방에서 60여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화장실 경험은 나에게 완전히 충격이었다. 볼일(?)을 마치고 일어서면 문짝이 목 부근까지만 닿기 때문에 앞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콘크리트 바닥에 구멍만 뚫어놓은 것이라 주저앉아서 일을 봐야했다. 냄새도 냄새지만 추운날씨에 볼일을 봐야 했기 때문에 매번 화장실에가고 오는 일이 아주 귀찮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엉덩이가 추워서 오래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느 날은 볼일을 마치고 버린 휴지가 바람에 밀려 위로 날아가기도 했다. 처음격는 일이라 좀 당혹스러웠다. 그 일을 격고 난 뒤 부터는 휴지가 날릴까봐 손을 좀더 구멍에 깊이 넣는라 애를 쓰고 했다. 화장실에 가는일이 고역이긴 했는데 나는 안거 기간동안 나오는 한국음식이 너무 맛있엇서 매번 과식을 했고 따라서 화장실에 자주갔고 갈 때마다 좀 오래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 화장실을 보면서 한국이 후진국이라는 생각보다는 이런 문화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아주강한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신원사에서 살면서 한국인에 대한 존경심을 개록새록 가지게 되었다. 할 수 있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사람들, 마음만 먹으면 못해내는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신원사 주변에는 농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화장실을 가기워해 밖에 나왔다가 한 초로의 농부가 지게에 나뭇짐을 가득 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가냘픈 할아버지가 저렇게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가실까. 그 옆에는 아저씨들 몇몇이 힘을 합쳐 바위를 옮기고 계셨다.
안거 생활 1개월이 지났을 때 우리는 쓰레기를 묻기위해 신원사 뒷마당에 큰 구덩이를 팠는데 그날 함께 일을하는 아저씨들이 너무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추운 날인데도 아랑곳없이 하루종일일을 했다. 아저씨들의 몸이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의지 하나로 모든 일을 해냈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고 난 뒤 건강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수정해야 했다. 전엔 ‘건강’ 혹은 ‘강하다’는 것이 우선 근육질 몸매에 체구가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아저씨나 농부들이나 다들작고 비쩍마른 체구였는데도 엄청난 힘을 냈다. 몸은 비록 미국인보다 작고 가날펐지만 거기서 나오는 힘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 나온것이었다. 진정 강한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나는 그 사람들을 통해 처음보았다. 거기에 비한다면 미국인들은 몸이크고 강해 보일지 몰라도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었다. 진정 강한 것이란 무엇인가.
또 신원사의 법당안은 불을 때지않아 완전히 얼음속 같았다.
신원사는 가난한 절이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땔감을 때지 못했다. 그런데 신도들은 아침저녁으로 그 추운법당안에 모여 열심히 절을 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 얼음장 같은 법당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절을 했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나라를 가보았지만 어느나라, 어느민족에게서도 이런 강인한 에너지를 느끼지 못했다.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동안 너무편하게 살아온 게 아니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이 이런’ 할수있다’는 에너지가 부러웠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지게에 나무를 가득 짊어지고 절안으로 들어왔다.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쓸 땔감인 것 같았다.
그는 나무가 가득 든 지게를 옆에세워두고 잠사 땀을 식혔다. 나는 마침 쉬는 시간이기도 해서 그에게 다가가 그 지게를 한번 져보고 싶다는 몸짓을 했다.
아저씨는 흔쾌히 승낙을 하셨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지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와 ! 이렇게 무거운 것을 나보다 약해보이는 저 아저씨가 저렇게 잘도 졌단 말인가. 나는 스물다섯의 혈기왕성한, 힘이 넘치는 젊은이였는데도 이 노인에 가까운 아저씨가 지는 지게를 못 지다니, 아저씨는 낑낑 거리는 나를 보고 한참 웃으셨다.
나는 어설프게 배운 한국말로 나이를 여쭈었다. 예순다섯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였다. 그는 허허 웃으시면서 다시 지게를 지고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한 손에 담배대까지 쥐고 말이다. 나는 마치 텔레비전에서 하는 묘기 대행진이라도 보듯 그이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이쯤 되면 쓰레기통 옮기는 것조차도 귀찮아 하는 살찐 미국노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친 김에 부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부엌 안에는 더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추운 날이었는데도 공양주 보살님들이 부엌에서 장갑하나 끼지않고 일을하고 계신것이 아니가.
아니, 세상에 이렇게 강한 사람들이 있을까, 와 한국사람들 정말 파이팅, 파이팅이다.
그런모습을 볼 때마다 나은 내 마음속에 아주 큰 다짐을 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조금 불편하고 어려운 것쯤은 이겨내야 한다.’
그럴수록 아주 열심히 참선수해에 전념했다.
안거기간 중 매우 인상적인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화계사 보살님들의 방문이었다. 보살님들은 땅콩버터와 빵, 과일, 야채, 케이크, 호박죽, 양말, 속옷 등을 가득싣고 오전 열 시경 신원사에 도착했는데 신원사까지는 버스가 직접 못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내려가서 그 짐을 다 가지고 올라왔다.
그때 일은 한국불자들의 순수한 마음을 경험한 첫번째 경험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뭘 하던 시람인지, 우리가 얼마나 나쁜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를 텐데도 머리 깎은 우리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냈고 뭐 하나라도 도울 것이 없을까 하고 분주했다.더구나 우리는 모두 다른나라 사람들 아니가. 그런데도 그들이 베푸는 사랑과 애정은 민족과 나라를 초월한 것이었다.
보살님들은 새벽 네 시에 서울을 출발해 버스에 시달린 피곤한 몸이었을 텐데 바로 부엌으로 달려가 미역국, 찰밥 등 우리를 위한 점심 음식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선방으로와서 우리에게 삼배를 올렸다. 나는 스님도 아니데 그들에게 스님 대접을 받는것 같아 미안하고 계면쩍었다.
여태껏 살면서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보살님들과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묵언 때문에 많은 얘기를 할 수 없었지만 말 없이도 우리는 너무 좋은 시간을 가졌다.
당시 나는 한국말을 거의 몰랐다. 그런데 한국에 도착하면서 들은 말 중에 ‘여보세요’라는 밀이 쉽게 외워졌다. 아마 인사말인 것 같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신원사를 떠나는 그들을 향해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몇몇 보살님들이 내 말을 듣고 좀 이상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박장대소를 하는 바람에 나는 내가 틀린 말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몰랐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빨개진다.
이 화계사 보살님들의 방문은 나를 더욱 고무시켰다. 그런 순수하고 정이 넘치는 친절한 마음,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한테, 그것도 파란눈을 가진 외국인들에게, 한국말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그들은 마치 어머니 같은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마침내 화계사에 도착햇다. 와, 드디어 숭산스님이 계신 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꿈에그리던 화계사, 위대한 선사 고봉스님이 돌아가신 곳 마치 성지 순례를 온 수도자처럼 가슴속에서 경건한 마음이 일었다.
어둠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가와지붕의 아름다운 곡선,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밖이 추우니 빨리 들어가자는 무심스님의 재촉도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화계사 경내로 걸어 들어서면서 좀 이상한 냄새를 느꼈다. 뭔가 퀴퀴하다고 할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공항에 내릴 때 부터 내 코를 자극하던 냄새였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것은 ‘연탄 냄새’였다. 그때가 1990년이었는데 그때만해도 서울의 난방재료는 연탄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연탄이 자취를 감추고 있으니 불과 10녀년 만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드디어 화계사에 방 하나를 배정받고 몸을 눕혔다. 옆에는 나와 미찬가지로 동안거에 참여하기 위해 온 서양사람이 이미 잠든 상태엿다.
그날 밤, 나는 몸이 피곤했는데도 흥분과 감동으로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다. 그러다 살프시 잠이 들엇다. 그러나 곧 너무더운 열기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몸 한쪽이 불에 데인 것같이 뜨거웟다. 온돌의 열기 때문이었다. 나는 덮고있던 담요를 접고 바닥에 깐 뒤에야 겨우 누울 수 있었다.
화계사의 기상시간은 보통 세 시었다. 그런데 나는 두 시 반에 눈을 떠 영 잠을 자지 못했다. 화장실에 갔다가 들어왔더니 룸메이트도 깨어 있었다. 알고보니 프라비던스 젠센터에서 만난적이 있었던 닐잉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나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 큰스님이 지금 이 절에 계시냐고 물었더니 그는 손가락으로 다른 가와집 빌딩을 가리키면서 ‘저곳에 계신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붋빛이 새여나오고 있었다. 그때가 새벽 두 시 40분 이었다.
닐이 나의 놀란표정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큰스님 방에는 항상 두시에 불이켜져.”
“왜?”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녀서 1천배를 하신대.”
나는 감동과 존경심으로 할말을 잃었다 잠시 큰스님이 계신 곳의 불빛을 바라보고 법당으로 갔다. 법당에는 나말고도 약 20여 명의 외국인들이 있었다. 미국, 폴란드, 캐나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전세계에서 동안거를 하기위해 온 사람들과 10여명의 외국인 스님들이었다.
드디어 숭산스님이 법당안으로 들어오셨다. 우리는 모두 삼배를 올렸다.
큰스님은 늘 그러하시듯 하나하나 우리얼굴을 찬찬히 살피셨다..
오! 하버드 스튜던트. 원더풀 원더풀. 하우 아 유 (Oh Wonderful, Wonderful How are you).”l
와 ! 세상에, 큰스님이 나를 알아본 것이다. 단 한번 면담을 하고 두어번 예불시간에 마주쳤을 뿐이었는데 그분이 나를 기억하시고 계셨다.
우리 모두는 같이 염불하고 참선수행하고 발우공양까지 마쳤다.
나는 며칠 뒤부터 있을 계룡산 신원사 동안거를 기다라며 서울구경을 했다 .조계사도 가고 승복도 샀다. 동안거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내일이면 신원사로 향하는 날.
그날 밤 나는 화계사 큰방에서 나처럼 동안거에 참여하기 위해온 10여 명의 외국인들과 함께 마침내 삭발을 했다.
아마독자 여러분들은 출가하지도 않은 일반신도가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깍고 동안거를 하는 전통이 다소 의아할 것이다. 한국 불교의 전통에는 그런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숭산스님의 전통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숭산스님이 그런파격을 하신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서양에서 불교가 점차인기를 얻고있고 동양의 선사들이 존경을 받는다해도 불교의 역사가 아직 짧기 때문에 서양만의 불교전통은 아직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한국불교의 전통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다. 한국ㆍ중국ㆍ일본 불교에서는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승려들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불자들이 수행을 통해 불교를 접한다. 절에가서 뭐뭐뭐 해달라고 빌기위해 불교를 접한다는 이야기다.
큰스님은 열린마음을 갖고계신 분이다. 따라서 우리 미국사람들의 상황과 마음을 잘 읽고 그에 맞춰 불교전통을 만들어오셨다. 오히려 선방스님들은 젠센터에서 별도의 일들을 갖고있기 때문에 일단 승려가 되면 안거수행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비해 신도들은 자기가 마음먹기에 따라 시간을 낼 수도 있고 출가를 하지 않고도 안거수행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또 미국에는 당장에 절을 많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 신도들이나 비구니들 만을 위해 따로 공간을 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큰스님은 동안거, 하안거 때 승려와 신도들이 같이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때 신도들은 스님들처럼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어야 한다.
본래 숭산스님이 지도하시는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서의 첫 동안기 수행은 1984년경 수덕사에서 이루어졌다. 큰스님이 젊었을 때 수덕사에 살면서 수행하셨기 때문에 그곳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큰스님의 스승이신 고봉대선사, 경허대선사 역시 수덕사에서 살면서 수행하셨다.
그런역사 깊은 사찰에서 비구,비구니, 일반 남녀 신자들이 같은 선방에서 함께수행을 하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완전히 혁명적인 일이였다. 많은 한국스님들은 숭산스님의 이런행동이 한국불교를 오엽시킨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일부 스님들은 숭산스님에게 대놓고 ’한국불교를 망친다’고 항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숭산스님은 별 도리가 없었다. 많은 푸른 눈 제자들이 한국에가서 수행하고 싶었는데 그들을 따로따로 수영할 공간이 없었다. 또 비록 출가는 안 했다 하더라도 진정 수행을 원하는 일반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어하셨다.
결국 숭산스님과 수덕사의 오랜인연으로 당시 수덕사 방장스님이셨던 원담 큰스님은 숭산스님의 푸른 눈 제자들이 수덕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매년 안거에 참여하는 미국사람들이 늘어났다. 큰스님은 ‘한국에 가면 한국 참선불교 전통의 뿌리를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미국사람들은 일단 한국에서의 동안거 경험을 필수코스로 여겼다.
사람이 갈수록 늘어 더이상 수덕사 선방에서 수용할수 없는 지경까지 되자 동안거는 1989 계룡산 신원사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3년 뒤인 1992년 마침내 화계사에 국제선원이 따로 만들어지면서 화계사에서도 안거가 가능 해졌다.
요즈음 매년 1백 명이상의 전세계사람들이 큰스님의 지도아래 하안거, 동안거 수행에 참가한다. 그들중 일부는 출가를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아주 많다.
신원사 동안거
신원사 안거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머리를 깎아야하고 승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록 출가는 하지 않았어도 스님과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 아주 엄격한 규율이어서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내가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았어도 출가한 스님은 아니기 때문에 스님들 앞에서는 모든 예를 갖춰야 한다. 안거기간 중 개인 물건은 사과박스 두 개 이외에는 허용이 안 된다. TV, 전화는 물론이고 편지왕래도 안된다. 일체 묵언을 해야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만 빼고는 90일동안 절을 떠나서는 안 된다. 신원사는 아주 오래된 절이다. 공주와 가까운 계룡산 남쪽에 위치해 있다. 선방은 아주 작다.
미국사람들은 넓은 땅에서 공간의 부족함이 없이 살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 대해 유난히 다른나라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여긴다. 처음 경험하는 한국사찰 생활의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것도 많았다. 가장 재미있었던 경험은 화장실 경험이었다. 나는 그렇게 먼 화장실은 처음보았다. 선방에서 60여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화장실 경험은 나에게 완전히 충격이었다. 볼일(?)을 마치고 일어서면 문짝이 목 부근까지만 닿기 때문에 앞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콘크리트 바닥에 구멍만 뚫어놓은 것이라 주저앉아서 일을 봐야했다. 냄새도 냄새지만 추운날씨에 볼일을 봐야 했기 때문에 매번 화장실에가고 오는 일이 아주 귀찮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엉덩이가 추워서 오래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느 날은 볼일을 마치고 버린 휴지가 바람에 밀려 위로 날아가기도 했다. 처음격는 일이라 좀 당혹스러웠다. 그 일을 격고 난 뒤 부터는 휴지가 날릴까봐 손을 좀더 구멍에 깊이 넣는라 애를 쓰고 했다. 화장실에 가는일이 고역이긴 했는데 나는 안거 기간동안 나오는 한국음식이 너무 맛있엇서 매번 과식을 했고 따라서 화장실에 자주갔고 갈 때마다 좀 오래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 화장실을 보면서 한국이 후진국이라는 생각보다는 이런 문화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아주강한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신원사에서 살면서 한국인에 대한 존경심을 개록새록 가지게 되었다. 할 수 있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사람들, 마음만 먹으면 못해내는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신원사 주변에는 농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화장실을 가기워해 밖에 나왔다가 한 초로의 농부가 지게에 나뭇짐을 가득 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가냘픈 할아버지가 저렇게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가실까. 그 옆에는 아저씨들 몇몇이 힘을 합쳐 바위를 옮기고 계셨다.
안거 생활 1개월이 지났을 때 우리는 쓰레기를 묻기위해 신원사 뒷마당에 큰 구덩이를 팠는데 그날 함께 일을하는 아저씨들이 너무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추운 날인데도 아랑곳없이 하루종일일을 했다. 아저씨들의 몸이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의지 하나로 모든 일을 해냈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고 난 뒤 건강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수정해야 했다. 전엔 ‘건강’ 혹은 ‘강하다’는 것이 우선 근육질 몸매에 체구가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아저씨나 농부들이나 다들작고 비쩍마른 체구였는데도 엄청난 힘을 냈다. 몸은 비록 미국인보다 작고 가날펐지만 거기서 나오는 힘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 나온것이었다. 진정 강한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나는 그 사람들을 통해 처음보았다. 거기에 비한다면 미국인들은 몸이크고 강해 보일지 몰라도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었다. 진정 강한 것이란 무엇인가.
또 신원사의 법당안은 불을 때지않아 완전히 얼음속 같았다.
신원사는 가난한 절이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땔감을 때지 못했다. 그런데 신도들은 아침저녁으로 그 추운법당안에 모여 열심히 절을 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 얼음장 같은 법당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절을 했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나라를 가보았지만 어느나라, 어느민족에게서도 이런 강인한 에너지를 느끼지 못했다.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동안 너무편하게 살아온 게 아니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이 이런’ 할수있다’는 에너지가 부러웠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지게에 나무를 가득 짊어지고 절안으로 들어왔다.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쓸 땔감인 것 같았다.
그는 나무가 가득 든 지게를 옆에세워두고 잠사 땀을 식혔다. 나는 마침 쉬는 시간이기도 해서 그에게 다가가 그 지게를 한번 져보고 싶다는 몸짓을 했다.
아저씨는 흔쾌히 승낙을 하셨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지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와 ! 이렇게 무거운 것을 나보다 약해보이는 저 아저씨가 저렇게 잘도 졌단 말인가. 나는 스물다섯의 혈기왕성한, 힘이 넘치는 젊은이였는데도 이 노인에 가까운 아저씨가 지는 지게를 못 지다니, 아저씨는 낑낑 거리는 나를 보고 한참 웃으셨다.
나는 어설프게 배운 한국말로 나이를 여쭈었다. 예순다섯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였다. 그는 허허 웃으시면서 다시 지게를 지고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한 손에 담배대까지 쥐고 말이다. 나는 마치 텔레비전에서 하는 묘기 대행진이라도 보듯 그이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이쯤 되면 쓰레기통 옮기는 것조차도 귀찮아 하는 살찐 미국노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친 김에 부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부엌 안에는 더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추운 날이었는데도 공양주 보살님들이 부엌에서 장갑하나 끼지않고 일을하고 계신것이 아니가.
아니, 세상에 이렇게 강한 사람들이 있을까, 와 한국사람들 정말 파이팅, 파이팅이다.
그런모습을 볼 때마다 나은 내 마음속에 아주 큰 다짐을 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조금 불편하고 어려운 것쯤은 이겨내야 한다.’
그럴수록 아주 열심히 참선수해에 전념했다.
안거기간 중 매우 인상적인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화계사 보살님들의 방문이었다. 보살님들은 땅콩버터와 빵, 과일, 야채, 케이크, 호박죽, 양말, 속옷 등을 가득싣고 오전 열 시경 신원사에 도착했는데 신원사까지는 버스가 직접 못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내려가서 그 짐을 다 가지고 올라왔다.
그때 일은 한국불자들의 순수한 마음을 경험한 첫번째 경험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뭘 하던 시람인지, 우리가 얼마나 나쁜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를 텐데도 머리 깎은 우리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냈고 뭐 하나라도 도울 것이 없을까 하고 분주했다.더구나 우리는 모두 다른나라 사람들 아니가. 그런데도 그들이 베푸는 사랑과 애정은 민족과 나라를 초월한 것이었다.
보살님들은 새벽 네 시에 서울을 출발해 버스에 시달린 피곤한 몸이었을 텐데 바로 부엌으로 달려가 미역국, 찰밥 등 우리를 위한 점심 음식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선방으로와서 우리에게 삼배를 올렸다. 나는 스님도 아니데 그들에게 스님 대접을 받는것 같아 미안하고 계면쩍었다.
여태껏 살면서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보살님들과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묵언 때문에 많은 얘기를 할 수 없었지만 말 없이도 우리는 너무 좋은 시간을 가졌다.
당시 나는 한국말을 거의 몰랐다. 그런데 한국에 도착하면서 들은 말 중에 ‘여보세요’라는 밀이 쉽게 외워졌다. 아마 인사말인 것 같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신원사를 떠나는 그들을 향해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몇몇 보살님들이 내 말을 듣고 좀 이상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박장대소를 하는 바람에 나는 내가 틀린 말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몰랐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빨개진다.
이 화계사 보살님들의 방문은 나를 더욱 고무시켰다. 그런 순수하고 정이 넘치는 친절한 마음,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한테, 그것도 파란눈을 가진 외국인들에게, 한국말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그들은 마치 어머니 같은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Monday, January 30, 2012
만행 니의 미지막 스승
만행 나의 마지막 스승
다음날아침, 새벽예불에 참가하고 난 뒤 우리는 법당에 안장 큰스님을 가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대부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젠센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스님들, 한 20여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너무 흥분해서 온몸이 떨렸다. 드디어 큰슨님을 더욱 가까이서 뵙는구나.
드디어 큰스님이 들어오셨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큰절을 세 번 올렸다.
나는 당시 맨 앞줄에 앉아 있었는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맨처음가까이서 보는 큰스님의 얼굴.
나는 여러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그런 피부는 처음 보았다. 도저히 63세 노인의 얼굴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게 완전히 부처님 얼굴이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얼굴을 본 적이없다. 세계곳곳을 여행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렇게 평온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행복이나 슬픔같은 감정이 들어오기 전의 상태와 같았다. 눈은 보석처럼 맑고 깊었다. 그의 눈을 보면서 저것이 우주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넓은 우주.
새벽이라 우리의 얼굴은 모두 부스스 했지만 큰스님의 얼굴은 너무 맑았다. 나는 나중에 큰스님께서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방에서 매일아침 혼자서 1천배를 하신다는 것도 알았다. 무려 30여년 이상을 그렇게 해오셨고, 새벽무렵에 큰스님 방을 지날때면 창문커튼 너머 그가 절하는 모습이 그립자로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큰스님과 함께 108배와 염불수행을 차례로 했다. 염불수행을 하는 큰스님의 목소리는 맑고 크고 청아했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풍겨져나오는 에너지는 한 마리 큰 호랑이 같았다. 염불이 끝나고 우리는 각자 자리로 돌아가 면벽하고 참선을 했다. 참선하는 40여분동안 나는 마음을 차분히 집중하려 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사와 함께 참선을 한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참선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돌아앉았다. 큰스님께서 간단히 법문을 하셨다.
참선이란 특별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 생각,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활하면서 가만히보면 마음과 몸이 따로 놉니다. 먹을 때, 잘 때 걸을 때 우리 몸은 먹고 자고 걸을지 몰라도 마음은 끊임없이 따로 움직입니다. 참선수행을 하면 몸과 마음이 완벽하게 하나가 됩니다. 모든사람들이 각자의 평화를 이룰 때 그것이 세계평화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세계평화를 외치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 학자들은 말과 행동이 하나였읍니다. 요즘 학자들은 진리와 정의, 평화, 도덕에 대해 얘기하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돈과 명예에대한 욕심이 있고 이에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정치가들, 종교인들, 사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평화를 얘기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평화를 하겠다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면 그것이 진정으로 이 세계를 돕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관없읍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났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이 질문을 붙잡고 ‘오직 모를 뿐……’하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수행하십시요. 그러면 모든생각이 끊어지고 집착이 사라집니다. 생각 이전의 본성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조화이고 평화입니다. 열심히 수행정진하는 여러분의 모습을보니 사랑스럽습니다.
이어서 큰스님과 함께 아침 발우공양이 있었다. 현미밥에 김치, 깍두기, 김, 땅콩버터, 과일, 빵, 두유 등 각자 네개의 대접에 담아먹었다. 나중에는 그릇에 묻어있는 것까지 물로씻어먹는 모든과정이 완벽한 침묵속에서 행해졌다. 먹는 것도 참선의 하나였다. 공양이 끝나고 큰스님은 법당을 떠나셨다.
다른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떳지만 나는 한참을 법당에 앉아 있었다. 어린시절 학교다닐 때 생각, 대학에 들어와 학생운동에 열중했었던 생각, 그리도 키르케코르와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시절, 세계여행…… 지난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오직 진리를 찾고 싶다는 강열한 열정하나로 하얗게 새웠던 그 숱한 밤들, 아! 그 고통의 시간이 이제야 끝나는가……. 나는 행복했다. 이제야 길을 찾았다는 생각에 울컥 눈물까지 났다.
잠시 후 지도법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큰스님을 개인적으로 뵙고 싶다고 면담 신청을 해놓았는데 운좋게도 기회가 닿은 모양이었다. 나는 너무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승산 큰스님이야말로 나의 마지막 스승이시다. 그는 살아있는 부처님이시다. 수십개의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무엇부터 여쭤야하나.
마침내 그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얼굴에 하나가득 웃음을 띠고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아 계셨다. 세 번 큰절을 마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너무 어려워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읽으셨는지 ‘이리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가 동양사람이기 때문에 아주 무게를 잡고 앉아 계실 줄 알았다. 당시 마국인 불교신자들 중에는 일본불교를 믿는 이들이 많았는데 나는 친구들로부터 일본선사들은 아주 엄격하고 권위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말을 듣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비록 큰스님께서 대중들 앞에서는 따뜻하고 다정다감해 보여도 개인적으로 뵐 때는 무척 어려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오…… 안녕하세요? 수행은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어요? “두 달 전에 큰슨님 강의를 하버드대학에서 듣고 바로 케임브리지 젠센터로 이사했읍니다. 그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읍니다. 요즘 참선수행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오 ! 그래요,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무슨일을 하시지요?” “하버드 대학원에 디니면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있읍니다. 특히 불교와 기독교를 접목하는 연구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주 재미있겠네요, 그런데 당신은 삶에대해 무엇을 알고 계시지요?” 갑작스런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마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마치 손자를 대하는 할아버지처럼 크게 웃었다. “혹시 소크라테스를 공부한 적이 있어요?” “예 예일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그의 책을 많이 읽었읍니다. 나 역시 대학을 다닐 때 소클라테스는 내가 아주 존경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답니다. 그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했지요, 매일 아테네 시장 거리를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언제나 이렇게 말했읍니다. ‘너 자신을 알라.’이것이 그의 가르침 전부였읍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이론도 없고 설명도 없이 오직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고 다녔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제자기 이렇게 물었읍니다. “그러는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을 아십니까? 그러자 그는 ‘나 역시 나를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읍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아주 재미있읍니다.” “좋아요. 그럼 내가 당신하테 하나 묻겠읍니다.” 큰스님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물었다.”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폴 입니다.” “그건 당신의 몸의 이름입니다. 누군가, 즉 부모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은 겁니다.” “…… “올해 몇 살이에요?” “ 스물여섯 살입니다.” “그건 역시 당신의 몸의 나이입니다.” 큰스님은 나의 무릎을 탁탁 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몸은 당신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진짜 나이를 알고 싶어요.” 나는 완전히 할말을 잃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 누구도,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의 어떤 교수님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않았다. 나는 큰스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큰스님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으셨다. “아니, 학생은 하버드대학에 다니는데 당신자신을 모른단 말이에요? 그거야말로 큰일이군요.” 정말 부끄러웠다.너무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이건 무슨 가르침일까? 완전히 다른 세계야. 다른 코드같아.” 안과 밖이 완전히 뒤집히는, 그동안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신념들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그런 경험이었다. 나는 얼굴이 벌개져 아무말도 못했다. “내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이해하겠어요? “예예...... 아니,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큰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당신의 컴퓨터는 너무 복잡하군요. 너무 성능이 좋아요”라고 하셨다. 잠시 후 차나 한잔 하자며 녹차를 내놓으셨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차를 마시기 시각했다. 감자기 큰스님께서 물었다. “자, 이제 알겠어요?”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큰스님은 지금 뭔가를 묻고 있는데 너무 간단한, 마치 어린이들에게나 하는 질문을 저토록 평온하고 깨끗하고 친절한 미소로 묻고 있는데,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간것이다. 에머슨, 쇼펜하우어, 플라톤, 까뮤, 키르케고르, 소크라테스를 모두 공부했고 철학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정작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진짜 나이는 몇살인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방바닥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큰스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큰스님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다는 듯 이렇게 말씀하셨다. “질문이 있으면 무엇이든 해보세요.” 기다렸다는듯 나는 입을 열었다. “큰스님께서는 ‘모르는 마음’(don’t know mind)을 강조하셨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그동안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뭔가 계획을 해야하고, 뭔가 생각을 해야하고, 뭔가 이해해야 한다고 배웠읍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모른는 마음을 어떻게가지며 그것을 어떻게 지킵니까?”
“생각할 때 생각할 뿐, 들을 때 들을 뿐, 볼 때 볼 뿐,먹을 때 먹을 뿐, 그게 다 입니다. 생각할 때 샌각하세요.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면 생각하지 마세요. 먹을 때 오직 먹으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은 이 생각이 어디서 오는 것이냐, 누가 만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직 ‘모르느 마음’을 갖고 똑바로 가십시요. 이 모르는 마음이야말로 어떤 철학, 하느님, 부처님, 하버드대학보다 나은 겁니다. 모르는 마음을 간직하면 당신의 진정한 길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모르는 마음을 찾을 수 없어요.” “나는 이미 당신에게 보여줬어요. 다시 묻겠읍니다.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 잘……모르겠읍니다.” 큰슨님은 순간 “옳지”하고 소리를 치셨다. “바로 그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뭔가 맑아질 것입니다. 생각할 때 생각하세요.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뭔가 맑아질 것입니다.생각할 때 생각하세요. 생가하는 시간이 아닐 때 생각할 필요는 없읍니다. 머릿속으로 따지지마세요. 오케이?” “예” “원더풀, 원더풀, 좋아요, 아주 좋아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큰스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단어가 ‘원더풀’ 이었다.)
다음날아침, 새벽예불에 참가하고 난 뒤 우리는 법당에 안장 큰스님을 가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대부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젠센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스님들, 한 20여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너무 흥분해서 온몸이 떨렸다. 드디어 큰슨님을 더욱 가까이서 뵙는구나.
드디어 큰스님이 들어오셨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큰절을 세 번 올렸다.
나는 당시 맨 앞줄에 앉아 있었는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맨처음가까이서 보는 큰스님의 얼굴.
나는 여러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그런 피부는 처음 보았다. 도저히 63세 노인의 얼굴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게 완전히 부처님 얼굴이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얼굴을 본 적이없다. 세계곳곳을 여행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렇게 평온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행복이나 슬픔같은 감정이 들어오기 전의 상태와 같았다. 눈은 보석처럼 맑고 깊었다. 그의 눈을 보면서 저것이 우주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넓은 우주.
새벽이라 우리의 얼굴은 모두 부스스 했지만 큰스님의 얼굴은 너무 맑았다. 나는 나중에 큰스님께서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방에서 매일아침 혼자서 1천배를 하신다는 것도 알았다. 무려 30여년 이상을 그렇게 해오셨고, 새벽무렵에 큰스님 방을 지날때면 창문커튼 너머 그가 절하는 모습이 그립자로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큰스님과 함께 108배와 염불수행을 차례로 했다. 염불수행을 하는 큰스님의 목소리는 맑고 크고 청아했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풍겨져나오는 에너지는 한 마리 큰 호랑이 같았다. 염불이 끝나고 우리는 각자 자리로 돌아가 면벽하고 참선을 했다. 참선하는 40여분동안 나는 마음을 차분히 집중하려 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사와 함께 참선을 한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참선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돌아앉았다. 큰스님께서 간단히 법문을 하셨다.
참선이란 특별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 생각,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활하면서 가만히보면 마음과 몸이 따로 놉니다. 먹을 때, 잘 때 걸을 때 우리 몸은 먹고 자고 걸을지 몰라도 마음은 끊임없이 따로 움직입니다. 참선수행을 하면 몸과 마음이 완벽하게 하나가 됩니다. 모든사람들이 각자의 평화를 이룰 때 그것이 세계평화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세계평화를 외치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 학자들은 말과 행동이 하나였읍니다. 요즘 학자들은 진리와 정의, 평화, 도덕에 대해 얘기하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돈과 명예에대한 욕심이 있고 이에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정치가들, 종교인들, 사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평화를 얘기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평화를 하겠다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면 그것이 진정으로 이 세계를 돕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관없읍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났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이 질문을 붙잡고 ‘오직 모를 뿐……’하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수행하십시요. 그러면 모든생각이 끊어지고 집착이 사라집니다. 생각 이전의 본성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조화이고 평화입니다. 열심히 수행정진하는 여러분의 모습을보니 사랑스럽습니다.
이어서 큰스님과 함께 아침 발우공양이 있었다. 현미밥에 김치, 깍두기, 김, 땅콩버터, 과일, 빵, 두유 등 각자 네개의 대접에 담아먹었다. 나중에는 그릇에 묻어있는 것까지 물로씻어먹는 모든과정이 완벽한 침묵속에서 행해졌다. 먹는 것도 참선의 하나였다. 공양이 끝나고 큰스님은 법당을 떠나셨다.
다른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떳지만 나는 한참을 법당에 앉아 있었다. 어린시절 학교다닐 때 생각, 대학에 들어와 학생운동에 열중했었던 생각, 그리도 키르케코르와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시절, 세계여행…… 지난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오직 진리를 찾고 싶다는 강열한 열정하나로 하얗게 새웠던 그 숱한 밤들, 아! 그 고통의 시간이 이제야 끝나는가……. 나는 행복했다. 이제야 길을 찾았다는 생각에 울컥 눈물까지 났다.
잠시 후 지도법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큰스님을 개인적으로 뵙고 싶다고 면담 신청을 해놓았는데 운좋게도 기회가 닿은 모양이었다. 나는 너무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승산 큰스님이야말로 나의 마지막 스승이시다. 그는 살아있는 부처님이시다. 수십개의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무엇부터 여쭤야하나.
마침내 그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얼굴에 하나가득 웃음을 띠고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아 계셨다. 세 번 큰절을 마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너무 어려워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읽으셨는지 ‘이리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가 동양사람이기 때문에 아주 무게를 잡고 앉아 계실 줄 알았다. 당시 마국인 불교신자들 중에는 일본불교를 믿는 이들이 많았는데 나는 친구들로부터 일본선사들은 아주 엄격하고 권위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말을 듣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비록 큰스님께서 대중들 앞에서는 따뜻하고 다정다감해 보여도 개인적으로 뵐 때는 무척 어려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오…… 안녕하세요? 수행은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어요? “두 달 전에 큰슨님 강의를 하버드대학에서 듣고 바로 케임브리지 젠센터로 이사했읍니다. 그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읍니다. 요즘 참선수행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오 ! 그래요,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무슨일을 하시지요?” “하버드 대학원에 디니면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있읍니다. 특히 불교와 기독교를 접목하는 연구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주 재미있겠네요, 그런데 당신은 삶에대해 무엇을 알고 계시지요?” 갑작스런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마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마치 손자를 대하는 할아버지처럼 크게 웃었다. “혹시 소크라테스를 공부한 적이 있어요?” “예 예일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그의 책을 많이 읽었읍니다. 나 역시 대학을 다닐 때 소클라테스는 내가 아주 존경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답니다. 그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했지요, 매일 아테네 시장 거리를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언제나 이렇게 말했읍니다. ‘너 자신을 알라.’이것이 그의 가르침 전부였읍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이론도 없고 설명도 없이 오직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고 다녔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제자기 이렇게 물었읍니다. “그러는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을 아십니까? 그러자 그는 ‘나 역시 나를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읍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아주 재미있읍니다.” “좋아요. 그럼 내가 당신하테 하나 묻겠읍니다.” 큰스님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물었다.”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폴 입니다.” “그건 당신의 몸의 이름입니다. 누군가, 즉 부모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은 겁니다.” “…… “올해 몇 살이에요?” “ 스물여섯 살입니다.” “그건 역시 당신의 몸의 나이입니다.” 큰스님은 나의 무릎을 탁탁 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몸은 당신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진짜 나이를 알고 싶어요.” 나는 완전히 할말을 잃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 누구도,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의 어떤 교수님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않았다. 나는 큰스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큰스님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으셨다. “아니, 학생은 하버드대학에 다니는데 당신자신을 모른단 말이에요? 그거야말로 큰일이군요.” 정말 부끄러웠다.너무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이건 무슨 가르침일까? 완전히 다른 세계야. 다른 코드같아.” 안과 밖이 완전히 뒤집히는, 그동안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신념들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그런 경험이었다. 나는 얼굴이 벌개져 아무말도 못했다. “내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이해하겠어요? “예예...... 아니,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큰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당신의 컴퓨터는 너무 복잡하군요. 너무 성능이 좋아요”라고 하셨다. 잠시 후 차나 한잔 하자며 녹차를 내놓으셨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차를 마시기 시각했다. 감자기 큰스님께서 물었다. “자, 이제 알겠어요?”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큰스님은 지금 뭔가를 묻고 있는데 너무 간단한, 마치 어린이들에게나 하는 질문을 저토록 평온하고 깨끗하고 친절한 미소로 묻고 있는데,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간것이다. 에머슨, 쇼펜하우어, 플라톤, 까뮤, 키르케고르, 소크라테스를 모두 공부했고 철학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정작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진짜 나이는 몇살인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방바닥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큰스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큰스님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다는 듯 이렇게 말씀하셨다. “질문이 있으면 무엇이든 해보세요.” 기다렸다는듯 나는 입을 열었다. “큰스님께서는 ‘모르는 마음’(don’t know mind)을 강조하셨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그동안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뭔가 계획을 해야하고, 뭔가 생각을 해야하고, 뭔가 이해해야 한다고 배웠읍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모른는 마음을 어떻게가지며 그것을 어떻게 지킵니까?”
“생각할 때 생각할 뿐, 들을 때 들을 뿐, 볼 때 볼 뿐,먹을 때 먹을 뿐, 그게 다 입니다. 생각할 때 샌각하세요.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면 생각하지 마세요. 먹을 때 오직 먹으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은 이 생각이 어디서 오는 것이냐, 누가 만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직 ‘모르느 마음’을 갖고 똑바로 가십시요. 이 모르는 마음이야말로 어떤 철학, 하느님, 부처님, 하버드대학보다 나은 겁니다. 모르는 마음을 간직하면 당신의 진정한 길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모르는 마음을 찾을 수 없어요.” “나는 이미 당신에게 보여줬어요. 다시 묻겠읍니다.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 잘……모르겠읍니다.” 큰슨님은 순간 “옳지”하고 소리를 치셨다. “바로 그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뭔가 맑아질 것입니다. 생각할 때 생각하세요.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뭔가 맑아질 것입니다.생각할 때 생각하세요. 생가하는 시간이 아닐 때 생각할 필요는 없읍니다. 머릿속으로 따지지마세요. 오케이?” “예” “원더풀, 원더풀, 좋아요, 아주 좋아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큰스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단어가 ‘원더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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